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27화 (127/128)

127.

카신은 옆에서 잔뜩 긴장한 채 시험을 치고 있는 루터를 힐끗 보았다. 카신의 정체를 깨닫고 잠시 충격을 받았던 루터는 그럼에도 답을 술술 적어내고 있었다.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책을 한 번만이라도 쭉 읽었다면 이렇게 고민되지 않았을 텐데.

루터 때문이라기보다 자만에 빠져, 또 귀찮아서 보지 않은 이유가 더 컸다. 하지만 카신은 전적으로 정체를 알아챈 루터가 신경 쓰여 책을 다 읽지 못한 것이라며 잘못을 돌렸다.

‘차라리 커닝을 할까?’

카신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고작 십여 년 산 애송이의 답안지를 베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이 내가 가르친 마법을 기본으로 두고 있어. 고득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하지만 시험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카신은 제국이 건립될 때 외에는 제국의 마법 지식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제국의 마법사들이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며 붙인 마법학 명칭과 오래전에 그가 지었던 명칭까지 비교해 가며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오라버니의 시험지를 한번 봐도 될까요?”

시험이 끝나자마자 카신은 옆에 앉은 루터에게 최대한 상냥한 척하며 물었다.

시험 시간이 거의 끝난 것도 몰랐다. 그만큼 카신은 자신이 모르는 명칭들, 거기다 아직 성립되지 않은 잘못된 지식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수석이라고 했지. 필기에선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만점이라지?’

불안했다. 그래서 그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루터에게 시험지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 여기…….”

루터가 채 내밀기도 전에 카신은 시험지를 낚아채서 가져왔다. 그리고 그가 내린 답을 쭉 훑어보았다.

‘어째서? 난 아카넨 이론부터 오류를 먼저 발견했는데!’

헷갈렸던, 정확히는 잘못된 이론 지식을 바탕으로 나온 문제는 거의 다 틀렸다.

카신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 찍기 실력이 무척 형편없다는 걸. 그는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저, 저기 표, 표정이…….”

히나가 지었다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살벌했다. 루터는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카신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카신이 그를 보며 싱긋, 예쁘게 웃었다.

‘왜 이렇게 섬뜩한 거지?’

상대가 카신인 것을 알아서 그런 걸까? 분명 카신은 히나의 모습으로, 히나처럼 웃고 있는데도 소름이 돋았다.

“히나, 시험 잘 쳤어? 만점을 목표로 한다고 했잖아.”

카터가 히나와 루터 사이에 끼어들며 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카신의 어깨에 카터의 팔이 둘러진 걸 보고 루터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결혼까지 한 처자에게 스킨십이 무척 짙군. 이름이 카터, 라고 했지.’

카신은 카터의 이름을 되뇌었다. 다음 수업 때,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루터랑 답 맞춰보는 거야? 너희들 답이 틀리면 수석은 한 명이 되는 거겠네.”

카터가 히나의 책상 위에 있는 시험지를 쑥 빼갔다. 카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하마터면 마법을 쓰려다가 겨우 멈추었다.

“어? 히나, 이 문제를 틀린 거야? 어째서?”

“내놔!”

카신은 시험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카터의 손목을 툭 쳐서 힘을 빼게 한 다음, 순식간에 시험지를 가져왔다. 그리고 아차 하며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전무한 히나의 모습을 하고서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다 운동신경은 다소 떨어지는 몸으로 카터의 손목까지 내리쳤다.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던 카신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갈 테니, 두 분은 계속 담소를 나누세요. 그럼 먼저 갈게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가는 히나의 뒷모습을 보며 카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히, 히나가 축복 기도를 앞두고 요즘 좀 예민해!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카터.”

“예민한 정도가 아닌데?”

“겨, 결혼식도 있었잖아! 신혼인데 시험을 치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렇다고 해도…….”

“그보다 실기 시험 준비는 잘돼가?”

그날, 루터는 머리를 긁적이며 히나가 나간 방향을 계속 보고 있는 카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야 했다.

* * *

‘역시 답안지를 바꾸는 게 좋을까?’

카신은 손에 들린 두 시험지를 비교해 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는 시험지 때문에 그렇게나 기다렸던 히나가 있는 별궁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루터의 시험지까지 가져와 버렸다. 하지만 그는 손에 루터의 시험지가 있다는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 문제가 뭘까.’

카터가 분명 이 문제를 틀린 거냐고 물었었다. 수십 가지의 문제 중, 틀린 걸 봤다는 뜻이었다.

세인트의 교수들이 답안지를 철통같은 보안으로 지킨다고 해봤자, 카신에겐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었다. 답안지를 고치는 건 큰일이 아니었다.

만약 답안지를 고친다고 해도 카터가 말한 틀린 문제를 제외하고 고쳐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이상함을 느끼리라.

“그래도 합격이긴 한데.”

카신은 두 시험지를 펄럭이며 다시 비교했다. 루터가 만점을 맞았다고 가정했을 때, 그는 합격점인 70점을 겨우 넘겼다. 그것도 71점이라는 충격적인 점수로.

세인트에서는 필기시험에서 학생들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합격선을 낮추긴 했지만, 대부분 80점이 넘는 점수로 합격을 했다. 히나가 이 점수를 보면 크게 좌절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교수들의 답안지를 훔쳐 미리 외워갔어야 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아침에 잠든 히나를 계속 구경하느라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이렇게 조잡한 문제가 나올 줄 알았다면 칼피온을 보낼 걸 그랬어.”

어딘가에 숨어 있는 칼피온을 찾아 보냈다면 적어도 만점은 아니더라도 고득점은 받았을 것이다. 칼피온은 드래곤 중에서도 드물게 유희를 미친 듯이 하고 다녔으니.

하지만 칼피온이 히나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짜증이 나는 판이었다. 그런데 히나의 모습으로 변장한다고 다니는 걸 보라니,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카터의 기억을 바꿀까도 싶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컸다. 이 문제도 틀렸냐는 말을 다른 학우들도 듣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합격점이잖아? 괜찮을 거야. 잘 설득해 보지.”

잠깐 걱정했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를 쉬게 하고 싶어 저지른 짓이었다. 카신은 별궁으로 돌아가면서 조금 토라질 테지만, 그래도 히나가 그의 배려에 수고했다며 금방 화를 풀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번 시험을 어떻게 준비했는데……. 카신 님, 너무해요!”

하지만 카신은 그날 71점이라는 충격적인 점수를 말하자마자 처음으로 엉엉 울며 서러움을 폭발시키는 히나에게 쩔쩔매야 했다. 그리고 그의 간곡한 설득에도 절대 굴하지 않은 히나가 세인트의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신혼 둘째 날, 카신은 결국 홀로 쓸쓸한 밤을 보내야 했다.

* * *

루터는 필기시험에서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쪽지시험까지 웬만해선 만점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험에서 한 가지 헷갈렸던 게 있었다. 너무 오래전에 공부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역시 틀린 거겠지?”

안타깝게도 카신이 시험지를 가져가는 바람에 정확하진 않았다. 하지만 답을 맞춰보던 친구들의 시험지로 제가 냈던 답을 기억해 내며 확인한 루터는, 한 문제 틀렸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보다 히나라면 무조건 합격인데 왜 카신 님을 보낸 거지?”

몇 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신이 시험을 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름대로 이해는 되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히나와 있으면서 카신과 얘기하게 되는 일이 한 번씩 있었다. 그때마다 루터는 현재의 이론 중, 잘못된 사실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마법식은 쓰이지 않는다고? 제국의 고지식한 서적들이 그리 말하더냐? 웃기는구나. 한번 익혀놓으면 어디든 접목해서 쓰이는 마법식을 효율성이 없다고 하다니. 접목할 방법을 모르는 것이면서 안 된다고 단정 짓다니, 이토록 어리석을 수가.

실제로 수업 시간에도 가끔 있었다. 카신이 쓰는 마법식은 변형되어 독특하거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 것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이론에 누구보다도 강한 루터가 질문을 많이 던졌다.

“제국의 이론이 틀리다는 건 아니다. 당장은 익히기 쉽고 접목이 간단한 마법식을 추구하는 것도 맞지. 하지만 그건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겠다는 뜻이야.”

카신은 마법 관련 제국 서적 그 어디에도 쓰이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루터는 현재 마법을 개발하는 학자들도 이 방법을 모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세인트의 상급반이나 됐는데, 설마 지금 여기서 발전 없는 마법사로 남고 싶은 건 아니겠지? 내가 알려준 마법식을 순식간에 시현할 수 있게 되면 다른 마법과 어떻게 접목시키는지 알려주마.”

결국 제국에서는 거의 고대 유물처럼 오래된 서적에만 잠깐 언급되어 있었던 마법식을 익히게 했다. 그때 모두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카신이 알려준 마법식을 익히고, 또 다른 마법과 접목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알아낸 지금은 다르다. 카신의 말대로 그 수업을 들은 모두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주 큰 차이를 냈다.

“교수님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해야 될까. 가끔 알아듣기 힘든 말도 많이 하시니까.”

어떻게 보면 카신에게 이번 시험은 무척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뭐, 설마 불합격하진 않았겠지.”

다음 날, 히나가 필기시험에서 유일하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루터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뼛속까지 새겨야 했다.

* * *

“도대체 어째서 히나가 시험에 떨어진 거지? 말해보시게.”

히나의 불합격 소식을 들은 카신은 가장 먼저 담당 교수인 에단과 마법학 교수인 벤스를 찾아갔다. 두 교수는 다소 위협적으로 따지는 카신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교수의 자질이 의심되는군.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옳게 쓴 답안지를 틀렸다고 하다니.”

만약 히나가 이대로 불합격이 되어 다시 상급반에 머물게 된다면?

루터의 답이 백 퍼센트 옳다고 생각해서 안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당연히 루터가 내린 답으로는 71점이어서 합격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번 시험에서 2점짜리 문제를 하나 틀렸다. 그로 인해 그 또한 한 문제 틀려 69점이 되어버렸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히나가 시험에서 불합격이 된 책임은 전적으로 카신에게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친 시험을 문제 삼아 정해진 기간 내에 졸업을 하지 못하니 그만두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떻게든 히나를 합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졸업까지 이 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 하지만 교수님, 이번 시험의 답으로 채점을 했을 때, 리베리아 양은 불합격입니다.”

“어디가? 잘못된 점을 말해보게.”

카신은 히나의 시험지를 두 교수 앞에 펄럭였다. 그리고 하나하나 집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페트논은 여기에 적힌 항목의 모든 마법식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마법이다. 거기다 아카넨 이론은…….”

아무리 길게 따지고 들어도, 카신은 멍청한 두 교수에게 히나를 합격시켜 줄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결국 루이스를 찾아갔다.

“리베리아 백작이 필기시험에 떨어졌다지? 수업 태도며, 학업 성적이며 뭐든 떨어지는 것이 없었는데, 꽤나 의외였네.”

이 상황이 우습다는 듯이 루이스는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꼴도 보기 싫었다. 카신은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히나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건 제국의 학자들이 무지하여 답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네가 알고 있는 답은 현재의 지식으로 밝혀내지 못했으니, 지금 상황에서는 답이라고 할 수 없지. 백 년 후에 따지러 온다면 내가 받아주겠네.”

요즘 들어 계속 루이스에게 골탕을 먹고 있었다. 카신은 이를 갈면서도 차분히 자리를 지켰다. 억울하게도 그는 지금 약자였다.

“그렇게나 히나를 합격시키고 싶은가?”

사실 루이스는 이번 시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정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던 히나가 떨어져 실기 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그에게 가장 먼저 보고되었다.

히나의 실기 시험은 축복 기도로 대체하기로 했다. 이미 대대적으로 언제 하겠다고 공개가 된 축복 기도를 필기시험에 떨어졌다는 이유로 안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루이스는 히나를 가장 먼저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당연히 별궁에 있어야 할 히나가 세인트의 기숙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언가 있다고 의심을 했다.

‘설마 카신이 시험을 대신 쳤을 줄이야.’

뭐든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은근슬쩍 떠보자 히나가 술술 내뱉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손쉽게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 수 있었다.

“자네의 눈에는 답이 틀린 문제들이 많이 보이겠지. 그것들을 제국의 마법사단과 학자들이 있는 곳에서 전부 다 논리적으로 증명해서 밝혀낸다면, 히나에게 재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겠네.”

이미 히나에겐 재시험을 보는 것을 허락했다. 전쟁에서 다친 후유증과 축복 기도를 준비하느라 최근 심신이 고되었으니, 다시 한번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루이스는 운도 좋고, 기회를 잘 잡는 편이었다. 특히나 카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운까지 작용했다.

“멍청한 제국의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내 말을 바로 이해할 수나 있을 것 같습니까?”

카신은 기가 막혔다. 이번 문제의 오류는 그의 지식수준에선 간단한 거였다. 제아무리 엘리트라고 해도 카신의 눈엔 일반인에 불과한 이들에게는 절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신혼이기에 다른 곳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재시험은 무리겠구만.”

“하지 않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곧 마법사단과 학자들을 모아주십시오.”

대마법사가 가르친 마법이나 이론은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제국 건립 초창기 때 알려준 지식들에 불과했다. 그 외에는 카신의 위대한 업적만이 기록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제국엔 위대한 대마법사의 새로운 이론과 연구에 관한 책이 다시 한번 널리 퍼지게 되었다.

“카신, 나로 인해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으니, 사는 게 참으로 즐겁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다면 어린 황태자, 루이스와 그따위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신은 다시 한번 과거 루이스와 했던 약속에 이를 갈며 그 자리를 나왔다.

카신은 루이스와 히나가 재시험에 대해 따로 해결을 봤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는 어린 루이스를 별궁에 들였다는 것조차도 뼈저리게 후회했다. 역시 황제는 능구렁이라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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