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세이나가 온다. 눈앞에서 쓰러졌던, 어쩌면 영영 다시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이나가.
응접실로 들어오는 세이나를 보자마자 눈물이 차올랐다. 히나는 세이나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눈물이 멈추기는커녕 서럽게 더 흘러내렸다.
“히나?”
카신도, 세이나도 당황한 얼굴로 이제는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까지 하는 히나를 보았다.
시야가 흐려서 그런 건지, 너무 우느라 진이 빠진 건지 히나는 터덜터덜 비틀거리며 세이나에게 다가갔다.
“절대로…….”
히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얼마나 감정이 격해진 건지 목멘 목소리 때문에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로 쓰러지던 세이나를 잊을 수 없었다. 신관들이 세이나의 막사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했고, 당시엔 카신도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많이 신경 쓰지 못했다.
루터에게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어서 걱정되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티를 내지 못했을 뿐, 카신이 세이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을 때까지 조마조마했다.
“절대로…… 죽지 마세요.”
제국으로 돌아오고 정신이 들자마자 세이나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은 괜찮은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축제 분위기인 제국과 달리 대신전은 이번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어 암울한 분위기라고 들었다.
‘세이나 신녀님에 대해 물으면 카신 님은 계속 대답을 피했었지.’
어째서 신전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지, 은근슬쩍 물어보아도 카신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만 했다. 카신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결국 끝까지 묻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세이나의 안부를 생각할 때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신녀님은, 제 앞에서만은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세이나를 보며 히나가 안도와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카신은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히나가 세이나를 유독 좋아하고 따랐던 건 알고 있다. 제국에서도 인정받는 세이나의 유일한 제자가 되었을 때, 히나가 심히 기뻐하긴 했다.
‘한데 이렇게까지 세이나를 좋아했다고?’
전쟁이 끝나고 정신을 차린 히나가 가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 세이나가 걱정되어서였던 걸까?
카신은 히나가 세이나에게 극도로 관심을 갖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히나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몇 번이고 세이나에 대해 물을 때마다 슬며시 대답을 피했다.
어차피 그때는 세이나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을 때라 말해줄 수도 없었다. 세이나가 제국인이 되며 처우가 결정됐을 때는 그의 계속된 회피에 히나가 더 이상 묻지 않게 된 이후였다.
‘도대체 왜?’
히나의 과민한 반응에 놀란 건 세이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걸 보면 세이나가 히나에게 별다른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설마…….
“아직,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했는데…….”
카신은 눈을 크게 뜨며 히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바로 세이나를 확인했다.
세이나 역시 놀란 눈으로 히나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세이나도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히나에게 사실을 말해준 상대를 찾기 위해.
“그렇게 가시면 안 되잖아요.”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어떻게 히나가 알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던 두 사람은 목 놓아 우는 히나로 인해 그만두어야 했다.
“히나,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난…….”
뒤늦게 세이나는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차마 ‘당신은 나의 아이가 아니에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히나는 자신의 아이였다. 그 사실만은 죽어도 잊고 싶지 않았다.
“전 다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세이나의 앞까지 다가간 히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의 옷깃을 꽉 잡았다.
“제 존재가 알려지면…… 신녀님이 곤란해질 것 같아 아는 척하지 못했어요.”
끝까지 모른 척하려 했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연습했다.
“저를 아주 좋아해 주시니까, 그 사실 하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미워서 버림받은 게 아니란 것만 알면 된다. 옆에 있으면 된다고, 항상 곁에 있을 수 없더라도 한 번씩 보기만 한다면 괜찮았다.
성력을 잘 쓰게 되어 수업을 받지 않게 된다면 서운하겠지만, 그래도 대신녀인 세이나는 다행히 공식적인 행사로 일 년에 여러 번 제국을 방문한다. 그러니 그때마다 멀리서라도 보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죽는 건 안 돼요. 엄마라고 한번 불러보지도, 안겨보지도 못했는데…….”
세이나가 엄마라는 걸 안 순간, 안아보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포기했다.
세이나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를 아주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히나는 그 진심을 간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만인에게 존경받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엄마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신녀님도 언제, 어디서 위험해질지 모르는 사람이야.’
대신녀는 기도를 위해 건장한 남자에게도 무척 위험한 곳을 자주 다녔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신감 넘치는 세이나가 언제 위험에 빠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미워서 버린 게 아니잖아. 설사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나를 무척 예뻐하시잖아.’
세이나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세이나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세이나가 당황해 도망간다 하더라도 꼭.
‘더 말해야 하는데…….’
보고 싶었다고 폭 안겨보고 싶었고, 왜 한 번이라도 아는 척하지 않았냐고 원망도 쏟아내고 싶었다.
어째서 신녀의 몸으로 자신을 갖게 되었는지도, 자신을 버리게 된 사정도 전부 말해준다면 그 어떤 터무니없는 이유라도 모두 이해해 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돌던 수십 가지의 감정들이 그녀를 어지럽혔다.
“히나.”
따스한 품이 온몸을 감쌌다. 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세이나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히나, 여태 알아주지 못해서, 계속 너를 속여서 미안해.”
엄마인 세이나에게 듣는 첫마디는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듣는 말은…….
“그리고 내 목숨보다도 더, 세상에서 가장 널 사랑한단다.”
사랑한단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듣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어릴 때부터 고대하던 순간이니, 분명 하늘로 날아오를 듯 그저 기뻐야 하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라고…….”
지금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눈물까지 쏙 들어가 버렸다.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와 문장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히나는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침도 삼키고 숨도 크게 내쉬어보았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벌리고 다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려 했다.
“엄마라고 불러봐도…….”
어째서 이 중요한 순간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걸까?
입술 사이로는 얄궂게도 꺽꺽대는 소리만 나왔다. 세이나의 품이 너무, 지나치게 따뜻해서 몸이 녹아버렸다. 그래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이런 엄마지만, 내게 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니? 응?”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 대신 세이나가 간절한 목소리로 청했다. 엄마라고 불러달라고. 어서 그리해 달라고.
“엄마.”
마침내 엄마라는 소리가 나왔다. 히나는 떨리는 두 팔을 들어 세이나를 마주 안았다.
“엄마.”
“응.”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세이나를 엄마라고 불렀고, 그 부름에 세이나가 대답했다. 이 모든 사실이 꿈만 같았다.
히나는 다시 한 번 더 세이나를 불렀다. 평생 쓸 수 없을 거라고, 모두가 쉽게 부르지만 자신은 절대 부르지 못할 거라 여겼던 호칭으로.
“엄마.”
“그래, 히나.”
어딘가에 가족이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힘을 내어 살았다. 하지만 가족은 없었고, 그녀에게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더 이상 헛된 기대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겨우 알게 된 모친은 아주 높고 귀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고, 그다음에는 허탈했다. 평생 엄마라는 단어는 쓸 수 없을 것이며, 아는 척도 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나는…… 엄마의 딸인 거죠?”
만약 아는 척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면 꼭 묻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저를 딸로 생각했느냐고.
“너는 언제나 나의 딸이었어.”
그간의 모질고 힘겨웠던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히나는 너무 기뻐서 또다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내 딸이어서 매 순간 너무 행복했단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무슨 몹쓸 짓을 저질렀다고 부모에게 버림까지 받게 된 것이고, 배 아파 낳은 아이를 버릴 만큼 부모는 얼마나 아이를 미워하게 된 건지.
하늘 아래 부모 없이 태어나진 않았을 텐데, 평생을 부모조차 모르고 산 것이 한스럽기도 했다.
어째서 혼자만 부모가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이냐며,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 얼마나 많은 원망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어.’
하지만 히나는 세이나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며 생각했다.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세이나가 그녀를 마음속 깊이 딸로 생각했듯이, 그녀 또한 세이나를 엄마로 알고 있으면 되는 거였다. 서로만 알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나도…….”
부모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여태 했던 상상 이상으로 무척 행복했다.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행복하다가 죽어버리면 어쩌지 걱정이 될 만큼.
히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세이나에게 지금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내뱉었다.
“신녀님이 내 엄마라서 지금 너무 행복해요.”
카신은 두 사람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여전히 세이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로를 간절히 원했던 모녀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사랑해요, 엄마.”
히나가 그에게만 해야 하는 사랑 고백을 세이나에게도 했다. 하지만 카신은 히나가 세이나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싫다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하게, 아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군.’
히나를 향한 세이나의 무한한 사랑을 엿봐서 그런 걸까?
여전히 히나가 세이나가 모친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의아했지만, 그 과정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세이나는 히나에게 절대 해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히나의 행복에 아주 큰 일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히나와의 시간을 방해받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세이나에게 충분히 양보할 수 있었다. 세이나는 그럴 권리가 있었고, 카신은 그 권리를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세이나라서 다행일지도.’
소리 내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카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히나의 모친이 세이나라서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