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라우너는 히나를 옭아매고 있는 드래곤의 거대한 발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히나를 감싸고 있는, 강철보다 더 단단할 것 같은 발톱에서부터 몸을 덮은 비닐보다는 자잘하고 촘촘한 비닐로 덮인 발로 향했다.
‘이렇게 자신이 없기는 처음인데.’
고작 발인데도 너무 두꺼웠다. 그리고 꽉 매달리기도 힘들 만큼 무척 단단했다.
제아무리 검기를 쓴다고 해도 이 단단한 피부에 얼마나 칼집을 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평생 겁도 없이 살아왔지만, 이렇게 자신이 없고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드래곤이 뿜어내는 위엄과 거대한 몸체는 압도적이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이 드래곤에게서 떨어지기만 하면 카신이나 처음 보는 남자나 둘 중 한 명이 구해줄 것이다. 카신의 뒤에 있는 남자는 모르겠으나, 카신은 무조건 히나를 구해주러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드래곤이 막는다고 해도 뒤에 있는 남자가 어떻게 대립해 주겠지.’
칼피온이 적어도 방관만 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 라우너는 바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을 꺼냈다. 항상 한 손으로만 검을 쥐던 그가 드래곤의 단단한 피부를 베기 위해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라우너의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검기에 코반드가 뒤늦게 제 발톱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발견하고 발을 휘저으려 움직였지만 라우너가 더 빨랐다.
[으윽……!]
강한 검기가 깃든 검이 몸통에 있는 비늘보다 자잘한 비늘 사이로 그의 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살갗이 깊숙하게 베이며 그의 몸보다도 더 붉은 피가 울컥하고 튀었다.
발끝이 찢어지는 고통이 몰려오자 코반드는 본능적으로 강하게 움켜쥐고 있던 히나를 세차게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리고 아차, 하며 히나와 함께 빠른 속도로 하강하는 라우너를 향해 날아갔다.
“히나!”
동시에 카신도 히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누구 마음대로!”
칼피온이 코반드를 방해하기 위해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코반드는 날아오는 카신과 칼피온을 보며 크게 공기를 들이켰다.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며 그의 입속으로 강한 바람이 들어갔다. 그가 카신과 칼피온을 향해 거대한 브레스를 날렸다.
“아악! 젠장!”
칼피온은 거대한 몸체만큼이나 커다란 불길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간의 몸은 너무 연약했다. 단단한 비늘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드래곤의 본체와 달리 인간의 연약한 살은 불길에 가까이만 가도 녹아버린다.
인간의 몸으로 쏘아대는 브레스도 아닌, 본체의 거대한 브레스를 직통으로 맞는다면 정말 끝이었다. 이걸 노리고 코반드는 굳이 눈에 띄는 거대한 본체로 돌아간 거였다.
코반드에게 가다 말고 뒤로 물러난 칼피온은 멈추지 않고 돌진하는 카신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미쳤구만.”
카신이 날아오는 브레스를 힐끗 보더니 그쪽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곧 거대한 불길이 카신을 집어삼켰다.
칼피온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브레스를 뚫고 멀쩡하게 튀어나오는 카신을 경악 어린 눈으로 보았다.
‘고작 한 손으로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는다고? 그게 말이 돼?’
드래곤의 거대한 브레스를 꿰뚫고 나온 카신이 중간에 코반드와 맞부딪쳤다. 카신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자, 코반드의 거대한 몸체가 반동으로 살짝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코반드는 더 물러서지 않고 카신을 향해 다시금 브레스를 날렸다.
카신은 한 손으로 브레스를 막으면서, 다른 손으로 지상과 점점 가까워지는 히나와 라우너를 향해 마법을 걸었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히나와 라우너의 몸 주변에 동그란 막이 생겼다. 막 안에 둘러진 두 사람이 지상에 안전하게 내려앉았다.
그걸 본 칼피온이 조용히 눈치를 보다 히나와 라우너를 향해 날아갔다.
“그 눈을 보니 더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군.”
카신은 한쪽 눈이 일그러진 채 흉측하기 짝이 없는 코반드의 본체를 보며 조소를 날렸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내 아량이 너무 넓었어.”
[로티우스! 널 죽여 버릴 테다!]
히나와 라우너에게 다가가는 칼피온을 보면서도 눈앞에 있는 카신 때문에 어떻게 하지 못한 코반드가 이를 갈았다. 그가 곧 숨을 들이켜고는 마구잡이로 브레스를 뿜어냈다.
“아아. 실성이라도 한 건가.”
카신은 양쪽으로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허공에 마구 날아다니는 브레스를 무력화시켰다.
뜨거운 불길의 브레스는 카신의 힘이 닿자마자 피시식, 하고 사라졌다. 코반드의 멀쩡한 쪽 눈의 동공이 급격하게 일렁였다.
“네까짓 것이 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코반드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앞에 있는 카신, 그리고 히나에게 가까이 간 칼피온, 거기다 성력에 여전히 맥을 못 추고 있는 그의 마법사 부대, 마지막으로 이 혼란한 틈 속에서도 연합군의 마법사 부대를 없애려 드는 제국군.
성력 따위로 인해 마법사 부대가 목적과 의지를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어떤 지휘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국군의 마법사와 기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로를 도와가며 마법사 부대를 무차별적으로 무찔렀다.
‘수가 너무 적어.’
살아 있는 마법사 부대가 너무 적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마법사 부대를 잃는다고 해도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판도를 바꿀 기회마저 없어진다.
‘설마 로티우스의 힘이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칼피온이 옆에 있는 것도 엄청난 변수였다. 하지만 가장 큰 변수는 본체로 날린 브레스까지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카신의 엄청난 힘이었다.
“저것도 네놈들 짓인가?”
카신의 눈이 지상에 있는 마법사 부대에게로 향했다. 딱 봐도 인간이길 벗어난 존재였다.
우습게도 가장 이치와 섭리를 벗어난 존재인 카신은 다른 것이 조금이라도 섭리를 벗어나는 것을 못 견뎌했다. 지금도 그는 못마땅해 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코반드가 대답했다.
코반드는 마법사 부대를 본 카신이 자신을 쉽게 죽이지 못하리라 예감했다.
“새삼스레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지?”
카신은 비정상적인 마법사 부대의 연구 일지와 실험실, 그렇게 만들어진 비정상적인 마법사들의 위치를 모두 그의 입으로 직접 토해내게 할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그리고 존재했다는 작은 흔적을 모두 지울 때까지 그를 절대 죽이지 않으리라.
“로티우스, 네 그 엄청난 능력은 인정하지. 신과 비등한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처음부터 카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드래곤을 학살하고 다니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섭리를 어기는 존재는 없어져야 한다니.
그 어느 누구도 위대한 생명체인 드래곤을 멸종시킨다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설사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드래곤도 개미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게 카신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코반드는 오랜 시간 카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엄청난 연구를 해왔다. 수백, 수천 가지의 변수와 최악 속의 최악을 생각해 두고, 카신에게 대항하기까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네 녀석은 진짜 신이 아니야.”
카신도 인간이었다. 히나라는 존재가 그걸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고작 인간 여자 하나에 쩔쩔매며 어울리지도 않는 감정을 보여주는 카신을 이번에야말로 없애 버리리라. 코반드는 훗, 하고 짧게 조소를 흘렸다.
마법사 부대는 애초에 그의 유전자를 집어넣어 완성된, 그래서 그의 말만 따르게 되어 있는 완벽한 인형이었다. 코반드는 속으로 마법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모두 빛이 되어 사라져라.’
그러자 허망하게 서 있던 마법사들까지 갑자기 몸을 곤두세웠다. 그나마 제국군의 기사에 대항하던 마법사들도 공격을 멈추며 그 자리에 꼿꼿하게 몸을 세웠다.
“모두 물러나라! 최대한 멀리 흩어져라!”
그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자 아델리아가 다급히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반드는 지휘관의 목소리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 두며, 숨겨두었던 투명한 유리구슬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마법사 부대가 무얼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그를 바로 제압하려고 달려드는 카신을 향해 유리구슬을 던졌다.
파지직.
허공에 날아가던 유리구슬이 금이 가고 깨어지며 히나가 튀어나왔다. 이미 가짜인 걸 알고 있음에도 카신이 허공에서 날아오는 히나를 본능적으로 받았다.
카신이 히나를 받는 순간 연합군의 마법사 부대가 번쩍하고 빛이 났다. 카신도, 칼피온도 갑작스러운 빛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코반드는 빠른 속도로 카신을 지나치며 히나가 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훗, 고작 빛 가지고 벌벌 떨다니.’
아무것도 아닌 빛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그들의 행동을 묶어놓을 수 있게 만든.
그의 유전자를 섞어 마력을 잠재 능력 이상으로 끌어내 만든 마법사 부대였다. 마법사의 수가 적어 염려했던 것과 달리 그들이 죽으며 뿜어낸 빛은 카신과 칼피온의 행동을 묶기엔 충분했다.
* * *
한편 루터는 세인트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후방의 안전한 곳에 있었다. 아직 학생 신분인 그들의 역할은 멀리서 제국군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며 간혹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생사를 오가는 전장에서 그나마 안전한 곳에 있던 루터는 멀리서 붉은색의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나고, 히나가 잡혀갔으며, 또 어디선가 나타난 카신과 대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라우너와 함께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지는 히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루터! 전열을 흩트릴 셈이야?”
누군가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하지만 루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말을 몰아 히나가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히나는 내 동생인걸!’
동생.
히나는 그의 동생이었다. 그것도 작고 가녀린 체구로 신비한 능력과 집요한 강단을 보여주는 자랑스럽고 애틋한 여동생이다.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에는 히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싫었다. 그래서 카신과 히나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겉핥기식으로만 오라비 역할을 하고 절대 그 이상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시키잖아!’
처음부터 히나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카신과 그토록 각별한 사이면서도 비참하고 힘든 상황에서 혼자 꿋꿋하게 견뎌내려 들었다.
그래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는 히나에게 조금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보니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끈기와 노력에 반해 어느새 히나를 도와주고 있었다.
‘히나는 절대 먼저 손을 뻗지 않으니까!’
안 될 걸 알면서도 히나는 혼자 하려 들었다. 그런 히나의 곁에 있어줘야 했다. 카신의 뒤에 있던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뒤늦게 히나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지만, 처음 보는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지쳐 버린 히나를 가장 잘 알아주는 건 카신이 아니었다. 히나가 노력하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도와준 그였다.
루터는 한두 명 사라져도 티도 나지 않는 후방에서 대열을 지키는 것보다 히나에게 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히나!”
빛이 번쩍이기 직전에 루터는 히나에게 도착했다.
강한 힘으로 내동댕이쳐 졌던 라우너와 히나는 정신을 잃은 채 동그랗게 움푹 파인 바닥에 뉘어져 있었다. 카신의 마법으로 안전하게 떨어진 듯했다.
말에서 내린 루터는 다급히 히나와 라우너를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강한 빛과 함께 암전된 듯 시야가 캄캄해지는 순간, 루터는 본능적으로 히나를 꽉 끌어안으며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