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95화 (95/128)

95.

연합군은 예상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성문을 연달아 돌파했다. 아델리아는 후발대가 있는 장소에 도착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연합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빠르게 전투 준비를 행했다.

“히나 양을 앞세운다니요?”

아델리아가 다음 전투 지역으로 지정한 곳은 커다란 바위와 산 사이에 있는 가파른 골짜기였다. 세이나는 히나가 최전선에 선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델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방금 정한 거니, 듣지 못했을 수밖에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따지고 드는 세이나와 달리 아델리아는 차분히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낮지만 가파른 절벽과 골짜기 입구에 제국군이 제대로 매복을 했는지 확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적을 두고, 싸움도 못 하는 히나를 데리고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저는 괜찮아요, 신녀님.”

히나는 세이나를 뒤로한 채 아델리아 옆에 섰다.

아델리아는 어젯밤, 늦게까지 짜두었던 작전을 알린 다음에 히나를 따로 남게 했다. 그리고 히나에게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알려주었다.

“히나 양!”

세이나가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히나를 불렀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히나는 가슴이 찌르르하며 아릿하게 조여오는 기분을 느꼈다.

‘나를 걱정해 주시는 거겠지?’

보면 볼수록 세이나의 애틋한 사랑이 느껴졌다. 세이나의 시선은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신녀님, 히나는 신녀님의 애제자이긴 하지만, 제국에 속해 있습니다. 이 일은 신녀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델리아는 유독 히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이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도도하게 굴던 대신녀가 잔뜩 날을 세운 채 언성을 높이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걱정 마, 히나. 넌 내가 지켜줄게!”

라우너가 히죽 웃으며 히나의 옆에 섰다. 아델리아가 제 아들이 하는 꼴을 잠시 지켜보더니 곧 무표정한 얼굴로 제국군을 향해 짧고 강하게 명령했다.

“모두 각자 위치로!”

히나는 남자보다도 더 당차고 등등한 아델리아를 보며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라우너에게 말했다.

“공작님은 정말 멋지신 것 같아요.”

“그렇지?”

히나가 어머니를 보고 레베스톤 가문을 더 좋아하게 되면, 제게 시집을 오지 않을까?

라우너는 허황된 상상을 하다가, 여태 아델리아에게 눈도 떼지 못하고 있는 히나를 툭툭 건드렸다.

“어머니는 이제 그만 보고 나랑 저쪽에 가자.”

“네? 아, 네!”

그런데 너무 어머니만 보는 거 아냐?

심각할 정도로 아델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히나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낀 라우너는 고개를 갸웃했다. 라우너는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히나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적군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순식간에 눈빛을 바꾼 라우너는 히나를 데리고 골짜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적군은 깊고 좁은 골짜기 사이로 진격하고 있었다. 히나는 그 위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아델리아가 신호를 보내길 기다렸다. 세이나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절벽 위에 엎드린 채 아델리아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앞장선 적의 마법사 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전부 들어올 때까지 제국군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아델리아가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신호를 주는 순간, 신녀들과 황궁 마법사단이 모두 나왔다.

“신녀님들의 신력을 증폭시켜라!”

리베리아 후작이 증폭 마법을 펼치고, 그 뒤를 이어 황궁 마법사들이 모두 같은 마법을 시현했다. 하얀 신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고, 연합군의 마법사에게 닿았다.

“으으으……!”

단단한 갑옷 안에서 괴상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몇몇 마법사들이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갑옷 안에서 사막의 건조한 모래와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신력에 허물어진 마법사가 쓰러지며 투구가 벗겨지자, 아주 오래된 듯한 해골도 함께 바닥을 굴렀다.

아델리아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통하고 있어. 하지만…….’

마법사의 수에 비해 신력이 너무 약했다. 증폭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의 수가 적은 것도 있지만, 신력을 제대로 다루는 신녀의 수도 부족했다.

하지만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열에 두어 명이 쓰러졌다. 나머지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성력에 비해 증폭에 한계가 있군.’

그래도 움직임을 어느 정도 봉쇄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정도면 검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기사라도 마법사와 협공하면 적을 베는 것이 가능했다.

“모두 돌격하라!”

아델리아가 검을 높이 치켜든 채 호령했다. 골짜기 입구와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최정예 기사 부대가 마법사 부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시간을 끌면 무조건 패한다. 아델리아는 삐걱거리는 마법사를 제치고 공격을 시작하는 마법사들을 찾아 베기 시작했다.

신녀들의 신력이 떨어지자마자 베라미의 지휘하에 몇몇 마법사가 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이야.”

베라미는 연달아 증폭 마법이 가능한 소수의 마법사들과 서로 눈짓을 한 다음, 히나에게 말했다.

“네, 준비할게요.”

히나는 아델리아를 중심으로 제국군의 기사들이 삐거덕거리는 마법사들을 베는 것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무장한 마법사들이 생각보다 더 크고 위협적이어서 무서웠지만, 그들과 용맹하게 맞서 싸우는 아델리아를 보니 그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건너편을 힐끗, 보니 세이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디 하나 다칠까 염려하는 모양인지 세이나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다시 마음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저, 잘할게요. 그러니 지켜봐 주세요.’

히나는 세이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이나가 속으로 ‘내 딸은 정말 훌륭하게도 컸구나.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하는 마음이 들었으면 했다.

‘적어도 내가 미워서 버린 건 아니라는 거잖아.’

세이나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마음만을 확실히 느껴졌다. 히나는 세이나의 애틋한 마음에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어 보답하고 싶었다.

히나는 두 손을 모아 성력을 한껏 끌어모았다. 한편으론 이렇게 끌어모으다가 또 폭주를 하면 어쩌나,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안에 모이는 성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어쩐지 마음이 더 차분해졌다.

“됐어요.”

이렇게까지 성력이 많이 모였던가?

히나는 제 손 안에 있는 찬란한 빛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성력을 자유자재로 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꽤나 큰 힘까지 내게 된 것 같았다.

‘어제보다도 더 잘됐어.’

적군의 마법사 모두에게 뻗어질 만큼 성력이 모였다. 물론 증폭 마법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이 정도 힘이라면 골짜기 안에 성력을 모두 퍼트릴 수 있을 것이다.

‘칼피온, 고마워요.’

상충하는 힘을 가진 칼피온에게 성력을 더 이끌어내는 법을 배운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히나는 베라미가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깊은 골짜기 쪽으로 성력을 쏟아냈다.

증폭 마법과 최대한 끌어낸 성력이 뒤섞이자 세상을 비출 만한 찬란한 빛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히나는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빛을 보며 입을 작게 벌렸다.

* * *

루이스를 닦달하여 히나의 위치를 대강 파악하자마자 카신은 빠르게 전쟁 지역으로 향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쓰고 싶었지만, 그는 제국이 건국되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루이스가 말하는 위치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이상 공간이동 마법은 힘들었다.

“히나가 가까워지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거겠지?”

“뭐야. 날 탐지기로 쓰는 거야?”

“얼마나 가까워져야 알 수 있지?”

무시도 이런 무시가 없었다. 칼피온은 제 할 말만 하는 카신을 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평소라면 묻지도 않고 매몰차게 버리고 가는 주제에, 갑자기 친절하게 같이 갈 거냐고 물어봐서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신은 성력을 온몸으로 느끼는 예민한 본능을 가진 그를 이용하려고 동행한 것이었다.

‘내가 같이 가지 않는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종족의 유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가 거절할 리가 없다.

“글쎄.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시험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카신의 눈이 험악해졌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는 여태 히나를 만나며 무엇을 했냐는 힐난이 담겨 있었다.

“내가 히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든가, 고맙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하지그래?”

칼피온은 카신에게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것에 기분이 나빠지자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구시렁거렸다.

“모든 드래곤이 히나의 기운을 느끼는 건가?”

카신은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물었다.

코반드가 뒤에서 조종하여 전쟁을 일으킨 거라면, 그가 전쟁터의 위치를 알고 있을 확률이 컸다.

만약 코반드가 먼저 가서 히나를 낚아채 버리면?

드래곤 모두가 감각이 예민하여 히나의 기운을 느낀다면 곤란했다. 코반드가 수많은 제국군 사이에 숨어 있을 히나를 단번에 찾아버리는 순간 끝이었다.

코반드가 히나를 발견하기 전에 그가 먼저 찾아야 했다. 카신은 이를 꽉 문 채 속도를 더 높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강산도 변하고, 지형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칼피온은 입가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본능이 강한 인간은 히나의 기운을 느낀다며? 드래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럼 코랄드는?”

“흐음, 코랄드는 어릴 때부터 전투 능력이나 모든 감각이 타고났다고는 들었는데……. 싸워봤지 않아?”

분명 코랄드의 그 눈, 로티우스 네가 만들었잖아!

칼피온은 따지듯이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카신의 얼굴이 험악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이 한둘인 줄 알아?”

“그건 그렇지.”

한때 드래곤을 찾아 대량으로 학살하고 다녔던 카신이 눈 조금 그은 코반드를 기억해 낼 리가 없다. 칼피온은 어쩐지 코반드가 불쌍해져서 속으로 혀를 찼다.

“나는 위험감지 능력이 워낙 타고났으니까. 알잖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나만큼 히나의 기운을 더 정확히 느낄 수 있는 드래곤은 없을 거라고 봐.”

다른 의미로 카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카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불쾌하군. 나중에 히나를 느끼는 것들은 다 싸잡아…….”

“타고나길 이런 걸 어떻게 하라고!”

아직도 심장에 가해진 충격에 얼얼한데!

칼피온은 억울해서 마구 따지려고 하다가 멀리서 느껴지는 성력의 선명한 기운에 고개를 홱 돌렸다. 카신도 느낀 건지 눈을 크게 뜬 채 성력이 강하게 흘러나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런 힘은 예민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느끼겠는걸.”

칼피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멀리,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서도 숨이 막힐 만큼 선명한 성력의 힘이 느껴졌다.

“설마 히나가 폭주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안정적이었다. 히나가 제대로 컨트롤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의 아이가 폭주했을 때 내뿜었던 기운하고는 완전히 다르기도 했다.

‘뭐가 이렇게 힘이 넘쳐?’

폭주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건 코반드였다. 코반드가 이 힘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히나에 대해 조사했다면 성력에 대해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코랄드에게 먼저 히나를 빼앗기면 드래곤이고 뭐고 전부 다 죽여 버릴 줄 알아.”

소름 끼칠 만큼 서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은 카신은 칼피온을 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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