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득수의 분노
[ 팔로스 제국의 건국
위대한 사막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용맹한 전사들이여, 뜨거운 열사의 모래를 벗어날 때가 돌아왔다.
팔로스 제국의 영광이 있던 그곳으로, 강물이 흐르고 수풀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
가장 많은 영토를 얻은 이가 팔로스 제국의 황제가 되리라.
난이도 : 지역 제패
보상 : 팔로스 제국의 황제.
퀘스트 제한 : 사막 전사 한정. ]
팔로스 제국의 재건!
은링, 벤, 엘릭스.
세명의 모험가로 이루어진 대지의 그림자 파티에서는 그동안의 지독한 고생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됐네요. 이제."
"후. 정말 다신 받고 싶지 않은 퀘스트였어."
"난이도가 진짜 말이 안 될 정도였어."
절망의 평원을 발견했고, 엠비뉴 교단을 세상에 드러나게 만들었던 대륙 최고의 모험가 파티!
그들은 엠비뉴 교단의 보물을 구하기 위한 퀘스트를 위해 대륙 전역을 헤메고 다녔었다.
결과는 허무하게도 위드가 엠비뉴 교단의 총본영을 파괴해버리는 것으로 미래가 바뀌면서 끝나고 말았다.
"우리에게는 헛수고였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야."
"엠비뉴 교단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해도 좋네요. 그들의 보물들이나 악마의 술법들이 다 풀려났다면 대륙은 엉망진창이 되었을 거니깐요."
"모험 퀘스트의 난이도를 보면 상황에 따라 악화되는 걸 느낄 수 있지. 로열 로드에서는 베르사 대륙이 망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위드 때문에 찾았던 남부 사막의 메타페이아.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중앙 대륙으로 돌아가려던 도중에 쌍봉낙타를 구하다가 받게 된 퀘스트.
사막의 대제왕과 관련된 14단계의 연계 퀘스트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고생이 진짜 말도 못 해."
"아후.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그동안 인도자의 역할을 했다.
위대한 사막의 대제왕의 후예인 젊은 사막 전사들을 사냥터와 퀘스트로 이끌어서 보살피며 성장시켰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사막 부족들을 퀘스트와 설득으로 통합시켰으며, 위드의 부하들이 남긴 보물들을 찾아내서 사막의 발전을 위하여 썼다.
대지의 그림자 파티에게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많았다.
기껏 키운 사막 전사들이 허무하게 죽어버리거나 모래 폭풍에 휘말려서 사라지고 나면 퀘스트의 성공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북부, 아르펜 왕국에서 퀘스트를 하겠다며 건장한 청년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퀘스트의 끝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제왕 퀘스트를 하시겠다고요?"
"우린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실컷 싸울 수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싸울 수는 있는데 위험한데요."
"그걸 원합니다."
검오치와 수련생들.
그들은 사막 전사보다도 더 용맹했으며 뛰어난 검술 실력과 투지를 가졌다.
그리고 무식했다.
은링이 그들에게 부탁했다.
"아. 여기선 물러나는 게 좋겠어요."
"남자는 전진이죠!"
과감하게 싸워서 전멸.
"전사들의 레벨을 더 올려야 해요. 조금만 더 키우면 안정권에 접어들겁니다."
"애들은 싸우다 보면 알아서 크죠."
사막 전사들까지 데리고 같이 전멸.
사막 부족의 화합에도 사건은 벌어졌다.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오아시스의 지배권을 두고 부족들이 다투는데..."
"흠. 저희들이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오아시스의 역사를 감안해보면요. 그리고 양 부족의 특산품 교역을 알선하는 방향으로 한다면 원만한 해결책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일단 가보고 판단하죠."
그리고는 사막 부족들끼리 전쟁을 치르게 만들었다.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넓은 사막에서 거센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하는 수만명의 전사들을 보며 기도 안 찰 지경이었다.
"..."
그럼에도 아르펜 왕국에서 왔다는 사내들은 기적처럼 어찌어찌 승리를 일구어내기는 했다.
도저히 불가능해보일 것 같은 전투도 거짓말처럼 이겨낼 때가 있었으며, 의외로 사막 전사들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칼질 좀 한다며?"
"그런데?"
"심심한데 덤벼라."
지독하게 오만하고, 사나운 사막 전사들과 싸우고 고기와 술을 나눠마셨다.
전사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인구가 천여명에 지나지 않던 사막 도시들은 위드의 조각술 최후의 비기 중에 노들레와 힐데른 퀘스트 때문에 번성하게 되었다.
숱한 사막 도시들과의 인연을 맺었고 사막 전사들을 양성했다.
"어쨌든 이젠 조만간 팔로스 제국이 건국되겠네요."
"후... 그러게요."
"대제왕의 퀘스트도 끝마무리라니..."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뿌듯함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대륙의 어딘가에 사막의 대제왕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은 유저가 또 있다는 것을.
[ 사막의 패자
끝을 모르는 모래사막에는 팔로스 제국의 드넓은 영광이 묻혀있다.
사막 전사들은 위대한 제국의 부활을 위한 안배를 해 놓았다.
전사들의 피에 흐르는 명예와 투쟁심.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강자가 나타나 대제왕의 길을 걷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막 전사들의 뜻과 의지를 하나로 모으라.
사막의 시험을 통과한 그대가 부른다면 전사들은 기꺼이 아껴 두었던 칼을 꺼내고 따를 것이다.
난이도 : S 사막 퀘스트.
보상 : 대서사시 '팔로스 제국의 건국'으로 연결될 수도 있음.
퀘스트 제한 : 역사적인 사막 전사의 인정.
사막의 영웅인 헤스티거에 의해 강제로 부여됐던 퀘스트!
모험가 대지의 그림자 파티는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었다.
위대한 조각술 마스터이며, 네크로맨서가 되어서 단물을 빨아먹으려는 위드!
그가 숟가락을 얹기 위해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 * *
검오치.
그는 냄새나는 늑대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이 맛 아니냐?"
"야성미가 철철 넘치십니다. 사범님."
"후후."
수련생들 백스물두명.
그리고 사막 전사 35만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하벤 제국의 아이데른 지역으로 진격했다.
"딱 패싸움하러 가는 기분이다."
"비유가 정말 적절하십니다. 사범님."
"완전 시인 아니십니까?"
"크후훗. 여긴 천국이다. 말이 아니라 주먹과 칼로 이야기를 하니 말이다."
검오치는 스스로의 머리에 대해서 약간의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한다.'
로열 로드를 하면서 드디어 생긴 버릇.
어릴 때부터 부모님한테 수없이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말을 들었는데 드디어 생긴 것이었다.
다른 사범들이 몬스터를 보면 검부터 뽑아들 때에 생각을 했다.
'저놈 칼질하는 맛 좀 나겠는데?'
강자를 만났을 때세도 생각을 했다.
'팔모가지를 날려버리곶나서 어깨, 옆구리, 발목 순서대로 쳐야지. 흠뻑 두들겨 패줘야겠다.'
옛 아이데른 왕국 지역은 현재 하벤 제국의 중소 영주들이 다스렸다.
드넓은 일스 대평원과 소규모 공국 지역의 땅들은 헤르메스 길드에 큰돈을 바쳤거나, 공적을 세운 유저들이 골고루 나눠먹었다.
"다 쓸어버리자!"
"후와아!"
검오치와 수련생들이 이끄는 사막 전사들은 일스 대평원을 가로질렀다.
"침략! 침략이다!"
중앙 대륙이 수천여개 길드로 나눠져 있던 시절부터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소규모 공국 지역!
헤르메스 길드가 지배하는 하벤 제국군은 일스 대평원에서 급하게 수비에 나섰다.
"공격 마법을! 더 가까이 다가오면 화살을 쏴라."
일스 대평원에서 수확되는 방대한 곡물!
요새와 성벽에서 막으면 막대한 식량을 사막 전사들에게 넘겨줘야 했던 것이다.
정작 검오치와 수련생들은 농산물 수확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다.
검오치는 적들을 보며 생각했다.
'머리 숫자가 절반밖에는 안 되는데? 음. 그럼 공격해야지! 내가 봐도 합리적이고 똑똑한 판단이야.'
제국군에는 급하게 모이느라 인근에 백여명이 넘는 영주들의 군대는 참여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사막의 영광을! 시원하게 싸워보자!"
"선봉은 제가 섭니다."
"간다. 먼저 가는 사람이 임자다."
"우랴우랴우랴!"
검오치와 수련생들이 진격 명령을 내리자 낙타를 탄 사막 전사들이 해일처럼 전진을 시작했다.
크구구구궁 콰과과광!
마법병단의 마법공격이 융단 폭격처럼 평원에 작렬했다.
"이랴. 달려라!"
"더 빨리.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
사막 전사들은 검오치와 수련생들과도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오로지 돌진!
적의 눈을 쳐다보면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려간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시미터를 돌리며 걷어낸 사막 전사들은 그대로 하벤 제국군의 진영을 강타했다.
"크하하핫. 바로 이 맛이지!"
적진에 난입한 검오치는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놈. 여기서 막겠다!"
"재밌을 것 같군. 덤벼라!"
검오치는 가끔 기사들과도 창을 맞댔다.
전력을 다해서 말과 낙타를 달리면서 검과 창을 부딪치면서 겨뤘다.
빠른 이동 중에 절묘한 균형 감각과 힘,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겨루는 기마전!
"고작 이 정도인가!"
"크윽. 분하다."
검오치의 힘 앞에 하벤 제국 기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낙타와 말을 탄 상태에서는 경험과 감각의 차이가 컸다.
수련생들과, 사막 전사들 역시 제국군을 압도했다.
제국군의 정규군은 하벤 지역이나 북쪽에 몰려 있었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남부 지역에는 하벤 제국군에서도 2급이나 3급에 속하는 제국군 병사들!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도 백명이 좀 넘게 군대에 속해 있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는 걸 보자마자 일찌감치 도주한 후였다.
일스 대평원의 승리!
사막 전사들은 고작 수천명도 죽지 않았는데, 제국군은 4만명이 죽고 나머지는 전부 포로로 잡혔다.
검오치조차도 놀라서 물었다.
"내 지휘 능력이 이렇게 좋았냐?"
"그러게요. 우리가 해낸 게 맞습니까. 사범님?"
"돌을 던졌는데 코끼리가 쓰러진 것 같다."
"음... 마법 공격을 당할 때 또 그런식으로 전멸할 줄 알았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겨서 어리둥절해 있던 수련생이었다.
무턱대고 돌격해서 실컷 하울 뿐이었지 결과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 했다.
특히 이런 큰 규모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대승이라니!
"뭔가 불안해진다."
대학물을 한 학기 먹다가 중간에 쫓겨난 검백십칠치가 말했다.
"사범님. 이럴 땐 조언을 얻어야합니다."
"역시 그렇지. 똑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검오치와 수련생들은 마법 통신을 이용해서 아르펜 왕국의 군사 총사령관 알카트라와 대화를 나눴다.
알카트라는 과거 하벤 제국의 북부 지역을 다스리다가 아르펜 왕국으로 넘어온 나름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 알카트라 : 아마도... 기습의 효과가 컸던 것 같습니다. 하벤 제국에서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용맹한 낙타 기병들이 돌격에 성공하면 방어 진형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기도 하지요.
검백십칠치가 간단히 해석을 했다.
"선빵 날린 게 효과가 컸다는 거 같습니다."
"흠. 나도 그렇게 듣고 있었다."
- 알카트라 : 다만 문제는 앞으로의 일입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대규모 병력이 결성되어 일스 대평원을 향하게 되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막지 못합니다.
"놈들이 떼로 몰려올 거라는데요?"
"알고 있다. 많이 겪어봤잖아. 원래 지면 떼로 몰려오는 거니까."
- 알카트라 : 사막 전사들은 제국군 병사들에 비해서 강합니다. 그런데 조합이 너무 나쁘죠. 중보병사단에 마법 병단이 동원되면 허무하게 질 겁니다. 사막 전사들은 공성전으로 버틸 수도 없을 거고, 저라면 원거리에서 끊임없이 마법으로 견제하면서 사막 전사들의 숫자를 줄일 겁니다.
"마법으로 멀리서 때린다는데요?"
"그건 좀 많이 아프지."
"어떻게 해결할까요?"
"그것도 그냥 물어보자."
- 알카트라 : 정복 전쟁은 오랫동안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침략해서 크게 이기긴 했지만 다음에 싸우면 질 겁니다.
알카트라는 사막 전사들을 데리고 평원처럼 넓은 지형에서 막아야 한다고 조언을 했다.
30분 가까이 제국군을 상대하는 전투 진형에 대해서도 말을 해주었는데 검오치와 수련생들은 열심히 들었다.
"커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전쟁 준비에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습니다."
- 알카트라 : 별말씀을요. 언제든 물어보실 것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마법통신이 꺼지는 순간, 검오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알아들었냐?"
"뭔 말을 하는 건지. 뭐라고 설명은 하긴 하던데 졸려서 못 들었는데요."
"나도 잘 모르겠다."
검오치와 수련생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덩치 큰 사내들끼리 주르르 모여앉아 회의를 나누었다.
엄청난 병력과 포로들. 드넓은 땅!
"우리가 진짜 왕이 될 수 있을까?"
"글쎄요. 반장도 못 해봤는데요."
"골목대장이 제일 마음 편하고 좋지 않습니까?"
검오치와 수련생들은 머릿속이 깨끗한 게 좋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내한테 물어보자."
"예. 그게 젤 낫겠습니다."
"녀석이라면 방법이 있겠죠."
검오치는 위드에게 귓속말로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하고는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있겠냐?"
돈이나 이익에 관해서는 초고성능을 자랑하는 슈퍼컴퓨터급의 위드의 두뇌가 회전하고는 결론을 내놨다.
- 위드 : 사형들이 지키긴 어렵죠. 대평원 부근의 도시도 하나 둘이 아니고요.
"그럼 다음에 싸우다가 다 죽을까?"
- 위드 : 그럴 필요야 있겠습니까. 지금 일스 대평원의 하벤 제국군 병력은 전멸했죠?
"응. 이 동네 유저들이 그러는데 이 주변 제국군은 없다더라. 도시나 성은 지키고 있겠지만."
- 위드 : 영주들의 병력은 그리 안 클 겁니다. 세금 거두는 정도의 병력밖에는 안 두는 편이니까요. 걔네들을 전부 치세요.
"정복하라고?"
- 위드 : 아뇨. 그냥 공격해서 다 함락하고 약탈하세요.
"약탈?"
"오오... 함락과 약탈이라니!"
검오치와 수련생들의 귀가 솔깃했다.
약탈!
머리가 나빠도 이해가 잘 되는 깔끔하고 시원한 단어였다.
"그 다음에는? 제국군이라는 놈들이 물러올 때까지 전쟁 준비를 하며 기다려서 싸우면 되나?"
- 위드 : 아뇨. 놈들이 바라는 걸 해줄 필요는 없죠. 포로들을 잔뜩 데리고 사막으로 물러나세요.
"기껏 군대와 싸워 이기고 땅까지 얻었는데, 다시 철수하라고?"
- 위드 : 사형들한테 땅이 왜 필요합니까. 집 짓고 살 것도 아닌데요.
"그렇기는 해."
- 위드 : 대평원의 곡물부터 시작해서 각종 자원과 돈, 사람을 끌고 사막으로 돌아가세요. 제국군 포로들이 많다면서요.
"다 항복하니까 죽일 수도 없고 잡아놓긴 했지."
- 위드 : 전부 데려가서 사막 전사 훈련을 시키세요. 그리고 병력을 마구 늘려서 하벤 제국의 이곳저곳을 마구 침략하는 겁니다.
"침략..."
약탈과 침략!
검오치는 생각했다.
'뭔가 마음에 드는 단어들이 많아. 이건 절대적으로 옳은 작전 같다.'
- 위드 : 사막 전사의 전투 방식이죠. 지키지 않고 빼앗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근데 놈들이 쫓아오면?"
- 위드 : 제국군이 사막까지 들어오진 못할 겁니다. 드넓은 국경을 들쑤시면서 사람이나 자원을 사막으로 전부 끌고 가세요. 부족한 사람과 자원을 챙기면 남부 사막 지역도 빠르게 발전하겠죠.
"음. 발전이라... 좋군.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라."
- 위드 : 일스 대평원의 곡물이 있으면 포로들을 먹이기에 충분할겁니다. 먹이고, 재우고, 일을 시키면 어떻게든 나아지겠죠. 그리고 부족한 자원이 있으면 아르펜 왕국의 해상교역으로 보내드릴게요.
"교역?"
- 위드 : 식량이나 생산 물자, 전투 물자. 무엇이든지 아르펜 왕국과의 교역으로 확보하면 됩니다.
위드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해상 교역을 통해 사막 지역의 사치품을 수입하고, 아르펜의 물자들을 수출할 생각을 했다.
아르펜 왕국도 개발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자의 생산량이 늘어나서 수출로를 필요로 했다.
사막 지역에 병장기를 비롯한 넘치는 전트 물자를 수출하고, 사치품과 금과 은, 동물과 가죽을 수입하면 된다.
사막 지역에 대해서는 특히 잘 알고 있는 위드라서 아르펜 왕국과의 상거래를 통해 얻을 게 많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사막 지역 혼자 발전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남부 사막이 아르펜 왕국과의 교역을 진행한다면 발전 속도는 몇배나 빨라질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줄 거냐. 고맙다. 막내야."
- 위드 : 예. 팔로스 제국의 건국은... 아니, 사형 일이 제 일 아니겠습니까.
* * *
"음. 레벨을 두개 올렸군."
위드는 사냥을 하면서 성장에 완전히 만족하진 못했다.
하루나 이틀에 한개 정도의 레벨업!
방금 462의 레벨을 달성했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경험치를 모으고 있었지만 레벨 400대의 유저들은 이미 꽤 많아진 시점이었다.
레벨 100 이하의 초보들은 로열 로드를 하면서도 시간을 보내며 느긋하게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순수하게 취미로 로열 로드를 탐험하고 즐기는 유저들!
불행히도 풀죽신교의 유저들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었다.
레벨이 200, 300을 넘어가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사냥도 재미있고, 캐릭터의 성장과 퀘스트를 하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성취감에 빠졌다.
레벨이 400대를 넘어가면 퀘스트를 통해 상당한 업적을 쌓는다.
작은 마을은 물론이고, 그 지역의 일부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상당한 비중을 가진 퀘스트!
특정 마을에 공적을 계속 쌓다 보면 주민들이 영웅으로 칭송하거나 기념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에 푹 빠지다 보면 레벨을 올리는 데 소홀하지 못했다.
로열 로드 전체에서도 1만 등수에 꼽히는 랭커가 된다면 어디서라도 자랑할 수 있었다.
로열 로드를 즐기지 않는 국가는 거의 없다.
하와이나 홍콩, 파리, 런던, 뉴욕.
어느 도시에서라도 로열 로드에서 랭커라면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듬뿍 받는 것이 가능했다.
레벨이 곧 인기이고 돈이 되는 세계!
퀘스트와 조각술 최후의 비기를 얻기 위해 뒤처진 위드의 400대 중반정도의 레벨은 절대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저들처럼 억지로 올린 400대 중반의 레벨은 아니었다.
방대한 스탯과 퀘스트 경험.
조각술 최후의 비기 퀘스트를 하면서 잃어버린 레벨까지 감안하면 간신히 원래대로 복구를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더 높은 곳으로. 진정한 악당이 되려면 강해져야 햊 어중간하게 약한 악당이야말로 졸렬하게 퇴치당하는 뻔한 결말로 가게 되니깐."
위드는 방송으로 판매되는 수익까지도 감안하면 지금 상태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땅을 좀 사놔야겠어."
은행에 저축은 물론이고, 땅 투기까지도 가능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믹스 커피라도 마시고 싶은 날에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츄리닝 차림으로 동네 은행에 간다.
프리미어라운지!
VIP손님들만을 상대로 하는 은행 창구에서 과자와 커피를 당당하게 꺼내먹고 나왔다.
친절한 은행 직원들에게 저축 상품에 대한 설명까지 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 곳이란 말인가.
"돈이 있으면 커피숍이 따로 없구나."
과거에는 천장에 매달아놓은 생선을 보고 밥을 먹었다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
돈이 있으면 쓰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대우를 해주었으니까.
심지어 신용카드 회사에서도 하나만 발급받으면 사은품을 듬뿍 안겨준다고 한다.
예전에는 단돈 만원도 빌릴 곳이 없었는데 5천만원 한도의 마이너스 통장이나 대출도 권유했다.
물론 빚은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돈우 빌려서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철저히 몸으로 깨닫고 있는 위드였다.
"참 그러고 보니 그놈들은..."
위드는 사냥터를 전전하면서 과거 생각이 났다.
학교에까지 빚을 받으러 쫓아오던 사채업자들.
심심하면 찾아와서 지독햐 행패를 부리던 사채업자들에 대한 기억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시간도 꽤 지났으니... 나중에 더 성공해서 꼭 복수를 해줘야지."
돈과 권력.
위드는 일단 돈부터 많이 갖고 싶었지만 혹시나 권력도 갖게 되면 복수는 필수라고 생각했다.
* * *
정득수는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볼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러웠다.
"저 남자. 불쌍한 거 같지 않아요?"
"맨날 혼자 돌아다니죠?"
"양복은 자주 입던데 일은 안 하는거 같아요. 출근하는 모습도 한번 못 봤어요."
기업 회장으로 살아갈 때는 종업원들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본사에 출근했었다.
해외 출장을 갈 때에도 한국의 대기업 회장으로서 어딘 가더라도 대우를 받았다.
정득수는 최고급 호텔에서 지배인들에게 귀빈 대접을 받았으며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할 때가 드물었다.
젊을 때는 신도시 건설 사업을 위해 방문한 사막 한복판에서도 호화로운 요리를 차려놓고 만찬을 즐겼다.
그리스 남쪽, 지중해에서도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팔아치우며 최신형 요트에서 파티를 했었다.
수출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정부로부터 상장도 받아봤고, 성공한 재벌 2세로 신문에 자주 이름도 오르내렸다.
'그러면 뭐하나. 다 망해버렸는데.'
정득수는 과거의 영광이 짐처럼 느껴졌다.
호성 그룹의 회사 지분을 정리하면서 가진 상당한 현금과 해외 부동산들.
중년인 지금부터 앞으로 남은 노후를 보낼 돈이야 넉넉했지만 그룹에는 아무 영향력도 남지 않았다.
그에게 아부하던 직원들은 백화 그룹과 벽일 그룹의 눈치를 보면서 연락마저 끊었다.
명절이 찾아오더라도 배 한 상자 보내오는 이가 없었다.
'안보내주면 내가 사 먹으면 되지.'
정득수는 장바구니에 라면이나 배, 귤을 담아서 계산했다.
마트에 있던 계산원 아줌마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오후부터 할인 들어가는데. 기계로 하는 거라 10분만 기다리시면 할인 가격에 살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지금 계산해주세요."
"아까워서 그러죠."
"계산하셔도 됩니다."
정득수는 턱을 들고 오만하게 말했다.
기업 회장으로서 살아온 자신이 고작 3천원 때문에 10분을 기다리지 않으리라.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
그렇지만 아줌마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마트를 오시고, 회사 다니세요?"
"아뇨."
"그럼 자영업 하세요?"
"아닌데요."
"아. 그러시구나. 죄송해요."
"..."
어딘가 정신 패배를 당한 느낌!
정득수는 마트를 나와서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괜히 이 동네로 이사를 왔나?'
바로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이다.
이 동네는 유별나게 이웃들끼리 서로 잘 알고 지냈다.
'한적한 동네라서 그렇겠지.'
피붙이인 딸이 살고 있는 집과 가까이 살고 싶었다.
현실은 그룹 회장의 자리를 놓고나니 서윤은 물론이고 이현을 보기도 껄끄러워서 피해 다니는 처지였다.
딸에게만큼은 대그룹의 오너로서 왕처럼 당당하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패잔병의 신세가 되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몰골은 너무도 비참했다.
'외국으로 나가버리면 편하겠지만... 그러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딸을 못 보겠지.'
정득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면서 집으로 향했다.
'마트에 가는 것도 상당히 귀찮다.'
식사의 대부분을 주문 음식을 시켜 먹었지만 간단한 식료품들은 구입을 해야 했다.
'자장면도 지겹고... 한 그릇만 배달해달라고 하면 왜 이렇게 눈치를 봐야하는 건지.'
정득수가 잠시 푸념을 하면서 걷고 있을 때였다.
그의 집 앞에 이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 저놈이?'
그가 한창 잘나갈 때는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딸 도둑놈.
'한창 사냥을 하느라 바쁠 텐데. 조각사를 마스터하고 나서 전직도 했잖아.'
아르펜 왕국의 작은 마을들을 오가면서 수레에 잡다한 물품을 가득 실어서 교역을 하고 있는 자신이다.
로열 로드에서는 정득수의 캐릭터인 바트와 위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이현이 서 있으니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이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밥은 먹었는가?"
"예. 집에 별일 없으시죠?"
"별일은 무슨... 덕분에 잘 지내지."
어른들부터, 노인들까지도 이현의 앞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날씨가 참 추운데 웬일인가?"
"볼일이 있어서요. 할머니도 일찍 나와 계시네요?"
"요즘은 폐지도 잘 안 모여서..."
"추운데 3호집 가서 순댓국이나 드세요."
"또 사주는 건가?"
"사주기는 무슨. 제 이름으로 그냥 달아놓으세요."
동네의 노인들이 이현만 보면 주름살을 펴며 활짝 웃었다.
용돈과 음식을 챙겨주고, 시장에서 싸게 파는 옷이 있으면 사서 나눠준다.
말로만 복지를 떠드는 정부보다도 훨씬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집주인들이 빈집을 놀리고 있으면 이현이 만나러 찾아갔다.
"집이 비었네요?"
"그게... 월세를 내놓긴 했는데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두달 넘은 거 같은데. 가격을 싸게 내놓으세요."
"낮추긴 했는데..."
"부동산에서 그러는데 수리할 곳도 많다던데요. 저쪽에 가건물에 사는 흥춘이 할아버지 집이 무너지기 직전이에요. 고치면서 깨끗하게 쓸 분이니까 월 17만원에 주세요."
"뭐라고? 그 가격은 곤란한데. 집이 잘 안 나간다고 15만원이나 깎아줄 수는 없잖아."
"싫어요? 거절하신 겁니까?"
"어...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사람들이 참 입이 싸요. 저도 그렇고요. 이런 말 퍼지면 그리 좋진 않을 텐데. 이동네 오래 사셔야죠?"
"으응. 그래야지."
동네에서 이현의 힘은 절대적!
이현의 말이 떨어지면 노인정에서 화투를 치던 노인들부터 어린이집의 아이들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국회의원이나 시장, 시의원 선거가 있을 때에도 이 동네에 오면 꼭 이현에게 인사부터 했다.
좁은 동네이긴 해도 당당한 지역 유지!
정득수의 눈가가 좁혀졌다.
'저녀석이 수완이 놀랍기는 해.'
그가 한창 잘나갈 때만 해도, 사실 지금도 국회의원 정도를 만나거나 시장과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젊은 나이에 벌써 이안큼이나 이룩해낸 건 보통의 능력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끄는 능력이 있는 건가. 로열 로드에서만이 아니라.'
동네의 중심.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몇몇 사람들은 이현의 존재를 껄끄러워했던 적도 있다지만 지금은 다들 좋아했다.
이현 때문에 유명해지고 동네가 살기 좋은 지역이 되었다.
크든 작든 그 영향을 입다 보니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저 녀석이 왜 내 집 앞에 서있지?'
정득수는 다가가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노인 한분이 다가와서 말했다.
"어서 가보게."
"예?"
"거참. 눈치도 없나. 바쁜 사람 기다리게 하지 말게!"
"..."
이 동네의 노인들은 철저히 이현의 편이었다는 걸 잠시 잊었다.
만약 이현이 지금 국회의원은 안되겠다고 말 한 마디라도 한다면 당장 시위라도 나설 것이다.
'정말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정득수는 주저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당당하지 못한 처지라서 어깨가 좁아졌고 발걸음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보자마자 이현이 하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르신. 저녁에 저희 집에서 식사라도 같이 하실래요?"
"밥이야 뭐 집에서 대충 먹으면..."
정득수는 대답을 하다가 아차 싶었다.
집에 가봐야 자장면이나 시켜먹거나 저녁에 치킨이나 주문해서 먹게 될 것이다.
지겹도록 먹고 있는 음식이었고 딸인 서윤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무슨 염치로...'
정득수는 차라리 거절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지금 집에서 드신다고 확실히 거절하신 거죠?"
"거절한 거 맞네."
"어떻게 한다. 따님에게 집에 모셔 오겠다고 말해놨는데."
"으응?"
"저녁 같이 먹자고 허락도 받아놨는데."
"..."
정득수는 이현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같이 먹자고 말하고 싶었다.
딸과의 저녁 식사.
몇년 동안 제대로 얼굴도 못 보고 이야기도 못 나눈 딸과의 오붓한 저녁 식사.
호성 그룹의 계열사 하나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지난번에도 거절하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근데 이번에는 딸한테 허락도 받아놨다고?'
차마 체면 때문에 바지를 붙잡지는 못하고 있을 때!
'이놈아. 한번만 더 권해봐라.'
딱 한번만 더 권유한다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리라.
'그림이 그렇게 되어야 좋지.'
정득수가 가만히 서서 먼 산을 쳐다봤다.
이현이 늘어져라 길게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우리랑 정 같이 안 드시겠다면 어쩔 수 없죠. 여러모로 바쁘실 테니까요."
"그...렇지."
텅 빈 집에 가봐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밥을 시켜먹고 로열 로드에나 접속해서 시간을 때울 뿐.
'한번만 더 권해라. 딱 한번만.'
시커멓게 속이 타들어가려고 하는데 이현이 성의 없이 말했다.
"그래도 아주 바쁜 일 없으면 그냥 간단히 식사나 같이 하시죠?"
"그럴까?"
* * *
"커허험."
정득수 회장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헛기침부터 했다.
'이게 다 뭐냐.'
잘 구운 관자와 노릇노릇 구운 꼬치구이.
반찬으로는 더덕 무침과 잡채, 두부탕수, 흑임자샐러드.
막 담아 숨이 살아 있는 생김치에 인삼이 들어간 삼계탕!
'냄새가 기가 막히는구나.'
요리는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눈으로도 예쁘게 보였지만, 풍겨오는 향이 보통이 아니었다.
맛있는 요리만이 풍기는 절대적인 향!
감미롭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냄새를 맡고 있으면 저절로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어서 빨리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서 음식을 먹고 싶었다.
정득수는 문득 몇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내 딸아이가... 이렇게 요리를 잘 하는구나.'
서윤이 병원에 있을 때 가끔씩 시간이 나면 문병을 갔었다.
실어증에 걸려서 창밖만을 바라보는 딸에게 말이라도 몇 마디를 걸어보고,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며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호성 그룹의 모든 것. 주식과 현금. 전부를 네게 물려줄 거다. 이 세상에서 넌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될 거야. 그러니 어서 낫기만 하렴."
병원에 찾아올 때마다 거액의 돈을 남겨준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큰 행복을 줄 테니 어서 병원을 나오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윤이 병원에서 라면을 끊이는 모습을 봤다.
면과 스프만을 넣는 게 아니라 소시지와 파, 치즈, 만두까지도 섞어서 넣었다.
"맛있겠구나."
정득수가 무심코 말했을 때에 서윤이 그릇에 라면을 담아서 넘겨줬다.
'나아가고 있어. 내게 라면을 줬어!'
감격에 겨워서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가득 집었다.
'딸이 처음으로 끓여주는 라면.'
면발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건 독이다!'
맵고, 짜고, 느끼하고, 기름졌다.
만두는 뭉개져서 국물 위로 떠다니는데 씹는 식감까지도 최악이었다.
"크흐흠."
정득수가 억지로 한 입을 먹고 나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때마침 비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그래? 오늘 갑자기 한 회장이 보자고 한다고? 그래. 식품 수출 때문인 것 같군. 관련 자료 준비해놓고 있어."
정득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아.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할 것 같구나. 다음에 보자."
서윤을 남겨놓고 서둘러 병실을 떠났었다.
무사히 병원을 퇴원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게 되다니.
'시간이 약이었구나.'
정득수가 감격해서 젓가락을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삼계탕보다도 관자나 꼬치구이, 두부탕수나 잡채부터 먼저 맛을 보고 싶었다.
"..."
하지만 그때 서윤이 밥상의 중심에 있던 반찬 그릇들을 이현에게 옮겼다.
꼬치구이와 관자를 먹기 좋게 찢어서 이현의 숟가락 위에 올려놓는 것 이었다.
'딸이... 내 딸이.'
그릇이 조금 멀리 옮겨지긴 했지만 정득수가 먹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딱 15센티 정도!
고작 그만큼 멀어졌을 뿐인데도 젓가락을 내밀어서 뻗기에는 굉장히 민망해지고 말았다.
"음. 잘 익었네."
이현은 그 귀한 요리를 입에 넣고 당연하다는 듯이 맛있게 씹었다.
'저, 저런 나쁜 놈이.'
정득수는 체면 때문에 수저를 들고 삼계탕 국물을 떠먹었다.
'음... 이것도 맛있긴 하네.'
고기도 찢어서 먹었다.
몸에 좋은 여러 가지를 넣고 푹 끓인 진한 육수와 잘 삶아진 삼계탕.
삼계탕이 맛있다 보니 관자나 꼬치구이.
다른 반찬들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졌다.
밥상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처럼 감히 뻗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의 삼계탕에 들어 있는 닭은 다리가 하나뿐이었다.
'설마 치사하게 닭다리까지?'
정득수가 슬그머니 살피자 이현의 뚝배기에는 닭다리가 세개나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