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39권 : 8) 바다의 보물 (265/520)

8) 바다의 보물

이현은 주택의 구석구석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리나라 건축 기술은 확실히 부족한 점이 많아. 건설업계에 혁신이 필요해."

오래될수록 집은 손봐야 할 곳이 자꾸 늘어나는 법이다.

비가 샌다거나 하진 않더라도 겨울에 옷풍이 심하게 불어서 난방 효율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전기장치들이 고장나기도 한다.

주택에 살면서 집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방수 페인트도 주기적으로 발라 주고 전체적으로 한 번씩 점검을 해 주는 건 필요였다.

"집을 한번 지어 놓으면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한 700년 정도는 무사히 유지가 되어야지. 이 정도의 기술력도 없나, 쯧쯧."

이현은 건축업계가 너무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비싼 땅에 투기를 부추기며 분양만 할 줄 알지 생활 편의를 위해 제공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겨울에는 저절로 따뜻해지고 여름에는 시원해지는 신소재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체 전력 생산, 지하 400미터 천연 암반수 공급, 건강에 해로운 미세 먼지 자동 제거 기능 정도는 주택에 기본으로 붙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자동차가 있는 집에는 기름도 자동으로 채워 주고, 유기농을 선호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마당 한편에 비닐하우스도 만들어 준다면 참 좋을 것이다.

"시멘트로 지은 집은 정이 안 가."

쉴 새 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이현의 입가에는 썩은 미소가 가득했다.

자기 집을 둘러보면서 조금씩 수리하는 이 기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대문도 화사하게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마당에는 통나무를 직접 깎아서 벤치도 만들어 놓을 결심을 했다.

"올해에는 배나무와 사과나무도 한 그루씩 더 심어야지. 지금 심어 놓으면 나중에 나이 먹어서는 과일값에 돈을 전혀 들이지 않아도 될 거야."

방송국으로부터 출연료와 시청률에 따른 성과금을 듬뿍 받을 예정이었지만, 지출에 대해서는 항상 엄격했다.

이미 이현이 저축한 액수만 봐도 상당한 알부자!

은행 직원이 주기적으로 전화를 해서 특판 상품을 안내한다거나 혹은 홍삼을 선물로 보내 주었다.

자신을 담당하는 은행 지점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이현은 일부러 거들먹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 고객님, 특판 상품이 있는데 지점에 방문하시면 우금대리를 적용시켜 드릴 수 있어요.

우금대리!

"글쎄요. 최근에 남아도는 돈이 조금 있기는 한데……. 뭐, 딱히 쓸 일도 없으니 조금 넣어 볼까요?"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살던 몇 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변화였다.

'이게 다 내가 잘난 덕이지.'

누구의 덕도 아닌 순전히 자기 덕!

이현은 마당을 청소하다 몸보신의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요즘 내가 바빠서 잘 챙겨 주지 않았군. 뭐, 알아서 잘 먹으니까."

서윤의 집과는 벽을 허물어 놓고 지낸다.

이현에게는 그녀가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뭐 가져갈 게 있다고 이현의 집에 있는 물건에 욕심을 내겠는가.

그래서 몸보신은 식사 때가 되면 서윤의 집에 가서 현관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서윤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쓰다듬어 주고 맛있는 음식을 주니 이것이 개 행복!

이현에게는, 식구들이 돼지갈비를 먹은 후 남은 뼈다귀라도 하나 얻어먹으려면 엄청난 애교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서윤은 몸보신의 입맛을 생각해서 매 끼니때마다 요리를 다르게 해 주고, 난생처음 먹어 보는 꿀맛 같은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게 해 줬다.

개 껌은 상자째로 쌓여 있었으니 진정한 개 팔자를 누리는 중이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따끈따끈한 밥인데,  특별히 너에게 주도록 하지. 옜다! 많이 먹어라."

이현은 잔반을 모아서 물에 말아 몸보신이 밥그릇에 채워 넣어 줬다.

아침에 제육덮밥을 해서 먹었지만, 고기는 배 속으로 싹 사라지고 채소와 살점이 몇 개 붙어 있는 정도.

끄으응.

몸보신은 늘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귀찮다는 듯이 거만하게 맞은편으로 돌아누웠다.

아침에 서윤이 호주산 특등급 양고기를 줘서 배를 채웠으니 가당치도 않은 밥찌꺼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근본도 알 수 없는 잡종견이 나도 먹는 밥을 안 먹는다니."

몸보신을 목주로 단단히 묶어 놓았다.

"아무 데도 못 가게 해야지. 굶다 보면 배고파서 먹겠지. 털에 참기름을 발라 놨나. 아주 윤기가 줄줄 흐르는구나.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아주 호강에 겨워서 된장에 밥 비며 먹겠어."

그렇게 몸보신의 목덜미를 괴롭히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현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마당에 나온 서윤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 오해하기 쉬운 광경이기는 한데, 보신이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야."

몸보신은 서윤이 나타나자 벌떡 일어나더니 주인에게도 흔들지 않던 꼬리를 좌우로 살랑거리면서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충성심이 높은 개이기는 했지만 항상 보는 서윤이고 밥도 챙겨 주다 보니 안주인처럼 따르고 있었다.

깨갱, 깽깽!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갑갑한 목줄 때문에 못 가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발라당 누워서 배를 드러내는 훌륭한 애교!

이현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역시 요즘 개들이란……."

지금 키우고 있는 몸보신 2세는 수컷이었다.

발정기가 되면 목줄로 꼭 묶어 놔서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하는 이현이었다.

이현과 서윤은 한낮의 햇빛을 받으면서 마당에 있는 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서윤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잘 잤어요?"

"응."

"여동생은요?"

"도서관에 갔어."

서윤은 이혜연에 대해서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현의 여동생이라면 향후 시누이가 될 수 있는 존재였으니 싫어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부탁 말이야."

"어떤 부탁요?"

"퀘스트 도와주기로 한 거."

"네."

이현은 서윤이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를 도와주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했다.

공짜를 밝히는 자신이었지만 아무 대가도 없이 입을 닦을 수는 없었다.

서윤이 퀘스트를 위해서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었기에 덥석 저지른 약속!

'역시 돈이겠지. 돈을 달라고 할 거야. 돈이지. 돈밖에는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먼발치를 바라보는 서윤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갔다.

이현의 얼굴도 따라서 붉어졌다.

'미리 다 생각해 놨구나. 과연 돈이로군. 얼마나 큰 액수를 부르려고… 역시 이 세상은 돈이 모든 걸 좌우해.'

서윤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데이트."

"응?"

"바쁜 건 알지만 하루라도 데이트를 해 보고 싶어요."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현은 서윤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집 나가면 다 돈인데… 뭘 해야 하지.'

당연히 아무 계획도 없었다.

도로 가에 우두커니 서서 뭘 해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없어요. 하지만 어디든 좋아요."

"으음!"

평범한 남자들의 데이트에 대한 부담감!

드라마를 보면 특히 재벌 주인공들이 많이 나온다.

키 크고 잘생기기까지 한 그들이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가방을 사 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을 맞춰 주는 바람에 보통 남자들은 너무 힘들어졌다.

게다가 그런 드라마에서는 깜짝 이벤트에, 마지막에에 헤어질 때는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까지 안겨 주지 않는가.

'영화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야 돼. 다 허구 속 이야기지. 특히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면, 이런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자막으로 안내를 해 주면 더 좋을텐데.'

하필 재벌의 딸인 서윤의 씀씀이를 감당하기에는 일반인으로서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 현실이었다.

호텔 레스토랑을 가고 싶지만 편의점 김밥도 감지덕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다.

이현은 염치 불구하고 말했다.

"배고프지?"

"조금요."

"그럼 밥을 먹으러 가자. 근데 어디로 가고 뭘 해야 할지는 내가 결정해도 돼?"

"물론이에요."

"미리 말해 두지만 비싼 데는 못 가."

"상관없어요."

서윤은 뭘 먹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이현이 집에서 해 주는 요리가 가장 좋았지만, 함께 외식을 하는 일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했다.

이현의 옆에 있으면 밝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내가 메뉴를 정해야겠군. 자장면을 먹으러 가자!"

"아는 곳 있어요?"

"이 동네에서 내가 모르는 집은 없지."

오랜만의 중국집 방문이었다.

동네의 중국집들이 수시로 개업과 폐업을 하고 있지만 한때 배달 업종 관련 종사자로서, 어떤 업소가 가장 청결하고 장사도 잘되는지 정도는 꿰고 있었다.

이현은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씩 시키고 나서 잠시 고뇌에 빠졌다.

"사… 사천 탕수육도 주세요. 둘이 먹기에는 많으니까 작은 걸로 주세요."

엄청난 지출!

하지만 서윤이 그를 위해서 쏟은 시간이 있기에 이 정도의 대우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자장면을 먹을 때는 말이지, 강한 입의 압력을 이용해서 먹어야 맛있어."

후루루루룹!

이현의 입이 진공청소기처럼 면발을 흡입했다.

자장 양념이 입가에 다 묻어 버리는, 추잡하기 짝이 없는 장면!

서윤은 차마 따라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고 얌전하게 자장면을 먹었다.

"음식을 저렇게 복 없게 먹으면 안 되는데. 호로로로롭!"

그렇게 자장면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현이 계산을 치렀다.

"커피를 마시자. 내가 뽑아 줄게."

이현은 중국집의 현관에 고객들을 위해 놔둔 자판기에서 당당하게 커피를 뽑았다.

"돈 아끼고 시간 절약하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어. 음식을 먹고 난 후의 공짜 커피야말로 직장인들의 낭만이랄까. 내가 직장인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정말 부러웠거든."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점이요?"

"단체로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고, 회사 카드로 결제를 하고 커피를 뽑아서 유유히 나오는 모습이 말이야. 공짜 밥을 먹다가 노후에는 연금을 타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서윤은 눈치와 예감이 날카로운 편이었다.

특히 이현의 성격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일부러라도 옛날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갑작스럽게 과거에 가난하게 살던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이상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갔다.

"식사도 했으니, 이제 등산을 할까?"

"등산요?"

"저기 보이는 산으로!"

이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도시의 중앙에 있는 산이었다.

계단이 약간 많긴 하지만 높고 험한 산이 아니라 공원으로 꾸며져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 있었다.

이현과 서윤은 한 단계씩 계단을 올랐다.

여느 연인들처럼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가위바위보 내기라도 할 법하지만 둘에게는 그런 건 없었다.

'가위바위보를 이겨서 뭐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것도 좋아.'

30여 분 정도를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서 드디어 정상!

꼭대기에는 팔각정이 있었고, 철망에는 이곳에 온 연인 방문자들이 기념으로 묶어 놓은 자물쇠가 수백 개도 넘게 채워져 있다.

이현은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로 가서 말했다.

"옛날에는 있잖아. 그래 봐야 몇 년 전이지만, 가끔 이 산을 올랐어."

과거를 떠올리는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남들처럼 운동을 하려던 것도 아니고 풍경을 보려던 것도 아니야. 그냥 부러워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산에 온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산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가족들이 나와 있었다.

솜사탕, 음료수 장사를 하는 노점상도 있었다.

그러나 이현은 도시의 건물들을 향하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아니. 그냥 여기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그렇게 부러웠어."

"……."

"참 많은 집과 건물이 있구나. 누구는 일을 하고, 집에서 쉬고, 학교를 가고, 꿈이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살아가겠구나 하는 부러움?"

이현은 산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가 내리고 난 이후라서 불빛들이 선명하기도 했지만, 그 불빛들이 켜져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하고 있으리라.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산에 오르는 자신과 달리, 맛있는 요리를 해 먹고 따뜻한 집에서 살아가며 저축도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한평생 열심히 살았더라도, 노인이 되면 누군가는 자신의 할머니처럼 몇천 원을 벌기 위해서 폐지를 줍거나 나물을 팔러 시자에 나가야 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 나한테는 너무나도 신기한게 될 수도 있는 세상을 느꼈지. 그냥 불빛들이 너무 다 좋았고, 바라보면서 부러웠어. 그때 하던 생각은, 나도 정말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좋을 것만 같았지."

돈에 의한 조기교육을 받으면서 살아온 셈이다.

"산에 올라올 때마다 저기 흔한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어. 지금은 뭐, 그래도 어느 정도 꿈을 이룬 셈이지. 노후를 위해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챙겨 놓은 돈도 제법 있고."

서윤의 눈에 맑은 눈물이 맺혀서 흘러내렸다.

어느새 저녁이 찾아와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현은 하나 둘 켜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도시의 야경보다도 예쁜 서윤이 곁에서 가만히 울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이럴 때 키스를 하던데. 음, 아냐. 난 안될 거야.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진 사람이 아니니까. 저 눈물을 오해해서는 안 돼. 내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눈물이 날까.'

그렇게 생각하니 서윤이 주르륵 흘리는 눈물이 쉽게 이해가 갔다.

'운수저로 밥 먹다가 나무젓가락을 쓰는 사람을 보면 딱하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겠지. 예를 들면 길가를 헤매는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고 할까. 그래서 우는거로군.'

갑자기 악화되는 추측들!

'이 세상은 돈과 권력이야. 예쁘고 돈 많은 여자가 날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나? 저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잘생기고 학벌 좋고 집안도 훌륭한 남자를 만나서 떠나겠지.'

서로가 비슷한 처지가 아니라면 언젠간 떠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없이 살아온 데에는 익숙하지만, 마음속에 크게 자란난 누군가가 갑자기 떠나 버리면 그 공허함은 정말 무섭다.

'언젠가 이별하게 될 사이야.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탕수육은 시키지 않는 거였는데.'

이현은 씁쓸하게 말했다.

"내려가자."

거리로 나오니 어느새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데이트라면 영화를 한 편 보거나 술을 마시는 것도 괜찮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윤을 보고 있었다.

"저기 좀 봐. 인형이야, 사람이야?"

"어마어마하게 예쁘다. 근데 울고 있잖아?"

서윤은 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주목을 받는 외모.

그녀의 얼굴과 입고 있는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들은 남자들이 함부로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몸이 얼어붙어 버리거나 꿈인지 현실인지를 의심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옆에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윤이 울면서 걷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신장이식이라도 기꺼이 해 줄 수 있을 만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현과 서윤이 걸어서 집이 있는 골목에 도착했다.

특별한 코스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짧은 데이트의 끝.

"음, 들어갈 가지?"

"네."

"그럼 뭐, 내일 또 볼까."

"……."

이현과 서윤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가장 예쁠 때가 언제일까. 지금인 것도 같군.'

잘 그린 짙은 화장보다는 막 울음을 그치고 나서 조금 부은 눈.

상대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맑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이현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건 다시 키스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자신이 한 걸음 다가가서 입을 맞추더라도 서윤의 눈빛과 표정은 거부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로열 로드에서 퀘스트를 하며 석상화가 되었을 무렵, 서윤은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이현은 그 당시에도 접속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맞추던 순간 느낌을 기억했다.

서윤이 그때 동상이 자신이란 걸 알고 한 것인지, 또한 어떤 마음으로 입을 맞춘 것인지도 궁금하다.

막연하게 물어보지 않고 지나쳤던 사건들이 오늘 갑자기 떠오른다.

서윤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키스를 해도 될까. 안 될까. 괜히 해서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분위기를 보면 아무래도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솔직해지자.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해. 그래도 상대방의 기분이나 판단이 중요한 건데. 애매하게 이러지 말고 그냥 깔끔하게 키스를 하라고 말을 해 주지.'

이현은 서윤의 얼굴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짧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생각이 회오리를 친다.

무려 1분!

정적 상태에서 두 사람이 몸이 굳은 채로 서 있은 시간이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여 주기까지 했는데 씹을 줄도 모르는 격이었다.

★★★★★★★★★★★★★★★★★★★★★★★★★★

유병준은 모니터를 보던 중에 이현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호오,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더니 밖에도 돌아다니는군."

인공지능을 통해서 베르사 대륙의 주요 인물들을 수십 개의 모니터로 볼 수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관찰 로봇이나 무인 항공기를 동원해서 특별히 현실에서도 주시했다.

"이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다가 이현의 옆에서 함께 걷는 서윤을 발견했다.

"데이트를 나왔군. 저 아가씨는 퀘스트를 도와주었던 그 처자인가. 과연 아름답군. 가히 최고의 미녀라고 할 수 있겠어. 어떻게 저런 여자가 저런 놈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건지."

유병준은, 그 둘이 중국집을 갈 때부터 깊은 한탄의 연속이었다.

자장을 입가에 묻히며 추하게 먹는 모습,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계단을 걸으면서 손도 잡아 주지 않는 개매너!

"저런 놈도 여자 친구가 있는데."

진심으로 깊은 한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도, 자신의 힘든 삶에 대해서 푸념을 하더니 분위기가 무르익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는 게 아닌가.

"저, 저런 짐승보다 못한 놈!"

유병준은 정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둔해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가져야 연애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길에 걸어 다니는 생면부지의 다른 여자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서윤이 울고 있는데 아무런 위로도 해 주지 않다니!

특별한 사탕발림도 필요 없고, 곧바로 키스를 해야 할 최적의 타이밍이다.

정 어색한다면 가볍게 안아 주는 정도도 나쁘지 않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다시 산을 내려와 버린다.

"전투 중에는 그렇게도 기회를 놓치지 않더니, 저 녀석은 정말 답답해.

보고 있는 유병준이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허무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분위기가 다시 잡혔다.

서윤은 눈까지 감았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저놈은!"

아무리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행동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이현과 서윤이 가만히 있는 1분이 유병준에게는 10분처럼 느껴졌다.

"안 되겠군. 베르사."

 - 네, 말씀하십시오.

"가로등 밑이라서 너무 밝은 게 이유일 수도 있겠어. 저 동네 가로등 전부 차단해. 갑자기 전부 꺼지면 놀랄 수도 있으니 차례대로 차단하는 게 좋겠지."

 - 명령 접수했습니다. 도시 시스템에 강제 개입 완료. 2초 뒤에 실행됩니다.

이현과 서윤이 있는 골목길과 그 주변 길가의 가로등이 멀리서부터 차례대로 슬며시 꺼졌다.

밤이기에 서윤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밝혀져 있던 가로등도 빛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이 둥그랗게 떠 있고, 멀리 있는 간판의 불빛이 비치면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이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걸로도 모자라나! 도대체가 저 녀석은……."

유병준은 심지어는 자신의 자존심까지도 상했다.

이쯤 된다면 밥을 떠먹여 주는 게 아니라 억지로 투입을 해도 죄다 토해 놓는 중환자 수준이 아닌가.

"인근 가게에서 저들에게 들릴 정도로 낭만적인 음악을 크게 틀어 놔."

 - 개인 시스템에 강제 접근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관찰 로봇을 통한 음향 시스템 설정은 가능합니다.

"관찰 로봇은 몇이나 되지?"

 - 현재 대상자의 주위로는 32기의 무인 항공기와 22기의 소형 로봇이 있습니다.

이현은 로열 로드에서 비중이 매우 큰 인물이고 유병준의 각별한 관심을 받고 있기에 호위와 관찰 로봇이 다수 배정되어 있었다.

"음악을 깔아 줘!"

이현의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날아다니던 무인 항공기가 어둠 속에서 지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내려왔다.

또한 작은 새와 벌레, 돌멩이 등으로 위장하고 있던 관찰 로봇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관현악부터 시작되어,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생생한 음악!

입체 서라운드로 들리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서윤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고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저놈은 지금 잠이라도 자는 것이야?"

 - 아닙니다. 대상자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이현은 가만히 서윤의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와 함께했던 긴 시간 동안의 추억이 다 함께 떠오른다.

충동적인 욕망보다는 마음이 더 다가선다.

이현은 아주 서서히 서윤에게 다가가서 키스를 했다.

★★★★★★★★★★★★★★★★★★★★★★★★★★

철썩, 처어어얼썩!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서 높게 튀어 오른다.

햇빛을 받은 모래 알갱이들은 부지런히 반짝인다.

퀘스트를 완료하고 난 후, 위드는 유령처럼 몸이 없던 상태에서 다시 대제왕의 몸으로 돌아왔다.

물론 토르의 신검과 갑옷은 감쪽같이 없어진 상태!

그의 앞에는 커다란 푸른빛의 포탈이 열려 있었는데,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문이 틀림없으리라.

"이제 돌아가야지."

위드는 전쟁의 시대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데에는 미련이 없었다.

조각 생명체들은 알아서 살아갈 것이고, 팔로스 제국의 운명도 정해져 있지 않은가.

엠비뉴 교단의 대신전이 워낙에 외딴 곳에 있다 보니 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점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완료하면서 얻을 것은 다 얻었고, 방송을 통해서도 감수성이 예민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은 분명했다.

'캐릭터 산업이 활황을 띠겠군. 특히 드래곤에 탄 흑곰 인형으로 거둬들이는 수입은 염전만큼이나 짭짤할 거야.'

모든 게 다 계산된 행동!

이곳이 어딘지, 대략 위치는 짐작이 갔다.

중앙 대륙으로 돌아가서 사막의 대제왕으로서 행세를 할 수도 있지만 부질없는 일이리라.

"그래도 그냥 가기에는 조금은 허전하단 말이야."

노들레와 힐데른의 사랑 이야기가 조금은 여운을 남겼다.

약간은 부모님 생각이 나기도 했다.

'아버지는 참 자상하고 좋은 사람이었지.'

어릴 때부터 직장에서 돌아오면 위드와 잘 놀아 줬다.

장난감도 직접 만들어 주고, 저녁이면 같이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술을 조금 많이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보증을 서슴없이 서주는 점이 문제이긴 했지만.

어머니는 좋은 대학을 나온 현숙한 분이었다.

맞벌이를 하느라 육아에는 소홀한 부분이 있었지만, 가정 살림에 전념할 수가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이해해야 하는 면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떠나보내고 나니 남은 추억들마저도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기억들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노들레와 힐데른의 이야기도, 위드가 다시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묻혀 버렸으리라.

'그분들도 계속 살아 계셨다면 서로 사랑을 하고, 나나 동생이 커 가는 모습들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와 어머니도 사랑 이야기가 있었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버지가 공부를 하러 온 어머니에게 한눈에 반해서 편지와 함께 데이트를 신청하고, 그 후로 만날수록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실상 어머니는 위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좀 괜찮긴 했는데, 고리타분한 면이 적지 않았지. 빈틈을 보여 주면 남자답게 치고 들어와야 하지 않겠니. 근데 데이트 신청 받는 데만 2달이나 걸렸어. 결혼? 사귀면서 청혼 언제 하나 기다리다 늙어 죽을 줄 알았단다. 넌 앞으로 커서는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돼.

노들레와 힐데른처럼, 부모님들도 끝까지 사랑을 하면서 행복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난 절대 아버지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지. 바로 어제 키스도 했으니까 말이야."

위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노들레와 힐데른에 대해서 기억하고 알아주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겠지. 내가 성공한 퀘스트로서 이름은 알더라도, 나처럼 경험한 사람과는 느낌이 다를 거야. 그들을 위한 조각품을 만들어 줘야 되겠군."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각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위드는 조각 재료들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근처에서는 마땅한 바위를 구할 수가 없었다.

'백사장의 모래를 쌓아서 만들었다가 폭풍이 몰아치기라도 한다면 금방 허물어져 버릴 테고, 그렇다고 해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에 가서 조각을 한다면 느낌이 별로인데.'

노들레와 힐데른은 섬에서 살면서 바다를 보며 행복한 시간을 나누었다.

조각품도 마땅히 그들이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바다 주변에 세워 놓는 것이 맞으리라.

"다른 곳에서 바위를 옮겨 온다면 너무 힘들까? 아냐, 잘 찾아보면 쓸 만한 재료가 근처에 있을 거야. 조각 재료들은 찾아내지 못할 뿐이지 어디든 있으니까."

위드는 노들레가 그랬듯 집과 백사장 주변을 거닐었다.

산책을 하듯이 걷고 있으니 그들이 보았을 풍경이나 느낌이 더 생생하게 전해졌다.

험한 세상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살아간 연인들.

위드의 눈이 바다로 향했다.

"저거로군!"

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견뎌 내면서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

일반적으로 조각품은 가능한 장애물이 없는 편리한 장소에 조각하기 마련이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한다면 대범하게 시도를 해 보는 것도 좋다.

바다에 우뚝 솟은 바위에 새긴 조각품은 역경을 이기며 살아간 노들레와 힐데른의 인생과도 잘 어울리리라.

"그렇다면 해 보자."

위드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몸이 물속에 푹 잠길 만큼, 의외로 상당히 깊은 바다!

목표로 했던 바위는 백사장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파도가 하얀 포말이 되어서 계속 부서지면서 바위 너머로 사람의 키보다도 높게 솟구쳤다.

"해 보자. 불가능은 없어!"

깡. 깡. 깡.

사막의 대제왕으로 활동하면서도 혹시나 몰라서 조각 도구들은 늘 가지고 다녔다.

왕국들에서 약탈한 최상의 제품들.

대장장이들을 닦달하여 뜯어낸, 다이아몬드로 만든 모루와 정!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조각품을 갂으면서 파도에 흠뻑 젖는 건 당연하고, 눈에도 수시로 바닷물이 튀어 들어갔다.

"실수를 할 수는 없지. 재료를 다시 구할 수도 없는 거니까."

바위를 손으로 만지고 강도를 확인하면서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

수천 년은 파도를 견디었을 단단한 바위지만 자연저긍로 형성되면서 미세한 금들이 깊게까지 이어져 있는 경우도 있어서 주의해야 했다.

바위에 두껍게 낀 이끼와 얽혀 있는 해초, 불가사리 등을 치우면서 작업!

노들레와 힐데른은 젊은 시절이 훨씬 더 잘생기고 예뻤지만, 그들이 나이가 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대로 조각을 했다.

행복이 절절에 달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노인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먼 바다를 보며 파도에 맞서는 조각품!

작업을 시작한 지 불과 10시간도 되지 않아서 작품이 완성되었다.

감정을 따라서 빼고 더할 것을 느끼는 대로 결정했기 때문에 진행이 빨랐다.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이야 뭐, 노들레와 힐데른으로 해야지."

 -노들레와 힐데른이 맞습니까?

"맞아."

『 명작! 노들레와 힐데른을 완성하셨습니다!

시간과 자연의 힘이 깃든 조각품이다.

대륙의 역사를 새로 쓰는 조각사의 작품으로, 특별한 대상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위대한 영웅의 조각품은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누군가가 노들레의 모험에 대하여 발견하면 예술적, 역사적 가치는 3배로 증가하게 됨.

예술적 가치 : 4,392.

특수 옵션 : 노들레와 힐데른을 바라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사흘 동안 34% 증가한다.

            항해 스킬 21% 증가.

            용사의 축복 '불굴의 희망' 이 부여됨.

            반경 4킬로미터 이내에서는 어떤 몬스터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음.

            발견자들은 특별한 행운으로 모든 스탯이 영구히 2씩 증가함.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명작의 숫자 : 25 』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손재주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시간 조각술의 레벨이 초급 2레벨로 증가하였습니다.

  조각품의 내구도가 더 높아져서 나쁜 환경에서도 오랫동안 보존됩니다.

노들레와 힐데른의 조각품은 가뿐히 명작으로 탄생했다.

과연 위드가 노렸던 대로였다.

현재의 조각술 숙련도는 고급 9레벨 94.1%.

전쟁의 시대에서도 드물게나마 조각품을 만들었고,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도 완료했다.

명작의 조각품까지 성공시켰더니 조각술 마스터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좀 허전한데. 노들레와 힐데른이 고작 명작이라니……. 내가 성의가 조금 모자랐던 것도 같아."

위드는 스무 날을 더 그곳에 머무르면서 조각품을 만들었다.

조각사의 인생에서 여러 힘든 조각품들을 깎아 보았지만 이번이야말로 사상 최대의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주 어려운 고난이도의 작업이었고, 마지막 전투에서 입수한 드래곤의 뼈와 비늘도 아끼지 않고 썼다.

"이제 나도 아무 후회가 없겠군."

위드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미련 없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포탈로 들어갔다.

그가 떠나고 난 해안가는 조각품을 만들기 전과 비교해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백사장의 모래는 여전히 반짝이고, 눈에 띄는 어떤 조각품이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평선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거칠고 험한 파도와 맞서고 있는 노들레와 힐데른의 명작 조각품이 보인다.

정말 잘 어울리는 바다 풍경과 조각품이었지만, 다른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위드의 다른 조각품은 맑고 푸른 바다 아래에 있었다.

산호초가 퍼져 있는, 깊지 않은 바다.

보로타 섬의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는 작은 아이들부터,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조각품.

대륙을 헤매면서 싸우고, 살아가고, 도망치고.

사막의 생활과 엠비뉴 교단을 상대로 한 전투가 해저에 그리듯이 새겨졌다.

노들레와 힐데른.

각 시기마다 두 연인은 드래곤의 뼈와 비늘, 미스릴을 이용하여 호화로운 동상을 세워 표현했다.

그들이 살아간 일대기가 전부 조각품으로 탄생되어 있었다.

해저의 암초들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 놓은 조각품의 제목은 '바다를 그리워하며 살아간 행복한 두 사람'.

삶을 괴롭히는 파도에 상처를 입었을 두 사람이지만, 바닷속은 형형색색의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서 헤엄을 칠 정도로 잔잔하다.

시간 조각술이 부여되어 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자연적인 손상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바다의 보물로 기록된 대작의 조각품!

아마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쉽게 발견되긴 힘든 작품이었다.

 ㅡ 저길 봐.

 ㅡ 어머어머, 너무 머지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조각품에 대한 소문이 금세 퍼지면서 꿈 많은 인어들이 찾아왔다.

 ㅡ 인간 세상이 다 저렇다니 참 무서워.

 ㅡ 그래도 멋지지 않니?

인언들이 매일 방문을 하고, 조각품 주변으로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며 지나갔다.

★★★★★★★★★★★★★★★★★★★★★★★★★★

"재미있는 모험의 끝을 보았군. 그렇지 않느냐, 베르사."

 - 재미있는 기준을 무엇으로 놓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현재 위드가 달성한 퀘스트의 성과는 약 279%정도로, 목표치를 압도적으로 초과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출현할 수 있는 확륭은 0.003%에 불과한 수준으로…….

"그만!"

유병준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위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시켰다.

그 와중에 드래곤을 이용한 것이 결정적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도 없다.

본래 노들레의 퀘스트에서는 아헬른의 희생으로 드래곤을 무사히 봉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혼돈의 드래곤을 봉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처리를 해 버린 것은 정말 기대하지 못한 성과였다.

유병준은 위드의 입장에서 그 이유를 찾아냈다.

"앞날을 내다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면 그런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고나 해야 할까. 나처럼 머리가 좋다 보면 이런 부분에서는 불리하군."

 - …….

인공지능조차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위드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괜히 얄밉고 심술이 난다.

하지만 이제 모험은 끝났고 현실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재미는 있었지만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잃어버린 기회나 비용이 너무 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다시 만회할 수 있겠지만……. 내 모든 재산과 권한을 이어받을 후계자는 바드레이가 될 가능성이 여전히 높겠군."

조각술 최후의 비기를 얻어 냈어도 위드도 당장의 손해가 막심했다.

로드릭 미궁에서는 조각 부활술을 사용했으며, 사막에서도 무려 열셋이나 되는 조각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

초보 시절에야 조각품에 생명을 부여하고 나서 입는 레벨의 손실을 만회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레벨이 400이 넘는 지금은 치명적이다.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20에 가까운 레벨 하락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하벤 제국과의 세렧적인 측면에서도 불리한 전황이 역전될 정도로 당장의 엄청난 변화는 없다.

시간의 조각술을 완전히 숙달되게 활용하려면 많은 수련이 필요한데, 북부의 위협은 당장 시급하게 닥쳐왔다.

유병준이 확인해 본 바로는 위드와 바드레이의 레벨 차이만 90 이상.

생산과 조각술의 비기들이 도움은 되겠지만, 전투 스키의 다양함이나 숙련도에서도 심하게 차이가 난다.

시간 조각술이라는 최후의 비기가 있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쓸 수 있을 정더로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현재로써는 바드레이와 싸워서 이긴다는 건 정말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또한 유병준은 인공지능을 통해서 베르사 대륙에서 암중으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암살대와 첨보원들이 북부 지역에 대거 파견되어 있다.

그들은 북부에서 레벨이 높은 유저들을 암살할 뿐만 아니라 매수도 하고 있었다.

중앙 대륙에서 쫓겨난 고레벨 유저들에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고 높은 지위도 주겠다고 하면서 풀죽신교를 배신하라고 한다.

"제안은 고맙지만 선뜻 내키지가 않습니다. 이제 겨우 북부에 정착을 했는데요."

"북부는 하벤 제국에 의해서 곧 초토화될 겁니다. 그 이후에는 저항에 대한 대가로 가혹한 지배가 이어지게 되겠죠. 북부를 선택해서 얻는 불이익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갈 곳 없던 저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는 사람도 많고……."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줄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기회는 두 번 세 번 찾아오지 않아요. 헤르메스 길드에 선택된 사람들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정과 의리는 돈과 권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간혹 그 고고함을 지키려는 이들에게는 더욱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결국에는 헤르메스 길드 편으로 만들었다.

북부에서 활동하는 이름 있는 유저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중이다.

헤르메스 길드가 무서운 점은, 그들은 일찍부터 장기가느이 계획을 세울 뿐만 아니라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북부를 초토화시키기 위해서 아낌없이 음모를 총동원했다.

"위드는 마법의 대륙 시절에 무자비한 폭군이었다."

"힘을 가지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위드에게 속아서는 안 되낟."

여전히 효과가 크지 않은 유언비어 살포도 계속되었다.

북부의 유저들이 똘똘 뭉쳐서 대항을 하니 그들을 사분오열 흩어 놓을 계략도 밑바닥에서 꾸준히 진행되었다.

상인들도 각 조합별로 북부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주요 거점에 자금을 투자하여 폐업을 시키면서 돈으로 상업을 황폐화시키고 있었다.

문화에도 막대한 자금을 이용하여, 건축물과 예술품을 돈으로 찍어 냈다.

지금 벌어지는 전쟁 외에도 장기적으로 북부의 유리함을 없애서 발전의 원동력까지도 끊어 놓겠다는 속셈이 분명했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장인 라페이는 앞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영웅적인 면모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는 멀리 보고 세세하게 살필 줄 아는 참모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나중에라도 하벤 제국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북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하고, 아예 본보기가 될 정더로 씨를 말려 버릴 작정인 것이다.

"바드레이를 한번 만나 봐야 되겠군."

 - 그에게 후계자 시험을 실시할 준비를 해 둘까요?

바드레이의 모든 정보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조사되어 있었다.

유병준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우연하게 만나는 자리를 만든다면 바드레이는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 아직은. 뻔한 결말이라고 하더라도 끝이 날 때까지는 기다려 주는 게 예의겠지. 위드의 마지막 발악도 지켜봐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