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광장의 조각상
위드가 다시 접속을 했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중앙 광장은 빙룡 광장이나 빛의 광장보다는 협소하지만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곳이다.
'커헉! 내가 왜 이곳에.....'
위드는 당황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평소처럼 장사를 할 뿐이었다.
분수대에서 물통을 채우는 초보자들도 조각상을 구경하면서 지나갔다.
"이번에 발견된 조각품이지?"
"응. 꼭 진짜 같다."
"만져 보고 싶은데....."
여성 유저 2명이 가까운 곳에서 조각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근데 키는 별로 안 크네."
"얼굴도 평범한 것 같아."
여성 유저들이 떠나고 나서는, 처음 시작하면 기본으로 지급되는 옷에 아직 때도 묻지 않은 초보자가 나타났다.
"위드 님, 저도 위드 님을 본받아서 열심히 살게요. 앞으로 쭉 지켜봐 주세요."
장사를 마치고 자리를 접던 상인들도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모라타를 이렇게 발전시켜 주어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재미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위드는 석상이었기에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상인은 조금 높은 제단에 서 있는 조각상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보았으리라.
파티 사냥을 나가는 전사들이나 모험가들도 다가왔다.
모라타에서는 도시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이 기본처럼 되어 있었다.
만약 던전에 사냥하러 갔는데 조각상이나 그림을 감상하지도 않고 왔다면 개념 없다고 욕을 먹어도 마땅한 ㄴ일.
"정말 이렇게 신 나는 곳은 처음이에요. 멀리까지 사냥을 나가서 죽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즐겁네요."
눈앞에 있는 게 단순한 석상이 아니라 진짜 위드가 석상처럼 굳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별생각 없이 마음에 담고 있던 혼잣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키 작은 드워프도 왔다.
"캬하! 대륙 곳곳, 정말 많은 곳을 다녀 봤지만 모라타만큼 맥주 맛이 좋은 곳은 처음이오. 이렇게 지내기 좋은 활기찬 곳을 만들어 줘서 고맙구려."
유저들 중에는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 아저씨가 손을 꼭 잡고 와서 조각상을 감상하고는 다른 곳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풀죽신교 대추죽에서 다녀갑니다.'
"국왕 위드 만세."
유저들 중에서도 위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사냥을 나갔다가 밖에서 흔한 야생 꽃이나 풀이라도 뜯어 와 조각상 아래에 깔아 주었다.
접속을 종료했다가 다시 들어오더라도, 사람들이 조각상을 보면서 감탄하거나 아르펜 왕국의 발전을 원하면서 활기에 찬 대화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아르펜 왕국 주민 된 거 잘했다. 그치"
"그럼. 내가 바로 왕국에 들어오자고 했잖아. 대륙 어디를 뒤져 봐도 이런 곳은 없다니까."
중앙 광장에서는 로열 로드를 시작한 초보자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도 보였다.
밝게 웃으며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장소.
중앙 광장에서는 파티 사냥을 할 사람을 모으거나 장사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바드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작은 공연도 했다.
거리의 악사들이 내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위드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주민들이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그리고 한밤중에도 장사가 정말 잘되는구나. 상인들이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군.'
국왕으로서 정말 행복했다.
'세금을 올리기만 하면 완벽하겠어.'
★★★★★★★★★★★★★★★★★★★★★
풀죽신교의 비밀 회동.
"에퀴녹 마을의 상업에 시설에 대한 정비가 필요합니다."
"건축가 몽베르트 님에게 부탁을 드려 봐야지요. 시장의 규모를 키우고 상업 건물들을 단기간에 확장하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셀린 마을은, 지금은 별것 없지만 던전들로 인하여 발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개척 마을의 특성에 맞도록 모험가들을 파견하면 될까요?"
"로그 님이 최근에 퀘스트를 마치고 맡은 일이 없다던데, 소일거리 삼아서 부탁을 드려 보죠."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판자촌이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이미 가파른 언덕에 판잣집 건설 부지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조만간 걱ㄴ설에 들어가면 별걱정 없을 겁니다."
풀죽신교는 어마어마한 성세를 자랑했다.
지금으로써는 정확한 규모조차도 추정이 불가능했는데, 아르펜 왕국의 유저라면 풀죽신교에 가입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드가 현명한 통치를 할 때마다 풀죽신도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를 위하여 위대한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열심히 이용해 줍시다!"
"정말 위드 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영주들과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보론 마을의 영주가 원래 있던 성을 허물고 새로 짓는다네요."
"완전 어이없네. 위드 님은 흑색 거성에서 그대로 머무르고 계시는데. 쯧쯧."
"위드 님은 그런 데 쓸 돈이 있으면 우리를 위하여 건축물을 하나 더 지어 주셨을 겁니다."
"디안스 마을의 세율이 2% 더 올랐더는 소식 들으셨어요?"
"정말 뭘 믿고 자꾸 세금만 올리지?"
"그러니까 망해야죠!"
신도의 충성심 유지의 원천은 뒷담화!
풀죽신교에서는 위드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전쟁과 파괴, 과도한 세금으로 핍박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왕국민들과는 달리, 베르사 대륙에서 주민들을 위한 통치를 베푸는 유일한 땅이 바로 모라타였다.
세상을 비추는 훌륭한 국왕 위드!
"이 땅에는 풀죽보다 맛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소도 아니고, 언제까지 풀죽만 먹고 살겠습니까. 저는 이제 스테이크에 콩 수프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레벨이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어리석었죠."
모라타에서 시작한 초보 순두부의 고백이었다.
"저는 잠시 잊었습니다. 왜 위드 님이 우리에게 풀죽을 베풀었는지, 그 이유를!"
"풀죽! 풀죽! 풀죽!"
"자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풀죽의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고깃국을 먹더라도, 떫고 쓴 풀죽의 맛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풀죽신교 만세!"
그래도 초보자들에게 밥은 먹이면서 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끓여 준 풀죽이, 이제는 자유라는 거창한 상징을 가진 의미로 끌어올려졌다.
"꺾이거나 밟힌 풀은 우리를 뜻합니다. 한 뿌리는 쉽게 뽑히지만 다 같이 모이면 우린 해낼 수 있습니다. 위드 님과 함께 갑시다!"
"풀죽, 풀죽, 풀죽!"
"그냥 풀이 아닙니다. 땀을 마시고 자라는 노력의 열매인 것입니다!"
"풀죽, 풀죽, 풀죽!"
풀죽신교는 모라타를 성도로 하여 북부 전체에 분포되어 있었다.
ㅡ위드 님, 일당 잡부가 많이 필요한데요.
ㅡ풀죽이라도 먹여 가며 일 시키면 될 겁니다.
과거 창설 작업에 관여한 바가 있던 마판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사태.
이제 북부에 아르펜 왕국이 건국되면서 팔죽신교에서는 그들이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았다.
모라타는 한정된 땅에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몰리면서 커진 도시라고 할 수 있지만, 왕국이 되면서 영토가 비할 바 없이 넓어진 것이다.
"마을 개발 작업을 더 빨리 해야 됩니다. 늦어지거나 해서 위드 님이 그런 곳에까지 신경 쓰게 되는 사태가 일어나면 절대 안 돼요."
"가뜩이나 하실 일도 많은 분인데, 어떻게 마을 길 하나 내는 것까지 다 관리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워낙 신경 쓰실 일이 많다 보니 얼마 전에는 망할 놈의 바드레이에게 죽기까지 하셨잖습니까."
"그게 다 우리 잘못입니다. 진작 나서지 못한 제 탓입니다!"
풀죽신교에서는 아르펜 왕국의 영토가 확장된 곳에서의 개간과 채광, 건축, 사냥, 모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었다.
"죽순죽 부대. 오늘은 루벤스 강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냥을 합시다. 치안 회복을 위해서 앞장서야지요. 가실 분들, 동문으로 모이세요."
"죽순죽 유저 여기 갑니다!"
"독버섯 부대,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스탠 성 인근에 몬스터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데! 당장 갑시다!"
"우우, 몽땅 잡아 옵시다!"
과거에는 완전 초보자들의 모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전체적인 레벨이 많이 높아졌다.
평원에서 돌아다니는 웬만한 몬스터들은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되다보니, 필요한 곳에 투자를 해서 건물을 세우거나 몬스터 사냥으로 치안 회복도 이루어졌다.
아르펜 왕국의 문화 확장으로 새로 얻은 마을과 땅을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발전 과정이 유저들의 축적된 힘으로 단축되고 있는 것이다.
"영주, 아니 국왕 폐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지. 건축가로서 위드 님의 이름을 딴 광장을 세워야겠어."
"이곳의 예술품은 내가 먼저야."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아르망 마을에 잡화점을 제일 처음 열어야지 손해? 일주일만 장사해도 투자비는 다 회수할 수 있을 거야."
★★★★★★★★★★★★★★★★★★★★★
중앙 대륙에서 아르펜 왕국으로 통째로 넘어오는 중소 길드들. 그들도 풀죽신교에 포함되기를 원했다.
"꼭 우리 길드의 정체성을 버리고 풀죽신교에 들어가야 될까?"
"길드장님, 아르펜 왕국에서는 필수입니다."
"혹시 사냥터 제한이나 그런 게 있는 건가? 하지만 풀죽신교에서 배타적으로 나온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중앙 대륙에서 건너온 유저들은 그런 핍박을 지긋지긋하게 겪어 왔다. 기껏 북부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이런저런 제한이 생긴다면 상당히 불행한 일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풀죽신교 회원은 도시 내의 식당에서 5% 할인 혜택을 받는다는군요."
"영주의 식당에서?"
"아닙니다. 이곳에 장사하는 유저들이 대부분 풀죽신교의 회원이다 보니 어느 식당을 가더라도 혜택이 같습니다. 반찬도 몇 가지 더 나온다는군요. 그리고 사냥터에서 상인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는 10%의 할인 혜택을 받습니다."
"그건 괜찮군."
"마차나 말을 빌릴 때도 값을 깎아 주고, 공연도 그날 가장 일찍 시작하는 회는 반값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나?"
"그림이나 조각품 구매 시 할인! 모험과 사냥에 대한 정보도 제공도 되고, 신용도를 쌓으면 장사 밑천도 대 준다고 하는데요. 어려운 스킬을 습닥하는 퀘스트에도 모여서 갈 수 있으니 정말 좋다고 합니다."
웬만한 카드 혜택을 능가하는 풀죽신교!
★★★★★★★★★★★★★★★★★★★★★
서윤은 빙룡 광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부드러운 털옷 팝니다. 갑옷 위에도 겹쳐 입을 수 있어요. 최저가 390골드에 모십니다."
"얼마든지 구경하세요. 사냥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취급합니다. 중고 물품 거래도 가능."
"육질이 살아 있는 쥐포! 씹는 맛이 달라요. 전투 중에도 씹으면서 포만감을 채울 수 있는 쥐포 사세요."
그녀는 장사하는 상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식기나 가구를 사렴련 어디로 가야 하나요?"
"판잣집 장만하셨어요?"
"네."
"이 부근에서는 흙집용품들을 많이 판매하거든요. 판잣집에 꾸밀 만한 용품은 황소 광장 쪽에서 많이 팔려요."
"감사합니다."
상인은 곱고 예쁜 목소리를 들어서 흐뭇했다.
왠지 목소리만으로도 쉽게 범접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느낀 듯한 기분.
서윤은 황소 광장으로 가서 판잣집에 어울리는 식기와 가구를 구매했다.
가구공예는 조각사들이 많이 하는 부업이기도 했다.
쓸 만한 나무를 벌목하여 책상, 침대, 의자, 식탁, 소파 등을 만들곤 했는데, 디자인만이 아니라 내구성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빠, 우리 이거 사자."
커플끼리도 많이 와서 판잣집을 꾸미기 위한 다양한 용품들을 구입했다.
거실, 침실, 부엌, 서재 등을 꾸미는 경우에는 구입해야 하는 물품도 상당히 맘ㄶ았다.
집을 꾸미고 나면 언제든 와서 편안히 쉴 수도 있었으며 친구들에게 자랑거리도 되어서,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유혹이었다.
서윤도 마음에 드는 물품을 골랐는데, 몇 가지 미처 없는 물품들이 있었다.
"찾으시는 물품들이... 제법 안목이 있으시군요. 그런 것들은 조금 비싼데. 중앙 광장에 가시면 상인 안데르스가 팔고 있을 겁니다."
서윤은 중앙 광장으로 가서 물품을 찾던 도중에 분수대 옆에서 위드의 조각상을 발견했다.
"......"
그녀가 알고 있는 위드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
서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각상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순서를 기다려서 앞으로 갔다.
가까이에서 봐도 영락없는 위드였다.
"......"
서윤은 밤이 될 때까지도 중앙 광장에서 물품을 구매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때우는 데 있어서 쇼핑만 한 것이 없다.
중앙 광장에서는 온갖 잡다한 물품들을 다 판매하고 있었기에 볼만한 구경거리도 많았다.
시간이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저녁에는 선술집이 붐비고, 사냥은 아무래도 아침 무렵에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밤에는 어디나 다소 한적해지기 마련이지만, 중앙 광장은 새벽 시장도 크게 열려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편이어서 24시간 한산한 때가 없ㅂ었다.
새벽 시장에서는 쉽게 맛보기 힘든 곰 바비큐를 포함하여 신기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기도 하여 더욱 인기였다.
"공연장에서 하이렌과 베너티의 공연이 있습니다."
"벌써 모라타로 돌아왔나?"
"얼른 가 보자!"
인기 있는 여성 바드들의 공연에, 유저들이 많이 빠져나갔다.
다소 한산해지면서, 위드의 조각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위드의 조각상이 진열되고 나서 처음 사흘 동안은 구경꾼들로 중앙 광장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중앙 광장 상인들의 매출이 10배씩 뛰어오를 만큼, 파급효과가 대답하였다.
모라타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문화적인 혜택이 풍부하였지만, 그럼에도 위드의 조각상이고 스탯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초보자와 고레벨 유저가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앙 광장에 진열이 되고 열흘이 지난 지금은 다소 주목도가 떨어진 상태.
그래도 한창 북적이는 때에는 줄을 서서 구경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말이다.
서윤은 슬그머니 조각상으로 다가가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법 조명들이 밝혖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밤이라서 사방이 어스름했다.
'정말 해도 될까?'
그녀의 가슴은 아까부터 쿵쾅대면서 뛰고 있었다.
서윤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살짝 올렸다.
달빛조차도 숨을 죽일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서윤은 조각상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이현은 오랜만에 아이템 경매 사이트에 접속했다. 요즘의 주 수입원은 아이템 매각보다는 아무래도 방송사에서 지급되는 출연료였다.
"흠, 아이템의 시세가 생각보다도 훨씬 떨어지지 않는군."
처음 로열 로드에 대해서 걱정했던 부분이다.
새로 시작하는 유저들이 없다면 아이템의 시세는 곤두박질치기 마련.
그러나 로열 로드는 유저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끌어들이고 이다.
아르펜 왕국의 최근 발전 속도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른 것도 레벨 50 이하 초보자들의 힘이었다.
무력이야 볼품없지만 모이면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초보자들!
매일 가져오는 짐승의 가죽으로 인하여 재봉 산업이 나날이 발달하고, 초보자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조달하느라 상업 활동도 활발했다.
"가지고 있는 아이템을 조금 나중에 팔아도 괜찮겠어."
이현은 매각 시점을 잘 조절했다.
아이템의 시세는 매분 단위로 변동되는데, 어느 누가 쓴다는 소문만 나도 찾는 사람이 늘어서 가격이 뛴다.
특정 사냥터에서 유용한 무기도 있고, 새로운 전투 방식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전투에는 유행이 따르기도 하는데, 로열 로드 초창기에는 도둑이나 모험가 같은 직업에게도 방패는 필수였다.
몬스터의 공격력이 강력하다 보니 크고 두꺼운 방패에 숨어서 장기전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적의 생명력을 크게 깎아 놓을 수 있는 마법사, 궁수와의 파티 사냥법이 흔해졌다.
갑옷이나 다른 방어구, 사제의 보호 마법도 발달하다 보니 기사와 워리어가 아니라면 굳이 방패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방패의 가격이 많이 폭락했다.
그래도 공성전이나 던전을 처음 개척할 때를 위한 대비용으로 여전히 어느 정도 소비는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법 아이템들의 가격은 여전히 높고... 마법사는 하지 않기를 정말 잘했어."
마법사 전용 아이템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
높은 지적 능력으로 인해서 NPC들의 호감을 끌어내기 좋은 것이 마법사다.
파티 사냥을 한다 해도, 앞에서 직접 싸우지 않고 뒤에서 마법 공격만 날리면 되니 편하기도 했다.
주문을 외워서 발휘하는 마법의 한 방 공격력이나 화려한 효과는 일품이었으니, 마법사는 정말 인기 있는 직업이었다.
하늘을 날거나, 텔레포트, 물 위를 걷고, 유용한 소환수를 불러내는 등 다양한 보조 마법까지 쓸 수 있어서 재미있는 직업이었다.
다만 마법 아이템은 정말 만들기도 어렵고 귀해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장비 마련으로 허덕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르칸의 풀 세트는 아직 팔 때가 아니로군.'
네크로맨서들의 물품들은 아직 중저레벨을 위주로 거래되고 있으니 바르칸의 풀 세트 아이템은 한참이나 후에 팔아야 될 것 같았다.
이현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다 올리면 경매 사이트에 엄청난 난리가 나게 되리라.
느긋하게 경매 사이트를 돌아보고 있는데, 최근에 경매가 가장 크게 들썩이는 물품이 있었다.
탈로크의 믿음 갑옷.
"설마......"
경매 글을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역시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아이템의 모습!
매일 수리를 하고, 입김을 불어 조심스럽게 닦아 가며 사용했던 물품.
-이거 텔레비전에서 많이 본 그 갑옷 아니에요?
-전쟁의 신 위드가 사용했던 갑옷이 맞나요?
-맞습니다 이거 올린 사람의 아이디를 보세요.
-바드레이 맞네요.
-완전 대박이다.
탈로크의 믿음 갑옷 경매 시작 금액은 130만 원!
낮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입찰을 하며 가격을 띄우고 있었다.
다양한 옵션을 가지고 있고, 레벨 제한은 350으로 비교적 낮은 편이기도 하다.
더구나 위드가 착용했던 물품이라는 희소성까지 붙다 보니 가격은 벌써 370만 원을 넘어간 상태!
경매가 끝날 때까지는 아딕 닷새나 남아 있으니 더욱 비싼 값으로 낙찰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바드레이, 이 나쁜 놈....."
베르사 대륙에서는 강한 자로서, 그리고 뛰어난 유저로서 존중했다.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서 싸움이야 있었지만 악감정까지는 없었다.
그렇지만 경매 글을 보고 생겨난 분누와 짜증, 소화불량!
"바드레이, 훗날 반드시 널 죽여 주겠다. 그리고......"
이현은 확실한 복수 방법을 떠올렸다.
"네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빼앗아서, 그걸 팔아 큰돈을 벌어 주지!"
무작점 감정에 몸을 맡기는 건 이현의 방식이 아니었다.
철저리 실리를 추구하는 분노!
★★★★★★★★★★★★★★★★★★★★★
한국 대학교로 가는 길.
이현은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 보통 걸어갈 때도 많았지만 때마침 버스가 와서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탄 것이었다.
그런데 버스에서부터 학과 후배를 만났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학교 가세요?"
"그래."
이현에게 인사를 한 건 최상준을 따라다니던 여자 후배였다. 로열 로드에서, 잠깐이지만 멜버른 광산에서 사냥도 같이한 사이.
"시간 되시면 밥이라도 같이 드실래요? 모험에 대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거든요."
"아침 먹었어."
"벌써 점심을 드실 시간인데요. 인문관 식당에서 돈가스 드셔 보셨어요? 맛있어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위궤양 때문에 요즘 물만 마시고 살고 있어. 기름기 있는 건 안 돼."
"제가 살게요."
"배고프던 참이었지."
후배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현의 성격에 대해 소문도 쫙 퍼진 후였다.
로열 로드에서의 위드라는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야 그를 소 닭 보듯이 했다.
MT나 학회 일에서도 전부 빠졌으니, 강의실에서 후배들에게 존재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 학과에 그런 선배도 있었어?"
"왠지 우리를 자꾸 피해 다니는 거 같지 않니? 인사를 해도 받아 주지도 않고."
"수업도 제대로 안 듣는 것 같아. 노트에는 낙서하고 있더라. 리포트도 제대로 낸 적도 없다더라. 그런 선배랑 같은 조에 걸리면 정말 귀찮아지는데."
"아, 그 서윤 선배님이랑 같이 다니는 남자?"
넓게 펼쳐진 갯벌의 꼬막 같은 미미한 존재감!
그러다가 전쟁의 신 위드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이후에는 모든 것이 180도 바뀌었다.
후배들은 강의 시간마다 모여셔 수다를 떨었다.
"이현 선배 멋지지 않니? 말수도 적고, 강의 시간에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고뇌하는 것 같아 보이는 옆모습이 정말....."
"돋보이는 외유내강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만 떠드는 사람과는 다르게 자랑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학교 다니고, 로열 로드에 접속을 하면 전쟁의 신 위드라니..... 꺄아! 그 이중성이 매력적이야."
"전투만 하면 그 박력이 있는 모습이 정말 남자다워. 오크 카리취의 품에 안겨 보고 싶다."
"어떻게 조각사란 직업을 가졌을까? 보통 감수성으로는 어려운 직업이잖니. 모험을 하지 않는 평소에는 잔잔한 호수를 보면서 정말 예쁜 조각품을 생각하고 있을 거 같아."
"모라타에 가 봤니? 완전 영웅이야. 이현 선배님이랑 꼭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다."
"동생이 사인 받아 오라고 했는데 너무 떨려서..... 뭐라고 말을 걸지?"
순식간에 가상현실과의 멋진 선배로 떠오르게 된 이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작년에 학교에서 벌였던 확약들까지 알려지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 후배들에게 절대 밥을 사지 않겠다는거창한 목표를 가진 이현에게는 그다지 발마직하지 않은 전개.
다행히 서윤의 높은 벽에, 대부분의 여자 후배들은 말도 붙여 보질 못했다.
"둘이 왜 만나는 거야?"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을까?"
"만날 따라다니고 도시락도 싸 오는데? 서윤 선배가 정말 좋아하는 거 같잖아."
그러다가 요즘엔 이것도 바뀌었다.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
"서윤 선배의 선택에는 역시 당연한 이유가 있었던 거구나."
이현은 학교 식당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사실 집에서는 영양식을 요리해서 먹는 편이기는 했지만, 돈가스나 라면도 정말 좋아했다.
'어릴 때에는 동생이랑 같이 돈가스집을 가 보고 싶었는데.....'
레스토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식집 돈가스라도 동생과 같이 나누어 먹으며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돈가스는 가끔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이기는 했지만 집에서 만들어 먹으려면 손도 제법 가고, 무엇보다 식용유가 너무 많이 들어서 최근에는 먹지를 못했다.
요리로 인한 환경오염보다는, 전적으로 식용유값 때문에!
"제 이상형은요, 궁금하시죠? 모험을 같이할 수 있는 남자예요."
"아, 그래."
슥슥.
이현은 금방 나온 돈가스에 칼질을 했다.
정확하게 간격을 나누어서 잘리는 고기.
"저를 지켜 주지 않아도 좋아요. 막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하면서, 그 두근거림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물오물.
"좋겠지."
"소연이 남자 친구 생긴 거 아세요? 로열 로드에서 만났다는데."
"생겼어?"
"네. 매일 캡슐방으로 데이트하러 간대요."
"그렇구나."
이현은 돈가스를 씹어 먹으면서 만족스러운 맛을 느꼈다.
'이 돈가스 괜찮군!'
소스도 느끼하지 않은 것이, 정확히 이현의 취향이었다.
물론 앞자리에 앉은 후배가 뭐라고 떠드는지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는 상태.
소연이라는 애가 누구인지,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현은 과식도 하지 않고 잘 씹어 먹은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네, 선배님!"
후배의 얼굴은, 이제 인맥을 터놓았다면서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학교에서 만나거나 한다면 친하게 말도 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그리고 어쩌면 로열 로드에서 아이템을 지원해 주거나 퀘스트를 소개해 줄지도 모른다는 무궁무진 한 환상의 퍼레이드!
이현은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잔디밭을 걸었다.
큰 나무 그늘 아래는 서윤과 1년 넘게 같이 도식락을 까먹던 추억의 장소.
"앞으로 1년 정도는 도시락을 먹지 못하겠군."
서윤이 싸 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현은 방학 기간 내내 여동생의 눈치를 보다가 개강 전날, 드디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저녁에, 된장찌개에 삼겹살까지 해 놓고 여동생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전공 수업에, 도장도 다녀야 되고, 로열 로드도 해야 되잖아 요즘 내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이현의 몸이 예전 같지 않기는 했다.
티셔츠를 벗으면 자잘하게 발달한 근육이 눈에 확 띄고, 아침에 10킬로 정도는 가볍게 조깅할 수 있는 체력.
"몸이 안 좋아지다 보니 요즘 감기도 자주 걸리는 거 같고...."
이날을 위하여 그동안 찬물로 목욕도 많이 했다.
감기에 걸려서 기침하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데, 그걸로는 끄떡도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불도 덮지 않고 자고, 아이스크림도 많이 먹고, 도장에서 혹사도 해 보았다.
그런데 무슨 몸이, 몸살이나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멀쩡한 건지!
사전 공작은 실패였지만 그래도 어젯밤 밤을 새워서인지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오빠, 많이 아픈 거야?"
이혜연이 이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 보기 위해서였는데, 그녀가 깜짝 놀랄 만큼 뜨거웠다.
부엌에서 끓인 물을 빈 병에 담아서 이마에 대고 있다가 왔기 때문이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고 운동도 격하게 해서, 몸에서 땀도 줄줄 흘렀다.
이현이 힘없이 말했다.
"그냥 견딜 만해. 그래도 여러 가지를 다 하다 보니 조금 무리가 온 것 같네."
"병원 가 보자."
"병원은 무슨!"
꾀병에 병원비라니, 절대 안 될 노릇!
"조금만 쉬면 나아. 그런데 이제 내일이면 개강이지?"
"학교는 갈 수 있겠어?"
"가고는 싶은데, 내일까지 몸이 나을 거 같진 않아. 무리해서 학교에 다니다 보면 몸 상태가 계속 나빠질 것 같아서 걱정도 되고."
"원래 개강 첫 주에는 학교 안 나갔잖아. 그냥 집에서 쉬어."
"....."
이현은 개강 첫 주는 철저히 학교에 가지 않고 로열 로드를 했다.
그러한 과거 전력이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
이현은 피곤한 듯이 과장된 몸동작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몸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아. 그나마 방학 때는 시간이 많았는데 개강을 하고 나면 학교도 다니면서 일을 해야 되니 더더욱 힘들겠지."
"잘할 수 있을 거야, 오빠. 나도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게."
"그냥 조금 푹 쉬고 싶다. 항상 바쁘게 달려오기만 해서 삶에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오빠....."
여동생에게 꾀병을 부려서 전격적인 1년의 휴학 결정!
"드디어 골치 아픈 일에서 해방이야."
이현은 1년 반의 추억이 담겨 있는 한국 대학교를 거닐었다.
"내가 낸 등록금으로 벤치를 바꾸었군. 화단에도 꽃도 심었고... 체육관도 새로 짓고, 직원들 회식도 한 모양이지."
여기저기 모두 눈에 익숙한 곳들이었다.
"그렇지만 1년간 휴학을 하면 그동안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겠군."
대학 최대의 장점은 누가 뭐라 해도 역시 휴학 제도!
이현은 학과 사무실로 가서 휴학 신청을 했다.
원래 개강 전까지 해야 되지만, 대한민국에서 기간이 지났다고 안 되는 건 없는 법.
휴학 사유에는 '바드레이에게 복수' 라고 적어 놓았다.
★★★★★★★★★★★★★★★★★★★★★
집으로 돌아오는 이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앞으로 1년간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기인한 편안한 기분.
"이 1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여동생이 유학을 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휴학을 연장하고 말리라.
모처럼 기쁜 마음으로 마당으로 가서 키우는 개 몸보신에게 밥도 줬다.
"많이 먹어라."
왈왈!
요즘 무슨 낌새를 챈 것인지 몸보신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통통하게 살이 쪄야지. 기름기도 좔좔 흘러 주면 좋고....."
로열 로드에 접속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집안일이란 잠시도 떼어 놓을 수가 없는 것.
이현은 덝과 오리, 토끼 들에게도 먹이를 주었다.
일감이 있어서 번거롭다는 생각도 가끔 들었지만, 동물을 키우는 것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먹음직스럽게 커 가는 것을 바라보는 그 기쁨!
이현이 이처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얼마 전에 이사를 나간 옆집 자리에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현이 살고 있는 동네는 주택단지였는데, 가장 넓고 집값이 많이 나갇건 옆집이 최근에 팔렸다.
그러더니 집을 허물고 넓은 마당에 텃밭까지 있는 대저택이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서윤의 집!
그녀는 이현이 휴학을 고려 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웃돈을 주어서 옆집을 매수했다. 물론 이현의 집과 붙어 있는 쪽의 담장은 미국식으로 형식적인 나무 울타리 정도만 만들어 둘 계획.
반직석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
최지훈은 한강 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오늘은 이혜연과 데이트 약속이 있는 날.
그의 생각으로는 영화나 한 편 보고 근사한 곳에서 식사나 하면 좋을 테지만, 만나서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ㅡ1달 전부터 자전거 타고 다녀 보고 싶었는데. 싫으면 말고요.
이혜연의 무서운 말.
공부해야 한다며 매일 어찌나 바쁜지, 정말 어렵게 잡은 기화라 설령 막노동을 간다 해도 이 데이트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최지훈이 쿠키와 커피를 시켜 놓고 안장 있으니 카페 여자들의 시선이 자꾸 그에게로 향했다.
키 크고 잘생인 외모에 옷까지 센스 있게 입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최지훈은 그녀들에게 이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감히 다른 여자들과 같이 둘 수 없는 이혜연의 매력에 푹 빠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여자야."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고 올바르게 자라지 않았던가.
사실 과거에 껌을 조금 씹긴 했지만, 최지훈은 여기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상태!
"똑똑하고 참하고 예쁘고, 모자란 구석이 없는 것 같아. 둘이 같이 살면 사소한 일로도 알콩달콩 정겹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고."
이미 수면 안대 두께의 콩깍지가 완벽하게 씌워져 있었다.
최지훈은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마저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한밤중이 아니라 아침 일찍 데이트를 위해서 나오는 것도 기분 전환에 참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부르르르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을 보니 이혜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제 왔나 보구나."
최지훈은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렘을 느끼면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야?"
약속 시간이 이미 조금 지났지만, 이혜연이 무안하지 않게 금방 먼저 도착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미안해요. 갑자기 일이 많이 생겨서 못 갈 거 같아요.
"그렇구나. 괜찮아.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 뭘."
최지훈은 다정하게 이해해 주는 남자였다.
"근데 무슨 일인데? 곤란하거나 어려운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지?"
-오빠가 대청소랑 밀린 빨래를 한다고 해서요. 보신이 털이 꼬질꼬질해서 목욕도 시켜야 되는데... 도와줘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천하의 최지훈이 개 목욕시키는 데 밀리다니!
-여기 일손이 부족한데, 지훈 오빠도 올래요?
"난, 저기, 청소 같은 건 잘 못 해서....."
-싫어요?
"갈게. 집으로 가면 되지?"
-고마워요. 빨리 와요.
최지훈은 자동차 키와 지갑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급 명품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
아쉬워하는 여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최지훈.
그러나 그의 현실은 잔소리를 듣기 전에 서둘러 청소를 도와 주러 가야 하는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