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세상의 정점에 서며 카신은 그 누구에게도 본래의 힘을 꺼내본 적이 없었다. 칼피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칼피온이 제 드래곤 하트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카신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가 픽 웃었다.
“패기 넘치는 꼬맹이가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네. 세상 물정 모르던 꼬맹이가 제법 많이 컸군.”
처음 죽인 드래곤의 사체를 연구하던 카신은 드래곤 하트에 광폭하고 막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때부터 그는 학살한 드래곤 하트로 여러 시험을 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제힘에 흡수하고 융합하는 법을 터득했다.
얼마나 많은 드래곤의 힘을 삼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느새 심장이 변해 있었다. 무한한 힘을 가진 드래곤 하트로 말이다.
“내가 배운 것만 익혔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내게 드래곤 하트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다니, 칭찬해 주지.”
카신은 칼피온이 꽤 계획적으로 준비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충고했다.
“하지만 칼피온, 넌 처음부터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더냐. 장로들의 힘은 그리 만만치 않아. 고지식하고 이기적인 장로들을 설득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할 거야. 하지 않으면 그들은 로티우스, 네 손에 모두 죽을 테니까.”
“네 노력 따위도 모른 채 그들은 널 배척하고 혼자 두려 할 텐데?”
“그딴 건 상관없어. 난 이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검은 눈동자가 무척 올곧았다. 당시의 드래곤들은 정말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카신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칼피온의 눈을 보는 순간 믿어보기로 했다.
“내 의지는 변함없어. 너는 그렇다 쳐도, 그 외의 드래곤들은 별로 살려두고 싶지 않구나.”
블랙 드래곤이 파괴만을 일삼는다는 전설과 달리 칼피온은 무척 순수했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데리고 다니며 많은 것을 알려준 거였다.
“하지만 시간을 주지. 네가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지켜볼 시간 말이다.”
“꼭 해낼게, 로티우스.”
“네가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기어오르는 것들이 있다면 난 학살을 멈추지 않을 거다.”
“그럴 일은 없어. 그 전에 규율을 지키지 않은 드래곤은 내 손으로 죽일 거거든.”
칼피온이 꽤 천진하게 웃었다.
귀찮음을 무릅쓰며 기껏 키워놨더니 이제는 제 머리 위에 오르려고 한다. 카신은 마치 모든 일을 다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웃는 칼피온이 얄미워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먹이사슬의 정점은 네가 아닌 나야. 그러니 너라도 내 손에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로티우스도 약속해 줘. 네 드래곤 하트를 꼭 지키겠다고. 최강인 나를 넘어서는 건 너만이 가능해야 돼.”
그리 말하는 칼피온의 얼굴엔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갈망과 종족을 유지시키려는 간절한 마음이 카신의 눈에도 충분히 보였다.
“그래야 균형을 맞출 수 있어.”
조금 세상을 안 것 가지고, 세상의 균형까지 운운하다니.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카신은 그런 칼피온이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내 드래곤 하트를 그 누구에게도 건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만약 내가 생을 다해 죽는다면, 내 심장을 갖고 함께 죽을 테니 울지 말렴.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어리고 가여운 블랙 드래곤아.”
카신에게 두 가지를 약속받은 칼피온은 바로 그날, 카신의 곁을 떠나 홀로 독립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칼피온은 모두가 인정하는 드래곤 로드가 되었다. 거센 반발을 일으키고 도망가는 드래곤도 있었지만, 칼피온은 제 손으로 그들을 즉각 처단했다. 동족 유지를 생각하는 순수함이 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비정하고 냉혹했다.
칼피온은 드래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규범과 규율도 만들었다. 인간에 비해 무척 자유로워 지키지 못할 것들이 아니었다.
물론 반발도 있었지만, 카신의 손에 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부분의 드래곤이 칼피온의 말을 따랐다.
드래곤 사회가 완전히 확립되자 카신은 더 이상 그 세계에 개입하지 않았다. 거슬리는 드래곤에게도 경고를 하긴 해도 그뿐이었다. 서로의 약속이 지켜진 거였다.
* * *
“꽉 잡고 있어, 히나! 내가 어서 올라가서 널 잡아 끌어줄게!”
마법으로 올라가던 도중 마력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가파른 벽에 겨우 매달린 채 버티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래는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었다.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지 오래였지만, 그 누구도 벽을 잡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마법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루터는 바로 코앞에 있는 분화구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한계 이상으로 마력을 썼다. 더는 마법을 쓸 힘이 없었다.
전에 카신이 인간은 한계를 넘어가면 한정된 마력이 조금씩 늘어난다고 했다.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루터는 당장 죽을 위기에서 몇 번이고 한계 이상의 마법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
‘내가 올라가야 해!’
하지만 한계를 너무 넘어섰다. 더는 쓸 힘도 없지만, 이 이상 쓴다면 그대로 쓰러져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얼마 남지도 않은 이 거리에선 벽을 타고 올라가 히나를 끌어 올리는 편이 더 빨랐다.
“떨어지니까! 절대 허튼짓하지 말고 그대로 붙어 있어야 해!”
“네, 오라버니!”
마력을 너무 쓴 탓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당장 구역질을 해서 속을 게워내고 싶었다. 루터는 이를 악문 채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고 올라갔다.
‘라우너 형이라면 저 아래에서도 번쩍번쩍 올라왔을 텐데.’
어릴 때 라우너는 그의 집에 놀러 오면 마법사는 너무 약골밖에 없으니, 어서 같이 체력을 기르자며 리베리아 형제를 독촉했다. 그럴 때마다 마법사가 왜 무식하게 몸을 굴려야 하냐고 도리어 더 무시했었다.
‘진작 같이할걸.’
그때 라우너를 무시했던 것이 후회되었다. 루터는 비 오듯 흐르는 땀도 닦지 못한 채 바위 벽에 튀어나온 모서리를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툭.
“어어?”
“오라버니!”
루터가 잡고 올라가려던 돌이 부스러졌다. 아래로 떨어진 돌을 용암이 소리도 없이 삼켰다.
떨어지려는 몸에 어떻게든 힘을 준 루터가 다급히 다른 돌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다.
“으아악!”
설상가상으로 툭, 하고 왼발이 밟고 있던 돌이 부서졌다. 중심이 무너지자 다른 쪽 발도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안 돼요! 버텨야 돼요, 오라버니!”
그 모습을 본 히나가 다급히 루터에게 외쳤다.
“허어엉! 오라버니! 버티란 말이에요!”
당장에라도 루터는 방금 전 떨어진 돌처럼 용암에 삼켜질 것 같았다. 히나는 엉엉 울며 절벽에 매달린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튀어나온 돌을 잡고 다급히 올라갔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눈을 뜨니 분화구 꼭대기에 엎드려 루터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오라버니! 흐으윽, 죽으면 안 돼요!”
눈물에 시야는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히나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루터의 팔을 겨우 붙잡았다.
“안 돼요! 죽으면 안 된다고요!”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도 히나는 루터를 잡은 손에 온 힘을 주어 끌어 올렸다.
여기서 루터가 떨어지면 저 무시무시한 용암에 삼켜질 것이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을 열기이니,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뼛속까지 녹아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마, 마법으로라도 올라오란 말이에요, 오라버니!”
루터가 그렇게 죽길 원하지 않았다. 히나는 제가 엄청난 힘으로 루터를 끌어 올리는 것도 모른 채 큰 소리로 펑펑 울었다.
“히, 히나.”
“오라버니, 올라오란 말이에요!”
“히나!”
정신이 거의 나갔던 것도 같다. 히나는 루터가 큰 소리로 불러오자 뒤늦게 딸꾹질을 하며 앞을 보았다. 계속 흘러넘치는 눈물 사이로 루터가 흐릿하게 보였다.
“나, 난 괜찮아.”
루터는 멋쩍은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히나가 이렇게까지 우는 모습에 쑥스러운 탓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올라간 거야?’
그가 떨어지려 하자 히나가 암벽 전문가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분화구 끝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눈물을 쏟아내며 믿기지 않는 힘으로 그를 끌어 올려주었다.
‘처음부터 히나에게 올라가라고 할걸.’
루터는 죽을 위기에서 살았다는 안도보다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오라버니가 무사히 올라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엉엉 우는 히나는 자신이 끌어 올려서 루터가 올라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히, 히나?”
“정말 다행이에요!”
만약 그가 죽기라도 했다면…….
히나는 훌쩍이며 루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난 괘,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놓으라고.”
“네, 오라버니.”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히나는 루터가 쑥스러워한다는 것도 모른 채 훌쩍이며 떨어졌다. 그리고 시커먼 검댕이 묻은 루터를 보고 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오라버니, 어, 얼굴이…….”
루터의 얼굴에 검은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건지 루터가 꽥 하고 받아쳤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저 밑에서부터 올라왔으니 화산재가 묻은 게 당연하잖아!”
“저도 그렇다고요?”
히나는 제 얼굴도 그렇다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저 밑에서부터 화산재가 우리 얼굴에 쏟아져 내렸을 거라고.”
루터가 분화구 아래를 향해 손가락을 몇 번이고 흔들며 가리켰다.
히나는 무의식적으로 루터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하니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붉은 용암을 응시했다.
“또 왜 그래?”
“저 용암, 좀 올라온 것 같지 않아요?”
분명 한참 밑에서 올라왔다. 벽에 매달리고부터 루터가 아래를 보지 말라고 해서 보지 않았지만, 얼마나 깊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히나의 말에 루터도 고개를 돌려 분화구 아래를 보았다. 그도 이상한 걸 느낀 건지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 동안 펄펄 끓는 용암을 응시했다.
“그러게.”
“오라버니! 저기, 저 기둥! 우리가 있었던 곳 아니에요?”
히나는 처음 이동되었던 곳을 가리켰다. 한참이나 높게 솟았던 기둥은 아까와 달리 용암에 당장 삼켜질 것 같았다.
저렇게 낮은 곳이 아니었다. 저 높이였다면 그들은 나갈 생각도 하기 전에 익어버렸을 것이다. 분명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였다.
“저거 지금 올라오고 있는 거 맞지?”
루터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 그렇겠죠?”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루터가 히나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뛰……!”
“아아악! 오라버니 어서 도망가요!”
루터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히나가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루터는 어느새 저 멀리 가버린 히나를 멍하니 보며 다급히 말했다.
“가, 같이 가, 히나!”
루터는 히나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그녀는 엄청 빠르게 뛰고 있었다.
루터는 히나가 자신을 두고 갈까 싶어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그녀만을 쫓았다.
‘저거, 저거……. 어디 가서 쉽게 죽지는 않겠네.’
히나가 생각보다 위기에 강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