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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를 훔쳐라-101화 (101/128)

101.

화산이 곧 폭발한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땅이 진동했다.

산을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수많은 생명체가 보였다. 작은 동물일지라도 위험을 감지한 것인지 그들도 분주하게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다 도망가! 도망가야 돼!”

말한다고 말귀를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히나는 내려가며 끝없이 동물들에게 도망가라 소리쳤다. 루터가 그런 그녀를 말렸다.

“히나! 그럴 시간 없어! 힘 빼지 말고 어서 뛰어!”

“하지만……!”

우르르릉―

또다시 땅이 울렸다. 히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루터를 따라 뛰었다.

쿠웅! 구구구웅!

하늘이 무너지는 건지, 땅이 갈라지는 건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땅의 묵직한 울림과 함께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에 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 오라버니!”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화산구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 끝까지 쭉 솟아올랐다.

뭉게뭉게 올라가는 검은 연기는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번쩍이는 붉은 액체가 튀었다.

“히나! 뛰어!”

루터는 멍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히나의 손을 잡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한계라고 생각한 것이 우습게도, 몸은 계속 움직였다. 더 빠른 속도로 말이다.

콰르르릉―

“절대 뒤 보지 마! 뛰어!”

바로 옆에서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엄청난 굉음이었다.

히나는 자신을 잡고 빠르게 끄는 루터로 인해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면서도 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주변의 작은 동물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답답하게도 도망가지 않고 귀만 쫑긋 세운 채 가만히 있는 동물들도 있었다.

“다 도망가! 도망가!”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뜨거운 열기였다. 떨어지는 돌조차 묵직하게 삼켜 버리는 펄펄 끓는 용암이 흘러내리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죽을 것이다.

“도망가라고!”

히나는 간절하게 외쳤다. 동물들이 제발 이 소리에 놀라 도망이라도 칠 수 있도록.

“히나! 힘 그만 빼!”

루터가 말렸음에도 미련이 남는지 히나의 두 눈은 숲속의 작은 생명체들을 좇고 있었다.

“저긴……!”

무작정 아래를 향해 빠르게 뛰던 루터는 멀리 보이는 깃발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게 보이는 제국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멀리 어떤 외딴곳에 떨어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전쟁 지역 근처였던 모양이었다.

“히나! 저기 제국군이 있어! 보이지?”

제국군을 가리키던 루터는 허전한 손을 느끼며 뒤로 홱 돌았다. 꽉 잡고 있었던 히나의 손이 어느새 빠져 있었다.

“히나!”

히나가 뒤를 돌아본 채 그 자리에 넋 놓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루터는 저도 모르게 히나의 시선을 따라 끝까지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던 분화구를 보고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용암이 터진다는 말이 맞으리라. 눈이 부실 만큼 붉은 것이 여기저기 팍팍 튀며 곳곳으로 날아갔다.

붉은 용암으로 뒤덮인 분화구는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펄떡였고, 그 주변의 땅은 가느다란 혈관처럼 붉은빛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다 다 죽겠어요.”

히나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색의 돌덩이가 히나 앞으로 휙 날아왔다. 너무 빠른 속도라 무엇이 날아왔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도 그녀 앞에 떨어진 붉은 돌덩이 주변의 풀이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를 내서 말이다.

“우리…… 어쩌지?”

검붉은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붉은 용암이 순식간에 산을 뒤덮었다. 루터도 뛰어서 도망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건지 넋을 놓고 용암이 산을 삼키는 것을 응시했다.

“다 도망가야 하는데…….”

삼킨다는 단어가 딱 적당했다. 붉은 용암이 흘러내리며 모든 걸 삼키고 있었다.

히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분화구에서 튀기는 검은 암석 조각이나 붉은 용암 덩어리가 주변에 날아오고 있었다.

“아앗!”

“히나!”

어깨에 뜨거운 쇠꼬챙이로 구멍을 낸 것 같았다. 루터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떨어진 검은 암석과 용암이 뒤섞인 조각을 소매로 두드리며 떨궜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이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주변 풀을 녹이다 거멓게 변해갔다.

고작 엄지손톱만큼 잡은 조각이었지만, 옷이 시꺼멓게 타서 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 살도 짓눌러졌으리라.

‘이대로는 안 돼.’

화산재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히나는 그 사이로 루터를 보며 암담한 미래에 잠시 눈을 감았다. 화산구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답답했다.

“아!”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히나는 눈을 번쩍 뜨고는 루터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제국군! 제국군은 어디에 있죠, 오라버니?”

“저, 저기…….”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던 루터가 겨우 대답했다. 그녀는 루터가 가리키는 곳에서 곧 제국군을 발견했다.

“오라버니, 마법! 마법!”

“무슨 마법?”

“보호 마법이요! 카신 님한테 배웠죠? 제일 첫 시간에 다 배웠잖아요!”

“하지만 이런 곳에서…….”

루터는 이제 코앞까지 떠내려오는 붉은 용암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뛰고 싶지만, 긴장이 풀린 것인지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차피 도망간다고 해도 멀리까지 튀어 오르는 암석 조각이나 용암 덩어리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그거 말고! 어서요, 어서!”

“하지만 마력이…….”

“조금이라도 좋아요! 조금만 버텨요, 우리!”

히나는 자포자기한 것인지, 멍한 얼굴로 겨우 대답하는 루터를 재촉했다.

뒤늦게 루터가 힘겹게 마법진을 그렸다. 미세하게 남은 마력 탓에 식 자체가 매우 희미했다.

‘최대한 버티면 되는 거야.’

루터가 마법진을 그려 나가는 걸 보며 히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입속으로 텁텁한 가루가 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기에 칼피온이 있어. 라우너 오라버니도 있고.’

아까 성력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얼마나 힘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우너가 깨어 있을지, 칼피온이 계속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이 좋은 누군가라면 그녀의 성력을 알아채 줄 것이다.

히나는 두 손을 모아 집중했다. 하지만 양손 사이의 공간에서는 희미한 빛도 나지 않았다. 최대한 집중하고는 있지만, 흘러내려 오는 용암에 조급한 마음을 완전히 지울 수도 없었다.

“히나, 마법진 완성은 했는데…… 얼마나 버틸지는 몰라.”

루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용암을 보며 그는 울상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둘 다 용암에 풍덩 빠져 죽을걸. 저건 몸을 천천히 녹여서 더 아플 것 같은데…….”

“조용히 좀 해봐요, 오라버니!”

징징거리는 루터에게 짧게 나무라자 그가 숨을 흐읍, 하고 들이마시며 입을 다물었다. 히나는 눈을 감고 조금 더 집중했다.

‘집중하자, 집중. 아니면 다 죽어. 그러긴 싫잖아! 카신 님도 이제 내 거고, 가족도 생기고, 엄마도 찾았는데!’

만약 여기서 살아서 돌아간다면 혼란스러운 감정 덕에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전부 하리라.

히나는 간절하게 성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얇은 눈꺼풀 위로 환한 빛이 보이자 눈을 번쩍 떴다.

“돼, 됐다!”

두 손 안에 찬란한 빛이 생겨났다. 히나는 두 손을 높게 뻗었다. 이렇게 하면 더 멀리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제발! 아무나 좀 알아채 주세요!’

손안에 반짝이는 성력을 보며 히나는 간절하게 외쳤다.

* * *

콰광!

멀리서 화산이 폭발했다. 코반드가 고개를 홱 돌리며 하늘을 뒤덮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그가 경악 어린 눈으로 그곳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자, 잠깐! 거래 조건을 바꾸도록 하지!”

“거래 조건을 바꾸다니, 무슨 소리지?”

코반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붉게 변하는 화산구를 보자마자 바로 시선을 돌렸다.

‘왜 하필이면 지금……!’

화산구 안에 히나를 이동시켜 감춰놓았다. 하지만 그 화산이 하필이면 지금, 이 타이밍에 폭발했다.

화산의 뜨거운 온도는 레드 드래곤인 그도 화상을 입을 만큼 뜨겁고 강렬했다. 당연히 솟아오른 용암에 인간의 연약한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네 여자를 지금 데려오지! 그리고 여기서 네 심장과 네 여자를 교환하는 거다.”

거래 조건은 히나를 무사히 돌려보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올 히나가 없다면?

눈앞의 검은 연기에서는 여전히 섬뜩한 힘이 느껴졌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저 끔찍한 연기에 삼켜지게 된다고 했다.

“어째서? 그러면 히나가 무사히 돌아갈지, 그러지 않을지 모르지 않나.”

카신이 별로 내키지 않다는 듯 말했다. 코반드는 다른 말로 카신을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럼 지금 그 여자를 데려올 테니, 그 후에 다시 거래하지.”

아직 히나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짜라면 몇 개가 더 있었다. 거리를 두고 가짜 인형을 가져온 다음 다시 거래를 얘기한다면?

망설임 없이 가슴을 갈라 심장을 내어줄 만큼 아끼는 여자이니, 앞에서 대놓고 위협한다면…….

“이 거래는 네게 최상의 조건일 텐데? 히나를 무사히 돌려보내고, 건드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심장을 가질 수 있지 않아?”

카신이 느긋하게 허리를 굽히며 코반드의 턱을 잡고 들었다.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를 보며 그가 픽 웃었다.

“내 심장만 가진다면 넌 저기 있는 칼피온도, 나도 능가하는 존재가 되는 거지 않나. 그런데 왜 거래를 망설이지?”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샛노란 눈동자가 사납게 빛났다. 그 기세만으로도 당장 잡아먹힐 것 같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드래곤이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그를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혹, 히나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없게라도 된 건가?”

낭패였다. 하지만 최고의 조건을 지금에서라도 받아들일 순 없다. 받아들이는 순간, 눈앞의 검은 기운은 그를 삼킬 것이다.

도망가야 했다. 당장에 말이다.

“어서 말을 해보게, 코랄드.”

“네 여자는…….”

턱에 닿아 있는 카신의 손이 무척 시리다고 느끼는 순간, 코반드는 몸이 점점 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여자는 무사하다! 그, 그러니…….”

레드 드래곤인 그가 얼굴을 제외하고는 단단한 얼음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꿈쩍도 할 수 없도록 얇지만, 결코 녹지 않는 얼음에 말이다.

털썩.

허공에 몸이 멈췄던 칼피온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옆에서 흉포한 힘을 내뿜고 있던 어둠의 기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카신은 오로지 코반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히나는 어디에 있나? 어서 말해.”

“여, 여자…….”

목과 머리까지 뒤덮은 얼음에 코반드가 꺽꺽거렸다.

“아, 말을 하기 힘든 모양이군.”

카신은 손끝으로 꽁꽁 얼어버린 그의 목을 가로로 쓱 그었다.

“크윽……!”

손끝이 지나간 곳이 쩍 갈라지며 목 위를 뒤덮고 있던 얼음이 바닥으로 투둑, 하고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살갗이 깊게 베인 건지 코반드의 목에서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이런. 내가 흥분해서 힘 조절이 안 된 모양이야.”

코반드는 여기서 도저히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꿈쩍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단단한 얼음에서 빠져나와 머리를 굴려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카신이 히나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목에서 쏟아지는 다량의 피가 그를 꽁꽁 얼린 투명한 얼음 위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건 온몸의 모든 세포를 얼려 버리는 이 얼음이었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레드 드래곤인 자신이 고작 얼음에 몸이 얼어붙는 고통을 느끼다니.

상성이 반대되는 힘이어서 더 괴로웠다. 그의 드래곤 하트 깊은 곳에 있는 모든 불의 기운까지 얼려 버릴 것 같은 얼음 속에서 어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여기서 죽을 거라면 로티우스에게 최고의 고통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코반드는 눈을 굴려 검은 연기 아래로 붉은빛의 화염이 화려하게 튀고 있는 분화구를 보았다. 그가 다시 카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티우스. 네 여자가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나?”

목 위로 얼음이 잘려서인지, 그나마 말을 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코반드는 큭큭거리며 최대한 비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여자는 저 분화구 속에 집어넣었지. 화산이 폭파되기도 전에 용암이 넘쳐 증거 하나 없이 남지 않고 녹았을 테야.”

카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용암이 솟구치는 화산구에 닿았다.

“그래서 거래를 할 수 없네. 네 여자는 저기서 이미 죽었을 테니까.”

코반드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 카신의 눈을 보며 더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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