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귀한 조각품
위드는 드래곤 라투아스를 만나러 가기 전에 흐르는 강물로 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했다.
"더럽다고 죽일지 몰라. 드래곤이라는 족속은 성격이 보통 고약한 게 아니다 보니 트집을 잡힐 만한 일은 만들어선 안 돼."
시원한 강물에 몸을 씻고 나와서는 드래곤에게 배달해야 하는 퀘스트 아이템 유스켈란타의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 봤다.
레벨 제한이 자그마치 1,000에 달하는 아이템이었다.
몬스터 봉인 등 가능한 특성을 사용할 순 없더라도 모습을 비춰 주는 일반적인 거울로서 활용할 수는 있었다.
"음,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잘생겼군. 평소에 관리를 안 해서 그렇지 씻으면 확실히 광이 난단 말이야."
누렁이와 금인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음머어어어어, 아까랑 똑같다."
"골골골. 달라졌다. 물이 묻었다."
본인만 아는 미세한 차이!
위드는 깨끗하게 씻고 나서 초보용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목숨을 잃더라도 후회가 덜하도록 다른 장비들은 일절 착용하지 않았다.
이제 퀘스트의 기한까지는 고작 하루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림 이동술이라면 곧바로 갈 수 있었다.
라투아스의 레어.
그는 로자임 왕국의 남쪽 지역에 있었다.
때가 되자 빛의 알갱이들과 함께 유린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오빠."
"그림 이동술을 쓸 준비는 됐지?"
"레어 부근의 지역에 대한 그림은 그려 놓았어. 바로 출발이 가능해. 그리고……."
"응?"
"관은 오동나무가 좋겠지? 음, 박달나무로 할까?"
"……."
위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여동생과 친하다 보니 이런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재미없는 농담도 가족이니까 나누는 행복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면서 다정한 눈으로 여동생을 봤다.
'어느새 이렇게 자랐구나.'
할머니와 여동생.
가족이라고 해 봐야 많지도 않았으니 늘 신경 쓰면서 아껴주고 보살펴줘야 마땅하다.
때때로 사건을 일으키거나 사고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렇더라도 결국 가족이 주는 따뜻함은 무엇으로도 바꾸기 어려웠다.
여동생이 큰 사고나 탈 없이 예쁘게 자라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느 도둑놈이 데려갈지 몰라도 정말 복 받은 녀석이지. 아니야, 아까워서 못 보내겠어. 평생 끼고 살아야 해.'
유린은 계속 재잘거리고 있었다.
"확 타서 죽으면 관도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님 그냥 녹여 버리려나. 오빠, 요즘 죽어 본 지 오래됐잖아. 슬슬 한 번쯤 죽을 때도 되지 않았어?"
"……."
"딱 죽기 좋은 기회잖아?"
위드는 유린이 어릴 때를 떠올렸다.
엄마 아빠 없이 자신의 등에 업혀 다니던 꼬마 아이.
몇 살 차이 나지도 않지만 딸처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콧물도 참 오래 흘렸지. 식탐도 심해서, 먹을 것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며 참질 못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잠깐 동안 나쁜 친구들도 사귀었지.'
그래도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까지 받을 정도로 바뀌었다.
부모님이 계셨다면 참 뿌듯하고 기뻐하셨을 텐데.
여동생과 보낸 시간이 정말 길었다.
'이젠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빨리 시집이나 보내 버려야겠군.'
유린의 그림 이동술을 통해 라투아스가 있는 그레고달 산맥의 아래까지 바로 도착했다.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숲에서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빠, 그럼 난 갈게."
"그래.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할 테니까……."
위드는 그림 이동술로 와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관 짜 놓고 기다릴게!"
혀를 쏙 내밀더니 빛의 알갱이를 일으키며 사라지는 유린!
"역시 여동생이란… 아침저녁으로 패 둬야 하는데."
오빠이고, 아빠처럼 느끼기도 하니까 어리광을 피우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밝고 활발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유린이 우울하고 칙칙하게 집에만 있던 때를 떠올리니 지금은 훨씬 보기가 좋았다.
"앞으로 인해 한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놓으면 시집가기에 충분히 철이 들겠지."
다 큰 처녀에게 위험한 생각도 잠깐. 위드는 그레고달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 조각술이 있는 만큼 웬만한 몬스터들은 두렵지 않다.
다만 다크 게이머 연합에서 그레고달 산맥의 드래곤 레어 영역에 대해 평가한 자료를 보았다.
[ - 탐험자 레인입니다.
지금은 오래된 과거가 되겠군요.
막 레벨 180을 달성했을 때 드래곤의 레어를 전문적으로 다녔습니다. 죽어도 잃 게 없다 보니
혹시라도 대박을 노려 봤던 거죠. 모험이란 위험이 클수록 보상 역시 대박이 아니겠습니까.
당시에는 로열 로드 초창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보물을 얻거나 전설급의 무기라도 얻는다면
남들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 어서 가치가 대단했습니다. 물론 팔더라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겠지요.
아무튼 각설하거. 그레고달 산맥에는 현재까지 밝혀지기로 2마리의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블루 드래곤 라투아스와 블랙 드래곤 커미나드.
저는 커미나드의 레어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입구에도 가지 못하고 몬스터에 의해 죽었습니다.
엄청난 몬스터들이 개미 소굴처럼 바글바글했습니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아 드래곤의 레어 부근에는
몬스터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
위드도 과거 토르 왕국에 서식하고 있는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의 레어에 간 적이 있었다.
드워프의 삥을 뜯는 악룡 케이베른!
단지 실력이 훌륭한 조각사라는 이유만으로 벨소스 왕의 무덤에서 얻은 진귀한 아가테의 수정으로 만든 보석 조각품을 상납해야 했다.
수천 개의 수정을 은실로 엮어 드래곤의 형상을 만들어서, 바람이 살랑이기만 해도 우아하고 찬란하게 빛나던 조각품!
떠올리기만 해도 즉시 아랫배가 살살 아파 왔다.
"어떻게 해서든 드래곤과 엮이면 안 되는데. 이 퀘스트는 여기서 끝을 내야 해."
위드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로 했다.
그가 걸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리치 1마리!
해골 지팡이를 들고 붉은색 로브를 입고 있는 리치였다.
위드는 버릇처럼 바로 견적을 뽑았다.
'왕관을 쓰고 있진 않군. 일반적인 리치보다 더 대단한 아크 리치는 아니야. 시커멓게 변한 해골 지팡이를 봤을 때 익히고 있는 마법은 아마도 흑마법 계열로 추측되고 까다로운 적수군. 거리를 좁히더라도 블링크 마법을 써서 피하겠지.'
리치의 주특기를 파악하는 것도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위드는 무기도 가지고 오지 않은 이상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멀리 돌아가려고 했다.
- 인간이여.
그런데 리치가 위드에게 말을 걸었다.
- 라투아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위드는 상황을 이해했다.
'드래곤의 집사가 마중을 나왔군.'
드래곤들은 자신들의 고상한 취미와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을 부하로 부려 먹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으면 리치로 만든다고 한다.
실로 끔찍한 노예 생활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영역 안에 있는 드워프들을 착취하는 업무에서부터 레어의 많은 노예들을 다스리기까지 했다.
'즉, 일종의 관리직 노예란 이야기지.'
위드는 마판의 상회 직원들을 통해서 드래곤 라투아스와 관련된 정보들을 찾았다.
신뢰도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 전설과 귀족 가문, 왕실 기록 등을 통해 드래곤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다.
드래곤 라투아스는 악룡 케이베른과는 달리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그렇기 대문에 활동에 대해 남겨진 특별한 기록은 없었다.
'아주 심하게 나쁜 놈은 아니란 뜻이지. 역사서에 보면 악룡 케이베른은 심심하면 다른 왕국에 금은보화를 요구했다는데, 라투아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케이베른의 레어에 있는 보물만 훔칠 수 있다면 아마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텐데.'
위드는 리치의 눈치를 보며 품에서 새끼 거북이를 꺼냈다.
끝없는 생명을 가진 리치가 좋아하는 애완동물로 알려진 거북이!
물론 당연하게도 뇌물로 주려고 챙겨 온 것이었다.
오고 가는 뇌물과 챙겨 주기 속에서 싹트는 신뢰와 상호 우호 관계!
- 이게 무엇이냐.
"저의 소소한 정성입니다."
상대가 정색을 하고 거부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근면 성실하고 청렴결백한 기사에게 뇌물을 주어서는 오히려 친밀도가 하락하게 된다.
위드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뇌물을 주는 쪽에서 정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뇌물이란 상대방이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르게 주는 것!
누군가를 떠올리면 어설픈 인간관계보다는 바로 어떤 뇌물을 바쳤는지부터 떠오를 정도가 되어야 진짜 잘 줬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리치에게는 그냥 대놓고 꺼냈는데, 어차피 드래곤의 하수인인만큼 도덕적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작고 흰 거북이로군.
"귀한 것입니다. 어쩌다 얻게 되었는데, 험한 바다에서 무사히 성장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인간의 손에서 괴롭힘을 당하기보다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살면 거북이도 훨씬 좋을 것입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라투아스 님의 레어야말로 천국이니까.
"그리고 이건 소소하지만 거북이가 살 집입니다."
위드는 황금으로 된 거북이 집을 꺼냈다.
순도 100%의 금.
피를 토하는 기분으로 만든 작은 연못과 집을 표현한 조각품!
걸작과 같은 작품은 아니었어도 예술적 가치가 무려 374에 달했으며, 들어간 재료비만 하더라도 4,000골드나 되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를 해 봤습니다. 거북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하더군요."
- 그렇다면 거북이를 위해서 쓸모가 있겠군.
거북이와 황금 집을 받는 라투아스의 리치의 턱뼈가 조금 벌어졌다.
인간이었다면 입이 찢어지는 상황!
- 무엇을 꾸물거리는 것이냐. 라투아스 님께서 분노하시기 전에 어서 가자.
짐짓 사납게 말했지만, 어느새 목소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위드는 적지에서 작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했다. 물론 드래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면 도와주지 않겠지만, 평소에 약간이라도 우호도를 높여 놓는 게 중요했다.
뇌물을 바를 때는 충분히, 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마구 살포해야 했다.
위드는 드래곤을 라투아스를 만나기 전에 많은 상상을 했다.
그는 케이베른과 비교하여 과연 얼마나 위협적이고 강할 것인가.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와 달리 온전한 드래곤의 전투 능력은 어느 정도나 될 것인가.
'전투력을 확실히 알거나, 약간의 빈틈이라도 발견해 낸다면 엄청난 자산이 될 수 있다.'
악룡 케이베른의 레어에 갔을 때에도 모든 것들을 봐 두었다.
위드가 끊임없이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드래곤도 목표로 삼을 수 있기에!
사막의 대제왕 퀘스트를 할 때에도 아우솔레토라는, 드래곤 종족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만큼 특별히 강력한 녀석을 해치웠다.
위드의 레벨이나 전반적인 전투력이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들도 아주 많았다.
잡다한 스킬과 조각술의 비기들을 활용할 수 있고, 조각 생명체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궁극의 스킬인 시간 조각술까지도 사용이 가능하다.
검치와 수련생, 페일 일행 등 조력자도 많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풀죽신교라는 절대적인 지지 단체까지 있다.
위드가 드래곤죽을 만들자고 외치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뛰어들 고레벨 유저도 상당한 것!
지금까지 퀘스트와 사냥에서 불패의 신화를 쌓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미래였다.
- 인간이여, 그대는 알지 못하겠지만 나는 오랜 시간 이날을 기다렸다.
블루 드래곤 라투아스는 거대한 몸을 눕힌 채 레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눈으로 한참이나 작은 위드를 내려다보았다.
베르사 대륙에서 어린 드래곤들은 몇백 년 안 되는 시간을 살았지만, 성장을 마친 큰 드래곤의 나이는 최소 1천 살 이상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이었다.
'드워프와 엘프들에게 생일상만 받아 챙겨 먹어도 엄청난 부자가 되었겠다.'
위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약속된 기한은 맞추었지만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 지나간 일이지만 내가 페어리의 여왕에게 내린 벌은 자유를 빼앗아 버린 너무 가혹한 것. 훗날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해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위드는 곁눈질로 레어를 살폈다.
악룡 케이베른의 거처에는 보물이 산처럼 쌓여서 번쩍였따. 라투아스는 그에 비하면 레어가 광장처럼 넓기만 하고 텅 비어 있었다.
'드물지만 보물에는 관심이 없는 검소한 드래곤이거나, 혹은 다른 창고에라도 넣어 둔 모양이야. 창고일 가능성이 높겠지.'
훗날 라투아스를 사냥할 수도 있었으니 가능하면 드래곤이 많은 보물을 모아 놨기를 원했다.
'어쩌면 딴 집 살림까지 의심해 볼 만하지.'
위드의 머리는 아주 빠르게 돌아갔다.
드래곤과의 대화를 조금도 놓쳐서는 안 되고, 눈동자를 굴리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봐 놔야 했다.
- 너무나도 기다렸다. 그대가 가져온 것을… 보도록 하자.
"예. 바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드는 조심스럽게 실버 드래곤 유스켈란타의 거울을 꺼냈다. 그러자 거울은 두둥실 떠서 라투아스에게로 향했다.
라투아스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이 내려왔다.
- 그녀의 거울…이 맞구나.
드래곤의 눈동자가 떨렸다.
마치 눈물이라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
'드래곤낄 색이 다른 걸 보니 가족은 아니고, 역시 좋아하는 사이였군.'
대학교의 같은 학과에도 연인들이 있는데, 드래곤이라고 커플이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띠링!
『 라투아스의 레어 완료
블루 드래곤 라투아스는 실버 드래곤 유스켈란타의 유품을 가져온 인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다시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
옛 추억이 담긴 물건을 무사히 건네주었으니 배송 업무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보상은 없군. 욕심 부릴 일이 아니야. 더 이상 드래곤과 엮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위드는 이렇게 퀘스트를 끝낸 것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다시 올 때는 라투아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날이 될 것이다.'
수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드래곤 사냥을 나서게 될 것이다.
샤먼이나 성직자의 고위 직업에는 특수 기술 봉인, 마법 봉인 등이 있었다.
일정한 제한 등이 따르고 상대의 능력에 따라 지속 시간이 달라지기도 해도, 어쨌든 드래곤 사냥이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중앙 대륙에 명문 길드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더욱 체계적인 공략이나 도전에 나섰을 수 있었다.
물론 위드는 아우솔레토를 상대해 본 만큼 지금 유저들의 수준으로 승산을 분석해 보면 높게 쳐줘도 1%가 되지 않을 것이다.
드래곤이 어지간히 멍청하게 싸우면서 함정에 연속해서 빠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어렵다.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막거나, 숨통을 끊을 만한 결정적인 공격을 가할 능력조차 부족했다.
하지만 모든 직업들의 최정점에 달한 인간들과 다른 종족들이 모여서 스킬들을 활용한다면 기적을 노려 볼 수 있었다.
현재는 헤르메스 길드나 위드 정도만이 드래곤 사냥을 준비할 수 있었다.
향후에는, 북부의 영주들도 세력을 키운다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지리라.
드래곤이야말로 최종 보스 중의 하나.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에게도 수천수만의 엠비뉴 교단 사제와 광신도들이 거침없이 휩쓸려 가고 말았다.
병력이 많다고 해서 꼭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또 꼼수란 쓰라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만수무강하시기를."
위드가 물러가려고 뒷걸음을 치는데, 라투아스가 거울에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블루 드래곤의 커닫란 사파이어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가 위드를 쳐다보았다.
- 인간이여, 나에게는 중요한 일을 해 준 그대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위드는 0.1초 만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가 쓸 만한 명품 검이나 한 자루… 허억, 아닙니다. 저는 어떤 보답을 바랐던 것도 아니고, 테네이돈 님의 부탁에 의해 왔던 것일 뿐입니다. 이 일에 대한 어떤 공이 있다면 그것은 페어리의 여왕 테네이돈 님께 주소서."
원하는 요구를 하려다가 발 빼기로 급전환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가져다주었다고 해도 공적치나 친밀도가 모자라다는 판단에 의해서였다.
드래곤의 레어로 들어오기 전에 했던 다짐대로 뒷일은 테네이돈에게 전부 미루고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해도 성공이었다.
- 그대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는구나.
'허억.'
위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이놈은 식인 드래곤이었던 것인가!'
그래서 역사서 등에도 별 자료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특별히 인간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들은 파괴적이고 다른 생명들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에게서는 맑은 정령의 향기가 풍기고, 대자연의 기운이 감싸고 있다.
인간으로서 또한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술을 추구하고 있으니 존중받아야 할 가치란 충분하다.
- 블루 드래곤 라투아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 명성이 4,390 증가했습니다.
『 호칭 '드래곤의 예술가'를 획득하셨습니다.
예술에 대한 대단한 열정과 작품, 명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최소 2마리 이상의 드래곤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얻을 수 있는 호칭입니다.
예술 스텟의 증가 속도가 4% 증가합니다.
조각사가 완수하는 조각 퀘스트의 경험치와 명성 획득을 11% 증가시켜 줍니다. 』
위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예술 스텟이 많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에게서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저보다도 뛰어난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페트라는 화가의 실력이 훌륭합니다."
동료도 팔아먹을 판에 잠재적인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떠돌이 화가 페트 정도야 얼마든지 도매로 떠넘길 수 있었다.
- 그대의 압도적인 명성을 의심하지 말라.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빛을 발했지만, 인간의 역사에서도 그대는 손에 꼽을 만한 정도이며, 현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커헉.'
칭찬이 부담이 되는 상황!
'정말 무슨 보물이라고 하나 주려고 하나. 그렇다면 받아 두는 것도…….'
- 예술가여, 그대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이 대륙에서 오직 그대만이 가능한 일이니 길게 설명하지 않으리라.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내 친구, 유스켈란타의 조각품을 만들어 다오.
띠링!
『 실버 드래곤 유스켈란타
드래곤 라투아스의 부탁에 따라 유스켈란타의 조각품을 만들라!
지고한 조각사에게만 주어지는 기회.
드래곤 레어에 있는 재료들을 마음껏 이용하여 조각품을 제작할 수 있다.
라투아스는 대륙에 최고의 예술가로 명성을 날리는 당신의 실력을 믿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드래곤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조각품을 만들 기회는 최대 2회 주어지며, 완성까지의 기한은 1개월 이하이기를 바라고 있다.
난이도 : 최고의 작품.
보상 : 라투아스의 신임.
퀘스트 제한 : 최고의 예술가 한정 』
"으음."
뜬금없이 드래곤의 조각품이라니, 상당히 까다롭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퀘스트 내용조차도 거의 협박이나 다름이 없군. 포기해 버릴까. 조금 아쉬울 것도 같은데. 이건 불가능한 모험도 아니잖아.'
조각품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익숙했다.
로열 로드를 하면서 끊임없이 사냥, 혹은 조각품을 깎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퀘스트를 하면서도 쉬지 않고 조각품을 깎았기에 그 노력만큼은 누구도 뒤따라 잡기 힘들 정도다.
온갖 경험과, 조각품에 대한 새로운 시도 역시 많았다.
최상의 재료들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은 기회였다.
'곧 조각술 마스터에 오를 텐데… 평범한 작품들만 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어.'
각오만 단단히 한다면 드래곤의 의뢰에 따라서 조각품을 만들지 말란 법도 없는 것!
'거절한다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결국에 하게 만들 거야. 쓸데없이 거절해서 친밀도를 낮출 필요는 없을 테지.'
드래곤의 말처럼 거장 조각사라면 바로 자신이 아니겠는가.
위드는 길고 긴 고민 끝에 담담하게 말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위드는 그날부터 라투아스의 레어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드래곤의 레어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최초의 인간으로 허락된 것이다.
물론 이 장면들은 차후에 방송국을 통해서 많은 유저들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드래곤 사냥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무나 시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레어에는 약 100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엄청난 서재가 있고, 내부에는 마험 실험 창고, 보물 창고, 일꾼들의 숙소 등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
구조는 50평형대 아파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넓이만큼은 그래고달 산맥 안의 하나의 왕궁처럼 엄청난 규모였다.
당연하게도 리치를 비롯해 키메라, 바다 생명체 등으로 구성된 살벌한 가디언들이 통로와 입구들을 지키고 있었다.
위드에게 허용된 것은 마법 실험힐과 보물 창고까지!
마법 재료와 보물 창고에 있는 조각품들의 재료를 꺼내어 사용할 수 있었다.
드래곤의 연금술로 제작된 각종 희귀한 재료들, 대륙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마법 재료가 있었다.
보물 창고에는 등산을 해야 마땅할 정도로 황금과 보석이 쌓여 있었다.
"여기가 한국은행이구나. 이걸 다 팔아 치우면… 못 살 게 없겠다."
위드는 극심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다.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니!'
금괴와 현찰이 가득 쌓여 있는 한국 은행 금고에서 그냥 자장면만 먹고 나오라는 것과 같은 상황!
마법 실험실의 책장에서는 드래곤이 모은 서적들을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물 회오리 마법의 확대 연구>>.
<<육체의 기능 강화>>.
<<생명체의 202가지 실험>>.
마법 주문, 강화, 교양과 관련된 수백 종의 책이 있었다.
위드는 당연히 읽어 보려고 했다.
[ 드래곤 라투아스의 마법 기록 #54
물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
띠링!
- 지혜가 부족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독서 불가능!
평소에 다양한 스텟들을 쌓으면서도 지식이나 지혜는 방치해 두었던 결과였다.
'마법사라면 이익이 크겠군. 나야 별로 관계가 없지만.'
위드는 집중해서 조각품이나 만들기로 했다.
대륙으로 나가서 해야 할 일도 정말 많다. 드래곤의 퀘스트나 깔끔하게 끝내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조각품은 어디에 만들까요?"
- 그대가 원하는 곳에. 내 생각에는 레어의 입구가 넓으니 그곳이 좋을 것 같다.
"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니 좋겠군요. 제 생각에도 이곳이 가장 좋은 위치입니다."
위드는 주변 공간을 잘 살폈다.
조각품은 일종의 설치 마술이라고 할 수 있으니 주변과 세심하게 어울려야 한다.
특히 빛이나 주변 색과의 조화는 필수적이었다. 그레고달 산맥에서 느껴지는 웅장하고 수려한 산의 형태와 기운.
드래곤의 조각품을 만들기에 잘 어울렸다.
'유스켈란타. 뭐, 조각할 대상은 이미 확정되었고… 드래곤의 모습도 원래 비교해 크게 다르게 할 수 없겠지.'
우스꽝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조각품이 되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시도는 제한적이라는 건데.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겠다.'
유스켈란타의 그림은 리치가 가져다 주었다.
순수하고 고결한 실버 드래곤. 찬탄이 나올 정도로 품위 있고 우아하게 생긴 드래곤이었다.
"과연 멋지고 아름답군요."
- 라투아스 님의 친구분이었다. 너는 마땅히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제 예술혼을 아낌없이 불태워 보겠습니다."
뇌물의 힘 때문인지 조금은 호의적인 리치.
위드는 유스켈란타의 그림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아름다운 드래곤이군. 다행히 모델이 좋으니 뭐라도 잘 나올 수 있겠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드래곤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다 같은 강아지라고 해도 체형에 따라서 드러나는 느낌이 달라진다.
유스켈란타는 날씬하면서도 암컷 드래곤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가 적당히 살집이 있고 눈매도 매섭기 짝이 없는 폭력 전과자라면, 이쪽은 인간들의 친구이며 인도자 같은 느낌.
드래곤은 압도적인 강함과 지혜로움 때문에 베르사 대륙을 대표하는 생명체였다.
위드야 드래곤과 악연으로 많이 엮였지만 지혜로운 드래곤은 퀘스트에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드래곤의 조각품이라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지. 더군다나 상당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썩은 나무토막, 굴러다니는 돌 조각으로 죽기 살기로 조각술을 올렸다.
최상의 재료를 바탕으로 조각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았다.
위드는 라투아스에게 요청했다.
"조각을 하기 위해서 은이 많이 필요합니다."
- 원하는 만큼 말하라. 얼마나 필요한가?
위드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많이 요구해야지. 그래야 조각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재료 탓을 할 수 있지 않겠어?'
잠깐 계산 후에 넉넉하게 말했다.
"순도 99.99% 이상의 순수한 은으로 3만 킬로그램 정도……."
싧러 드래곤 유스켈란타의 크기에 맞춰서 일단 말을 해 봤다.
'너무 무리하게 이야기를 했던 건 아닐까. 친밀도라도 떨어지면…….'
- 그 정도면 되겠는가?
"네. 조금 더 있으면 넉넉하긴 할겁니다.
- 4만 킬로를 내주겠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하라.
"허억!"
레어에서 일하는 드워프들이 보물 창고에서 은괴를 옮겨 오기 시작했다.
레어 입구에 수레째로 쌓이기 시작하는 은괴!
로열 로드에서 은의 가격은 그때그때 조금씩 변한다. 대략이지만, 금보다는 70분의 1 정도로 싼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은괴의 산이 쌓이다니!
'이 드래곤이 검소하다고 생각했던건 착각이었어. 월세를 사는 서민이 강남 빌딩 부자를 걱정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군.'
순수한 은이였지만 원하는 형태를 만들기 위해 녹여서 정련을 할 필요는 있었다.
위드에게는 드워프들에 대한 지휘권도 주어졌다.
"이 은을 녹여 주십시오."
"알겠네."
드워프들은 구시렁거리지도 않고 바로 일을 했다.
인근 드워프 마을에서 매년 100여 명씩의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 레어로 불려온다.
드워프 마을에서 공인된 대장장이들인 만큼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아울러 드래곤이 지켜보는 이상 술을 마시거나 농땡이를 친다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뛰어난 대장장이 기술을 가진 드워프들에 의해 순수한 은으로 정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위드는 라투아수에게 또 요구했다.
"장식을 위해 백진주가 있었으면 합니다만."
- 어느 정도의 양을 원하는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최소 100킬로그램 정도는 있어야죠. 그리고 진주는 등급이 아주 중요한데… 2등급 이상이어야 합니다."
- 창고에서 가져다주어라.
1등급 백진주도 즉석에서 조달되었다.
이물질도 없이 깨끗한 최상의 진주.
초급 조각술에 머물러 있던 초보 때 이런 걸 보았다면 침부터 질질 흘렸으리라.
"그리고 이건 무리라는 건 알지만……."
- 말하라.
"헬리움도 있을까요?"
지골라스까지 가서 채굴을 시도했던 살아 있는 금속.
조각사의 꿈이며, 평생의 염원이었다.
"뭐, 없더라도 부족한 재료들을 모아서 최선은 다해 보겠습니다만… 확실한 게 좋다면 아무래도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지라……. 없으시면 그냥 없다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 가져오너라.
헬리움까지 떡하니 등장!
여신의 기사 갑옷을 만들 때 쓴 것보다 그 양도 무려 3배나 되었다.
"백금도 1,000킬로 정도만……."
- 가져와라.
"요정의 눈물도 좀 발라야 하는데요. 대략 1만 리터 이상으로요."
- 가져올 것이다.
대륙의 희귀한 재료들이 드래곤의 레어에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쌓여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빈부 격차가 느껴지는 상황.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라투아스가 들어주는 가운데, 지상 최대의 호화로운 작품을 준비하기만 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