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12화 (112/128)

112.

“히나!”

라우너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타고 있는 히나를 보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카신과 함께 양탄자를 탄 채로 달리는 말과 속도를 맞춰 오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광경이었다.

“응원하러 왔어요.”

가장 선방에 있던 아델리아는 뒤따라오던 라우너의 목소리에 뒤를 힐끗 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델리아는 카신을 철저히 외면하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인간 외의 존재라 여기는 카신에게 절대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검사로서의 숭고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도대체 언제 깨어난 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이제 괜찮은 거지?”

이틀 전에 먼저 출정한 군대를 카신의 신비한 양탄자로 따라잡은 히나는 반갑게 맞이하는 라우너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네, 괜찮아요.”

히나를 데려다주던 카신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코반드의 발에 힘들게 달라붙어 히나를 빼내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래도 그 대상이 라우너인 건 불만이었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라우너라니, 란 생각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아무도 모르리라.

“그보다 라우너 오라버니도 괜찮으세요? 그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내가 얼마나 강한데! 내가 위험하면 구해준다고 했잖아, 알지?”

코반드의 발에서 히나와 함께 땅으로 떨어지는 라우너에게 다치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준 건 그였다. 하지만 카신은 생색을 내지 않기 위해 이가 아프도록 입을 꽉 다물었다.

여기서 만약 라우너와 누가 히나를 구했는지를 가지고 논쟁하면, 얼마나 유치하게 보일지 충분히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고마워요, 라우너 오라버니.”

“그런데 히나는 여기 왜 온 거야?”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질문을 하는군.

카신은 속으로 라우너를 응원했다. 이번만큼은 마음이 맞았다.

히나가 불편한 게 아니라면 굳이 함께하고 싶다며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카신은 어쩔 수 없이 히나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저도 함께 가려고 왔어요. 분명 제 성력이 필요할 거예요.”

라우너의 시선이 그제야 카신에게 제대로 닿았다.

“그래서 대마법사님이 널 데려온 거야? 말도 안 돼. 나 같으면 절대 허락 안 했을 거야.”

카신은 꽤나 살벌한 눈으로 라우너를 보았다. 인간 따위는 단번에 잡아먹을 최상위 포식자의 강인한 눈초리에 라우너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히나가 전장에 참여하겠다면 제가 데리고 가지요. 대마법사님께서는 따로 움직이시길 바랍니다.”

앞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아델리아가 속도를 살짝 늦추며 다가와 말했다. 카신의 한쪽 눈썹이 살짝 휘었다.

“히나는 내가 데리고 있습니다.”

“대마법사님께서는 따로 행동하기로 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히나는 제국군 소속입니다.”

라우너와 달리 아델리아는 시선을 피하거나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저도 이번에 참여하게 됐으니, 제국군 취급을 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별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이 이상 별로 엮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공작 각하께서 카신 님을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응, 공작은 날 오래전부터 싫어했단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너라도 계속 좋아해 주려무나.”

히나는 아쉬운 눈으로 아델리아의 뒷모습과 카신을 보았다. 아델리아처럼 멋진 여성이 카신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보니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저희는 계속 이렇게 가요? 말은 안 타고?”

양탄자를 타고 나는 모습이 신기한지 병사들이 계속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이목이 쏠린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계속 모른 척하는 건 무리였다.

“히나? 그냥 나와 함께 가자, 응?”

라우너는 당장에라도 멈추어 안장을 빼고 히나의 자리를 만들 기세였다. 갑자기 타고 있던 양탄자가 높이 올라갔다.

“우리는 먼저 가도록 하지.”

카신은 히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라우너가 다급히 손을 뻗어 히나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하염없이 멀어졌다.

“히나, 떨어지니 어서 뒤로 오렴.”

카신은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보는 히나의 어깨를 감싸며 제 품으로 당겼다. 그러면서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짓는 걸 잊지 않았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스와 흩어져 있던 연합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델리아는 마법사 부대를 잃고 사기가 떨어져 단합이 전혀 안 되고 있는 연합군을 단번에 제압했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끝까지 저항하는 제이스에 비해 적군은 순순히 백기를 들며 항복했다. 제이스는 마법사 부대만 믿고 있어서 연합군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적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대부분 살려만 달라며 먼저 투항하고 나섰다.

“전쟁이라고 하기엔 생각보다 시시하네. 히나 앞에서 멋있는 모습 좀 보이려고 했더니.”

대부분의 적군을 제압하고 한숨 돌리기 위해 진영을 잡은 아델리아는 전쟁을 너무 쉽게만 보는 아들을 나무라려다가 말았다.

라우너의 말처럼 이렇게 시시한 전쟁도 없을 것이다. 적군은 제대로 된 연합 훈련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사기도 의지도 없었다. 그들이 연달아 백기를 드는 것에 누구보다도 김이 빠진 건 아델리아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잖아? 그리고 히나는…….”

이미 짝이 있다고. 그만 포기해.

차마 당사자들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한 베라미는 전쟁 중임에도 한쪽에서 차를 타고 있는 히나를 힐끗 보았다. 아까부터 정성을 들여 끓인 차를 조심히 찻잔에 담은 히나가 뒤에 있던 카신에게 내밀었다.

‘네가 아무리 보러 와도 히나는 널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히나가 지내는 막사에 득달같이 달려가는 라우너의 뒤를 쫓아온 터였다. 카신을 앞에 두고 히나에게 애정 공세를 할 라우너가 걱정되어 도저히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상황은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 심했다. 카신과 히나만 보면 오붓하게 여행 온 신혼부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몇 번이고 귓전에 말해주었지만, 라우너는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오라버니도 드시겠어요?”

히나가 베라미를 향해 조심히 물었다. 아직까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아서인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나마 계속 얼굴을 부딪치며 식사를 하면서 적대감이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이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베라미는 이제 좋지도, 싫지도 않게 된 히나를 가만히 보았다.

“난 됐으니…….”

베라미는 카신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완곡히 거절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카신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서 히나가 건네는 차를 받으라고.

‘뭐가 좋다고 다들 히나 타령인 건지.’

항상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신과 히나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나 계속 부친인 리베리아 후작과 함께 마법사 부대를 지휘했던 베라미는 히나를 가까이서 보는 게 꽤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히나에 대한 소문은 계속 듣고 있었다. 눈에 띄게 하늘 위에서 커다란 양탄자를 타고 카신과 함께 다니니, 말이 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듣자 하니 결혼 약속까지 했다지.’

부상자들과 함께 남겨졌던 루터에게 들은 얘기였다. 그게 아니라도 양탄자 위로 얼핏 애정 행각을 하는 카신과 히나를 보면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간혹 입맞춤을 했다는 소리까지 들려올 때면, 정말인가 싶어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대마법사 카신이 여자와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진짜인가 싶어서.

“고, 고맙구나.”

카신의 눈치가 보여서 차마 거절하지 못한 베라미는 히나가 기쁜 미소를 지으며 건네는 찻잔을 받았다.

“나도! 나도 줘, 히나.”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옆에서 라우너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여자들이나 마시는 거라며 평소에 차는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말이다.

베라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어 마셨다. 차를 끓이는 솜씨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은 편이었다.

“여기요, 라우너 오라버니.”

카신의 못마땅한 시선을 받으며 라우너는 히나에게서 꿋꿋하게 찻잔을 받아 들었다. 감히 카신을 상대로 참으로 대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히나의 시선은 계속 카신을 향하고 있었다. 베라미는 친구가 안타까우면서도 답답하기만 했다.

“라우너, 한참을 찾았단다.”

“공작 각하!”

히나가 일어나자 베라미도 바로 예의를 갖췄다.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아델리아의 등장에 라우너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지금은 굳이 예의를 따질 생각이 없으니 괜찮다.”

정중한 히나의 인사에 아델리아가 살며시 웃었다. 전장에서 보이던 위풍당당한 모습과 다른 인자한 미소에 히나는 멍하니 아델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델리아가 카신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걸로 간략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히나와 라우너의 앞에 편히 앉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베라미는 갑작스러운 아델리아의 등장이 의아했다. 총사령관답게 아델리아는 꽤 무뚝뚝한 편이었다. 아들인 라우너에게도 특별 대우를 하지 않고, 남들 앞에서는 부하나 일반 기사를 대하듯 시선도 잘 주지 않았다.

그래서 라우너가 기사로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그가 아델리아의 아들이란 사실을 대부분 몰랐다. 전장 중에 사람을 불러 라우너를 찾는 것도 이상한데, 아들을 찾아 히나의 막사까지 들어왔다.

“큰일은 아니다만 확인해 두고 싶은 게 있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아델리아는 히나를 잠시 응시했다. 아델리아가 라우너와 별도로 자신에게도 볼일이 있음을 직감한 히나는 눈을 말똥하게 뜨며 그녀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로티우스!”

아델리아가 무슨 말을 꺼내기 직전, 막사가 펄럭이며 칼피온이 들어왔다. 계속 보이지 않던 칼피온이 급한 얼굴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히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다급해 보이는 칼피온과 달리 카신이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칼피온은 한꺼번에 집중된 주변의 시선을 한번 훑더니, 곧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찾았어. 찾았는데…….”

카신이 벌떡 일어났다.

“상태가 좀 이상해.”

칼피온은 꽤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카신이 히나와 함께 있기 위해 제국군과 이동하는 것과 별개로, 칼피온은 개인적으로 코반드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칼피온은 코반드가 연합군을 지휘했었다는 것과 플로라 왕국의 후작이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바로 플로라 왕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미 모습을 완전히 감춘 코반드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슬라임처럼 흐물흐물한 검은 액체가 나타나, 근처에 있던 작은 마을을 덮치지 않았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칼피온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런 건 처음 보았다. 비슷한 것도 전혀 보지 못했다.

“지금 어디에 있지?”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칼피온을 보며 카신이 조금 빠른 목소리로 닦달했다.

“플로라 왕국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발견했는데…….”

카신의 눈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가 당장에 나가려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한 걸음 떼자마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히나가 카신의 옷깃을 꽉 붙잡고 있었다. 불안에 일렁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카신은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