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콰아앙!
히나는 눈앞이 순식간에 폐허가 되자 입을 작게 벌렸다. 방금 전까지 검은 마법사들이 달려오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눈앞에는 흙먼지만 날렸다.
“이런. 조절이 안 됐군.”
카신의 손에 모은 성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여태 응축시켰던 성력 중에 가장 작은 양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더 만들기도 전에 카신이 그만두게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성력으로도 검은 마법사들을 한꺼번에 없앨 수 있단 말인가!
히나는 카신의 마법에 또다시 감탄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다.
“제가 정말 지원군이 맞아요? 혼자서도 잘하실 것 같은데.”
아직 황궁 마법사들의 실력으로는 히나가 몇 번이고 집중해서 한계까지 성력을 모아야지만, 마법으로 증폭이 가능했다. 성력을 증폭시킨다고 해도 허용되는 범위는 무척 작았다.
하지만 사람을 그저 기분 좋게 만들 만큼의 성력만으로 카신은 눈앞을 완전히 쓸어버렸다. 그래, 쓸어버렸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았다.
“저걸 완벽하게 없애려면 네 성력과 내 마력을 섞은 마법진으로 마법을 시현해야 가능하단다.”
카신은 히나를 안은 채로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시험 삼아 했던 공격이 너무 잘 먹혔다. 칼피온이 브레스를 날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바닥에 끈적거리는 검은 액체로 흔적이 남아 있던 것과 달리 완벽하게 소멸했다.
“즉, 너와 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저걸 없앨 수 없다는 뜻이야.”
마법진을 그리는 데에 필요한 성력은 지극히 적었다. 하지만 효과는 최고였다. 카신은 다음 공격 대상자인 검은 것을 쳐다보았다.
“정말 제 힘이 필요하다고요?”
히나는 믿을 수 없었다. 카신의 마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기 때문에 도리어 그녀가 방해되지 않을까 염려했었다.
“그래. 저건 네가 없으면 나로는 역부족이란다.”
카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도움이 되는 거야!’
뭐든 혼자서도 잘하는 카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감을 얻은 히나는 허리에 둘러져 있는 카신의 팔을 꽉 잡았다.
“제가 필요하다면 온 힘을 다해 카신 님을 도울게요!”
카신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 검은 것과 가까워졌을 때는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카신의 온기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히나는 다시 한번 손안에 성력을 모았다. 카신이 그녀가 모은 성력을 받아다가 아까보다도 더 커다란, 하늘을 뒤덮을 만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히나는 홀린 듯이 커다란 마법진을 응시했다. 세상을 덮을 것 같은 마법진에서 빛이 나며 마력 덩어리가 뭉쳐지더니 검은 것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콰아아앙!
검은 것이 얇고 크게 넓어지며 카신의 마법을 삼키려 들었다. 하지만 옆으로 퍼진 검은 것들은 재가 된 것처럼 바스라지며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꺄악!”
히나는 검은 것이 커다랗게 솟으며 저를 덮치려 하자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다행히 카신이 그녀를 안은 채로 유연하게 피했지만, 검은 것은 그들을 추격해 하늘 높이까지 계속 쫓아왔다.
“열이 바짝 오른 모양이군.”
카신은 의외로 의연했다. 코반드가 그를 얼마나 증오했는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에서야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드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의지가 너무 분산되어 있어 그러지 못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위기의식을 느낀 검은 것이 어떻게든 그를 잡으려 아주 집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신은 히나를 안은 손에 더 힘을 꽉 준 채 빠르게 피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계속해서 어중간한 공격을 한다면 더 독이 오른 검은 것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 되도록 한 번에 끝내야 했다.
“히나, 성력을 얼마나 모을 수 있지?”
그간 얼마나 다른 생명체를 삼켜 힘을 흡수한 건지,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꽤나 큰 공격이었는데도 검은 것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지 않았다.
더디지만 없어진 부분이 조금씩 재생되고 있었다. 재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크게 한 방을 날려야 했다.
“조금 더 많이 필요할 것 같다만.”
히나는 무리하고 있을 것이리라.
이미 전부터 성력을 계속 쓰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히나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신은 되도록 히나에게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 번에 가고 싶은데, 최대한 많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카신은 히나를 믿기로 했다. 지켜준다는 여자의 성의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거기다 그녀는 아주 믿음직한 그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얼마나 많이요?”
카신은 검은 것의 크기를 가늠했다. 면적이 워낙 넓게 퍼져 있으니, 마법진의 크기를 최대한 늘려야 했다. 공격 마법의 위력과 상관없이 마법진에 성력의 힘을 모두 담아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양이 필요했다.
“방금 준 것에 열 배면 될 것도 같다만.”
사실 그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했지만, 성력이 담긴 공격을 받으면 검은 것은 재생이 더뎌진다. 그러니 나머지는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다.
“또 무리를 하시려고요?”
카신은 검은 것에서 시선을 돌려 히나를 보았다. 좁은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저게 저렇게 멀쩡한데 열 배로 되겠어요?”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지켜줄게요, 카신 님.”
히나가 두 손으로 카신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두 손에 있는 성력이 점점 더 커져 갔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될 만큼, 성력이 강한 빛을 뽐내며 그의 손 위에 뭉쳐졌다. 이러다가 성력이 폭주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저, 더 힘낼 수 있어요.”
그만두게 하려는 순간, 히나가 작게 속삭였다.
“저 이상한 것이 카신 님을 계속 노리게 두고 싶지 않아요.”
“저게 날 노리고 있다는 걸 용케 알았구나.”
“눈은 없지만, 계속 카신 님을 보고 있잖아요?”
히나의 눈에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 걸까?
문뜩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다른 걸 신경 쓸 때였다. 카신은 손안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성력이 넘치는 걸 보며 하, 하고 웃었다. 자신의 약혼녀는 때로 너무 걷잡을 수 없이 너무 강해져서 그가 따라가기 벅차게 만들었다.
“네가 전쟁을 끝낸 거야, 히나.”
카신은 히나의 성력을 바탕으로 커다란 마을 하나는 덮을 만큼 아주 광범위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가 어떻게든 그를 잡기 위해 치솟아 오르는 검은 것을 향했다.
“자고 일어나면 너는 영웅이 되어 있을 거란다.”
모든 힘을 소진한 히나의 몸이 힘없이 툭, 늘어졌다. 카신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꽉 붙잡고, 다른 손을 높이 들어 마법진에 그려진 마법을 시현했다.
곧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그에 반해 기진해 쓰러진 히나의 얼굴은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
전쟁은 끝났다. 승전보를 들고 당당하게 제국으로 돌아온 제국군은 술을 마시며 자신의 영웅담을 떠들었다.
제국에 있어 아주 오랜만의 전쟁이기도 했고, 적군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졸병이라고 해도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이 깨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군.”
루이스는 이번 전쟁의 공신들을 앞에 두며 말을 꺼냈다.
전쟁이 종결됨을 알리는 파티였다. 하지만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히나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리베리아 후작, 그대의 수양딸은 어떤가?”
“송구스럽게도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하옵니다.”
리베리아 후작은 마치 전해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수양딸의 상태를 직접 확인한 게 아닌가?”
“그것이…… 대마법사님께서 돌아오자마자 히나를 데리고 별궁으로 가셨습니다.”
“카신이 돌아왔다고?”
처리할 일이 있다며 카신은 히나를 두고 바로 사라졌다. 썩어버린 땅이 번지지 않도록 처리해야 된다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예. 다짜고짜 들어오더니 데리고 갔습니다. 걱정이 되어 사람을 계속 보냈지만, 깨어나면 알리겠다는 말만 하고 돌려보내서…….”
정말 깨지 못한 걸까?
루이스는 속으로 의문을 삼키고 술잔을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대마법사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깨지 못한다니, 대마법사도 이제는 한물갔군 그래.”
드래곤도 개입하고, 이상한 마법사, 거기다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까지.
절대 과장하는 일이 없는, 오히려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델리아의 설명을 모두 들었다. 그 과정에서 루이스는 히나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설마 그때 살려둔 첩자가 그런 힘을 낼 줄은.’
만약 히나를 모반죄로 풀토 공작과 함께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눌하기 짝이 없던 히나가 생각나자 루이스는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과거의 일을 떠나서 아무튼 이번에 크게 신세를 졌다. 몇 번이고 칭찬을 해도 부족했다.
“히나라면 곧 깨어날 것입니다. 제 딸아이의 건강으로 폐하를 걱정시켜 드려 송구하옵니다.”
“괜찮다면 그걸로 됐네.”
처음에 히나를 집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 했던 것과 달리, 히나에 대해 말하는 리베리아 후작의 입가에도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속으로 아주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참 신기한 아이였다. 어눌하고 연약했으며, 또 답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계속 시선이 가고, 또 생각났다. 보호해 주고 싶었으며, 잘했다고 칭찬도 듬뿍 해주고 싶었다.
“폐하, 이 자리에서 꺼내기 외람되오나 제가 별궁으로 직접 확인하러 가도 되겠습니까?”
차분하고 깔끔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그대가 직접 말인가?”
큰 외상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깨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카신은 파티 같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히나를 독차지하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였다.
“예. 히나는 제 유일한 애제자입니다. 그러니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누구보다도 믿을 만했다. 적어도 앞에 있는 사람은 카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기다 남들은 카신이 무서워서 절대 하지 못할 말도 서슴없이 하리라.
“카신이 들여보내지 않을 텐데?”
히나가 깨어났다는 것을 앞에 있는 세이나도 모르진 않으리라. 루이스는 히나와의 시간을 굳이 방해하러 가려는 세이나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친해졌나 싶었지만, 여전히 앙숙인 모양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마법사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세이나가 믿음직스러웠다. 세이나라면 사람을 아무리 보내도 절대 만날 수 없는 카신을 보는 것은 물론, 어쩌면 한 방 먹이고 올지도 모른다.
“그럼 가는 길에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을 깨워 파티 마지막 날이라도 얼굴을 비추라고 꼭 좀 전해주게.”
“예, 폐하.”
루이스는 뒤로 공손히 물러나는 세이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전에 카신과 세이나가 얼마나 서로 으르렁거렸는지를 목격해서 그런지, 여전히 둘의 조화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카신이 제게 세이나를 부탁한 것이 꿈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하긴, 이번 전쟁의 모든 것이 믿을 수 없는 일들뿐이었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루이스는 카신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돌아가는 세이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