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15권 : 3. 길드라스의 이상한 책자 (41/520)

     ▷길드라스의 이상한 책자

   한국 대학교의 총학생회에서는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학과별로 개최할 행사장 위치를 잡아 주고, 잔준비를 도와 준다. 문화제까지 동시에 개최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이벤트도 있었다. 무대 설치에, 가수 섭외까지 도맡아 하면서 활동적으로 움직였다.

"근데 진행자는 누구를 섭외하지?"

"유재돌 어때?"

   진행을 위해 태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MC 유재돌. 수다를 떨면 그칠 줄을 모른다. 착한 성품에 배려심도 많아서

  국민 MC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 봤는데, 무조건 도전을 찍느라 스케줄이 안 나온대요."

"그럼 강호은에게는 연락해 봤어? 작년에도 우리 학교 축제에서 진행을 해 줬잖아."

   레슬링 선수 출신 강호은!

   집채만 한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순박함으로, 때로는 카리스마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간다.

   큰형 같은 넉넉함과 힘과 열정이 있는 MC였다.

"그 사람은 3박 4일 여행을 가서요. 이번에 참석하지 못해서 아주 아쉽다던데요."

"이런... 그럼 누구를 섭외하지?"

   한국 대학교의 축제에는 연극과 뮤지컬, 연주회, 콘서트들이 함께 진행된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에게 활력과 대학 문화를 만끽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잔치였으니 

  소홀할 수 없었다.

   결국 딱히 적임자를 찾지 못한 메인 쇼의 진행자는 영원한 2인자, 거성 박민수에게 돌아가기로 정해졌다.

   정효린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흐르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맑고 서정적인 멜로디.

   직접 작곡해서 새 앨범에 넣기 위한 준비 중이었다.

"노래가 느낌이 참 좋은데... 가사는 어떻게 정할 거야? 유명한 작사가를 섭외해 볼까? 저번에

같이 작업했던 김태환 선생님이 같이하고 싶어 하시던데."

   연습실에서 매니저가 물었을 때, 정효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직접 쓸래요."

"그럴래? 효린 씨라면 작사에도 소질이 있으니까... 훌륭한 곡이 나올 거야."

   정효린은 정작 어떤 느낌의 작사를 할지 마음을 정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내가 부르고 싶은 곡을 작사할 거야.'

   노래가 쉽게 만들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새 앨범을 발매하고 무대를 가지려면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으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곡을 써 보려고 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정효린이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 오빠, 사흘 뒤부터 제 스케줄 비워 놓았죠?"

"효린 씨 부탁대로 처리는 해 놨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개인적인 사생활인데요."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던 정효린이라 매니저는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행선지를 묻지 않을 수는 없었

  다.

"어딜 가려고 하는데?"

"한국 대학교요. 제가 아는 사람이 그곳 학생이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가 보려고 해요."

『던전 크라마도의 최초 발견자가 되셨습니다!

  혜택:명성 230 증가.

       일주일간 경험치, 아이템 드랍률 2배.

       첫 번째 사냥에서 해당 몬스터에게 나올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물건 아이템이 떨어집니다.                           』

"아싸!"

"진짜 첫 발견이다. 이 올라가는 명성 좀 봐."

   던전에 들어온 파티원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것으로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한 거네."

"그래. 미공개 던전을 발견한 조는 아마 우리밖에 없을 거야."

   검사 벨라가 자신 있게 말했다.

   거의 안전한 사냥터들을 위주로 해 왔더니 이러한 모험이 즐겁기만 했다.

   다른 조들이라고 해도, 이번 과제에 맞춰서 던전을 처음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이드, 수고했어."

"학점 잘 받으면 밥 살게."

   나이드는 현실에서의 모습처럼, 칭찬을 받는 게 겸연쩍은 듯이 얼굴을 붉혔다.

"아니야.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헤겔도 격려를 한다면서 나이드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고생 많았다."

"아니야, 우리가 같이한 거잖아."

   새로운 던전 발견은 아이템이나 경험치를 얻기 위한 훌륭한 기회가 된다.

   헤겔은 검을 뽑았다.

"그럼 모두 전투준비!"

   대상은 던전의 안쪽에서 기어 다니는 흰 도마뱀을 닮은 모스터들이었다.

"쉴드 차지! 모조리 밀어붙인다앗!"

   헤겔이 왼손에 쿠드람의 방패를 들고 몬스터를 향해 돌격 했다.

   검사의 장점은 최상의 공격력.

   쌍검술, 대검술 등으로 공격을 극대화하여 어떤 근접 전투 직업보다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흔들려라. 뜨거워져라. 무너져라!"

"트리플 소드!"

"금속 강화, 화염의 축복!"

   원소술사 셀시아, 검사 벨라, 인챈터 르미도 전투가 벌어지니 자기들의 몫을 다했다.

   인챈터들은 물건에 특유의 힘을 영속적으로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사람에 적용하는 강화 마법의 효율은 성직

  자나 샤먼보다 못해도, 일시적으로 병장기의 힘은 몇 배나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방패 돌격을 당한 크라마노임들은 부상을 입고 여기저기 밀려나거나 뒤집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원소술사나 검사 들의 공격을 당하니 힘없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도둑 나이드가 은신술을 펼친 채로 크라마노임에게 접근했다.

"생물 정보 확인!"

   도둑이나 정찰자, 암살자, 모험가 들이 사용할 수 있는 직업 스킬.

   상대방의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도둑 나이드가 확인한 크라마노임들에 대한 정보는 파티원들에게 공유되었다.

띠링!

『몬스터 이름:어린 크라마노임

  레벨:234

  오래된 던전에서 서식하는 몬스터.

  매우 긴 세월 동안 던전 안에서만 지내 왔다.

  시력이 퇴화되어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음.

  땅의 울림이나 소리로 적들을 파악하며, 육식을 즐긴다.

  4개의 발을 이용해 신속하게 기어 다닐 수 있으며, 

          주둥이에서는 약한 마비 독을 토해 낸다.              』

   크라마노임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약점으로 목 부분이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치명적인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부위들!

   헤겔의 거센 공격과 벨라, 셀시아의 합공에 의해 크라마노임들이 무기력하게 회색빛으로 변했다.

   지하 1층의 몬스터들은 3시간 정도의 전투로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었다.

   인챈터 르미와 벨라의 레벨이 1개씩 오르고, 떨어진 아이템들도 상당했다.

   경험치 2배 덕분에 셀시아조차도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최고다."

"정말 좋은 던전이야. 우리 이번 과제. A는 문제없겠어."

   위드가 데일 왕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날이 저문 뒤였다.

"고목나무라... 이 근처인가?"

   짙은 갈색 흙으로 땅을 헤집은 흔적이 있는 장소에서 책자를 찾아냈다.

   길드라스의 이상한 이야기 책자.

   위드는 책을 읽어 보았다.

나 유쾌한 방랑자 길드라스는 어제 도르네 마을에서 새로운 처자를 사귀었다. 농사꾼의 딸인 그녀는

건강미가 넘치고... 아무튼 풍차의 밤은 무척이나 아늑했으며 분위기가 좋았다.

다음 날 도르네 마을을 나와서 어딘가로 걸었는데 나는 방향을 찾을 수 없었따.

나처럼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닌 여행자가 방향을 잃어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나무들이 수분이 빨린 채로 말라붙어 있고, 돌이켜 보니 붉은 땅을 지나온 것도 같다.

과거에는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졌던 걸까?

하지만 이 고목나무들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것 같다. 나 같은 여행자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하. 하. 하.

길을 잃고 해매던 와중에, 어딘가로 향하는 입구를 보았다.

나무들 사이에 꽤나 잘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지만 내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다.

굳이 그 안으로 들어가 보진 않았다.

난 마을부터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대체 왜 난 만날 마을은 찾지 못하면서 이런 위험한 곳들은 잘도 발견하는 것일까?

어서 빨리 사냥꾼의 숙소라도 찾아가고 싶다.

그곳에도 건강미가 넘치는 아가씨가 있으면 좋을 텐데......

   길드라스라는 여행자가 베르사 대륙을 떠돌았던 여행기의 일부였다.

   음유시인들이 좋아할 이런 이야기들은 베르사 대륙에 정말 많이 돌아다닌다. 심지어는 술집에서 1시간만 죽치

  고 있어도 서너 번은 들을 수 있다!

   나이드는 그런 정보들을 모아서 던전을 찾아낸 것이다.

   길드라스의 이상한 이야기 책자는 8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나며 소꿉친구와의 뜨거운 밤

농사꾼 딸과 보냈던 풍차 속 하룻밤

동쪽 해안가에서 인어와의 흥분되었던 밤

여행 마차 안에서의 짧았던 밤

번영했던 흔적이 있는 도시의 아래에서 신기루 같은 여인과의 밤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노예 수인족과의 짜릿한 밤

바바리안의 부락에서 체력의 한계를 느꼈던 밤

베르사 대륙의 모든 곳을 떠돌고 나서, 다시 소꿉친구와의 정겨운 밤

   각 장들은 기독성이 가장 높을 것 같은 제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표지의 밑부분에는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쓰여있다.

미성년자 구독 불가!

   헤겔과 나이드 들은 각자 배낭에서 빵과 과일을 꺼내어 식사를 했다.

"정말 맛없다."

"그래도 많이들 먹어. 체력을 아껴 놔야 하니까 말이지."

"이 던전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파티원들이 헤겔과 나이드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그들도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따.

"던전 안에 들어온 이상 끝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나도... 도둑으로서 꽤 여러 던전을 탐험해 본 편이기는 하지만 미리 예상은 불가능해. 미안."

   르미가 물었다.

"그럼 보통의 던전들은 지하 몇 층까지 있는 건데?"

"알 수 없어. 일반적으로는 지하 2층이나 3층. 이런 식으로 구분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거든.

심한 경우에는 지하 12층까지 있는 던전도 본 적이 있어."

"그렇게 깊은 던전이 있어?"

"지하 던전에서는 구분하기가 애매하거든. 계단을 통해서 정확하게 한 층씩 밑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갈수록 점차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던전의 경우에는 몬스터의 수준이 달라지거나

분위기가 달라졌을 때에 층을 구분하기도 해."

"그럼 던전 탐험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겠네?"

"가능은 하지."

   헤겔은 르미와 나이드의 대화를 듣다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몬스터들이라면 내가 죽을 일은 없을걸."

   헤겔은 스스로의 방어구에 대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세공 기술이 아니라면 만들 수 없는 물건으로, 수준 낮은 대장장이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방어구였다.

   공격에 치중하느라 약간 부족해지는 검사의 방어력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작품!

   제대로 만들어진 밴티스 갑옷 세트는 한 벌의 가격이 5만 골드를 넘어선다.

   무게는 무겁지만, 보통 갑옷의 방어력을 5배, 6배 초과한다. 어지간한 공격력으로는 죽지도 않는다는 뜻.

   웬만한 화살이나 검 들은 튕겨 내 버릴 정도의 방어력!

   검사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풀 플레이트 아머이다.

   헤겔이 착용한 갑옷은 마법 저항력까지 갖춘 상등급의 물건이었다. 세공이나 장식, 문양도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완벽에 가까운 최상품!

   내구력도 거의 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사들이 사용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물건이다.

   지하 2층에는 성년 크라마노임들이 출현했다.

   그런데 몸집만 조금 커졌을 뿐. 실제 공격력은 비슷했다.

   성장을 해도 발전이 없는 몬스터!

   다만 내뱉는 마비 독의 분량이 훨씬 많아져서, 성직자가 없는 파티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제기랄."

   헤겔이 역겨운 마비 침을 뒤집어썼다.

   누런 침을 맞으면서 싸우려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검사 벨라는 약해서, 성년 크라마노임에 의해 마비되면 금세 죽을 수밖에 없다.

   다른 동료들은 근접 전투 계열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헤겔이 나서서 몸빵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왜 이런 더러운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거야."

   헤겔의 갑옷과 방패가 침으로 뒤덮였다. 장비가 더러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역한 냄새까지 올라왔다.

   마법과 독 저항력이 뛰어난 액세서리들을 착용하고 있기에 여전히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 다른 이들

  이라면 전투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멀티플 샷!"

   트위터는 화살을 소나기처럼 쏘아 댔고, 다른 이들도 마나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도둑 나이드는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 크라마노임들을 유인하고, 뒤치기를 가했다. 도둑다운 재빠른 움직임으

  로 그가 시선을 끌어 주지 않았더라면 크라마노임들은 다른 파티원들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은 빠져나올 구석이 없이 크라마노임들에게 둘러싸였다.

"젠장. 이런 곳에서 선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헤겔이 다른 일행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사용하던 장검을 검집에 넣고 둔중한 메이스를 꺼내 쥐었다.

   일반적으로 메이스는 굉장히 강한 타격력을 가진 무기이다.

   검사들은 검을 전문적으로 익히지만, 동시에 창술과 둔기류의 무기 스킬도 별도로 습득한다. 기사들과의 싸움에

  서는 갑옷의 방어력이 너무 대단한 탓에, 끝을 뾰족하게 세운 창이나 둔기류의 무기가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파열의 메이스!

   현금 거래 시세 680만 원짜리 무기였다.

   옵션으로는 맹렬한 진동을 퍼트릴 수 있으며, 방패로 막아도 파괴력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힘으로 밀어 칠 수

  있다.

   물론 그만큼 짧고 무거워서 다루기는 어렵지만, 생명력이 질겨 잘 죽지 않는 몬스터를 상대로 할 때에는 최고

  의 방법이었다.

"차압!"

   무기를 바꾸어 들자 헤겔의 몸에서 강한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메이스 자체의 특성인지, 투지가 향상되고 몬

  스터들을 위축시켰다.

   헤겔은 크라마노임들의 움직임이 둔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스 웨이브!"

   헤겔이 메이스로 땅을 강하게 후려치자, 대지가 우르르 떨렸다.

   반경 7미터 안에 있는 크라마노임들의 몸이 충격파로 인해 회색빛으로 변했다.

   레벨 300이 넘는 검사가 무리해서 발휘한 광역 스킬, 그 타격력!

"섬광의 투혼!"

   포위망을 돌파한 헤겔은 양 떼를 도륙하는 것처럼 날뛰면서 크라마노임들을 사냥했다.

   다른 동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가장 많은 몬스터를 사냥한 주역이었다.

   헤겔은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젠장. 어스 웨이브의 스킬 숙련도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도 한 번에 절반 정도는 전투 불가로

만들어 놓았을 텐데......"

   부족한 스킬 숙련도로도 벨라나 르미 들을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레벨 300대의 검사는 정말 강하구나."

"만날 방송에서만 봤지 실제로는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말 그대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것같이

굉장하네."

   검사의 공격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지하 3층으로 향했다.

"하하. 늙은 크라마노임들이 나온다면 정말 좋은 던전이겠는데."

   헤겔이 자신 있게 앞장을 섰다.

   하지만 지하 3층에서부터는 그들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미로가 앞을 막았고, 함정들이 끊이

  지 않았다.

   독화살이 벽에서 쏘아지는 것쯤은 애교!

   땅을 밟으니 발이 푹 들어가고, 독을 가득 품은 뱀들이 습격했다. 도둑 나이드가 함정을 해체하고 뱀을 사냥했

  지만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다.

   그러한 전진도 잠시!

   쿠르르르릉!

   그들이 지나온 통로에서 큰 바윗덩어리가 굴러오는 것이었다.

   통로를 가득 메운 채, 빠져나갈 구석도 없이 굴러오는 바윗덩어리.

"뛰어!"

   후방에서 굴러오는 큰 돌덩어리를 본 일행은 기겁하여 죽을힘을 다해서 던전의 안쪽으로 달렸다.

"앞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바위에 깔려 죽는 것보단 낫지."

"통로가 좁아진다!"

   콰과과쾅!

   통로가 점점 좁아져서 큰 바위는 벽에 끼었다. 벽들을 상당히 파괴하면서 굴러온 바위였지만 마침내 멈춰 섰다.

"다행이다."

"이걸로 우리도 산 거야?"

   기쁨을 여유롭게 나눌 사이도 없었다. 도둑 나이드는 이런 경우에 더 큰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이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기, 얘들아."

"응?"

"나쁜 소식이 세 가지가 있는데... 아주 나쁜 소식과 덜 나쁜 소식이 있어. 그리고 한 가지는 

불행한 소식이 있거든."

   셀시아가 빙긋 웃었다.

   만날 반복되는 지겨운 사냥만 하다가 겪게 된 이런 던전 탐험이 그녀에게는 흥미진진했던 것이다.

"덜 나쁜 소식부터 말해 봐."

"응. 그건 우리가 돌아갈 길이 막혔다는 거야. 그리고 아주 나쁜 소식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함정이라니?"

"방금 내가 함정 탐색 스킬을 써 봤는데... 여기 전체가 함정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어서, 참고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함정 해체는 불가능해?"

"응. 여기 통로 전체가 함정으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 아마도 원래 여기는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 별도로 연결된 통로일 거야. 아무래도 바위가 굴러올 때에 방향을 잘못 선택한 것 같아."

"......"

   르미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러나 포기하기 전에 희망을 갖고 물었다.

"그럼 불행한 소식은 뭔데? 지금보다도 더 나쁜 경우는 없지 않아?"

"응. 지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위드 형이라는 거."

"......"

   낙담, 절망, 좌절, 실의에 빠진 파티원들!

   나이드의 늘어지는 듯한 말투에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다.'

   던전 탐험 과제는 그럭저럭 실패로 돌아갈 것 같았다.

   미발견 던전을 찾아낸 점수는 제법 높겠지만 중간에 전부 사망한다면 결국은 실패작이 될 테니까.

   과제도 과제지만 죽음으로써 잃어버리는 레벨이나 스킬 숙련도도 매우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때 헤겔이 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가만히 쉬었더니 소진되었던 체력이 회복되었던 것이다.

"모두 뭘 하는 거야. 여기서 가만 앉아 있다가 죽을 거야?"

"헤겔! 위험할지도 몰라."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잖아. 그럼 전진하는 거지. 그리고 크라마노임처럼 약한 몬스

터들이 나오는 던전인데... 위험이라고 해 봐야 별것은 없을걸."

   헤겔의 발언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이대로 서 있을 바에야 안으로 움직인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서서 죽진 않겠다.

   검사다운 행동이었지만, 불과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이었다.

"헤겔!"

"왜?"

   헤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파티원들은 헤겔의 허리와 어깨 등에 달라붙는 거미들을 볼 수 있었다. 벽과 바닥, 천장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

  온 주먹만 한 거미들이었다.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탓에 당사자만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저기, 너 지금 위험한데."

"뭔데."

"네 갑옷에......"

"뭐라도 있어?"

   헤겔이 뒤를 돌아보려고 할 때에는 이미 거미들이 거미줄을 뿜어내어 몸 전체를 꽁꽁 둘러맨 후였다.

   무기를 휘두르지도 못하게 몸을 꽉 틀어쥐었다.

   이른바 밀봉!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칠 때마다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조여들었다.

"크에엑!"

   헤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좋은 갑옷을 입고 있었던 탓에 생명력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지만, 암만 힘

  을 써봐도 거미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파티원들도 천장과 벽, 바닥 등에서 내려온 거미줄로 인하여 모두 꽁꽁 묶였다.

   통로 전체에 거미들이 가득해서 피할 공간도 없었다.

   레인저 트위터의 화살은 거미들의 접근을 방해하는 데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도둑 나이드의 단검으로도

  거미줄 몇 가닥을 끊어 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클클클."

   통로의 벽에서 대형 거미를 닮은 마물이 나타났다.

   엘핀 퀸 스파이더.

   보스급의 마물은 파티원이 죽어 가는 것을 느긋하게 지켜 보고 있었다.

"에효. 이대로 죽는구나."

"그래도 재밌는 탐험이었어."

   입만은 거미줄이 감싸고 있지 않아서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 정도가 위안이었다.

   위드는 말라붙은 나무들의 숲을 돌아다니며 던전의 입구를 찾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숲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흘렀다.

"입구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도둑이나 모험가라면 선행한 파티의 발자국만 보고도 쫓아갈 수 있다. 하지만 위드에게는 그런 추적 스킬이 없

  을 뿐만 아니라, 마른나무의 숲 중앙까지 빛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왔기 때문에 더욱 헤매고 있었다.

   후욱후욱.

   어디선가 생명체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자, 풀벌레들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적막과 살기가 흐르는 숲!

   쿵쿵거리면서 나무들 사이로 둔중한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침, 입, 자, 여, 죽, 으, 라!"

   그롤러!

   도끼를 든 몬스터들이 돌진해 왔다.

   수백의 무리. 그롤러 돌격대의 출현이었다.

   위드는 도망치는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경험치와 아이템들! 어서 와라!"

   오랜만의 사냥이라 적의 등장이 반가울 뿐이었다.

"콜 데스 나이트!"

   연기와 함께 데스 나이트 반 호크까지 등장시켰다.

"주인!"

   반 호크는 금방 위드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드워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과거에는 오크였던 적도 있으니 놀

  라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함께 사냥하면서 성장을 한 사이가 아닌 것.

"적이다. 싸워라."

"알겠다. 주인!"

   반 호크가 돌아서서 대검을 휘둘렀따. 땅이 뒤집히고, 그롤러들이 밀려서 쓰러진다.

   반 호크가 일단의 야만스러운 그롤러들과 싸우고 있을 때에, 나머지는 우회해서 위드를 목표로 삼았다.

"달빛 조각 검술."

   말라붙은 나무들의 숲에서, 위드는 빛줄기를 뿌려 대면서 전방을 향해 달렸다.

   나무들을 빠른 속도로 스치듯이 지나쳤다.

   말라붙은 나무들이 장애물이 되어, 뒤쫓아 오는 그롤러들이 공격할 수 있는 숫자와 시기에는 제약이 있었다.

"침입자!"

"산 채로 씹어 먹어 주겠다."

   그롤러 2마리가 교차하듯이 뛰어올랐다.

   박력이 넘치는 도끼질!

   막중한 체중이 실린 공격을 그대로 받아치는 것은 무모한 짓.

"칠성보!"

   위드의 몸이 잔상을 일으키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관성의 법칙을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는 스킬!

   전력 질주를 하면서도 전혀 다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스킬!

   처음 한 걸음 떼었을 때에는 몸 전체가 뒤로 향했다. 다음 한 걸음에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롤러의 공격권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 적을 통째로 가르듯이 검을 휘두른다.

   전투를 해 본 게 꽤나 오랜만이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파바바밧!

   교차하는 그롤러들을 뒤쫓으면서 난무하는 칼질!

   둘의 그롤러들을 사냥했을 때에는 반 호크가 이미 다섯이나 되는 적들을 처리한 후였다.

   반 호크는 제자리에 서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롤러들을 베어 버리고 있었다.

"칠성보!"

   위드는 거침없이 스킬을 시전했다.

   그롤러들의 빈틈을 공격하기 위한 빠른 스킬 사용. 잡템들을 줍는 순간에도 유용한 스킬이었다.

   마나와 체력이 비할 바 없이 늘어 있었으니 스킬 사용에 주저함이 없다.

   그때 르미로부터 귓속말이 전해져 왔다.

@위드 오빠.

@응, 무슨 일이야?

   정신없이 사냥을 하고, 잡템을 수거하는 와중에도 평온한 목소리!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통화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정신을 분산시켜서 사고 확률을 높인다는 이유에서다.

   로열 로드에서도 전투 중에 귓속말을 나누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알아서 자제를 하는 편.

   하지만 위드의 집중력은 가공할 지경이었다.

'경험치, 숙련도, 아이템!'

   세 가지를 향한 맹목적인 추종은 날벼락이 떨어진다고 하여도 흔들림이 없을 정도이다.

@여기 던전에 들어오셨어요?

@아니, 아직.

@오지 마세요. 우리 함정에 빠졌어요. 모두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거든요.

@......

@오빠도 괜히 오셔서 죽지 말고 마을에서 쉬고 계세요.

   척!

   위드가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른나무들의 숲을 살폈다.

   반 호크는 어느새 따라서 정지해 있었다.

'저 성질 더러운 주인이 갑자기 무슨 꼬라지를 부리려고......'

   거의 초보를 갓 벗어난 시절부터 함께해 왔던 동반자였기에 위드에 대해서 잘 알았다. 사냥을 하는 도중에는 

  일체의 망설임이나 흔들림이 없는 것을.

   그런 위드가 멈췄다는 사실이 반 호크에게는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의를 상실한 그롤러들 또한 두려운 눈으로 위드를 살폈다.

   반 호크가 폭발적인 공격력을 바탕으로 한다면 위드는 그와는 차원이 다르다. 도저히 뒤쫓을 수 없는 움직임.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어쩔 수가 없게 만든다.

   로열 로드는 사용자가 직접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레벨과 스킬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투력

  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검술을 고급까지 익혔으나 어린아이가 조종하는 캐릭터와, 진짜 검사가 조종하는 캐릭터는 하늘과 땅 차이.

   위드는 스킬들을 적재적소에 이용할뿐더러 솜털 하나만큼의 빈틈도 놓칠 줄을 모른다.

   전투에서 보여 주는 집중력, 몰두함으로써 보여 주는 실력은 위풍당당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일반 유저들은 비범한 몸놀림을 보며 놀랄 뿐이지만, 몬스터들도 충분히 느끼고 두려워한다.

   투지, 카리스마 스탯은 그 효과를 더욱 더해 주어서, 지성이 떨어지는 몬스터라면 쉽게 공포감에 빠져들게 만들

  어 버린다.

   그런 위드가 전투 중에 멈췄다.

"너희는 운이 참 좋구나.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가봐야 될 것 같다."

   그롤러들이 안도의 숨을 토해 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위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반 호크."

"말하라, 주인."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사냥해라. 잡템도 수거하는 거 잊지 말고."

"알았다. 주인."

   위드는 몬스터를 방치해 둘 인물이 아니었던 것.

   반 호크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나서 던전의 입구를 다시금 찾았다.

   다행히 그롤러들과 싸운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위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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