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94화 (94/128)

94.

선발대가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 최정예 부대가 꼼짝도 못 했다는 사실을 들은 후발대가 동요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과연 성력으로 병사들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까?

리베리아 후작은 황궁 마법사단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단보다 황궁 마법사단은 더 심한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며 집중력을 높여도 모자랄 판에, 강력한 적의 마법사 부대와 대전 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레베스톤 공작께서 허투루 말하진 않았을 텐데.’

허튼소리는 일절 하지 않는 아델리아가 시험을 해봤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성력의 힘이 미심쩍었다.

사실 리베리아 후작은 히나를 전쟁터에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혹여 잘못되어 날뛰게 될 카신이 무서운 것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히나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카신이 히나를 막아주길 바랐다.

“히나, 정말 자신이 있는 거냐?”

리베리아 후작은 히나가 무섭다고 말하며 지금이라도 돌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히나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세요, 아버지. 그보다 증폭 마법으로 성력을 퍼트릴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증폭 마법은 공격에 관련된 마법을 퍼트리는 데 거의 사용됐다. 신력이나 성력을 넓히는 데 쓰는 건 리베리아 후작도 처음이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아델리아가 부녀의 대화를 끊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히나가 신비한 빛깔의 성력을 손안에 모으고, 그에 맞춰 대기하고 있던 황궁 마법사단이 증폭 마법을 시현하는 걸 지켜보았다.

히나의 손에 모아진 성력이 공기 중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그에 증폭 마법이 더해지자 그 빛은 주변을 빠르게 덮으며 넓게 퍼져 갔다.

‘증폭이 되다니, 다행이야.’

아델리아는 팔짱을 끼며 공기 중에 녹아든 포근한 기운을 보았다.

히나의 성력은 병사들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뿐, 그 이상의 힘을 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일시적인 진통제나 다름없었다.

“아…….”

증폭된 성력을 실감한 히나가 짧게 탄성을 흘렸다. 아델리아는 점점 퍼져 가는 성력을 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히나는 병사들에게 사기를 올려주러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아델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 이상한 마법사들에게 이 힘을 뿌린다면?

‘감정이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아. 만약 그들의 감정이 억압되어 있는 거라면?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이 기운에 반응하면 필히 어떤 반응을 내보일 터.’

성력이 마법으로 어디까지 증폭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아델리아는 다음 수를 짰다. 히나가 전쟁터에 있는 것에도 꺼림칙한 반응을 보이는 리베리아 후작은 반대하고 나서겠지만, 이대로는 승리할 수 없었다.

‘다소 위험부담이 있지만, 이대로 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차피 전쟁에서 지면 모두가 위험하다. 그 어떤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아델리아는 히나를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 * *

“살려주세요!”

칼피온은 코반드를 따라가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히나가 같은 말만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기운도 너무 미세해.’

과거에 보았던 아이보다도 더 작고 미약한 기운이었다.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그도 느끼지 못할 만큼.

“코랄드! 드래곤을 전부 몰살시킬 셈이야?”

“하, 웃기는군! 로티우스를 살려두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건가?”

“죽일 수 있다면 진작 죽였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니 네가 로티우스의 발을 핥는 생활을 하는 게다!”

발까지 핥지는 않는데.

칼피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코반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코반드가 여기서 도망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히나를 이용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공간이동으로 이곳을 벗어나는 거였다.

‘로티우스가 오기 전에 시도하려 들 거야.’

마법진을 거의 그리지 않고 마법을 쓰는 카신이라면 모를까, 공간이동을 하는 데는 최소한의 시간이 걸렸다. 코반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도 넌 어차피 잡혀. 그러니 드래곤이 멸족되는 걸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죽어.”

드래곤인 코반드가 히나를 어찌하려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카신이 드래곤을 멸족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드래곤의 로드로서 칼피온은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 우리가 언제부터 종족 간의 유대가 그렇게 깊었던 거지?”

가소롭다는 듯이 코반드가 칼피온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반대편 허공으로 히나를 멀리 홱 내던졌다.

코반드를 따라가던 칼피온은 짧은 순간 고민했다. 히나를 잡을지, 아니면 코반드를 잡을지.

하지만 코반드가 히나 쪽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키는 순간, 그 고민은 깨졌다. 브레스가 날아올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칼피온은 제 몸을 날려 히나를 감쌌다.

‘너무 늦었어!’

휘이익―

거대한 불길이 히나를 감싼 칼피온을 덮쳤다. 브레스를 뿜어내어 막을 시간은 없었다.

칼피온은 제 몸에 다급히 방어 마법을 둘렀다. 하지만 용암만큼이나 뜨거운 불길은 짧은 시간 안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마법을 바로 꿰뚫었다.

붉고 거대한 브레스가 인간으로 변한 칼피온의 연약한 살점을 꺼멓게 태웠다. 그럼에도 칼피온은 히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멸족은 물론이고, 내가 죽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브레스에 타들어가는 칼피온을 보며 코반드는 이동 마법을 시현했다. 붉은빛의 방어진 사이로 코반드가 사라지자마자 꺼멓게 변한 칼피온이 허공에서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위잉―

바닥에 닿기 바로 직전, 칼피온의 몸이 멈췄다.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 카신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며 겨우 마법을 펼친 것이다.

순식간에 날아온 카신은 꺼멓게 변한 칼피온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가장 먼저 그는 칼피온이 품고 있는 작은 체구의 히나를 끄집어냈다.

살갗이 타들어갔지만 인간이 견디기 힘든 뜨거운 열기에 잠시 혼절했을 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똑같군.”

가까이서 보아도 히나와 똑같았다. 카신은 한 손으로 히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칼피온의 몸체 위로 손을 올리며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그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칼피온.”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검은 기운이 증식하더니 칼피온의 몸을 감쌌다. 꺼멓게 타들어간 살이 점점 거대해지고,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작은 몸이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블랙 드래곤으로 변했다.

크르릉!

극심한 상처에 이성을 잃은 블랙 드래곤이 콧김을 내뿜으며 눈을 번뜩였다.

드래곤의 몸이라면 모를까,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 드래곤 브레스를 모두 받아냈다. 본체로 돌아왔어도 인간이었던 몸이 느꼈던 충격은 칼피온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카신은 날뛰기 직전인 칼피온의 몸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렸다. 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마법진임에도 고통에 찬 드래곤은 날뛰기 위해 그 위에서 몸을 버둥대고 있었다.

“칼피온, 이제 그만 정신 차리거라.”

카신은 칼피온의 거대한 몸에 큰 쇼크를 줄 만한 마법을 내뿜었다. 버둥대던 몸체가 짧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그 행동을 멈추었다.

하얀 콧김을 내뱉으며 발톱을 세웠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던 드래곤이 잠시 뒤, 점점 작아졌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칼피온이 가쁜 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하악……!”

가슴을 옥죄는 고통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건지 칼피온이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겨우 숨을 고른 칼피온은 몸을 돌려 하늘을 보며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누웠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검은 눈동자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로티우스, 히나는 내가 지켰어.”

이성을 붙잡고 있기 힘들 만큼 파괴 본능이 그를 지배하려 들었다. 칼피온은 살기를 억눌리기 위해 온몸에 힘을 꽉 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렇군. 확실히 히나는 멀쩡해.”

카신은 제 품에 안겨 있는 히나를 보았다. 노출된 살갗이 타들어가긴 했지만, 대부분 멀쩡했다. 그만큼 칼피온이 그녀에게 모든 힘을 쏟았다는 뜻이었다.

“드래곤은 잘못 없어. 네게 해를 가한 건 코랄드야.”

이성이 날아갈 것 같은지, 칼피온은 이를 악문 채 겨우 말을 이었다.

“종족을 감싸려 몸을 던지다니, 갈수록 멍청해지는구나.”

히나에게 치료 마법을 걸며 카신은 지극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칼피온을 힐끗 보더니 픽 하고 실소를 흘렸다.

“널 외면하고 억압했던 종족이 그렇게도 좋았더냐.”

“지금은 아니야.”

인간의 형상을 하고서도 칼피온은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넌 추방을 당하거나 어느 구석에 억류된 채 평생을 살았을 텐데도?”

“다른 건 다 상관없어. 내가 히나를 살렸으니, 다른 드래곤은 건드리지 마.”

칼피온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카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네 노력이 가상하니, ‘지금은’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그런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야.”

어떻게 살린 종족인데.

칼피온은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몸이 아직도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코반드의 죄를 종족의 죄로 돌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만약 필사적으로 히나를 감싸지 않았다면 모든 드래곤이 로티우스에게 잔인하게 도륙을 당했겠지.’

카신은 드래곤에게 그런 존재였다. 칼피온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면서도 히나가 어서 의식을 찾기를 바랐다.

하지만 카신에 의해 치료가 완전히 되기도 전에, 히나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살랑살랑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카락.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카신은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주우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머리카락은 바스락거리며 잘게 조각이 나더니 공기 중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코랄드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던가?”

카신은 한숨을 내쉰 채 머리를 짚었다. 칼피온도 놀란 것인지 눈을 크게 뜬 채 이미 사라진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무슨 실험을 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긴 한데…….”

작게 중얼거리면서도 칼피온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허공에 사라진 머리카락을 좇고 있었다.

“어쩐지 같은 기운이 나더라니.”

히나와 같은 기운을 낸 것은 머리카락이다. 겨우 인지를 한 칼피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머리카락 한 올 때문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다는 것이 허탈해지기 시작했다.

“히나에게 가봐야겠어.”

코반드는 생각 이상으로 히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으리라. 그러니 히나를 이용하여 도망칠 준비까지 철저하게 했겠지.

이번 전쟁의 배후에 코반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인간의 전쟁이라면 모를까, 드래곤이 개입된 전쟁이다. 카신은 이번 전쟁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로 바꾸었다.

“같이 갈 텐가?”

카신은 여전히 바닥을 구르고 있는 칼피온에게 물었다. 칼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드래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은 또 모르는 거니까.’

변덕이 심한 카신이 혹여 나중에 드래곤을 멸족시키겠다고 나선다면 큰일이었다. 칼피온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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