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48권 : 1. 칼라픽 왕궁 (322/520)

달빛 조각사 48권

1. 칼라픽 왕궁

조각술 최후의 비기. 시간 조각술이 고급이 되어야만 열리는 여행의 조각술!

위드는 베르사 대륙의 역사를 빠짐없이 꿰고 있었다.

'몬스터의 침략이나 전쟁. 엄청난 일이 많이 벌어졌지.'

베르사 대륙의 역사서에 보면 중요하게 기록된 사건들이 꽤 있었다.

- 브루커 왕국 몬스터 침략으로 이틀 만에 멸망.

- 네미아스 요새. 37일간의 전투로 폐허로 변함.

- 바다에서부터 끝을 모르는 몬스터의 침략. 3년간 대륙의 절반이 몬스터의 침공으로 시달림.

'음. 아주 훌륭해.'

여행의 조각술은 시간의 흔적을 좇아서 특정 시점으로 갈 수 있는 기술이다.

'전쟁이다. 전쟁.'

순수한 조각사라면 역사적으로 예술이 번성했던 시기부터 관심을 가졌으리라.

멋과 낭만을 찾아서 문화와 관광이 번성했던 왕국의 수도로 자유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다.

혀를 사르르 녹이는 맛있는 음식이나 건물들, 환한 미소를 짓는 미녀들을 구결할 수 있을 테니까.

베르사 대륙의 역사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조각술 최후의 비기!

위드는 몰스 던전에서 시간 조각술의 스킬 레벨을 고급까지 올렸다.

띠링!

- 중급 시간 조각술 스킬의 레벨이 10이 되어 고급 시간의 조각술 스킬로 변화됩니다.

시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여행의 조각술을 터득했습니다.

현재 3회의 시간 여행이 가능합니다.

시간 여행의 횟수는 매달 1회씩 갱신이 되며, 퀘스트의 완수로 늘어나기도 합니다.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시에는 특수한 모험이나 역사, 예술, 경영, 전투, 제작 퀘스트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여행의 조각술은 스킬 레벨이 오를 때마다 더 많은 지역과 퀘스트, 역사를 탐험할 수 있습니다.

스킬 노가다로 획득한 고급 시간의 조각술.

위드가 첫 번째로 선택한 장소는

'칼라픽의 궁전.'

이런 고생은 나눌수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복하기에 동료들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 * *

몰스 던전에서 헤르메스 길드의 척살대를 처리하고 분위기가 잔뜩 고조되었을 때였다.

위드는 동료들과의 이별이 아쉬운듯이 말했다.

"그래도 좀 허전한데. 만난 김에 기념으로 사냥이나 한 번 할까요?"

오래된 순진한 동료들은 물론이고, 파이톤과 양념게장까지 의외로 쉽게 낚였다.

"그럼 사냥이나 하러 가죠."

위드는 작은 목소리로 스킬을 사용했다.

"여행의 조각술."

수천 가닥의 빛들이 모여들더니 사람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영롱한 포탈이 형성됐다.

< 시공간을 초월한 여행의 조각술이 발동되었습니다. >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위드는 다른 동료들이 자세한 걸 묻기 전에 서둘러 찬란한 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포탈로 들어갔다.

감쪽같이 사라진 위드.

"와. 위드님 새로운 이동 스킬 얻으셨나보네요."

순진한 수르카는 감탄했다.

이리엔도 착하고 의심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모험하면서 얻은 스킬인가봐요."

다른 동료들도 받아들이는 것은 비슷했다.

"아. 부럽다. 근데 네크로맨서한테 텔레포트 게이트 같은 이동 스킬이있나?"

로뮤나는 조금 질투를 했으며, 제피는 이동 스킬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게 먹고 싶다. 음... 유린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을 텐데. 살을 발라내서 먹여주고. 크으. 맥주도 한 잔 하면서.'

벨로트와 화령은 사냥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딱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녀들끼리 레벨을 올리면서 상당히 어려웠는데, 위드와 함께 하면 힘은 들어도 지나고 나면 최고의 효율을 보인다.

파이톤은 경쟁심에 불타올랐다.

'전사라면 힘이지. 네크로맨서로 전직을 했다지만... 조각사에서 무력이 약해지진 않았을 것. 이동 스킬 까지 얻다니 쓸모가 많을 거야. 어쨋든 자세한 건 옆에서 겪어보면 알겠지.'

관찰력이 뛰어난 암살자 양념게장 조차도 의심을 못했다.

'아이템을 사용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냥 스킬을 발동하는 형식이네. 청므 보는 것이라 신기한데... 조각술 관련 같기도 하고.'

위드가 있었다면 스킬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봤겠지만 먼저 들어가 버렸다.

자세히는 몰라도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마 속이거나 뒤통수를 치겠어?'

위드를 향한 수식어부터 어마어마하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이며 전쟁의신, 최초의 마스터.

모험으로 얻은 수많은 호칭들을 제외하고도 이 정도였다.

'안 좋은 거라면 먼저 선뜻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야.'

파이톤과 양념게장은 명성을 믿었고, 동료들은 그냥 의리 밖에는 몰랐다.

전형적으로 빚보증 잘못 서줄 유형들!

페일부터 아무 생각 없이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페일이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포탈로 들어간 직후였다.

그의 몸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천, 수만 개의 빛줄기들이 그의 빠른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텔레포트가 아니네?'

아득한 하나의 점을 향해서 쇄도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포탈을 통과한 장소는 엄청난 함성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반역자들을 제압하라!"

"모든 기사들은 죽음으로 폐하를 지킨다."

"돌격! 돌격! 기사단은 전력을 다해 적진으로 뛰어들라!"

칼라픽의 궁전.

중소 도시의 면적과 가까운 왕궁에는 왕실 기사들과 반란군으로 인한 전투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뭐, 뭐야. 어디야 이거."

페일이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스럽게도 바로 옆에 위드가 있었다.

"위드님!"

"음. 일찍 들어오셨군요. 역시 첫 번째로 들어오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넵. 당연히 위드님을 따라 첫 번째로... 아니. 근데 이게 뭡니까? 여긴 어디고요?"

"사냥하러 온 곳입니다."

"사냥이요?"

위드는 성공한 사기꾼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네. 여기가 사냥터죠."

띠링!

< 칼라픽의 생존자 >

수십 년이 넘도록 가뭄에 시달리며 쇠약해진 왕국 칼레.

아울트 산맥을 내려온 몬스터들로 인하여 왕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귀족파의 반란과 군대의 이탈로 인해 칼라픽 궁전은 피로 물들고 있다.

이 땅에 명예나 권력, 도덕은 이미 땅에 묻혔다.

벌어지는 전투에서 버티고 살아남아라.

난이도 : A

보상 : 전사의 용맹과 전리품.

퀘스트 제한 : 생존.

퀘스트가 강제로 부여됨.

퀘스트의 발생!

그냥 사냥만 하더라도 쓸 만한데 전투 퀘스트까지 만들어졌다.

위드는 이미 시간 조각술로 온 전후 사정을 알고 있었지만, 페일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퀘스트는 왜... 그리고 칼라픽이란 지명의 왕궁이 있었나요?"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역사적으로 보면 한 780년 정도 전에 멸망했거든요."

"근데 어떻게 제가 칼라픽에 와 있죠?"

"칼라픽이 멸망하던 그 역사 속으로 들어왔거든요."

"..."

시간 여행!

페일의 머릿속을 스쳐간 단어였다.

순간적으로 투철한 믿음을 가진 전투 노예답게 위드가 굉장하고, 또 이런 모험에 자신을 끌어들여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만만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모험에 뛰어들려면 믿을 수 있는 동료만을 옆에 둘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게 불만도 있었다.

"근데 왜 이런 사정을 미리 설명을 안 해주셨죠?"

"세상에 모든 일을 설명하면서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길게 설명하면 안 올 수고 있을 것 같아서요."

위드는 당당하게 말했다.

험한 세상에서 약간의 꾀를 내면서 살아가는 건 죄가 아니다.

순진하게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답답할 뿐!

"크으..."

페일은 한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납득했다.

'음. 맞는 말이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들어왔으니 위드님을 탓할 수는 없어.'

위험한 전장에 끌려오긴 했지만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쨌든 위드가 찾은 모험이라면 고생은 하더라도 성공 가능성은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보니 전투 규모가 정말 크네요."

"역사적인 혈투니까요."

위드와 페일의 눈에 왕궁 건물들이 불에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기울어져서 무너지는 건물들 사이에서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치열하게 피를 튀기는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왕실의 편에 서서 싸워야 하나요?"

"일단은 그러는 편이 좋겠죠."

"일단요?"

"상황을 봐서 뭐든 해도 될 겁니다. 어차피 살아남기만 하면 될 테니까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은 퀘스트.

파아아앗

열려 있던 포탈로 메이런과 수르카가 도착했다.

"여...긴 어딘가요?"

"칼라픽 왕궁입니다."

전투 노예 페일을 따라온 연인과, 일단 별 생각 없이 왔던 수르카.

그녀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칼라픽 왕궁요? 거긴 역사에 기록된 사지잖아요."

메이런은 방송 진행자로서 베르사 대륙의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페일은 분위기도 모르고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봤다.

"그곳이 여깁니다. 시간 여행을 통해서 왔어요."

"켁! 그럼 죽으러 온 거잖아요."

메이런은 절망적이기는 했지만 곧 기쁨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자! 방송 한 건 건졌다!"

헤르메스 길드와의 분쟁이라면 진행자로서 방송의 중립을 지켜야 했겠지만 이번에는 직접 참여할 수 있었다.

수르카가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잠시 쳐다보더니 위드에게 은근하게 물어봤다.

"귓속말이 보내질까요?"

"모르겠는데요."

"일단 대화 채널로 말해볼게요."

- 수르카 : 와... 여기 진짜 좋은 사냥터다.

수르카의 대화는 임시로 생성된 시간 포탈을 통해서 다른 동료들에게로 전해졌다.

- 화령 : 그렇게 좋아?

- 수르카 : 완전 짱! 언니. 몬스터들이 막 보석 들고 다녀요.

기사들 중에는 보석이 박힌 검이나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긴 했다.

- 벨로트 : 전투는 좀 지겨운데.

- 수르카 : 여기 잘생긴 남자들 천국임.

기사들의 외모가 쓸 만하긴 했다.

- 이리엔 : 지하나 흉악한 몬스터는 좀...

- 수르카 : 여기 멋진 건물이에요.

벨로트, 화령, 이리엔, 로뮤나, 제피들이 차례로 낚이고, 마지막에는 양념게장과 파이톤까지 들어왔다.

"케엣. 여기가 어디죠?"

벨로트의 질문에 수르카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칼라픽 왕궁요!"

"뭐하는 곳인데요?"

"극악의 전쟁터에요!"

사기와 도둑질도 대를 이어서 발전하는 법!

위드의 얼굴은 더욱 흐뭇해졌다.

* * *

"너희가 살아서 움직이던 땅으로 돌아오라. 이곳은 어두운 곳. 검고 부패한 땅. 영영 사라지지 않을 암흑의 율법을, 모든 이들에게 새길 수 있도록 하라. 언데드 라이즈!"

위드는 시체들로부터 언데드들을 소환했다.

스켈레톤 나이트와 듀라한, 데스 나이트들이 골고루 섞인 조합이 대지에서 일어났다.

"불멸의 전사에게 경배를.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자가 충성을 바칩니다."

데스 나이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적들을 막아라."

위드는 반 호크와 토리도를 소환하여 언데드들을 지휘해서 싸우도록 했다.

동료들도 당황한 것은 잠시였고 금방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았다.

각자 무기를 꺼내들고 다가오는 귀족파의 반란 기사들부터 처치했다.

페일의 궁술은 반란 기사나 귀족들을 향해 백발백중이었고, 메이런은 건물을 박차고 뛰어올라서 화살을 쐈다.

"파이어 필드!"

로뮤나는 일단 광역 화염 마법으로 침략하는 병사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칼라픽 왕궁에서도 기사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접근해왔다.

"침입자들! 반란군의 족속인가?"

페일이 활을 내리며 서둘러 말했다.

"우리는 도우러 온 겁니다."

"왕실에 충성을 바친 기사들의 시체로 사악한 언데드들을 불러일으키다니 너희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

"그건 위드님이..."

"네크로맨서는 대륙법에 의해 절대 금지되어 있는 족속. 시체를 다루는 악독한 기법을 사용하면서 변명을 할 셈이냐!"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위드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 담긴 눈빛.

"네크로맨서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죠. 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위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조각품을 건넸다.

"국왕 페하의 조각품입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흠."

미리 오기 전에 깎아놓은 걸작의 조각품!

조각품 아래에는 잘 붙여둔 3실버도 있었다.

아부와 뇌물이야 말로 복잡한 사회의 톱니바퀴를 부드럽게 구르게 하는 핵심 요소!

기사대장은 조각품을 훑어보더니 땅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국가가 망하게 생겼는데 이깟 조각품이라니! 너희들 모두 감옥에 가둬야겠다."

3실버의 뇌물 작전이 실패하는 광경에 동료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해결 방법은 있으니까요."

위드는 3실버를 줍고 나서 주문을 외웠다.

"시체 폭발!"

콰과과광!

왕궁의 기사대장이 있는 지역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 기사대장 타켄이 사망하였습니다. >

< 칼레 왕국과의 적대도가 100이 되었습니다. >

"허억!"

위드를 따라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페일과 무덤덤한 성격의 제피마저 깜짝 놀랐다.

"이렇게 해결하면 될 것 같군요. 공격해."

위드는 언데드들에게 칼라픽의 왕궁 병력까지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제가 사막의 대제왕 퀘스트를 할때 느낀 거죠. 여긴 여행의 조각술로 과거를 거슬러 온 곳입니다.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서 지금 보이는 모든 NPC들은 우리의 모험이 끝나면 사라지게 될 겁니다."

"아하."

로뮤나부터 납득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펜 왕국이나 하벤 제국, 그곳의 주민들은 아이를 낳거나 생산 활동을 하는 등의 생활을 한다.

모험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상대이기도 했으며, 자주 얼굴을 보면 정이 들기도 했다.

"지금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의 수명은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전부라고 봐야겠네요."

"네. 그렇죠."

"좀 허무해요."

벨로트가 푸념하듯이 말했지만 각자 맡은 역할을 잊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들이 주위를 에워쌋고, 귀족파의 반란군과 왕궁의 수비 병력을 상대로 전투를 펼쳤다.

"연쇄 관통, 대지의 파동!"

"에헷. 돌풍 화살!"

페일과 메이런은 넘쳐나는 적들을 향해 마구 화살을 쐈다.

현란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제피의 낚싯줄에 로뮤나의 마법 공격, 수르카의 주먹질!

"이얍. 주먹 강타!"

수르카의 주먹이 크게 커지더니 십여 미터를 넘게 날아가서 데스 나이트들과 싸우고 있던 기사의 몸통을 날려버렸다.

"난전은 마음에 들긴 하군."

파이톤은 대검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양념게장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가 활동할 때마다 지휘관급 기사들의 목숨이 하나씩 사라지게 되리라.

이리엔은 신성 마법으로 동료들의 체력을 치유해주었는데, 가끔씩은 언데드와 싸우다가 부상을 입은 기사들도 가리지 않고 회복시켜줬다.

"고맙습니다. 사제님."

"별 말씀을요."

위드는 언데드들을 지휘하며 한편으로 화살을 쐈다.

네크로맨서가 다른 직업과 파티를 맺었을 때에 상성이 나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직업적인 조화에서 1인 군단인 네크로맨서가 다른 유저들 몇 명과 조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들이 무지막지하게 몰려오는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면 되는 것이었다.

* * *

칼라모르 지역의 에바루크 성.

샤먼 다인의 통치를 받는 지역은 반란군으로부터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깨끗한 거리와 건물들을 보게. 영주님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

"칼라모르 왕국이 그립지 않느냐고? 어째서? 영주님이 부임하고 나서 모든 것이 좋아졌어. 지금은 더 바랄게 없다네."

"우리 성은 상업과 관광,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지. 이사를 온 사람들로 성의 인구가 늘어났고,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도 그치지 않아."

에바루크 성의 주민들은 다인의 통치를 찬양했다.

유저들 역시 아무 불만이 없었다.

"다인 영주님이 부임할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는데 말이야."

"응. 다 쓸떼없는 걱정이었지."

헤르메스 길드의 영주들은 지독할 정도로 유저들을 쥐어짜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영주 다인은 부임하자마자 세율을 낮췄고, 사냥터와 퀘스트에서 대부분의 차별들을 철폐했다.

헤르메스 길드에 의무적으로 내야하는 세금을 제외하다면 최소한의 세금만을 거뒀다.

도시 자체 사업을 통해서 자금을 형성하고 운영함으로써 경영적인 수완까지 발휘했다.

"영주님.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의 통치 지침이 있지 않습니까. 길드의 규율대로 행동하시죠."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이 오히려 반발을 할 정도였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다인의 친분이 다리우스나 라페이와도 이어져 있다는 소문이 돌고 난 이후였다.

중앙 대륙이 반란군으로 들끓을 때도 에바루크 성은 발전했고, 지금은 칼라모르 최대의 인구와 경제력을 자랑했다.

다인은 하루에 몇 번씩 거리 순찰을 하면서 주민들과도 친해졌다.

"영주님. 여기 약초 입니다. 꽃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약초를 더 좋아하신다고 해서..."

"네. 고맙습니다. 잘 받을게요."

다인은 약초를 씹어 먹으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치킨을 먹은 후에는 인삼이... 헴헴."

주민들과 유저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짙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그녀.

"사고다!"

"심하게 다친 부상자가 있다."

주민 중의 한 명이 마차에 치여서 크게 다쳤다.

다인은 곧장 달려가서 손을 내밀었다.

"제가 고쳐줄게요. 절대 회복!"

성직자처럼 고위 신성 마법으로 치료를 하는 그녀!

에바루크 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냥 파티에 끼기도 했다.

성문에서 사냥터로 가기 위해 사람을 모집하는 장소에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

"사냥 갈 사람 구하세요?"

"한 명이 모자란데... 한참 구하고 있네요. 레벨 400대 유저를 구하는데."

"저 그 정도인데요."

"그러면 같이 가실래요?"

"네. 갈게요."

"근데 저희 전사가 필요한데요. 머리띠와 귀걸이를 보니 샤먼인 것 같은데 근접 전투 가능하세요?"

다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라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네. 돼요."

"주로 사용하시는 무기가 어떤 거죠?"

"검, 창, 도끼, 활, 해머, 사슬낫, 밧줄, 곡괭이 정도요."

"아... 그러시군요. 거의 다 다루시네요."

"무기술이 취미라서요."

"파티에 있는 사제가 아직 좀 실력이 모자라서 생명력 관리를 조심하셔야 됩니다."

"치료 마법 돼요."

"정말이요? 그러면 최고죠."

뭐든 잘할 수 있는 샤먼!

단 이도저도 아니고 제대로 못 키우면 레벨만 높은 샤먼은 절대 절대 파티에 끼워주지 않는다.

다인은 심심하면 던전에서 놀았기 때문에 레벨보다도 각종 스킬 레벨이 높은 상태였고, 배우고 있는 기술들도 잡다했다.

함정 간파와 해체에서부터 축복과 저주, 몬스터 추적까지 가능했다.

다인이 파티에 낄 때마다 일찍이 이룩해본 적이 없는 속도의 사냥이 이루어졌다.

필요한 분야가 있으면 그녀가 다 보충해주었고, 파티원들은 따라오기만 하면 됐다.

"영주님과 사냥해본 적 있어?"

"없는데. 소문에는 그렇게 잘한다며?"

"잘하는 정도가 아냐. 그냥 쭉 믿고 맡기면 돼. 알아서 다 해줘."

다인은 심심하면 던전에 가서 전투도 하고, 도시의 시찰도 했다.

에바루크 성의 인기가 높아지다 보니 유저들이 많아지고 재정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그녀의 명성이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역에서의 주민들에게 명성은 더 오를 수 없을 정도였다.

칼라모르 지역 전체에서 다인의 평판이 드높았다.

헤르메스 길드의 수뇌부에서는 회의를 거쳐서 정식으로 제안했다.

"통치 지역을 늘려보는 게 어떻습니까?"

"얼마나요?"

"에바루크 성 주변으로 일곱 개의 성이 불안한 상태입니다. 영주들이 자격을 잃기도 했고... 그 지역들을 전부 다스려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다인이 관리하는 영토는 계속 늘어나서 칼라모르 지역의 오분의 일 정도가 되었다.

에바루크 성을 중심으로 기술과 문화, 생산의 교류를 통해 블랙홀처럼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 * *

마판 상회의 영업 사원 코묻돈!

그는 손마차를 끌고 칼라모르 지역의 에바루크 성에 들어왓다.

"자자. 말린 생선을 팝니다!"

"오세요. 구경하고 가세요. 1회용 마법을 담을 수 있는 구슬과 영상 대화용 수정을 싸게 내놨어요."

"뱀 껍질, 벌레 껍질, 각종 나무껍질 팝니다. 가치 아시는 분만요."

에바루크 성의 넓은 광장은 손마차를 끌고 거래하는 잡상인들의 천국!

땅에 앉아 있거나, 마차에 올라서서 적극적으로 물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흠. 이들 중에 전업 상인은 삼분의 일 정도로군.'

코묻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저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전투를 회피하는 상인이라면 뱃살과 턱살이 두툼하게 늘어나기 마련이다.

'일반 유저들이 이렇게 많이 물건을 팔다니... 경제가 튼튼해 보이는군. 사소한 교역을 통해서도 경제가 발전하게 되는 거지.'

코묻돈은 아르펜 왕국 출신의 유저였다.

로열 로드를 시작한 건 늦었지만 그럼에도 아르펜 왕국의 초기 도약기를 경험했다.

'뭐든 된다. 마판님이 말씀하셨어. 상인이 광장에 많으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상인이 왕국 내의 물품들의 거래를 독점하기는 불가능했다.

주민들이나 일반 유저들이 마을과 도시를 오가면서 소규모라도 물품을 옮기는 건 경제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가죽 제품이나 무기류 등의 생산을 대량으로 하기 위해서는 관련 재료들이 채워져야 한다.

유저들이나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일상적인 보충이 빨리 이루어질수록 치안이 좋고 경제 발전이 빨라진다.

하나의 마을로만 본다면 의미가 적겠지만, 왕국 전체의 규모로 본다면 교역은 생산과 소비, 유저들의 성장에 있어서 괸장히 큰 요소였다.

'에바루크 성에는 활력이 있군.'

코묻돈은 짐마차에 실어왔던 꿀에 절인 과일들을 10분 만에 다 팔아치웠다.

'물건이 팔리는 속도가 기록적으로 빨라.'

마판 상회에서는 하벤 제국의 각 도시에 비밀 영업 사원을 파견했다.

초보부터 고레벨 유저들이 사용하는 몇 가지 대표적인 물품들을 판매해보면 모이는 정보가 상당했다.

도시에 어느 정도의 소비 능력이 있는지, 인구와 기술, 유저들의 수준, 만족도까지도 통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에바루크 성이라. 여긴 장기간의 공략을 필요로 하겠어.'

코묻돈은 에바루크 성을 지나서 수베인을 향해 이동했다.

마판 상회의 영역은 중앙 대륙으로 옅지만 넓게 퍼지고 있었다.

* * *

서윤은 대지의 궁전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 풀죽차를 마셨다.

창가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처자식 별!

달밤이 아름답다지만 밤하늘에 떠 있는 처자식 별 만큼은 아니었다.

'앞으로 꾸려나갈 행복한 가정을 위한 조각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서윤은 창가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책상으로 돌아갔다.

- 중앙 대륙 도시들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

- 제국의 인구 이동 현황.

- 헤르메스 길드에서 추진 중인 주요 사냥과 퀘스트 전략.

- 중앙 대륙 정복 계획.

- 바드레이의 근황.

그녀는 각종 보고서를 읽으며 헤르메스 길드에 대해 점점 파악해갔다.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위드를 몇 번이나 방해하고 죽이려고 드는 그들에 대한 원망도 컸다.

하지만 그녀는 미워만 하고 있을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 없어. 아르펜 왕국은 밀리지 않을 거야.'

국왕 대리인 그녀의 권한은 대단히 컸다.

아르펜 왕국의 정책으로 경제 발전과 초보 유저들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했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레벨 200대 이후의 유저들은 아르펜 왕국 어느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잘 살 수 있다.

때론 죽음을 겪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성장을 하게 되는 것.

푸홀 워터파크에서 비롯된 막대한 자금이 아르펜 왕국의 교통망과 기간산업 발달에 지속적으로 투자되었다.

각 지역의 광역 도시들을 선정하여, 필수적인 생산과 직업 건물도 세웠다.

막대한 돈의 효율적인 투자!

서윤은 기업 경영이나 행정에 높은 안목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100만큼의 돈을 써서 30정도의 경제가 상승한다면 그럭저럭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부패한 관료들이 있다면 10만큼도 성장을 하지 않는다.

행정과 경영이 합리적이라면 돈의 가치에 따라 고스란히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다.

아르펜 왕국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국가이니만큼 100만큼의 돈으로 중장기적으로 1,000이상의 효율을 뽑아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필요한 부분에 투자하고, 미래를 대비하여 앞서나가야 해.'

아르펜 왕국의 내실을 다진 이후에 서윤이 살핀 곳은 중앙 대륙이었다.

* * *

"커허험."

마판은 두툼한 배를 좌우로 흔들면서 빠르게 걸었다.

무릇 상인이라면 큰돈을 벌 기회가 있더라도 여유를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짜릿한 흥정의 재미!

수십만 골드가 교역에 걸리면 몬스터를 사냥할 때보다도 성취감이 훨씬 컸다.

"그래도 늦을 순 없지."

마판은 육중한 몸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가 이 사회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위드!

'그를 만나기 전에는 나는 그냥 평범하게 돈을 좋아하는 상인일뿐이었어.'

위드는 돈을 가르쳐줬다.

지금의 마판은 대충 고객을 보면 가격을 후려칠 방법 서너 가지쯤은 쉽게 떠오르는 배테랑으로 변신했다.

위드를 만나고 대상인이 되었다지만 영광스러운 ㅓㄴ 역시 지금 이 순간이었다.

'잘못하면 약속 시간에 늦을 뻔 했군.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마판은 서윤이 있는 궁전으로 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얼마까지 알아보셨... 허업! 부르셔서 왔습니다."

"마판님 죄송해요. 제가 직접 가야하는데 바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나갈 수가 없어서요."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마판은 별빛을 가득 담은 듯한 서윤의 눈과 마주치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느꼈다.

위드가 부러울 때야 수도 업이 많았지만, 아르펜 왕국보다도 서윤의 존재가 더 놀라운 이유였다.

"툴렌 지역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어요. 마판 상회에서 구입이 가능하신가요?"

"네. 당연히요."

"그러면 철광석을 십만 골드만큼 구입해주세요. 필요한 자금은 왕국 예산에서 보내드릴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판은 장부에 적긴 했지만 이상하게 여겼다.

'고작 이런 일로... 십만 골드가 그렇게 큰돈은 아닌데. 게다가 툴렌 지역에서 철광석을 사서 아르펜 왕국까지 가져오면 인건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가서 적자인데. 북부에 철광석이 부족하지도 않고.'

서윤의 요청은 이제 시작이었다.

"철광석은 리튼 지역에서 판매해주세요. 시세가 13% 정도 더 높으니 마진은 남을 거예요."

"네. 좋습니다. 상인이 흥정을 하면 17%정도는 이문을 얻을 겁니다."

"오르말 성에서 보리를 사서 그라디안 지역에서 판매하는 것도 가능 할까요?"

"그쪽은 길이 잘 뚫려 있어서 쉽습니다."

"시세는 5%가 더 비싸요. 이쪽에는 53만 골드를 투입할게요."

"바로 추진하겠습니다."

마판은 부탁 내용을 받아 적으면서 의문이 커졌다.

이유를 알고 싶어서 조금 주저하긴 했지만 곧 입을 열었다.

"그런데 거래의 목적이 뭐죠?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판매 장소들을 바꾸는 게 낫습니다. 철광석만 하더라도 더 가까운 소므렌의 대장간에 가서 파는 쪽이 더 나은데 말입니다."

"하벤 제국을 방해하기 위해서예요."

"예?"

"적재적소에 물품들이 소비되지 않도록 할 거예요. 정상적인 거래이지만 생산을 방해한다면 경제 발전에 약간이라도 차질을 줄 수 있겠죠."

"...!"

서윤은 설명을 하면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 광경마저도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마판은 밀수로 돈을 빼먹을 생각만 했었던 자신을 반성했다.

중앙 대륙의 경제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효율적인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게 된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그 연결고리를 조금 틀어놓는다면 상당히 큰 차질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마판은 본능적으로 연결고리를 틀어버린 이후의 일들도 떠올랐다.

'철광석이 필요한 가공지에서는 일시적인 품귀 현상이 벌어질 거야. 하지만 상인들이 다시 늦게나마 소므렌 같은 곳으로 가져올 수 있겠지. 그러나 중간 과정이 늘어서 가격이 오를 거야.'

거래가 여러 번 이루어지고 운송비가 붙는 만큼 가격은 높아지게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하벤 제국의 국력이 악화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짭짤하게 돈을 벌면서... 이런 식으로 피해를 입히면... 교묘한 방법이라서 간단히 알아차리기도 힘들 거야.'

* * *

데스 나이트, 데스 나이트, 데스나이트, 데스 나이트!

위드는 언데드를 소환하면서 칼라픽의 왕궁에서 한 지역을 사수했다.

왕국의 존망을 건 전투였기에 반란군이나 수비군은 끝도 없이 밀려왔다.

"기사단장을 죽이는 게 아니었어요!"

로뮤나가 소리치는 걸 위드는 긍정적으로 대꾸했다.

"사냥감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세요."

"난이도가 더 올랐잖아요!"

"버틸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야 그렇지만..."

"막 때려잡으세요. 이런 기회도 사실 흔치 않으니까요."

로뮤나는 마나가 회복되면 광역 화염 마법을 썼다.

건물을 부수고, 적들을 대거 불에 태워버리는 공격!

시원하기는 했지만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사의 특성상 잠깐씩 쉬었다.

"이리엔. 제대로 가자."

"응. 알았어. 영민한 축복!"

일시적으로 지혜와 최대 마나를 극대화시켜주는 축복.

로뮤나는 마법책을 펼쳐서 읽으며 주문을 외웠다.

"드거운 대지가 달아올라 불길이 치솟고, 하늘의 불은 이 땅에 내릴지어다."

마법책을 보며 주문을 외우는데에만 4분이 넘게 걸렸다.

"그레이트 파이어 스톰!"

수백 미터의 대지가 갈라지고 화염이 치솟았다.

하늘에서는 불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반란군이나 왕궁 수비대를 가리지 않는 로뮤나의 궁극 마법!

"질리도록 싸울 놈들이 많군."

파이톤은 돌파형 전사답게 수르카와 같이 적진을 휘젓고 다니다가 휴식이 필요하면 돌아왔고, 제피는 위드의 곁에서 수비를 맡았다.

페일과 메이런은 그저 기계처럼 화살을 쐈다.

"시체 폭발, 시체 폭발, 시체 폭발!"

위드가 마법을 외울 때마다 시체가 폭발하면서 경험치와 숙련도가 쌓였다.

어느 한쪽이 전멸하지 전에는 끝나지 않는 극악의 전쟁터, 사방에 널린 시체들을 폭발시키면서 주변 병력들에게 피해를 안겨줬다.

양념게장은 조용히 지휘관들만을 목표로 삼았으며, 화령은 이곳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처음에 양념게장은 화령이 적진으로 나가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제 곁에 있어보세요."

"지켜달란 말씀이십니까?"

"아뇨. 죽일 만한 적들이 알아서 올 거예요."

화령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소검을 들고 치마를 너풀거리면서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움직임은 적 기사들과 지휘관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였고, 그들은 강력하게 현혹되어서 다가왔다.

양념게장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지휘관들을 없앨 수 있었다.

따라라랑!

돌무더기 위에 걸터앉아서 하프를 튕기는 벨로트.

칼라픽의 왕궁에 왔을 때만 해도 위험하고 죽을 곳이라고 겁먹었던 동료들은 위드의 계산대로 거짓말처럼 적응하고 있었다.

어디에 내던져놔도 1인분은 하는 사람들.

위드는 타락한 성자의 지팡이를 흔들었다.

'적들이 마구 달려들고 그들을 해치우는 거다. 끝도 없이 몰려드는 적, 이런 전장을 네크로맨서는 헤집고 다니는 것이지.'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는 전투가 끝이 났고, 위드와 동료들이 휴식을 위해 널브러졌다.

"으... 끝나긴 했다."

수르카가 땅에 주저앉았다.

페일과 메이런은 이미 다 소모해버린 화살을 보충하기 위해서 전장을 돌아다녔다.

화살이 업성도 마나를 모아서 쏠수는 있었지만 위력이나 마나 소모에서 차이가 나니까.

"같이 주워라."

- 알겠음. 주인.

위드는 오랜만에 바람의 정령 씽씽이를 소환해서 화살 수거를 돕도록 했다.

물론 주목적은 화살 외에도 쓸 만한 전리품이 있다면 모조리 얻기 위함이었지만.

"으하아아."

얼굴이 땀에 젖은 화령은 두 팔을 벌리면서 매력적으로 기지개를 켰다.

연예인!

일반인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그녀에게는 밤샘이나 피곤이 익숙했다.

벨로트도 연주를 마쳤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조금 살 것 같죠. 언니."

"응. 간만에 힘들게 사냥을 한 기분이네. 위드님을 따라다니니깐."

"뭐 그건 그래요."

위드는 동료들의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고는 모닥불을 피웠다.

"뭐 하실 거예요?"

"음식을 만들어야죠."

"우와. 무슨 요리를 해주실 건데요?"

"별 거 아닙니다."

위드가 메고 있던 배낭에서 상당한 양의 요리 재료들이 나왔다.

고급 요리 스킬에 의한 특제 소스를 바른 스테이크 구이와 해산물 스프!

풍기는 냄새와 색감만 봐도 1등급이 2등급의 비싼 요리 재료들이었다.

파이톤이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생각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역시 최초의 마스터라서 통이 크군."

위드의 인성에 대해 알고 있는 페일과 제피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겨렸다.

"저건 아닌데. 조각술 마스터를 했다고 사람이 바뀔리가."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드는데 이유가 뭘까요."

"칼라픽 왕궁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한 불안감이 들긴 하는군요."

어쨌거나 위드의 요리는 그냥 입안에 넣는 순간 사라진다고 할 정도로 맛이 있었다.

30인분 가까이 차려놓은 요리들도 동료들이 경쟁적으로 먹다보니 금방 사라졌다.

얌전한 성격의 이리엔이나 벨로트도 다른 사람들이 먹기 전에 먼저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위드님의 요리야. 먹어도 살로 안 갈꺼야."

화령은 큰 뼈에 붙은 고기를 두손으로 잡고 뜯었다.

그렇게 짧게 지나간 식사 시간, 위드가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슬슬 전투 준비를 하죠."

"예? 전투는 끝났잖아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메이런이 불안하게 쳐다봤다.

"모르셨습니까? 칼라픽의 역사에 대해서요."

"어떤데요?"

메이런은 자신이 봤던 베르사 대륙의 역사를 떠올렸다.

역사서마다 조금의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하게 최악의 전쟁터라고 밖에는 표현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귀족파와의 사투. 밤에도 공격이 이어지지만 어렵게나마 왕실 수비군이 버텨내죠. 마침내 귀족파를 몰리치고 찾아온 평화. 그 이후로 몬스터들이 공격해오게 됩니다."

"그, 그랬어요?"

"예. 이 퀘스트는 아마 못해도 열흘짜리일 겁니다."

과로와 혹사.

의외로 놀라지는 않았다.

귀족 반란군의 규모를 봤을 때 전투 한 번으로 간단히 끊나진 않으리란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으니까.

기사들의 레벨 수준은 평균적으로 300대 중후반을 넘는다.

개개인은 약하지만 기사단의 돌격이라거나, 마법 병단의 일제 공격은 다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위험했다.

게다가 가끔 등장하는 지휘관들은 레벨 400대 중반.

기사들의 무력이 전부가 아니라 지휘 능력을 통해 아군 병력들의 사기와 전체적인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파이톤과 양념게장이 부지런히 움직였어야 했다.

메이런이 궁금하다는 드이 물었다.

"근데 엠비뉴 교단도 위드님이 몰아냈었잖아요. 과거에서 그들의 총본영을 파괴하면서 미래에도 사라지게 되었어요. 맞죠?"

"네. 그렇죠."

"근데 우리가 여길 막아낸다면 베르사 대륙의 미래도 바뀌는 게 아닌가요?"

메이런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화령이나 벨로트, 제피는 역사의 변경 같은 건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다른 동료들 역시 결과에 대해서는 굼긍해 했다.

위드는 설거지를 하면서 설명해주었다.

"시간 조각술. 그러니까 여행의 조각술로 과거로 돌아가서 역사를 바꾸는 건 위험한 요소가 있죠. 나중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이번 퀘스트는 그럴 걱정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요?"

"전투가 끝날 무렵 이 지역은 지진이 일어나서 싹 가라앉게 될 테니까요."

* * *

칼라픽의 왕궁!

위드의 동료들은 그저 한 가지만 기억하고 있으면 됐다.

언데드가 아니면 공격하고, 언데드면 놔둔다.

추가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적이라도 조만간 언데드가 된다.

"크웨엑!"

"내 머리를 다오!"

"슝슝슝. 슝슝슝!"

침을 흘리는 좀비, 머리를 들고 다니는 듀라한.

반호크가 이끄는 데스 나이트들은 기사단과 정면 대결을 펼쳤다.

"언데드 주제에 쓸떼없이 강하군."

"암흑 군대의 총사령관 반 호크다."

"언데드 따위가 자부심은... 나도 이름을 알려주지. 고귀함을 아는 기사 크레거다."

"크레거. 곧 넌 내 신입 부하가 될 것이다."

위드는 언데드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장을 넓게 살폈다.

칼라픽 왕궁으로 수많은 병력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귀족파의 반란군,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왕국군.

양측 모두 칼라픽의 왕궁에서 일대격전을 벌이기 위해 오고 있었으니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일어나라. 눈 감지 못한, 잠들지 않은 원혼들이여. 여기 살아 있는, 그리고 너희를 죽인 자들에세 복수하라! 데드 라이즈."

위드는 유령마를 타고 다니면서 언데드를 일으켰다.

1단계 언데드 마법으로 좀비에서부터 스켈레톤, 구울을 풍성하게 일으켰고, 기사들이나 귀족들이 싸우고 있는 지역에는 2단계 언데드 마법을 썼다.

"네, 네크로맨서다!"

"어딜 감히. 전투 중에 한 눈을 파는 것이냐!"

곳곳에서 부딪친 귀족파의 반란군과 왕국군.

그들이 싸우는 지역에서는 꾸물거리는 언데드들이 일어났다.

마법의 등급이 오를수록 소환되는 언데드의 종류가 다르고, 생명력, 전투력이 높아진다.

거인 성채처럼 시체의 춤질이 훌륭한 편은 아니었으니 마나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도 마구 언데드를 소환했다.

"크어어억!"

"이럴수가... 내가 좀비 따위에게!"

"유령이다. 눈이 번쩍거린다. 사제!"

위드의 언제드 소환 마법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직중급 1레벨에 불과했지만 질 보다는 양으로 숙련도가 잘 쌓였다.

"단단한 뼈, 악취의 바람."

강화 마법, 저주 마법 계열의 숙련도를 높이기에도 그만이었다.

레벨이 낮긴 해도 워낙 적들이 많기 때문에 경험치를 쌓기도 좋은 전장.

수르카와 파이톤이 대화를 나눴다.

"조금 할 만해진 것 같아요."

"확실히 그렇군. 적응이 되는 느낌도 있어."

위드는 3일째 되는 날 중대 결단을 내렸다.

"반란군을 칩시다."

메이런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 이상했다.

"지금도 싸우고 있는데요?"

"적의 본진을 제압하러 가죠."

"그런 건..."

메이런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진행자로서 나름 강심장이었지만 전장에서 양쪽 군대에 끼어서 싸우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귀족의 반란군이나 왕국군이나 평소라면 싸우지 않고 피해갈 상대였는데, 아예 적의 본진을 치자니!

수르카가 박수를 쳤다.

"와, 재밌겠다!"

파이톤도 대검을 땅에 꽂으면서 웃었다.

"찬성이다. 지겨운 싸움에 승부를 낼 수 있겠군."

그렇게 결정된 적의 본진 치기!

"반 호크. 길을 열어야 한다."

"알겠다. 주인."

"적의 기사단도 맡아야 되고, 궁수부대와 마법 병단의 공격고 유도해라. 지휘 부대도 도망 못 가게 붙잡아야 해."

"그걸 다 내가 해야 되나?"

"응. 억울하면 출세해."

막중한 반 호크의 어깨!

데스 나이트들이 귀족파 반란군의 본진을 향해 쳐들어갔고, 위드는 유령마를 소환하여 동료들과 함께 달렸다.

반 호크를 선두로 돌파 진형을 갖춘 데스 나이트들.

위드의 언데드 소환이 중급 2레벨에 오르면서 바르칸의 장비들은 더욱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기사들을 거침없이 물리쳤다.

"방어 진형. 방어 진형으로!"

귀족파의 기사들은 방패를든 중장보병들과 함께 급히 수비를 위해 밀집해야만 했다.

"돌파한다!"

반 호크가 검을 휘두르자, 데스 나이트들은 유령마에서 몸을 내던졌다.

인간이 아니라, 언데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전술.

유령마와 같이 적진을 몸으로 꿰뚫으며 부딪쳤다.

선두의 데스 나이트들은 집중 공격을 당하며 소멸되었지만, 본진은 빈틈을 드러낸 방어진으로 쇄도했다.

"죽어라. 불멸의 전사 위드님이 너희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내릴 것이다."

"불사의 지휘관을 엎드려 영접하라!"

"긍지 높은 위드 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는다!"

뼈에 갑옷을 입은 데스 나이트들이 기괴한 목소리로 떠들면서 기사들을 공격한다.

유령마를 타고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위드는 주문을 외웠다.

"데드 라이즈, 시체 폭발!"

시체들을 즉석에서 일으키고, 일부는 폭파시켜서 길을 넓혔다.

조각 파괴술로 모든 예술 스탯들을 지혜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방어 진형이 뚫렸다.

"습격이다!"

"그라우스 공작님을 지켜라!"

왕궁 수비대와 싸우던 반란군 병력들이 급히 회군했다.

데스 나이트들이 송곳처럼 적진을 꿰뚫었지만, 사방에서 그들을 제압 하기 위한 병력이 모여든다.

"지금이다. 반란의 무리들을 소탕하고 왕국을 바로 세우자!"

왕궁 수비대도 반란군의 뒤를 똧아서 추격해왔다.

"이랴. 달려라. 달려!"

"파이톤님. 이거 유령마입니다만."

"그냥 기분이라도 내야지. 이랴. 이랴!"

데스 나이트들이 반란군의 지휘부인 그라우스 공작과 수비 병력을 덮쳤다.

위드와 동료들은 주변에 있는 강자들을 제압했고, 한순간의 허점을 노린 양념게장이 깊숙이 침투했다.

"처형의 단두대."

하늘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면서 베어버린 공격!

"으아아악!"

< 칼라픽 왕국 반란군의 대장 지르코 그라우스 공작 3세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투 공적에 따라 자유롭게 부여할수 있는 2개의 스탯을 얻습니다. >

< 명성이 690 증가합니다. >

< 대규모 전투에서의 업적 달성! 1만 명이 넘는 적들을 상대했습니다. 투지와 인내가 1씩 증가합니다. >

반란군의 수장인 그라우스 공작이 목숨을 잃으면서 사기가 떨어진 귀족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격해라."

위드는 언데드들을 데리고 경험치를 쓸어 담았다.

반란군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데스 나이트가 1000기가 넘었다.

전장을 휩쓸어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독자적으로 기사단들과도 팽팽하게 싸울 수 있는 전력이 됐다.

"싸워라."

위드는 지치지 않는 언데드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왕국군과도 전투를 개시했다.

싸우고, 또 싸운다.

일으키고, 또 일으킨다.

"뚫어라. 생명의 주인인 내가 명령한다. 적들을 부숴버려라!"

네크로맨서의 전투는 단순해서 지루함을 주기 쉽지만, 대규모 전장에서는 아니었다.

강력한 언데드 부대가 전장의 한 영역을 증식하며 전투를 벌인다.

데스 나이트들이 중심이 되어 스켈레톤 부대의 지원을 받고, 유령들은 악귀의 형상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물어뜯었다.

< 신앙심이 2 감소하셨습니다. >

< 행운이 3 감소하셨습니다. >

< 언데드들의 특성을 활용한 전투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혜가 1 증가합니다. >

위드는 스탯 하락의 아픔은 있었지만 그조차도 아직 감수할 만 했다.

"쓸어버려라!"

그날 밤새도록 전투가 이어졌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칼라픽의 왕궁에서의 결전이 며칠을 더 끌었지만 결과가 바뀌었다.

그라우스 공작이 목숨을 잃고 귀족 반란군의 세력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ㅘㅇ국 수비대의 병력도 마찬가지로 손실이 컸지만 어쨌든 그들은 승리자였다.

"모두 함성을 질러라!"

"고롬 페하를 위하여!"

"용기와 희망으로 우리는 적을 극복해냈다. 왕국의 불안은 곧 제거될것이다."

왕국의 기사들이 외쳤지만 그들의 기쁨은 딱 자정 무렵까지였다.

언데드들.

반란군이 지리멸렬하면서 더 이상 먹잇감을 찾지 못하게 된 언데드들이 왕국 수비대를 전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으으... 이건 정말 나쁜 짓이잖아요."

"시금치 피자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시금치 피자는 좋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톡 쏘는 레몬 음료도 추가."

"뭐 그렇다면 반대는 안 할게요."

수르카가 따지듯이 이야기를 해봤지만 금방 설득 당했다.

여행의 조각술로 오면서 위드의 은근한 세뇌가 꾸준히 이어졌던 덕분이기도 했다.

이곳의 모든 NPC들이 그들의 모험이 끝나면 사라질 이들.

굳이 선과 악을 나눌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화살이 부족하네요."

"제 화살이 남은 게 있습니다. 나눠드리죠."

"페일님도 많이 없잖아요."

"괜찮습니다. 아무리 나눠줘도 더 커지는 게 제 마음이니까요. 하하."

전장에서도 풋풋한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는 페일과 메이런은 주변 일에응 관심이 없었다.

어느 쪽이든 싸우면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 뿐.

이리엔은 그냥 치료하고, 로뮤나는 과감하게 화염 마법을 퍼붓는다.

화령과 벨로트는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할 뿐이었다.

"아... 몸을 좀 흔드니까 스트레스 풀린다."

"언니, 진짜 재밌긴 하다. 나 새로운 곡도 만든 거 있는데 들어볼래?"

양념게장만이 오히려 번뇌에 빠졌다.

"삶과 죽음이라... 착하다고 오래 살아야하고, 나쁘다고 일찍 죽어야하나. 이 모험이 끝나면 사라질 생명들처럼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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