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같이 가요! 플로라 왕국이라면 거의 근처잖아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히나는 카신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 전에는 전부 카신이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신도 사람이었고, 누군가에 의해 죽을 수 있다.
그런데 모두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카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드래곤인 칼피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이다. 그런 곳에 카신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다.
“국경 근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같이 가요.”
위험할 거라면 함께 위험해지고 싶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히나 넌 이곳에 있거라.”
“안 돼요! 위험하니까, 같이 있어요.”
히나는 카신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녀는 전쟁을 겪으며 성력의 활용법을 알게 되었다. 위험한 상황이 닥친다면, 카신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플로라 왕국이라면 내일 도착할 예정입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니 함께 가시죠.”
아델리아가 일어나며 말했다. 카신의 얼굴에 잠시 고민의 빛이 어렸지만, 옷깃을 꼭 붙잡고 있는 히나를 보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내일 하도록 하지.”
“잠깐! 인간들을 데리고 가기엔…….”
칼피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막사 안에 있는 인간들을 쭉 훑어보았다. 드래곤인 그가 보기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코랄드도 정상은 아닐 거야. 회복도 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발버둥을 쳐 봤자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함께 가도 괜찮아.”
위험하면 가까이 가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카신은 픽 웃으며 히나의 옆에 다시 앉았다.
“그럼 전 내일 진격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라우너, 할 말은 돌아가면 하자꾸나.”
아델리아가 나가는 걸 멍하니 지켜보던 히나는 멀뚱히 남은 칼피온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칼피온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참 피곤하게 산다니까?”
칼피온은 터덜터덜 걸어와 히나 옆에 편히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곧 강한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우너가 꽤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드래곤, 맞죠?”
베라미는 직설적인 라우너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칼피온이 코반드와 싸울 때 다소 비정상적인 힘을 내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라 생각하지 않았다.
‘히나와도 잘 아는 사이 같아서, 그저 카신 님과 조금 친분이 있는 유능한 마법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설령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것은 무척 위험한 행동이었다. 칼피온이 정체를 들킨 것에 불쾌감을 표하며 달려들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흉포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글쎄?”
“드래곤이 이렇게 인간들 전쟁에 개입해도 되는 건가요?”
“난 전쟁에 참여한 기억이 없다만?”
칼피온은 꽤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라우너를 바라보았다. 방금 나간 아델리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앞에 있는 라우너는 특히나 감이 좋았다. 거기다 아직 어려서인지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아델리아와 달리 온몸으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라우너는 그에게 날을 잔뜩 세우는 중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고 싶었다. 감이 좋은 인간은 여러모로 신선하고 즐거웠다.
“라우너 오라버니, 칼피온은 카신 님의 절친한 친구분이세요.”
“드래곤이? 그럼 대마법사님도 드래곤이야?”
라우너의 뾰족한 시선이 이번엔 카신에게로 옮겨졌다. 카신의 노란빛 눈동자가 잠시 라우너를 보았지만, 곧 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티우스가 드래곤이면 얼마나 좋을까.”
대답을 한 이는 칼피온이었다.
“그러면 내가 매일 로티우스를 보며 불안할 일도 없을 텐데.”
카신이 힐끗 쏘아보자 칼피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름 아닌 히나 앞이었다. 그녀 앞에서 카신에게 멸족의 위협을 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히나는 맹하면서도 이따금 한 번씩 예리하게 구니 말이다.
“이제 그만 다들 돌아갔으면 좋겠군. 히나, 내일 강행군에 힘들지 않으려면 너도 어서 쉬렴.”
카신은 히나를 일으키며 방해꾼을 쫓아내기 위해 막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훑었다. 가장 먼저 베라미가 벌떡 일어났고, 칼피온이 느지막이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베라미가 끝까지 버티려는 라우너를 억지로 끌고 나가자 막사 안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이 더 남아 있었다. 카신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말했다.
“너도 가.”
“나?”
칼피온이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내일 강행군을 해도 괜찮은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은 채 일부러 놀리는 것에 열이 올라왔다. 카신은 히나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검은 마력 덩어리를 작게 만들어냈다.
“어서 가.”
“으응, 갈게. 간다고!”
칼피온이 급히 막사를 나갔다. 곧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냐.”
내일 일이 걱정되는지 히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카신은 히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침대 위로 끌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날 거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렴.”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카신은 히나와 제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아델리아가 끄는 제국군은 플로라 왕국의 국경이 가까워지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긴장했던 것과 달리 국경은 그 누구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다소 얼이 빠진 것도 잠시였다. 플로라 왕국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제국군은 전부 넋을 놓았다.
“이런. 어제보다 더 커졌군.”
칼피온이 혀를 차며 얘기했다. 멍하니 있던 히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카신의 옷깃을 꽉 잡았다.
“저건 뭐예요, 카신 님?”
카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도 모른다. 다만 저것이 점점 커지며 주변을 잡아먹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까만 슬라임 같은 진득한 액체가 점점 퍼지고 있었다. 카신은 옷깃을 잡고 있는 히나의 손 위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놓아주겠니?”
히나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녀는 저런 불길한 곳에 카신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 히나. 위험한 짓은 하지 않으마.”
히나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꽉 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카신이 옷깃을 매만지더니 히나를 칼피온에게 맡기고 검은 액체에 조금 더 다가갔다.
카신은 손안에 작은 마력을 응축시켜 검은 액체를 향해 던졌다. 마을을 하나 부수고도 남을 마력 덩어리였다.
우웅―
하지만 검은 액체는 너무나도 쉽게 카신의 마력 덩어리를 흡수해 버렸다. 마치 먼지를 삼키듯이 아주 가볍게.
카신의 힘을 흡수한 곳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검은 액체가 부글거리며 조금씩 분리되었다. 본체에서 떨어진 액체가 전에 보았던 비정상적인 마법사로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피부색이었던 마법사들과 달리 눈앞의 것들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때 봤던 것들보다 덩치도 조금 더 컸고, 뿜어내는 마력도 무척 기분 나빴다.
“별 이상한 짓을 해놓았군.”
코반드가 마지막 발악으로, 기존에 만들고 있던 마법사들을 이용해 이상한 실험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카신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검은 마법사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아델리아와 리베리아 후작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방어만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절대 공격은 안 됩니다.”
“그럼 후퇴 명령을 하란 말입니까?”
카신은 두 손가락을 마주 부딪쳐 탁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작은 불덩이가 수십 개 생겨났다.
손을 한 번 휘젓자, 불덩이가 빠르게 날아갔다. 하지만 검은 마법사들이 서로 마력을 합치며 불덩이를 날려 버리거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피했다.
“보다시피 도망은 안 됩니다.”
둔해 보이는 것과 달리 꽤 날렵했다. 수도 점점 빠르게 늘어나는 걸 봐선 어마어마한 양이 몰려올 것이다. 등을 보이고 도망가기보다는 차라리 그가 처리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나았다.
“제가 저것을 어떻게 하기 전까지 버텨야 합니다. 오래 버텨야 이기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잡아먹으려 들고 있었다. 심지어 공격한 힘도 흡수했다. 힘을 빨아들이려 움직이는 검은 물체가 눈앞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를 그냥 둘 리 없다.
카신은 뒤로 이어진 수많은 제국군과 검은 물체를 번갈아 보았다.
“후작께선 마법사들 모두와 함께 보호막을 쳐 주시죠. 공작께선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는 검은 마법사를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아델리아의 검술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최대한 보호막으로 버티고, 그 보호막을 뚫고 오는 마법사들을 협동해서 물리쳐야 한다.
“저걸 처리하는 데 얼마나 걸립니까?”
카신은 꾸물거리면서도 빠르게 이곳으로 기어오는 검은 물체를 보았다. 검은 마법사들을 양성해 내는 속도도, 다가오는 속력도 너무 빨랐다. 지금 상태로는 카신도 양쪽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저걸 어떻게 없애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몸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힘으로 완전히 눌러 버리면 된다. 하지만 뭐든 흡수하려고 드는 것에 어중간한 힘을 무작정 쏘아붙여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나도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아델리아가 살짝 눈을 찌푸렸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신 님!”
칼피온과 뒤쪽에 있던 히나가 급히 달려오며 카신을 불렀다.
“히나, 여기 있으렴.”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돼.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거란다.”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하려던 히나가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신에게 그녀가 방해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갔다 오마.”
“위험하면 다시 돌아오셔야 해요?”
“그래.”
히나의 눈에 담긴 걱정에 카신이 안심하라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도 가지.”
칼피온에게 남으라고 말하려던 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일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었던 엄청난 치명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편해진 몸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히나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니.’
긴 잠에서 깼을 때 보았던 히나의 걱정 어린 눈을 떠올릴 때마다 몸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걱정이라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카신은 처음으로 그를 걱정해 준 히나를 위해서라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칼피온이 필요했다. 드래곤 중에서도 최고를 자랑하는 블랙 드래곤이니 만약 그가 위험에 처하게 되더라도 어떻게든 구해주려 들 것이다.
‘나름대로 자식처럼 기른 놈이니.’
칼피온을 데려와 키웠던 보람이 있었다. 히나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안심하고 목숨을 맡길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많은 위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 수 있겠어?”
멀리서 보아도 불쾌하고 끔찍하기만 한 검은 물체에 칼피온이 물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전이라면 절대 이렇게까지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리라.
카신은 변화한 자신을 보며 픽 웃었다. 그가 두 손에 강한 마력을 응축시켰다.
“칼피온, 보고 싶지 않아?”
생뚱맞은 질문에 칼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카신은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와 히나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 말이야.”
“아이?”
“그래, 히나를 닮은 아이.”
부모와 형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형제들과 친근하게 농담을 하며, 때로는 서로 의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병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고, 형제들의 자식들이, 또 그 후손들에게서 형제들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마을에 들렀다.
“가족을 꾸리며 살고 싶어. 이왕이면 아주 많이.”
부모에게, 형제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것의 몇 배로 아이들에게, 아내에게 사랑을 주리라. 절대 외롭지 않도록 듬뿍.
‘아들과 딸에게는 조금 편애가 있겠군.’
그래도 아들이 많이 서운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랑을 줄 것이다. 자신처럼 외로운 아이는 절대 만들지 않으리라. 그것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
“로티우스의 아이라. 그것참 보고 싶네.”
의외라는 표정으로 카신을 보던 칼피온은 곧 씩 웃으며 검은 물체를 응시했다. 카신이 꽤나 의욕적이었다.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그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았다.
“자, 그럼 어떻게든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