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16화 (116/128)

116.

“대신녀가 버려졌을 겁니다.”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카신이 따로 찾아와 꺼낸 말이었다.

과도하게 성력을 사용한 대가로 히나가 정신을 잃었다. 루이스는 당연히 카신이 히나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대신녀? 지금 세이나를 말하는 건가?”

“예.”

하지만 카신은 그의 예측과는 달리 히나를 리베리아 후작가에 돌려보냈다.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니, 당분간은 쉬게 두고 싶다며.

“폐하께서 버려진 대신녀를 거둬주시지요.”

“세이나가 버려지다니, 어째서 그리됐다는 말인가?”

카신이 세이나를 신경 쓰는 것보다도, 대신전에서 세이나를 버렸다는 말이 더 믿어지지 않았다.

대신전에 있어 세이나는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루이스는 자신이 카신에 대한 해괴한 꿈을 꾸었는 줄 알았다.

“신녀의 신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버려질 수밖에.”

“그, 그게 가능한 일인가?”

세이나처럼 방대한 신력을 가진 신녀가 신력을 잃어버릴 수 있는 걸까. 그런 기록을 읽어본 적도 없었다.

“저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고작 인간의 신력으로 제 목숨을 살렸으니 말입니다.”

“자네의 목숨을?”

카신의 목숨이 위협당했다는 것 역시 믿어지지 않았다. 중간에 그가 정신을 잃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단순히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핑계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그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그리고 위독한 카신을 살린 것이 앙숙과도 같은 세이나라니…….

“제 입장에선 아주 싼 값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한 여자의 인생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니 제국에서 신녀를 거두어주셨으면 합니다.”

신력이 없어진 신녀라고는 하나, 그는 세이나를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카신이 말하지 않아도, 후에 이 일에 대해 알았다면 거두절미하고 세이나를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기회주의자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신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 부탁을 하는데,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순 없었다.

“대신전의 눈치도 봐야 하고, 신력도 없는 신녀를 거두어들일 명분까지 만들어야 하네. 세이나를 받아들이려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세이나는 전쟁에서 꽤 우수한 공을 세웠다. 그것만으로도 제국에서 거두어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대신전의 눈치가 보여 바로는 힘들겠지만, 몇 년 어디에 몸을 숨기게 한 후에 거두어도 되는 거였다.

“지금 당장은 나도 곤란하단 말일세. 자네가 그리도 바란다면 해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바쁜 와중에는 역시…….”

명분을 만드는 일은 루이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는 이런 일에 특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카신 앞에서 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카신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해졌지만, 그는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저도 지금은 꽤 바쁘니 원하는 바를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역시 자네와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아 기쁘군.”

“저는 그 점이 가장 달갑지 않습니다.”

그렇게 카신과의 뒷거래가 성립되었다. 루이스는 대신전의 압력에도 세이나를 제국에 속하도록 만들었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대신녀를 잃고 혼란에 휩싸인 대신전에는 섭섭하지 않을 만큼의 넘치는 보상을 해주었다. 대신녀를 잃고 위상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대신전에서는 그 자금을 거절하지 못했다.

덕분에 루이스는 눈치 보지 않고 세이나를 황궁 학교의 교수이자 히나의 개인 지도교사로 들일 수 있었다.

‘잃은 것은 많지만, 그래도 얻은 것이 더 크니 된 거겠지.’

대신전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보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거기다 카신과 거래를 하며 재미까지 보았다. 물론 카신은 아주 싫어했지만.

‘세이나와 카신의 대립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루이스는 카신의 별궁으로 향하는 세이나를 속으로 응원했다. 이상하게 그는 카신이 난감해하고, 불편해하는 것이 즐거웠다.

* * *

루이스의 예상대로 히나는 깨어난 지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종전과 동시에 긴장이 풀린 건지 깨고 나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카신의 품에서 공주님처럼 지내야 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편해졌다.

“그런데 파티가 열린다면서요? 우리가 가지 않아도 돼요?”

“내가 파티에 참석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하지만 저는 참석해야 한다고요.”

그녀는 후작의 딸이었다. 거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들이 별궁으로 찾아왔다. 히나는 오늘 아침에야 그간 카신이 별궁의 시녀를 시켜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네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 것이 아니냐.”

“전 깨어났는데…….”

“때로는 굳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될 때가 있단다. 이보다 더 좋은 핑계도 없으니, 조금 더 늦게 깨어난 걸로 하자꾸나.”

히나는 슬금슬금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 카신을 보고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요즘 그는 매번 그녀의 침대 안으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카신이 자연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가 잠들면 카신 님은 뭐 하고 계세요?”

마지막에 카신이 깊이 잠들었던 것을 봐서 그런가, 처음에는 그가 옆에서 잠을 청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히나는 그가 평소에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널 구경하지.”

“밤새 내내?”

“밤새 내내.”

“그건 조금 부끄러운데.”

“너도 내가 잠이 들었을 때, 옆에서 구경하지 않았더냐.”

“그건 잠이 들었다기보다 쓰러진 거였잖아요.”

“그럼 나도 네가 기진하여 지쳐 쓰러진 걸 보살핀 걸로 하면 되겠구나.”

매번 루이스에게 능구렁이 같다고 하더니. 카신도 그 못지않았다. 히나는 허탈하다기보다 웃음이 나왔다.

이런 얄궂은 면모를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 얄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혼자만 아는 것이 좋기도 했다. 히나는 카신의 품에 파고들며 오늘 종일 생각했던 것을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요즘 엄청 길게 잤는데, 조금은 죄송했어요. 제가 깨는 걸 너무 기다리실까 봐.”

카신이 긴 잠에 빠졌을 때, 깨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지쳐서 잠이 든 것뿐이지만, 그래도 카신을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했다.

“계속 절 보면서 기다리셨단 걸 빨리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깼을 텐데.”

“네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도 꽤 즐겁단다. 그러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히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가끔은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하기도 한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신 님.”

뭐든 다 받아줄 것 같은 얼굴로 카신이 눈을 마주쳤다. 돌아가게 된다면 참지 않겠다 했던 말과 달리, 그는 그녀가 지쳐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거의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전장에서 몇 번이고 입을 맞춰주었던 것도 돌아와서는 거의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다면, 절 안아주신다고 했죠?”

카신이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워진 히나는 애꿎은 그의 신비스러운 잿빛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아 손가락으로 꼬았다.

과거라면 그의 긴 머리카락에 몸이 닿는 것도 조심했을 것이다. 감히 손가락에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꼴 생각도 못 했으리라.

이렇게 된 것이 매번 신기했지만, 그래서 더 그를 제멋대로 만지고 다루게 됐다. 그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카신에게 몇 번이고 인지시키고, 또 스스로도 인지하고 싶었다.

“저를…….”

짓궂긴 했지만, 카신이 얼마나 그녀를 최우선으로 여기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여 절대 다가오지 않으리라.

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작은 입술을 벌렸다.

“안아주…….”

똑똑.

아주 정중한 노크 소리에 히나는 입을 쏙 다물었다. 하지만 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서 이어서 말하렴.”

“하지만 밖에 누가…….”

고개를 들어 카신을 보던 히나는 다시 입술을 조개처럼 꽉 다물었다. 카신의 눈동자가 꽤나 사나웠다. 그녀가 이어서 말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태세였다.

아주 큰 용기를 내어 말하던 거였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오늘은 계속 그녀를 배려해 준 그와 하나가 되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먹었다. 절대 물러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갑자기 들린 노크 소리로 애써 끌어 올린 용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더군다나 밖에 시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저히 이어 말할 수 없었다.

“누, 누가 찾아왔잖아요, 카신 님.”

카신이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다른 곳에 갈까?”

그가 일어나며 당장 공간이동 마법을 부릴 것처럼 굴었다. 히나는 다급히 카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파티 도중에 사람을 보낸 걸 텐데, 급한 거면 어떻게 해요.”

“전쟁도 끝난 마당에 급한 것이 있을 리가.”

카신은 끝까지 히나의 말을 듣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 했다. 시녀를 아주 멀리 내보내고, 이 방에 누구도 오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맑고 곧은 히나의 눈동자를 보니 그런 의욕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결국 밖을 향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세이나 신녀, 교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워낙 신녀로 호칭이 알려져서인지 시녀가 뒤늦게 실수한 것을 깨닫고 다급히 말을 바꾸었다.

카신은 세이나가 왔다는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히나의 두 눈이 급격하게 커지며 시선이 밖으로 향했다.

“들어오라 이르게.”

“예.”

히나를 위해 뭐든 하는, 심지어 가장 혐오하는 그를 살리기까지 했던 사람이 세이나였다. 하지만 카신은 그럼에도 세이나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든 하려고 하면 방해만 하니.’

세이나의 얘기를 듣는 순간, 히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카신은 오늘은 히나에게 아까 하려는 말을 듣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에도 이제는 무작정 미워할 수 없었다. 없앤다는 생각도 못 하겠다.

세이나는 카신에 의해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력이 모두 소진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들켰다. 그리고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신전에 끌려가 추궁을 들었다.

필요할 때는 귀하게 모시면서도 가치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대신전의 방식이었다. 타인에게는 호의를 베풀고 발 벗고 도우러 나서면서, 오랫동안 함께한 대신녀에게는 너무한 처사였다.

세이나가 대신전으로 그대로 끌려간다면 얼마나 힘들지 대충은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신은 전쟁 중에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그에겐 히나를 지키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의연하게 넘기다니, 그것 하나만은 칭찬해 줄만 하군.’

정신이 꽤나 피폐해졌을 거란 생각과 달리, 전쟁이 끝난 후에 마주한 세이나는 꽤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록 이제는 신녀가 아니지만, 그 숭고한 정신은 히나가 옆에서 본받았으면 했다. 그래서 카신은 루이스에게 따로 부탁하여 세이나를 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한 거였다.

“신녀님을 뵐 준비를 해야겠어요!”

히나가 다급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보며 카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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