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블랙 드래곤은 일반적인 드래곤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태어난다.
성정이 흉포하고 파괴만을 일삼는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블랙 드래곤은 드래곤들 사이에서 불길함의 상징이었다.
부모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느냐는 상관없었다. 수십만 년에 갑자기 한 번 태어나는 블랙 드래곤은 태어나는 즉시 가둬지게 되어 있었다. 성체가 되어 힘이 깨어나면 큰일이었으니까.
칼피온도 마찬가지였다. 불길함의 상징인 블랙 드래곤은 처음부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였다.
알을 깨고 완전히 나오기도 전에 보인 새카만 비늘 탓에 칼피온은 바로 부모에게 버려졌다. 그리고 깊은 동굴 안에, 비늘도 완전히 돋지 않은 여린 몸에 수십 개의 기둥이 꽂힌 채 봉인되었다.
그렇게 홀로 외롭게 죽어갈 운명이었다. 세상을 뒤흔드는 어느 한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드래곤을 죽이는 존재라니!”
“그런 존재가 있단 말인가!”
지상 최강이라고 여겼던 드래곤이 잔인하게, 아주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둘 죽어 나가는 정도였지만, 상대는 드래곤을 탐지하는 법을 터득한 건지 그 수는 곧 빠르게 늘어났다.
“죽은 사체에 심장만 없네.”
“분명 드래곤의 심장에 우리의 모든 힘이 모여 있다는 것을 안 게야!”
“설마 심장에 있는 우리의 힘을 제힘으로 흡수하고 있는 건가?”
그들의 추측은 점점 확신이 되어갔다. 드래곤을 찾아내어 학살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빠르고 간결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존재는 드래곤을 멸족시키는 것이 목표인 듯, 일방적인 학살을 계속했다.
수많은 드래곤이 모여 상대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전투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건진 건 상대가 인간이라는 정보 하나뿐이었다.
“고작 인간에게 고위 종족인 드래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이러다 멸족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멸족이 두려웠던 드래곤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세상을 파괴할 힘을 가진 블랙 드래곤, 칼피온을 찾아가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한평생 가둬둔 칼피온에게 구걸했다.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를 없애달라고.
깊고 어두운 곳에서 긴 시간을 홀로 살아왔던 칼피온은 수많은 드래곤이 자신을 찾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는 자신을 가둔 것에 분노나 원망보다도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감격에 취해 있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부디 흉포한 인간을 죽여주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칼피온을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은 몸이 자랄수록 더 깊이 박혀 들어갔던 수십 개의 기둥을 빼주었다. 기둥을 하나씩 뽑을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뿜어졌고, 칼피온은 살점이 나가는 듯한 고통에 휩싸여야 했다.
하지만 칼피온은 이 기둥이 모두 빠지면, 혼자가 아니게 된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고통을 인내했다.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드래곤을 학살하는 인간을 죽인다면, 드래곤들의 영웅이 되어 평생 외롭지 않아도 된다. 그에겐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래곤들은 칼피온이 있는 곳으로 상대를 유인했다. 그리고 칼피온은 기둥이 뽑힌 구멍으로 가득한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카신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블랙 드래곤인가.”
카신은 칼피온을 보자마자 조소했다.
“고작 비늘이 까맣다는 이유로 널 평생 가둔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그런 몸을 한 채로? 날 없앤다고 해도 또 가둬질지도 모르는데?”
드래곤들이 카신에 대해서 인간이라는 정보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카신은 드래곤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블랙 드래곤인 칼피온을 깨워 그를 처치하려는 계획까지.
원래 그들은 칼피온이 어느 정도 나은 다음에 카신을 유인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계획을 알고 있던 카신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칼피온의 봉인이 풀리자마자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이제 가둬지지 않아. 나는 널 죽이고 영웅이 될 거야.”
칼피온은 카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게 되는 것, 그것만이 그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었다.
“널 가둔 것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카신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칼피온은 대답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종족이야.”
“과연 그들도 너와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군.”
여태 만난 드래곤들은 모두 스스로가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생물이 피해를 입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참으로 가엽구나. 최강 종족 중에 최고의 힘을 가진 것이 고작 이런 세상 물정 모르는 상처투성이 드래곤이라니.”
자신의 종족만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드래곤들과 달리 칼피온은 순수하기만 했다. 그래서 카신은 칼피온에게 의외의 제안을 했다.
“나와 같이 가지 않겠나?”
단순히 혼자인 게 싫은 거니,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드래곤들보다 강대했고, 카신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싫어.”
하지만 칼피온은 망설이지도 않고 카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네가 영웅이 된다고 저들이 널 떠받들고 혼자 두지 않을 것 같나?”
카신은 칼피온이 몸만 컸지,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드래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난 널 죽이지 않아. 오히려 네 복수를 도와주고, 너와 계속 같이 있어줄 수도 있지.”
희귀한 블랙 드래곤이었다. 거기다 그와 같은 어둠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동질감이 들기도 했지만, 칼피온의 순진함에 흥미가 일기도 했다.
“싫어. 당신은 인간이고, 난 드래곤이잖아?”
“종족이 같아야 동질감이 드는 건 아니지.”
카신은 칼피온의 앞에서 어둠의 힘을 개방했다. 그의 몸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에 칼피온이 눈을 크게 떴다.
“성체가 됐어도 평생을 갇혀 살았으니, 아무것도 모르겠지. 내게 오면 뭐든 알려주마. 복수도 도와줄 수 있어. 물론 외롭지도 않을 게다.”
어둠의 힘을 쓴다는 이유 하나로 멸시받고 은폐되었던 칼피온은 같은 힘을 쓰는 카신을 넋 놓고 응시했다.
“같이 가겠느냐?”
“그래도 나는…… 동족을 버리진 않을 거야.”
“네 마음대로 하거라. 어차피 네 마음은 바뀔 테니까.”
카신은 칼피온의 마음이 금방 변할 거라 생각했다. 칼피온이 굳이 같은 동족이 아니어도, 꼭 누가 옆에 있지 않아도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를 가둔 동족에게 복수할 거라 예상했다.
“당신은 인간이니 계속 따라다니지도 않을 거야! 언젠가는 당신을 배신할지도 몰라!”
“할 테면 한번 해보거라.”
카신은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는 칼피온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되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힘을 가졌다는 블랙 드래곤이 어디까지 그에게 달려들 수 있을지 말이다.
그 후로 카신과 칼피온은 오랫동안 함께 다녔다. 드래곤을 찾아내어 학살하는 짓을 일시적으로 멈춘 카신은 칼피온을 데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어둠의 힘은 결코 불길한 게 아니야. 모든 힘이 조화롭게 뒤섞였을 때 나오는 최강의 힘이지.”
“그럼 내 힘도?”
“모든 색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이, 여태 네 몸에 기록된 수많은 힘이 균형에 맞춰 나왔을 뿐이야.”
“기록?”
“네 조상들의 속성이 무척 다양했고, 네 세포 하나하나에는 그 힘의 특징들이 모두 들어 있다는 뜻이다.”
수많은 유전자가 섞이고, 또 섞였을 것이다. 보통은 한 힘 쪽으로 치우치고 나머지는 모두 퇴화되기 마련이지만, 칼피온은 그 모든 속성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도 아주 조화를 잘 이룬 채 말이다.
“그럼 당신도?”
“너처럼 오리지널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난 만들어진 힘이야. 수많은 힘을 익히고, 삼키니 이렇게 변하더군.”
“내 힘이 좋은 거야?”
“한때 힘을 추구했던 내 입장에선 말이지.”
칼피온의 눈엔 카신이 완벽했다. 그런 카신이 어둠의 힘을 부러워했다. 칼피온이 혐오했던 제힘을 점점 좋아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카신은 이미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신은 그 어떤 작은 것에도 의문을 갖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연구했다.
힘을 추구하고 연구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칼피온은 그의 옆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다.
굳이 드래곤을 찾거나 학살하려 하지 않았던 카신으로 인해 칼피온은 다른 드래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칼피온은 어느 순간부터 그 어떤 드래곤보다 자신이 더 강할 거라는 확신이 서렸다.
“로티우스, 난 이제 혼자 다닐래.”
이제 카신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부모에게 생존의 모든 걸 배운 짐승이 스스로의 삶을 찾아 독립을 하는 것처럼 칼피온은 카신과 떨어질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
카신은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다는 기색도 보였다.
“이제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
“드래곤은 원래 독립적인 존재야. 언젠간 네가 떠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잠시 같이 있자고 한 거였고. 오리지널 어둠의 힘이 꽤 궁금했거든.”
카신이 연구의 목적으로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해도 충격적이지 않았다. 카신에게 배운 것도, 얻은 것도 많았다. 오히려 은혜를 갚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도 돼?”
“떠나기 전 마지막 질문이니 뭐든 대답해 주지.”
“왜 드래곤을 학살하고 다녔어?”
“너무 많아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대답이었다.
“정적이 없는 지상 최강의 종족이야. 먹이사슬의 정점인 생명체가 너무 많으면 세상의 균열이 일어나지. 거기다 그 존재는 무척 이기적이기까지 해. 그 어떤 제재도 없이 파괴와 살육만 일삼는 종족 따위는 이 세상에 필요 없어.”
하지만 이어진 카신의 설명에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카신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는 드래곤의 수가 지금의 열 배를 넘었다고 들었다. 거기다 딱히 규율이나 규범이 없어 수많은 생명체가 피해를 봤다.
“뭐, 드래곤의 힘이 궁금해서 죽인 것도 있지만 말이야. 아, 물론 흡수하려는 목적도 있었고. 확실히 인간이었던 내 몸은 너무 약했거든.”
이건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였지만.
칼피온은 카신의 옆을 따라다니며 정리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난 복수는 하지 않을 거야. 물론 원망도. 대신 당장은 힘들더라도 꼭 같은 일원, 동족으로 인정받아 함께 살아가겠어.”
“그건 내게 대항하겠다는 건가?”
카신만큼 냉혹하고 비정한 존재는 없다. 칼피온은 아무리 방금 전까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어도 대항하겠다는 순간 카신이 그를 죽일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신에게 정리한 마음을 말하는 시기가 조금 늦어진 거였다.
“아니. 그건 아니야.”
칼피온은 어떻게 해야 동족을 살리고, 카신과도 잘 지낼지 고민했다. 그리고 겨우 결론을 냈다.
“현재 드래곤 사회는 동족을 가장 우위에서 다스리는 수십의 장로들이 있지만, 인간들처럼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지. 지성이 있는 생명체면서 말이야.”
너무 이기적인 데다 제멋대로다. 장로들은 더했다. 그래서 동족을 모아 통합하거나 규율을 정해 제재하지 않았다.
칼피온은 카신과 인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인간들이 엄격한 규율과 법도를 만들어 얼마나 균형 있게 살아가는지를 배웠다.
“내가 그보다 더 위에 서겠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고작 어둠 좀 다룬다고 자만하게 된 건가? 그 일을 너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만 환상에서 벗어나라는 듯이 잔뜩 빈정거리는 카신에게 칼피온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할 거야. 그러니 약속해 줘. 만약 내가 해낸다면 무분별하게 드래곤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 그리된다면 말이지.”
포악하고 이기적인 드래곤의 정점에 서는 일은 힘들었다. 카신은 칼피온이 절대 해내지 못할 거라 예상했다. 성체가 된 지는 좀 됐지만, 그는 드래곤 장로들에 비해 무척 어리고 미숙했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약속해 줘.”
“또 뭐지?”
카신은 심드렁하니 물었다.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어린 블랙 드래곤을 한껏 비웃으며 말이다.
“네 드래곤 하트를 절대,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약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