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히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눈앞에 있는 카신을 보고 안도했다. 혹시라도 그가 깨어났던 것이 모두 꿈이었을까 봐 두려웠다.
“카신 님, 이제…… 괜찮아요?”
얼굴이 많이 상했던 카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핏기 없는 얼굴로 말라가고 있었고, 히나는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걱정했었다. 너무 늦게 깨어 말라 죽는 건 아닐지 하고.
하지만 지금의 카신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긴 했었나, 의심까지 들었다.
“내가 괜찮다고 하지 않았니.”
그가 회복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인지 히나의 맑은 눈동자에 물기가 차고 있었다.
카신은 살며시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의연한 척해도 걱정했던 모양이다.
원래 히나는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무척 강했고, 또 강한 것 같은가 하면 연약했다.
이제껏 어떻게든 버텨야겠다는 정신력 하나로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걱정에 속이 말이 아니리라.
“네가 깨지 않는다고 루터가 많이 걱정했단다.”
사실 하루가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그녀가 생각보다도 더 많이 힘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그가 깨어날 때까지 정신을 조여 맸던 거였다.
긴장이 풀려 깊게 잠이 든 히나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신은 일부러 그녀의 몸이 더 쉴 수 있도록 깊이 잠들게 마법을 걸었다.
“루터 오라버니가 왜……. 제가 오래 잤나요? 얼마나요? 아니, 그보다 전쟁은요?”
놀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신은 고개를 숙여 히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꼬박 이틀을 잤단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곧 제국군이 연합군을 몰아내려 출발할 게다.”
카신의 목욕을 도와주기도 했으면서 입술을 맞춘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워지자 히나는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곧이라면…….”
“부상자를 제외한 제국군이 출정 준비를 하고 있지.”
히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그럼 저는요?”
“히나 너는 방금 전까지 의식을 잃었던 부상자가 아니더냐.”
태연하게 그녀를 부상자로 만드는 카신의 능청스러운 얼굴을 보며 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한 마법사들이 나타나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요.”
반쯤 포기했음에도 히나는 작은 희망을 품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쟁에서 성력은 필히 필요했다. 이상한 적군의 마법사들에게 증폭이 잘 되는 성력이 통하는 걸 봤는데, 이대로 힘들다고 뒤로 내뺄 순 없었다. 그녀뿐 아니라 모두가 힘드니 버텨야 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무섭지도 않은 것이냐?”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카신을 보며, 히나는 코반드에게 잡혀 높은 하늘에서 이리저리 휘둘렸던 것을 떠올렸다. 거기다 루터와 그 끔찍했던 화산 속에서 나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순간 몇 번이고 죽을 뻔했지만, 위기를 잘 넘겼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쿵 내려가고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카신 님이 구해주셨잖아요?”
매번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카신이 등장하여 구해주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이번에 그는 그녀가 위험하자마자 바로 나타났다.
히나는 카신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지만, 그녀가 잡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제가 위험하면 약속대로 카신 님이 구해줄 거니까 괜찮아요. 카신 님만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전혀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정말 카신이 있다면 괜찮았다. 그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전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보다 카신 님도 절대적이지 않으니까, 절대 위험에 처하게 두면 안 되겠어.’
카신이 스스로 심장을 꺼내어 죽으려 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히나는 의외로 그가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의식을 잃은 채 눈물까지 흘리던 카신을 돌보며, 그간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려고만 했던 것이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대신 약속해요. 제가 정말 강해져서 카신 님이 위험하면 꼭 지켜줄게요.”
“날 지켜주겠다고?”
“이번에도 지켜줬다고요! 카신 님이 깨어날 때까지.”
“그래, 그렇구나.”
카신은 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깨닫고 작게 미소 지었다.
연약한 취급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형편없는 몰골로 히나의 보살핌을 받는 건 부끄럽기도 했지만, 무척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그 사태를 만든 건 일단 비밀로 하지.’
아는 이는 몇 없었다. 코반드야 제 손으로 죽일 거니 제쳐 두고, 칼피온은 조금 치사하지만 종족을 빌미로 협박을 하면 입을 다물 것이다.
‘신녀가 문제로군.’
눈치가 빠르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히나를 위해 그를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했으면서도, 목숨을 걸고 그를 살린 사람이 세이나였다. 그녀가 이 일을 비밀에 부쳐 줄지 어떨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보다 적군의 마법사들과 싸우려면 신력이나 성력이 필요해요! 지금 신녀님께서 많이 아프시니, 저라도…….”
세이나를 생각한 것인지 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녀라면 완전히 의식을 차리고, 회복하고 있단다.”
“만나보셨어요?”
“그래,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말렴.”
사실 그가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세이나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카신은 세이나가 신력을 잃고 죽을 뻔했던 것에 조금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히나가 우선이었다. 세이나에게 미안하더라도, 히나가 영순위인 그에게 있어 여태껏 한 선택은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군의 마법사들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일이라면 내가 나서기로 했으니.”
“카신 님이 나서요? 전쟁에도?”
“이번 전쟁엔 드래곤이 끼어 있단다. 그것도 규율을 완전히 어기고 탈주한 드래곤이 말이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나도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니 적군의 마법사들에 관한 일이라면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 계속 같이 있는 거예요?”
카신은 기대감 어린 히나의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전쟁 중에 그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희망에 히나의 눈이 반짝였다.
원래라면 이동 마법이든 루터를 통해서든 히나만이라도 어서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니 차마 돌아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조금만 상황을 보자꾸나.”
절대 히나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넘어가선 안 된다. 차라리 대답을 미뤄뒀다가 다시 마음을 잡은 후에, 단호히 돌아가라 하는 게 나았다.
“그런데 그 마법사들은 뭐예요? 카신 님은 아세요?”
“네 눈에는 무엇으로 보였지?”
“사람…… 사람처럼 보였어요. 조금 이상했지만.”
역시 그의 여자는 예리했다. 그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는데도 인간임을 알아보다니. 카신은 히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히나, 인간에겐 유전자라는 것이 있단다.”
“유전자……?”
“네 몸 안에는 아주 오래된 조상의 기록, 즉 유전자가 있단다. 그 기록들이 모두 합쳐서 네가 만들어진 거지. 그래서 인간이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아닌 더 조부모의, 혹은 그보다 더 위의 조상을 닮을 수도 있는 거란다.”
꽤나 어려운 얘기에 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하려 애쓰는 게 보였다.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건 머리가 비상한 드래곤이라고 해도 단번에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니까.
“그 마법사들은 한 가지 유전자, 즉 마법사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유전자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특화시켜 인공적으로 만든 마법사야.”
다른 모든 것들을 퇴화시키고 한 가지만 특화되게끔 유전자를 변형시킨 거였다. 억지로 퇴화를 시켰다기보다 마법사가 가지는 유전자를 특화시키니 다른 것들이 저절로 퇴화되었다.
“그렇게도…… 가능한가요?”
“아니, 그건 불가능해.”
아주 오래전, 어째서 가족들은 다 평범한데 혼자만 이런 힘을 갖게 된 걸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했던 연구였다.
그는 자신의 유전자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사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유전자가 유난히 특화된 것을 깨달았다.
카신은 자신의 유전자를 꺼내어 여러 번의 시험 끝에 비슷한 샘플을 만들었다. 그의 유전자를 억지로 집어넣어 그처럼 특화를 시킨 거였다.
혼자인 것이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내고 싶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그때의 그도, 지금의 그도 왜 그 유전자를 꺼내어 샘플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법사는 한 달도 채 살지 못한단다.”
“한 달도 살지 못한다고요?”
“그래. 다른 유전자가 모두 퇴화되어 겉도, 속도 마법사의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니 당연한 이치지. 섭리를 거슬러 만들어낸 생물이 그리 오래 살 리가 없지 않아?”
그 자료를 어떻게 빼돌린 건지 모르겠으나, 아델리아에게 들은 정보로는 그가 과거에 만든 샘플이 확실했다.
“한 달밖에 살지 않으면 너무 가엽잖아요.”
“어차피 아무런 감정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도 아닌 것들이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이 죽는 것조차 모르겠지.”
히나는 자신의 성력에 눈물을 흘렸던 적군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카신이 감정도 잃은 것들이라 표현했지만, 그녀는 그들이 이상하게 변한 몸은 물론이고,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 스스로의 모습에 슬퍼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 어딘가에 조금 더 있겠지. 그러니 난 그 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할 생각이란다.”
“너무 위험해요! 카신 님 혼자서는…….”
또다시 카신이 위험에 처하기라도 할까 봐 히나는 다급히 말리려다가, 그가 꽤 즐겁다는 얼굴로 미소 짓는 걸 보고 말을 멈추었다.
“전 걱정하는 건데 그렇게 웃고 있다니, 너무 짓궂으세요.”
“이제 알았니?”
“아무튼 엄청 걱정된단 말이에요.”
언제부터 이렇게 연약한 이미지가 되었을까. 오랜 세월을 살면서 보호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카신은 히나가 자신을 돌봐줘야 하는 대상이라 생각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조금 자존심이 상해도 히나의 걱정과 정성 어린 손길은 좋았다.
“네 약혼자는 꽤 강하단다. 그러니 이건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카신은 히나의 턱을 잡아 살며시 올렸다. 무엇을 할지 알아챈 건지 히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네가 걱정할 건 앞으로 나를 어떻게 해야 잘 받아낼 수 있을지, 이것 하나란다.”
입을 맞추자마자 카신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이 들어간 그가 조금 더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점점 더 집요해지고 깊이 들어오는 그를 받아내기 힘들었던 것인지, 히나의 몸이 점점 기울었다.
그녀의 몸이 침상 위로 쓰러지자 그는 입술을 떼며 그 위에 올라가 양팔로 히나를 가두었다.
“히나, 돌아가면 널 안을 게다.”
그의 타액으로 히나의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히나가 살며시 시선을 내리는 듯하더니, 곧 그와 눈을 맞추었다.
올곧은 눈동자는 절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걱정과 달리 그녀는 그를 충분히 받아내고 있었다.
“네.”
히나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신은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어서 전쟁이 끝나길 고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