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칼피온을 따돌리자마자 코반드는 바로 전쟁 지역으로 향했다. 마법사 부대만 믿고 있던 제이스는 아델리아의 반격에 당황하던 참이었다.
마법사들이 흐물흐물 움직이거나 바닥에 쓰려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델리아의 최정예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적군의 마법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코반드 후작! 어서 오게! 지금 상황이……!”
“지금 저게 무슨 상황이죠?”
신력에 맞부딪힌 마법사들이 힘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보며 코반드가 물었다.
‘저런 생각을 누가 한 거지?’
마법사이거나 마법사가 될 잠재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간들을 모두 모아서 만든 집단이었다. 마법사 특유의 유전자를 증폭시킨 그들은 대략 한 달을 사는 대신, 최강의 마법사가 되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내포되어 있는 잠재 능력을 완전히 끌어낸 거였다. 그러니 섭리에서 벗어난 것을 모두 정화시키려고 하는 신력은 막강한 마법사 부대에 있어 독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코반드의 미간이 조금이나마 펴졌다.
‘다행히 증폭 마법과 조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신력이 증폭 마법까지 정화하는 모양이군.’
신력을 억지로 증폭시키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았다. 증폭 마법에 의해 신력이 커지고 있지만 수백의 마법사 부대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마법사 부대는 또 만들어지고 있으니…….’
플로라 왕국 지하에 있는 비밀 실험실에서는 계속해서 마법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눈앞에 있는 마법사들이 전멸하기도 전에 충당이 될 것이다.
‘전멸을 시킬 수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시간이 늦춰졌을 뿐, 연합군이 우세인 건 변함없었다. 신력으로 변형된 인간을 정화시킬 생각을 한 것은 칭찬해 줄 만했지만, 안타깝게도 신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걱정 마십시오. 곧 상황이 바뀔 것입니다.”
“그, 그런가?”
“저런 생각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력이란 건 한계가 있는 법이죠.”
신력에 쓰러진 마법사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아마 잠재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인간들이리라.
신력이 떨어졌으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흐물흐물 움직이는 이들도 곧 제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연합국의 마법사를 기세등등하게 베고 있는 제국군의 기사들은 쪽도 못 쓰고 당한다.
“그보다 대마법사의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대마법사의 여자? 자네는 그 여자를 데리러 제국에 들어간 거 아니었나?”
“전쟁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곳 어딘가에 있겠지요.”
제국군을 보는 코반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였다. 갑자기 허공에 이상한 빛이 퍼졌다. 그 순간 흐물흐물 움직이면서도 반격을 하려던 마법사 부대가 모든 행동을 멈췄다.
“아…… 아…….”
정화 기능이 없는 성력은 증폭 마법에 주변으로 순식간에 넓게 퍼져 나갔다.
성력을 맞은 연합군의 마법사가 짐승이 죽어갈 때나 내는 울음소리를 힘없이 내며 행동을 멈추었다.
코반드는 눈을 크게 뜨며 연합군의 마법사를 응시했다.
‘울어?’
이미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그들은 여태 살아온 기억도 없으며, 감정도 잃어버렸다. 당연히 고통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성력을 맞은 마법사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투구 속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눈물은 마치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을 보여주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제국군을 물리치고, 점령하는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유일한 목표였다. 그 명령에 의문을 품을 수도 없으며, 당연히 다른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명령에 탄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된 자신들의 모습을 슬퍼하는 듯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마법사 부대의 이상 행동에, 잠시 멈췄던 제국군의 기사들이 곧 기세를 몰아 그들을 차례로 베고 있었다.
코반드는 뒤늦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실험작들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에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코반드는 아직도 공기 중에 흩날리는 기이한 힘에 씨익 웃었다.
“코반드 후작! 어떻게 하면 좋나! 지금……!”
당황하는 제이스를 무시한 채 코반드는 빠른 속도로 하늘 높은 곳에 올라갔다. 인간들이 개미 떼들처럼 작게 보일 만큼 높은 곳에서 멈춰 선 그는 빠르게 아래를 훑었다.
“저기 있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통해 만든 가짜 분신들로 히나의 얼굴은 이미 확인했다.
‘운이 좋았어.’
수만의 제국군 속에서 히나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뒤에서 카신이 맹렬히 추적하고 있었으니, 시간도 급박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힘을 이렇게 강하게 내뿜다니.’
코반드는 애초에 제국군이 이기든 연합군이 이기든 상관없었다. 그의 최종 목적은 오로지 카신을 없애는 것이었다. 카신을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제국은 후에 그의 손으로 없애면 될 일이었다.
“이런 힘을 내는 여자를 찾지 못할 리가 없지.”
힘을 과도하게 쓴 건지 멀리서도 히나가 살짝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코반드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 동그랗던 붉은색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졌다. 인간이었던 그의 몸이 점점 부풀기 시작하며 붉은빛을 띠는 두꺼운 비늘이 온몸에 돋아나기 시작했다.
붉은 비늘에 휩싸인 인간의 작은 몸은 순식간에 부풀어 거대한 레드 드래곤으로 변했다.
“드, 드래곤이다!”
온몸을 덮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붉은빛의 비늘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돌풍을 일으키는 커다란 날개, 인간의 체구보다도 훨씬 크고 날카로운 발톱, 거기다 긴 꼬리까지.
몸체만으로도 엄청난 위엄을 자랑하는 레드 드래곤의 한쪽 눈은 일그러진 눈두덩이 살점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반대쪽의 번쩍이는 붉은 눈동자가 너무 위협적이어서 일그러진 눈은 전혀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하던 군대들이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에 우왕좌왕 흩어졌다. 그가 날개를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인간들이 강풍에 휘청거렸다.
‘로티우스가 오고 있어.’
멀리서도 거대한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코반드는 빠른 속도로 히나를 향해 날아갔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히나는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온몸이 크고 단단한 드래곤의 발톱에 잡혀 있었다. 그것도 뒤엉켜 있는 수많은 군대가 개미 떼처럼 작게 보일 만큼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깨달았다.
“히나!”
히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쪽 다리가 강하게 당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우너 오라버니!”
드래곤의 발끝을 겨우겨우 붙잡은 채 라우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건지 하늘로 치솟아 허공을 돌던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가 발끝에 매달려 있는 라우너에게 향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라우너를 보는 순간, 히나는 척추를 타고 찌르르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살짝 떨었다.
“괜찮아, 히나! 내가 구해줄게!”
라우너가 드래곤의 발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주섬주섬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던 드래곤이 순간 날개를 틀며 아래로 빠르게 하강했다.
“라우너 오라버니!”
종이 쪼가리처럼 라우너의 몸이 허공에서 퍼덕퍼덕 휘날렸다. 라우너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드래곤의 발톱을 붙잡고 있었다.
드래곤이 다시 하늘 높이 치솟았다. 라우너를 떨어뜨리기 위해 방향을 틀며 바람을 세차게 갈랐다.
“그만, 코랄드.”
한순간에 드래곤의 움직임이 멈췄다. 바람을 가르며 이리저리 흔들리던 상태에서도 히나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드래곤에게 붙잡힌 채 허공을 날아다니는 것이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혹시나 성력을 쓰느라 기진하여 자신이 실신이라도 한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드래곤이 라우너를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세찬 바람이 온몸을 강타하자 겨우 꿈이 아니라는 걸 인식했다.
“히나를 어서 내놔.”
히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맞은편 하늘에 카신이 떠 있었다. 전쟁터에 카신 님이 오시다니. 이번에도 그녀는 환영이나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으읏……!”
[움직이지 마. 네가 움직이는 순간 이 여자의 몸은 바로 터져 버릴 테니까.]
드래곤의 발톱이 온몸을 조였다. 가까이 오던 카신이 우뚝 멈췄다.
‘환영이 아니야!’
이러다 몸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톱에서 힘이 풀어졌다. 히나는 겨우 숨을 내뱉으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눈을 깜빡였다. 온몸을 죄는 끔찍한 고통에 흐릿했던 시야가 겨우 조금씩 맞춰져 가고 있었다.
“날 자극해 봤자 좋을 것 없다는 걸 알 텐데? 어서 내놔.”
카신이 음산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히나는 카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돌아오고 카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놔.”
목소리마저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히나는 본능적으로 그 위험한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아냐,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지만 발톱 하나의 크기만도 못한 연약하고 작은 인간이 드래곤에게 잡힌 채 무얼 할 수 있지?
“하아, 하아.”
아래에서 들려오는 작은 헐떡거림에 히나는 시선을 내렸다. 라우너가 그녀에게 거의 가까이 기어오고 있었다.
히나는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은 라우너를 부르려다 다급히 제 입을 꽉 틀어막았다. 카신에게 시선을 곤두세우고 있는 드래곤이 눈치라도 채면 곤란했다.
몸채가 잡혀 있어 잘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히나는 라우너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라우너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라우너가 그녀의 뜻을 눈치채고 손을 쭉 뻗었다. 서로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다.
‘닿을 수 있어!’
히나는 조금 더 몸을 길게 빼어 최대한 손을 뻗었다. 꽉 잡힌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갈비뼈가 강하게 조여왔다. 뼈가 부러져 심장을 찌를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옥죄이는 순간에도 손끝이 살랑살랑 닿는 것이 느껴졌다.
히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당장에라도 잃어버릴 것 같은 정신을 바짝 부여잡으면서.
‘버텨야 돼!’
꽉 붙잡혀 있던 그녀와 달리 라우너는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바람을 계속 버텨왔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이미 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놓치면 라우너는 이 높은 하늘에서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아무리 라우너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 높이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라우너가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그의 손을 잡아줘야 했다.
‘할 수 있어!’
탁.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듯, 라우너와 히나의 손이 맞닿았다. 라우너가 히나의 손을 꽉 잡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녀의 앞으로 손쉽게 다가왔다.
“히나, 괜찮아?”
“네, 괜찮아요.”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라우너는 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카신을 힐끗 쳐다보았다. 카신의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도 있었다.
“저기, 저 남자 인간이 아니지?”
들킬 것이 염려된 건지 라우너가 검지로 카신의 뒤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카신을 보느라 칼피온을 이제야 발견한 히나는 고개를 다급히 끄덕였다.
“곧 떨어질 거야.”
“떨어지다니요?”
“드래곤의 다리를 벨 거야.”
“그게 가능한가요?”
그저 라우너를 구해야겠다는 일념하에 손을 뻗었던 히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해봐야지. 속박이 풀리는 순간 나를 꽉 붙잡아야 돼. 알겠지? 절대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라우너는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히나는 까마득한 아래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라우너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