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히나, 오늘은 신혼 초야란다. 알고는 있는 거겠지?”
오늘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참석한 사람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제국의 하나뿐인 대마법사와 성녀의 결혼식이니, 성대하게 올리라는 주변의 참견이 아주 잠깐 있었다.
하지만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카신은 전쟁 후 바쁘다는 핑계로 간단하게 결혼식을 끝냈다. 리베리아 후작가가 뒤숭숭하다는 이유까지 덧붙이니, 아무도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겠지?”
결혼을 하면 히나를 자유롭게 안아도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여태까지 버텨왔다. 꿈에 그리던 날이라, 히나가 결혼식 도중 세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도 넓은 마음으로 모른 척해 주었다. 못마땅했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했다. 카신은 끝까지 도움이 되지 않는 루이스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카신 님 먼저 주무세요.”
내일은 세인트에서 상급 졸업반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승급 시험이 있었다. 공부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는 그가 잠을 안 잔다는 것을 까먹은 게 분명했다.
그래도 이건 그나마 그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그의 물음에 대꾸를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본래 초야는 거부할 수 없는 건데…….”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듣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언제부턴가 히나는 공부에 집중하면 옆에 그가 있어도 눈치채지 못했다.
카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한숨 소리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책만 보는 히나를 보자 심술이 올라왔다.
“히나.”
히나가 보고 있던 두꺼운 책이 탁, 하고 덮였다.
갑자기 책이 덮어진 것에 놀란 건지 히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곧 카신의 소행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신혼 초야야.”
아마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별궁에 오고 히나와 처음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카신은 오늘 같은 날, 더 단호하게 구는 히나를 너무하다는 얼굴로 응시했다.
“하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던 히나는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이미 초야를 보냈는데…….”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사실 히나도 양심에 찔리던 차였다.
하필이면 루이스는 시험 전날로 결혼식 날짜를 정해주었다. 그에 카신이 따지러 갔지만, 그렇지 않으면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고민하더니 꼬리를 내리고 돌아왔다.
“그래서, 초야를 생략하겠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카신의 눈썹이 삐뚤어지는 걸 확인한 히나는 도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학교도 가야 한다고요.”
“일찍 학교에 가는 거라면 내가 데려다주면 된다. 당분간 내가 마법으로 아침마다 데려다준다고 했을 테니, 기숙사에 살 때보다 더 가까운 거나 다름없을 텐데?”
교수들 저택 중 하나를 신혼집으로 정비할 때까지, 둘은 당분간 카신의 별궁에서 지내기로 했다. 다소 멀지만, 어차피 카신의 마법으로는 한순간이었다.
본래 세인트의 학생들은 기숙사에 살아야 했다. 평일에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세인트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럴 거면 아예 세인트를 다니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정비 전까지 기숙사에서 따로 별거를 하란 거냐며 카신이 광분하자 루이스가 힘들게 허락을 해주었다. 결혼식까지 얼마나 다사다난했는지 모른다.
“……처음 정해놓았던 기간 안에 졸업을 하라는 조건에서 세인트를 다니게 해주신 거잖아요. 내일 시험에서 떨어지면 정말 큰일이라고요.”
카신은 그 조건을 건 것에 후회했다. 히나가 그 조건을 내세워 초야를 피하려고 들 줄은 몰랐다.
“실기 시험에서 떨어질 일은 없을 텐데?”
유일무이한 힘인 성력을 채점할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루이스는 히나가 이번 축복 기도를 무사히 잘 끝내는 것으로 시험을 대체시켰다.
제국 최초의 성녀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환호를 내지를 것이다. 히나가 성력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해도, 긍정적인 믿음으로 축복 기도가 성공리에 마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거기다 세인트의 필기시험은 그리 까다롭지 않지.”
세인트에서는 까다로운 실기 시험으로 워낙 좌절하는 학생들이 많다 보니, 필기시험은 되도록 누구나 합격할 수 있게끔 쉽게 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들에겐 무척 어려운 것이었지만, 영재가 많은 세인트에서 필기로 인해 떨어지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저는 남들보다 늦게 들어왔으니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요.”
“히나, 네 실력이면 내일 있을 필기시험은 무조건 합격할 거야.”
히나는 그간 루터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해 왔다. 무지했던 처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교수들도 많이 변한 히나를 잇따라 칭찬했다. 히나의 실력이라면 무조건 합격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합격점만 넘으면 되는 일이었다. 합격만 한다면 점수를 굳이 높게 받지 않아도 된다.
“단순히 합격만으로는 안 돼요. 저는 실기 시험을 안 치니까, 필기라도 잘해야 되지 않겠어요?”
도대체 히나는 왜 저리 열심히 사는 걸까. 적당히 하고 자신에게 더 열심히 해주면 좋을 텐데.
카신은 다시 뒤돌아 책을 펴려는 히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다 곧 픽 웃었다.
“꺅!”
히나가 책을 펴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리고 카신의 품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와 안겼다.
“카, 카신 님! 전 오늘 정말 공부해야 한다고요.”
“걱정 말거라. 네가 글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무조건 합격하도록 해주마.”
“하지만…… 아앗!”
카신은 두 손가락을 겹치며 딱,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방 안을 비추던 불이 모두 꺼졌다. 그리고 히나가 다른 말은 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입술부터 막았다.
결국 히나는 밤새 심술이 난 카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 * *
필기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세인트의 학생들은 처음으로 시험을 보는 하급반을 제외하고는 그리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시험에 익숙한 상급반은 더 심했다. 대부분 오늘 치를 필기시험이 아닌, 실기 시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거의가 필기시험에 관한 책을 아예 펴지도 않았다.
“히나, 왔어? 하필 오늘이 시험이라 교수님께서 섭섭해하셨겠다. 결혼하고 하루 이틀 정도는 너와 마음 편히 함께 보내고 싶으셨을 텐데. 설마 정말 만점 받겠다고 어제 교수님을 방치한 건 아니지?”
루터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아는 척을 했다. 이번 필기시험에 만점을 받을 기세로 공부한다더니, 히나는 정말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보다 넌 오늘만 지나면 상급 졸업반 확정이겠네. 아니, 뭐 필기시험에 떨어질 일은 없으니 벌써 정해진 건가? 아아, 나는 실기를 어떻게 치를…….”
히나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던 루터는 이상한 낌새에 말을 멈추었다. 책장을 넘기던 히나가 행동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히나?”
히나를 부르던 루터는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히나에게서 스산한 기운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밤이라도 샌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그녀는 무척 이상했다. 긴장할 거 하나 없는데, 이상하게 히나의 시선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히나를 자세히 관찰하던 루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 히나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 이상해.’
곧게 뻗은 허리, 반듯한 자세로 눈앞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영락없이 히나였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루터는 히나가 공부하는 것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었다. 항상 책이 뚫어질 듯 집중하는 히나를 보며 그도 몇 번이고 혀를 찼었다.
하지만 눈앞의 있는 히나는 평소처럼 책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시험에 합격할 것을 다 알고 있다지만, 너무 여유로웠다. 자세는 반듯했지만, 침대에 뒹굴며 나태하게 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보는 것처럼…….
“설마……!”
“설마, 뭐요?”
갑자기 홱 돌아본 히나가 루터의 말을 끊으며 상큼하게 웃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말하면 죽여 버린다.
마치 그렇게 협박하는 것 같았다. 루터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하하, 하고 소리까지 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야.”
루터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책상에 고개를 박다시피 숙였다. 히나로 분한 카신은 잠시 그런 루터를 보다가 다시 책에 집중했다.
‘저놈은 어떻게 알아본 거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염려가 됐던 세이나는 시험 감독이 아니니, 절대 들킬 일이 없다고 자부했다.
‘이상한 곳에서 쓸데없이 예리하군.’
카신은 옆에 있는 루터가 신경 쓰여서 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소꿉장난에 불과한 시험이야. 굳이 책을 볼 필요는 없지.’
옆에서 힐끔거리는 루터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이 일을 고자질할 만큼 루터는 멍청하지 않으니까.
거기다 이번 시험은 상급반이라면 누구나 통과하는 형식적인 시험이지 않는가. 그러니 의심받을 일도 없다.
‘어서 돌아가고 싶군.’
어제 히나를 너무 몰아세웠다. 이게 다 히나 때문이었다. 히나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 또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예뻐서 그런 거였다.
동이 틀 때까지 괴롭혔던 것 같다. 푹 잘 수 있도록 마법까지 걸어놓았으니, 아마 지금쯤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만점? 그래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건가?’
실기를 치지 않고 졸업반으로 올라가는 것이 다른 학우들에게 그렇게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굳이 필기에서 만점을 받지 않아도 제국의 성녀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텐데.
‘만점 정도는 뭐.’
함께 지내온 시간이 있으니 히나가 만점을 받는다고 해도, 조금 놀라기만 할 뿐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히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여기 있는 상급반 학우들도, 교수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한참을 하자, 시험 감독을 맡은 교수가 들어왔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카신은 간단하면서도 까다로운 시험 문제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의 마법학 수준이 이렇게 떨어졌던가.’
제국의 마법 수준과 대마법사의 마법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카신의 눈에는 소꿉장난을 어떻게 할 것인가,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플라텐타 마법식? 플라텐타 마법을 가르쳐 준 지 수백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이 수식을 그대로 쓴다고? 플라텐타 마법식을 변형해 봤자 얼마나 좋아진다고……. 조금만 더 연구했다면 다른 방법을 터득했을 텐데, 제국의 마법사들은 아주 태평하군그래.’
카신은 제국의 마법 지식으로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지식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퇴보된 지식들 사이에서 답을 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이건 객관식인데도 답도 없군. 도대체 문제를 어떻게 풀라는 말이지?’
어떤 이론을 접목시켜야 페트논 마법이 성립될까, 하는 지극히 추론적인 문제였다.
네 가지 답안 중에 카신은 두 답안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둘 다 답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마 제국에서도 둘 다 틀린 것이었다고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제국에서는 둘 중 하나만 아니라고 밝혀낸 모양이었다. 카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분명 아카넨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먼저 발견했어. 그러니 내가 알려준 이론을 바탕으로 커온 제국도 그랬을 확률이 높아.’
제국이 생기기도 한참 전,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에 연구했던 것이었다. 그런 걸 따지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