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케이베른의 활동
라페이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완벽하게 끝났군.’
머릿속으로는 패배를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기적을 기다렸다.
한 줌의 옅은 희망이라고 할까.
바드레이가 위드를 이기고, 마법처럼 하벤 제국군이 아르펜 왕국을 격파하는 것이다.
전쟁이란,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뜻밖의 결과를 기다렸지만 실망만이 남았다.
‘설혹 이겼더라도 어려운 상황이 해소되진 않겠지만... 이건 정말로 계산했던 상황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군.’
바드레이가 패배하면서 하벤 제국의 운명도 끝이 났다.
“우리가 해냈어요. 어서 싸워요!”
“그동안 당한 복수를 합시다. 봐주지 말고요.”
북부 유저들, 중앙 대륙 유저들까지 힘을 합쳐 펼치는 공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 마법 공격을 퍼부으면, 그보다도 더 많은 마법이 사방에서 날아온다.
기사들이나 병사들의 질에서는 하벤 제국이 앞섰지만 그마저도 인해전술에 무너지고 있었다.
“가자!”
“돌격이다. 돌격!”
수천만 마리의 좀비들을 연상시키는 북부 유저들이 달려왔다.
여기에 상황을 지켜보던 중앙 대륙 출신의 유저들까지 하벤 제국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아르펜 왕국 편에 섰다.
“막지 못합니다.”
“이건 무립니다. 적이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바드레이의 친위대나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수십 배의 적들을 상대로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세력이 지금까지 대륙 최강으로 불릴 정도가 아니었다면 진작 허무하게 무너졌으리라.
‘결국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라페이는 부대들을 지휘하고 있는 아크힘에게 다가갔다.
“이젠 우리에게 하나의 선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게 있습니까?”
“네. 정말 최후의 수단이지만요.”
라페이는 설명보다는 퀘스트를 보여주었다.
드래곤의 알
그린 드래곤 아란칼드가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알을 발견했다.
아란칼드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떠나고 난 이후에 알은 현재의 자리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알은 드래곤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분노를 해소할 방법은 무사히 알을 부화시켜서 새끼 드래곤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난이도 : S
제한 : 드래곤의 알 발견, 현재의 진행 단계에서 퀘스트 포기 불가능.
아크힘이 퀘스트의 정보창을 확인했지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하려고요? 퀘스트를 완수해서 드래곤을 이용하자는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부화까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될지 모르죠. 그리고 드래곤은 인간들끼리의 일에 잘 개입하지 않습니다.”
베르사 대륙에서 드래곤은 절대적인 강함을 가졌다.
그들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며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부탁을 들어주진 않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지금 알을 부숴야 합니다.”
“알을? 드래곤의 알을 부순다고요?”
아크힘이 놀라서 되물었다.
“예.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알이 파괴되면 대륙 전체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벨소스 왕의 불의 저주를 기억하십니까?”
“예전에 진홍의 날개 길드가 몰락하게 된 사건이었죠.”
“예. 보물에 욕심을 낸 대가로 대륙이 더워졌죠. 그것과 비슷합니다. 알이 부서지면 전 대륙이 케이베른의 보복을 당하게 될 겁니다.”
“진심입니까? 그런데도 알을 부순다고요?”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최강의 몬스터였다.
“대륙을 우리가 갖지 못한다면 부숴 버리는 쪽이 낫습니다.”
아크힘은 라페이가 새삼 무섭게 느껴졌다.
당장 망하느냐.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대형 사고를 일으키느냐.
두 가지의 길에서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좋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어디 저질러 봅시다.”
* * *
고람.
그는 중앙 대륙에서 얼마 전에 시작한 유저였다.
사촌 형이 헤르메스 길드의 바드레이 친위대 소속이라서 남들이 아르펜 왕국을 선호할 때도 중앙 대륙을 선택했다.
레벨은 102.
사촌 형의 지원을 받아서 좋은 장비를 쓰고, 사냥터도 마음껏 활용했다.
바드레이 친위대의 권한으로 초보 사냥터야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었다.
‘이것만 해내면... 아파트 한 채란 말이지.’
고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 전에, 라페이가 그에게 직접 약속을 했다.
- 이 알을 가지고 있다가 연락을 하면 아르펜 왕국 진영에서 깨뜨리십시오.
‘알을 깨면 대폭발이라도 하나?’
어려운 일도 아니다.
고람은 레벨이 낮아서 살인자 상태도 아니었고, 헤르메스 길드에 정식 가입도 안 되었다.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가 벌어질 때부터 북부 유저들의 틈에 섞여 있다가 알만 깨뜨리면 된다.
라페이는 미리 장비도 하나 주었다.
바위 신의 망치.
허락되지 않은 이가 사용하면 몸이 터져서 죽지만, 그래도 딱 한 번 휘두를 수는 있다.
‘그래. 뭐 어차피 아파트인데...’
고람은 라페이의 명령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위드가 바드레이를 이기고, 하벤 제국이 맹공격을 당할 때는 자칫 임무가 취소되는 게 아닌지 걱정까지 되었다.
- 라페이 : 지금 부수십시오.
라페이로부터 귓속말이 전달되었다.
고람은 안심하면서 배낭에서 새하얗고 커다란 알부터 꺼내서 땅에 내려놓았다.
“뭐야?”
“저거 타조 알인가? 엄청 크잖아!”
“그보단 바위 아냐?”
주변의 유저들이 보고 관심을 드러냈다.
고람은 유저들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들의 반응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확히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알을 꺼낸다. 바위 신의 망치를 쥔다. 알을 부순다.’
먼저 바위 신의 망치를 쥐어서는 안 되었다.
딱 1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몸이 터져서 죽을 테니까.
중요한 건 알을 꺼내 놓고, 망치를 쥐자마자 바로 휘둘러야 한다.
‘죽을 각오도 되어 있고. 아파트 한 채인데 뭐 망설일 거 있나?’
고람은 바위 신의 망치를 무장했다.
띠링!
< 바위 신의 망치를 잡았습니다.
신앙이 부족합니다.
힘이 부족합니다.
대지의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바위 신의 분노가 닿기 전에 내려놓으셔야... >
고람은 메시지창도 읽지 않았다. 오로지 하얀 알을 향해 전력으로 망치를 내려쳤다.
파삭!
알이 힘없이 깨지고, 거의 직후에 그의 몸도 신의 저주로 산산조각이 났다.
< 바위 신의 분노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악룡 케이베른의 알을 파괴했습니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과 그린 드래곤 아란칼드가 낳은 알을 부쉈습니다.
드래곤들의 분노가 대륙을 휩쓸게... >
* * *
“이겼다.”
“우리의 승리다.”
위드는 뽀로새의 등에서 아르펜 왕국의 편에 선 유저들의 함성을 듣고 있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대는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중앙 대륙을 통일했던 숱한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최정예 부대.
병력 숫자는 먼저 싸웠던 이들에 비해서 적지만, 한 명, 한 명이 강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높은 하늘에서 본다면 가르나프 평원 전체가 그들을 향해 덤벼들고 있는 것 같은 어마무시한 광경이었다.
- 마판 : 이걸로 위드님이 베르사 대륙의 통일 위업을 달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 코묻돈 : 축하드립니다. 적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곧 영토 정복도 이루어질 테고... 아르펜 대제국이 건설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 숨긴돈 : 브리튼 지역에서 마판 지부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벌써부터 상인들의 아부가 뒤따랐다.
- 로암 :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황제 폐하.
- 칼리스 : 흑사자 길드는 두고두고 충성을 맹세할 겁니다.
- 할마 :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발바닥이라도 핥겠습니다.
줄을 서는 유저들도 있었다.
위드는 가까운 미래에 베르사 대륙을 통치하는 것을 생각했다.
‘워터파크를 비롯해서 온 가족이 놀 수 있는 놀이공원들을 많이 만들어야지. 스키장도 돈 뽑아내기에는 그만일 것 같아.’
꼭대기가 8,800미터인 산에서 스키를 타는 정도는 초급자 코스로 분류할 작정이었다.
중앙 대륙이나 북부 지역에서 1킬로가 넘는 높이의 산에서 스키 코스를 만든다면 인파로 북적이게 될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뭐든 돈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경기장, 문화 공연이 가능한 극장. 명품이나 사치성 소비도 은근슬쩍 부추길 작정이었다.
‘일반 생필품에 대한 세금은 많이 안 붙이더라도 사치품은 사람들도 관대하게 생각할 테니까.’
거침없이 착취를 해 주리라.
‘아직 다 끝난 게 아냐. 진정한 착취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는...’
위드가 부푼 꿈을 안고 있을 때였다.
띠링!
< 악룡 케이베른의 분노가 시작되었습니다. >
짧은 메시지창이 떠오르더니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고람이 바위 신의 망치를 들고 알을 깨뜨리는 장면이 짧게 나왔다.
정작 중요한 건 그 다음 장면부터였다.
악룡 케이베른.
드워프의 왕국에 자리 잡은 블랙 드래곤.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그의 레어 내부가 영상에 나타났다.
드래곤을 처음 보는 이들은 그 압도적인 크기와 함께 섬세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하게 된다.
드워프들이 가공한 예술품, 귀중품들도 레어를 잔뜩 장식하고 있었다.
분노한 블랙 드래곤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내 알을 부수다니. 인간들... 너희들의 오만함을 벌하리라.
드워프들로부터 빼앗은 금은보화들이나, 여러 골동품들이 무너지고, 책장이 엎어졌다.
- 모두, 모두 죽인다.
케이베른이 앞발과 꼬리를 휘두르며 포효했다.
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며, 산더미 같은 암석들이 떨어졌다.
“꾸에엣!”
“크약!”
레어를 지키던 몬스터들이 바위에 깔렸다.
대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케이베른의 레어가 통째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케이베른은 넓은 날개를 펼치며 산을 뚫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이고른 산맥과 울타 산맥, 노른 산맥.
영상에는 토르 왕국의 아기자기한 도시들도 보였는데, 드워프들이 놀라서 땅에 엎드리는 광경들이 나왔다.
- 멸망해야 마땅한 인간들...
케이베른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상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고, 순식간에 도착한 곳은 토르 왕국과 가까이 있는 칼라모르 지역.
상업 도시 이들렌이 보였다.
브리튼 연합 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였다.
“뭐, 뭐야?”
“드래곤이다. 대박!”
성문 근처나 도시 안에는 일부 유저들도 있었다.
평소보다는 훨씬 적지만 가르나프 평원에 오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유저들.
그들이 깜짝 놀라서 케이베른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 끔찍한 인간들.
살아갈 가치가 없는 너희들에게 나의 분노를 안겨주마.
케이베른이 입을 크게 벌렸다.
새까만 어둠이 그의 주둥이에 뭉쳐가며 커지고 있었다.
“저거 설마...”
“브레스에요? 진짜? 우리를 향해 쏜다고?”
도시 안의 유저들은 난리가 났다.
멀리서 말을 타고 오던 유저들이 케이베른을 보고서는 재빨리 뒤돌아서서 달리는 모습들도 보였다.
상황 판단이 빠른 유저들.
그렇지만 평원이나 성문 근처에서 멍하니 케이베른을 보는 유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로서는 드래곤을 가까운 곳에서 직접 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다.
- 사라져라. 인간들아.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브레스가 쏘아져 나갔다.
땅과 건물들이 녹아내리고, 유저들은 직접 닿지 않더라도 그 독성에 의해 쓰러지며 목숨을 잃었다.
- 남아 있는 인간들을 남김없이 죽여라.
케이베른의 마법에 의해 도시에서 마법 병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위대한 존재인 케이베른님의 복수를!”
용아병.
드래곤의 신체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일어나서 도시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드래곤의 마법 가호에 의해 유저들의 공격은 통하지도 않았다.
- 위대한 나의 뜻에 따라 너희들의 영역을 해방한다. 인간들을 벌하라. 그들의 영토를 빼앗고 모든 것을 파괴하라.
토르 왕국의 세 개의 산맥과 던전들.
칼라모르 지역에 있는 수많은 산과 숲, 들판, 늪, 강과 던전.
케이베른의 용언에 따라 몬스터들이 나와서 인간들의 마을과 도시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인간을 죽이자.”
“케이베른님의 복수를!”
“감히 드래곤을 건드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몬스터들은 종족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다.
유저들이나 병사들이 몬스터들을 사냥하기도 하지만, 그들끼리도 싸우면서 개체수를 조절했다.
그렇지만 케이베른에 의해 풀려난 몬스터들은 적대 관계가 사라진 채로 인간들의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도시를 향하는 몬스터 대군의 위로,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짙게 흘렀다.
꽈르르릉!
콰콰쾅!
억수로 쏟아지는 비와 사정없이 내려치는 벼락들.
영상의 마지막 부분은 케이베른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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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끝나자마자 모든 유저들에게 메시지창이 떴다.
< 악룡 케이베른의 뜨거운 분노.
흉포한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이 활동을 시작합니다.
- 쓸모없는 몸을 움직여라.
많이 죽인 녀석들에게는 상을 주겠다!
케이베른의 지배 영역에 있는 몬스터들이 전 대륙에 걸쳐 침략을 감행하게 될 것입니다.
파괴와 복수.
용아병의 지휘를 받는 몬스터들은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기어오를 것입니다.
대륙이 파멸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십시오.
케이베른은 인간들에 대한 그 어떠한 자비도 없을 것입니다.
전투에서 활약한 몬스터들은 보상을 받습니다.
케이베른에 의해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육체를 강화시킬 것입니다.
몬스터를 이끄는 지휘관이 출현할 가능성을 1,000%로 높입니다.
케이베른의 특성에 의해 대륙 전역에서 저주받은 비가 자주 내리게 될 것입니다. >
“뭐, 뭐야. 이거?”
“드래곤이 인간에게 복수를 한다고?”
“무슨 일이야. 도대체 지금...”
인간 외에도 엘프, 드워프, 오크 등 종족을 가리지 않고 영상이 나왔다.
“이들렌에 있는 유저한테 소식이 왔는데. 정말 드래곤이 나타났대.”
“그리고?”
“브레스를 내뿜었다더라. 운 좋게 살았지만 용아병들이 나타나서 다들 도망치고 있다네.”
“영상이 진짜라는 이야기네.”
로열 로드의 유저들은 갑작스러운 영상에 당황스러웠다.
KMC미디어를 비롯한 방송국들도 갑작스런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 오주완씨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요?
- 방송국에도 아직 아무 정보가 없습니다만, 모든 유저들을 대상으로 영상이 나온 것을 보니 대단한 이벤트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 악룡 케이베른과 관련된 이벤트요?
- 정정합니다. 이벤트가 아니라, 영상의 내용을 보면 대습격이라고 봐야 되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케이베른이 적대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인데요.
도시와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들에게는 하나 더 메시지창이 떴다.
띠링!
살아남아라.
악룡 케이베른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몬스터의 침략이 예상되니 당장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을 추가해야 합니다.
케이베른의 저주받은 비는 곡식을 오염시키고 화재를 일으킵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만 할 것입니다.
난이도 : B
퀘스트 제한 : 영주 제한
보상 : 높은 명성.
주민들의 충성도.
도시 특성 부여.
모든 영주들에게 발생한 난이도 B급의 퀘스트!
인구가 많거나, 교통 요지에 있는 영주들에게는 난이도 A급의 퀘스트가 발생했다.
위드에게는 특별한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아르펜 왕국의 불안.
케이베른의 지독한 증오가 인간들을 향합니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인 당신은 영토와 주민들을 지켜야 합니다.
몬스터들의 파괴로부터 왕국이 몰락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수도와 주요 도시들이 일차 목표가 될 것입니다.
케이베른이 살아 있는 한, 그는 인간이 세운 왕국의 흔적까지도 철저히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난이도 : S
퀘스트 제한 : 국왕
보상 : 국가 발전
명성, 지휘력
“으음.”
이것만 하더라도 하루 종일 수학책을 본 것처럼 머리가 아파왔다.
위드에게 뜬 메시지 창은 한 개만이 아니었다.
띠링!
진정한 용사.
그대가 지금까지 이룩해낸 업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불사의 군단을 물리쳤으며, 세상의 끝과 끝을 오가며 탐험했습니다.
베르사 대륙의 과거로 돌아가서 엠비뉴 교단을 물리쳤고, 신비로운 조각술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며, 위험한 의뢰들을 멋지게 성공시켰습니다.
도시의 술주정뱅이부터, 산 위의 마을에 사는 어린아이까지도 조각사이며 모험가, 전사 위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음유시인들은 당신의 모험을 가사로 만들어서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악룡 케이베른이 잔혹한 보복을 선언하며 대륙은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신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악룡을 퇴치하십시오.
먼저 필요한 정보를 모아야 합니다.
용감하게 검을 뽑기 전에, 악룡 케이베른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난이도 : S
보상 : 용사의 선택으로 이어지게 됨.
퀘스트 제한 : 대륙을 구하는 영웅
가장 높은 모험 명성.
< 어떤 상황에도 거부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
< 퀘스트가 수락되었습니다. >
위드는 감탄했다.
“와. 정말 이놈의 팔자란...”
간신히 하벤 제국을 물리치고 바드레이까지 이겼다.
겨우 먹고 살 만해지는 줄 알았더니 악룡 케이베른이라니!
“잠깐. 그보다도.”
위드의 머릿속이 최신형 컴퓨터보다도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갑자기 벌어지게 된 이유는... 깊게 따져 보나마나 헤르메스 길드의 수작이겠지?’
영상의 시작 부분에 초보 행색의 유저가 가르나프 평원에서 아르펜 왕국 진영에 섞여 있었다.
‘그 사람이 알을 깨뜨렸다. 시작부터 영상에 나온 걸 보면 확실히 케이베른의 알이었겠지. 드래곤의 알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깨뜨리자마자 죽어버린 걸 보면 의심스러워.’
단순한 추리이기는 했지만 배후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겠지. 음. 자기 밥그릇을 그냥 넘겨주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이런 쪽의 이해심이나 공감 능력에 대해서는 탁월한 위드였다.
여동생이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감정적으로 화내기보다는 차분히 가르쳤다.
“약해 보였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못된 습성이 있지. 동화책에는 다들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지만... 어른들을 봐. 누가 사이좋게 지내니?”
여동생에게 세상을 보여주겠다고 가끔 일부러 텔레비전을 틀어서 정치판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상은 정글이야. 네가 먼저 놀려! 어설프게 혼내고 괴롭히면 보복하기 마련이야. 밟기 시작하면 철저히 짓밟아. 강해야만 편하게 사는 게 세상이야.”
여동생을 야무지게 만들어낸 육아 방침.
“세상이 만만한 게 아냐. 왜 실패하고 노숙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겠어? 믿을 건 자신뿐이고 상대의 이유 없는 호의 같은 거 기대하지 마. 어려울 때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중에서는 마지막 남아 있은 콩나물 하나까지 훔쳐 가려는 놈들이 많다고!”
세상이 어떻다는 걸 아낌없이 여동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페일 일행은 그중에서도 예외라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딜 가도 저런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하고 슬퍼하기 쉽지. 내가 적당히 착취하고 살아줘야 고생하지 않을 거야.’
이런 인생관으로 볼 때 헤르메스 길드의 선택은 당연히 옳았다.
‘문제는 지금의 나로서는 드래곤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혼돈의 드래곤 아우솔레토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이성을 잃고 자기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자각도 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엠비뉴 교단과 싸우고 있을 때 뒤치기까지 했었다.
사막의 대제왕 퀘스트를 해서 레벨까지 825였는데도 간신히 이겼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의 퀘스트는 유저들의 성장을 고려했을 때 너무 일찍 나온 느낌이지. 알을 부숴버렸기 때문이지만...’
위드는 불현듯 무언가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상의 마지막에 날개를 펼치고 어딘가로 이동하던 악룡 케이베른.
묘하게 거슬리고 여운이 남는 장면이었다.
“마판님. 긴급 상황입니다.”
- 마판 : 네. 지금 저도 영상을 보고 당황해서 연락을 먼저 못 드렸습니다. 중앙 대륙에 지부마다 판매 확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칼라모르 왕국을 비롯해서 주요 도시들마다 아는 유저들이 있죠?”
- 마판 : 예. 있습니다. 아직 많지는 않지만요.
“연락망을 가동해서 지금 당장 최대한의 인맥을 동원해 보세요. 악룡 케이베른이 어쩌면 이곳으로 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 마판 : 헉. 정말입니까? 아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마판도 긴급 상황이라서 상단 전체로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단에 속한 상인 유저들이 각자 도시와 마을에 알고 있는 유저들에게 정보를 모아서 답했다.
불과 2분 정도가 흐른 뒤였다.
- 마판 : 헛. 위드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케이베른이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고 있는데요. 방향이 북쪽입니다. 근데 아마도... 여기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비상사태였다.
‘케이베른과 싸워야 한다.’
위드는 여러모로 견적을 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드래곤 피어만 하더라도 약한 생명체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으니, 인해전술로는 절대 답이 나오지 않는 존재.
여기에 모여 있는 북부 유저들은 떼죽음을 당할 테고, 그 다음이 조각 생명체들.
하벤 제국군도 망하기는 할 테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망한 상태였다.
위드는 마판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상단의 모든 것을 즉시 철수시키세요. 자금이나 물자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 마판 : 옛! 바로 빠져나가겠습니다.
마판 상단은 막대한 부를 일궈냈다.
가르나프 평원의 한복판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에도 외곽에서는 열심히 장사를 했다.
하벤 제국군의 장비들이나 헤르메스 길드의 물품들을 구입하고, 전투 물자들을 팔아 치웠다.
“다른 상단들에게도 전해 주시고요.”
- 마판 : 상단들의 철수를 꼼꼼히 챙기겠습니다. 위드님은요?
“저는 아무래도 남아서 싸워야 되겠습니다.”
- 마판 : 악룡 케이베른과요?
“예.”
- 마판 : 아무리 위드님이더라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죽음도 있는 법이니까요. 우리의 인생이 다 그렇듯이요.”
* * *
- 전투 중지. 모두 도망쳐라!
“응? 무슨 소리야?”
“독버섯죽에게 퇴각은 없다. 전진!”
“죽순죽의 영웅들이여. 진격이욥!”
하벤 제국과 신나게 싸우고 있던 유저들이 정신없이 싸우고, 죽고 죽이고 있었다.
북부, 중앙 대륙 유저들이 뒤섞여서 그동안 당했던 복수를 하느라 무섭게 전선으로 달려 들어갔다.
전장에서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 마법까지 도처에 작렬했다.
- 모든 풀죽신교, 아르펜 왕국의 주민들에게 나 위드가 알린다. 즉시 퇴각, 가르나프 평원에서 도망쳐라!
“아놔. 왜 자꾸 그만 싸우라는 거야.”
“어? 근데 저거 위드님의 사자후 아닌가? 목소리가...”
“진짜 위드님이잖아.”
다시금 울린 사자후에 평원을 가득 메운 유저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멈췄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드의 목소리라면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의 영향이 있다.
하늘을 보니 거대한 새를 탄 위드가 사자후를 연거푸 터트리고 있었다.
- 악룡 케이베른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이대로 있으면 다 죽을 테니 전면 철수!
“케이베른?”
“영상에 나왔던 드래곤이... 이곳에?”
유저들은 깜짝 놀라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직후, 풀죽신교의 전체 통신 채널에도 메시지가 올라왔다.
- 레몬 : 긴급 상황이에요. 악룡 케이베른이 다가오고 있다니 모든 유저분들은 퇴각하세요. 악룡 케이베른이 도착할 때까지 2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이 온다니. 와. 대박.”
“최고네. 위드님과 바드레이의 싸움도 보고.”
“튀자. 튀튀튀튀!”
가르나프 평원을 가득 메우던 유저들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인근 도시나 마을로 가게 될 유저들, 그렇지만 절반 정도의 유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치와 수련생들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검을 뽑았으니 적을 베어야 하지 않겠느냐.”
“암요. 그렇습니다. 스승님. 조금 큰 도마뱀이 온다고 해서 우리가 도망칠 이유는 없지요.”
“사형들. 도마뱀 사냥도 해 봅시다.”
검치와 수련생들은 드래곤이 온다는 말에 더 기분이 좋았다.
오래전 기억이지만 드래곤을 잡겠다고 레어로 찾아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브레스는 화끈하니 재밌었지.”
“열기가 기가 막혔지 말입니다.”
죽을 각오를 한 이상, 악룡 케이베른이라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벤 제국군과 싸우던 유저들도 전투를 지속하고, 끝까지 구경을 하고 싶은 이들도 그대로 남겠다는 선택을 했다.
위드는 조각 생명체들에게 가서 명령했다.
“너희들은 당장 떠나라.”
- 주인을 놔두고 갈 수 없다. 골골골.
- 우리와 같이 가야 합니다.
금인이와 기사 세빌.
불사조, 빙룡, 킹 히드라 등등.
기존의 조각 생명체에 이어서 새로 이름도 정하지 못한 녀석들이 지상에 가득했다.
든든하고, 막강한 전투 전력이었다.
“그냥 가.”
- 전투가 벌어졌다. 전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철혈의 워리어 바하모르그까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이 돕는다고 해도 드래곤과 싸우기에는 아직은 무리다.”
위드는 드래곤의 강함을 조각 생명체들이 견뎌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다 죽어서 되살리게 되면... 레벨이 150개는 떨어지게 된다.’
조각사 시절부터 힘겹게 올린 레벨이었다.
네크로맨서 스킬을 활용하는 지금은 성장이 빠르다고는 해도 그만한 모험을 할 순 없었다.
‘차라리 드래곤에게 죽고 말지. 여기서 조각 생명체들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어.’
위드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했다.
“명령이다. 전부 떠나라. 나도 여기가 마무리되는 대로 떠날 테니까.”
- 알겠다. 주인.
- 주인. 빨리 와라. 음머어어어어.
조각 생명체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비행 생명체들은 날아가고, 지상의 생명체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조각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끔찍하게 아끼기 때문에 그대로 떠났다.
위드일, 위드이, 위드삼 등의 분신으로 생명을 부여했던 녀석들은 빠른 와이번들 등에 타고 갔다.
‘저놈들도 오래 부려 먹어야지. 쓸모가 많은 녀석들이야.’
위드는 조각 생명체들이 떠나는 것을 봤지만, 막상 자신은 끝까지 남을 작정이었다.
무모하고, 멍청한 선택이지만 이것이 지휘관의 운명!
‘북부 유저들이 아직 싸우고 있다. 그들을 남겨 놓고 가선 안 돼.’
오래전이지만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알바생들만 일을 하고 있는데, 일찍 퇴근하는 사장이 그렇게 미웠다.
믿음이란 오랫동안 쌓아야 되는 것이지만 그걸 잃어버리는 것도 한순간이다.
북부 유저들이 아르펜 왕국을 위해서 싸워주는데, 그들을 버리고 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지.’
그들을 존중해 주리라.
비록 다양한 방법으로 착취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서운함은 최소로 느끼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미덕.
“페일님.”
- 페일 : 네. 위드님.
“어딥니까?”
- 페일 : 지금 하벤 제국군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른 동료분들도요?”
- 페일 : 다 함께요. 아무도 안 떠났습니다.
위드는 씩 웃었다.
이런 사람들과 친해진 것이 로열 로드를 하며 얻은 큰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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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 이쪽으로 온다고?”
아크힘은 악룡 케이베른이 날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했다.
자신들이 사고를 쳐놓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른 반응이 올 줄이야.
“우리도 철수! 여기서 무조건 벗어나자!”
하벤 제국군과 헤르메스 길드가 전면 퇴각을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르나프 평원에서 얻은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남아 있는 건 더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딜 가려고.”
“나는 아직 살아남아 있는 독버섯죽이다!”
북부 유저들은 하벤 제국군이 떠나지 못하도록 불나방처럼 몸을 던졌다.
“기사단 5개를 내보내라.”
아크힘은 일부 병력들을 희생양으로 남겨 놓았지만 그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
하늘에서도 조인족과 뮬의 그리폰 군단도 집요하게 화살 공격을 하면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몰라. 이건 너무 위험할 것 같아.”
“우리도 도망가자.”
아르펜 왕국의 편에 섰던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드래곤이 온다는 소식에 흩어지고 있었다.
하벤 제국군은 추적자들에 의해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기병들과 기사들, 마수 군단으로 이루어진 병력이라 퇴각은 빠른 편이었다.
바드레이까지 잃어버리고 물러나는 처량한 길.
아크힘의 머릿속에는 라페이가 했던 말이 떠나지 않았다.
‘그 강대하던 헤르메스 길드가 드래곤의 힘으로 전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고 우린 하벤 지역에서만 웅크리고 있어야 하다니.’
옛 하벤 왕국의 영토.
헤르메스 길드의 세력은 강했고, 만약을 대비해서 요새화가 이루어져 있었으니 지키기는 편할 것이다.
중앙 대륙에서도 발전도가 높고, 인구가 많은 땅.
‘버티다 보면 다시 기회가 생길지도... 위드의 인기가 영원하란 법도 없으니 말이야. 라페이의 의견은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이었다. 근데 왜 결국에는 매번 손해만 입었을까.’
가르나프 평원에서의 전술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위드를 잡으면 끝날 싸움인데, 결과는 정반대로 큰 손실만 봤다.
‘바드레이님의 대결도 라페이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물론 누가 생각해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게 맞았으니 그걸 탓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위드가 우리보다 무력으로도 한 수 위라는 건가.’
헤르메스 길드의 미래가 어두웠다.
중앙 대륙을 차지하고 막대한 이권을 얻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미 발밑이 전부 무너져 있는 기분.
“여기다!”
“놈들을 쳐라!”
왼쪽 방향에서 낙타를 탄 사막 전사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돌격!”
검치를 선두로 시미터를 붕붕 휘두르며 기사단을 향해 뛰어들었다.
“푸하하하. 이것이 바로 사나이지!”
“사막의 화끈한 맛이다. 불이다. 불!”
사막 전사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뜨거운 불의 길이 이어졌다.
“이런. 별것들이 다 거슬리게 하는군.”
아크힘이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전부 죽입시다!”
거인기사 보에몽이 철퇴를 들고 외쳤다.
최강을 자처하던 헤르메스 길드의 입장에서 쫓기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크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 죽이자!”
아무리 도망치는 와중이라지만, 그래도 형편없이 쫓기진 않으리라.
헤르메스 길드의 자존심을 걸고 맞받아치려고 하는 순간.
- 여기다! 이쪽이에요!
- 놈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아크힘은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쫓아오고 있었다.
- 복수를 하자!
- 당할 만큼 당했다.
드래곤이 온다는 소식에 놀라서 물러나던 중앙 대륙 유저들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 아니면 헤르메스 놈들에게 언제 복수를 해줘?”
“그냥 한 번 죽지, 뭐. 대신 저놈들도 끝장을 낸다.”
중앙 대륙 유저들이 힘을 합쳐 추적에 나섰다.
초보자들로 이루어진 풀죽신교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투력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한 놈만 걸려라.”
“그래. 몽땅 벗겨 먹어주지.”
“크흐. 내 친구는 검과 방패를 다 얻어서 대박 났다더라.”
살인자들인 헤르메스 길드원이기에 복수도 하고, 전리품까지 노리는 유저들.
볼크를 비롯한 로열 로드로 먹고 사는 다크 게이머들도 대활약을 하고 있었다.
- 볼크 : 바로 지금입니다. 한 밑천 단단히 챙겨 봅시다. 언제까지 잡템만 줍고 다닐 겁니까.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착용한 장비를 노리며 눈이 붉어져서 달려오는 중이었다.
위드가 말한, 복수를 하더라도 수익을 추구한다는 마음가짐에 부합했다.
“빌어먹을. 그냥 갑시다.”
보에몽은 사막 전사들에게 보복을 하려다가 인파에 겁을 먹고 마수를 다시 달리게 했다.
“이 지긋지긋한 평원부터 벗어나고, 그 다음에 또 기회를 노립시다.”
“그래. 우린 딱 한 번밖에 안 진 겁니다. 언제든 다시 복수할 수 있을 겁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도망치면서도 사기가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중앙 대륙에서는 매번 이겼었고, 그들은 강하다.
재기를 노리고 있었지만, 측면을 노린 기사단의 돌격이 이어졌다.
특이하게도 말이 아닌, 황소를 탄 기사단이었다.
- 전속력으로 달려라!
기사단을 이끄는 것은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위드였다.
* * *
위드는 페일과 다른 동료들 외에도 중앙 대륙 출신 유저들, 그중에서도 추격을 위해 말을 잘 다루는 이들을 섭외했다.
기사의 직업을 가진 유저들은 탈것이 있을 때 전투력이 극대화된다. 특히 전쟁터에서는 과감한 적진 돌파를 하며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근데 이건 말이 아니라 소인데요?”
“소가 타기 더 쉽죠.”
“속도가 느리지 않나요?”
“빠릅니다. 일단 달려보면 알 겁니다.”
위드의 말에 반신반의했던 중앙 대륙 유저들이었다.
소를 탄 기사단이라니 볼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복수도 할 겸 한 밑천 챙길 기회라는 생각에 적극 참여했다.
우두두두두두!
처음 소가 달릴 때만 해도 신선하고 재미가 있었다.
“와. 그래도 꽤 빠르네.”
“기분 좋다. 이것도.”
수십만 마리의 소떼가 일제히 평원을 달린다.
날렵한 말과는 다르게 육중한 몸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아르펜 왕국의 소들은 얌전하지 않았다.
그들의 혈통은 선조인 누렁이로부터 많이 이어져 있다.
근육질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소들.
평소에는 순한 편이지만, 가끔씩 미쳐서 발광할 때가 있었다.
경쟁심, 투쟁 본능.
황소들은 함께 달리다가 콧김을 뿜어내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 푸흐흐흥!
평야를 가로지르면서 전력을 다해서 달리는데 그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선두에서 달리는 위드의 뒤를 따라오던 양념게장이 소리쳤다.
“위드님! 이거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그 옆을 따르던 수르카와 페일도 맞장구쳤다.
“맞아요. 빨라요.”
“조금만 더 천천히 가면...”
“뒤를 돌아보고 말하세요.”
양념게장은 뒤를 돌아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자신의 바로 뒤를 수십만 마리의 황소 군단이 미친 듯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흐억!”
“뭐, 뭐야 이거.”
동료들은 눈이 돌아간 황소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광분 상태예요. 속도를 늦추면 밟혀서 죽습니다. 그냥 무조건 달려요. 다른 건 아무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위드의 말대로 황소를 탄 유저들은 생각하길 멈췄다.
그냥 달린다.
바람을 느끼고, 요동치는 황소의 등에 하나가 되었다.
적은 두렵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건 뒤따라오는 황소 군단!
전술에 따라서 가치가 무궁무진한 기사들이지만, 그냥 달린다.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하벤 제국군이 보이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힘껏 들이받아 버리는 수밖에!
* * *
“광휘의 검술!”
위드는 바로 앞에 있는 기사를 대형 도끼로 내려찍었다.
지금까지 달려오던 황소의 속도와 힘을 최고로 끌어내서 가한 일격!
조각 파괴술로 힘을 늘려 놓은 효과는 아직까지도 작용 중이다.
찬란한 빛이 기사를 그대로 갈랐다.
< 절대적인 죽음!
무섭게 빠른 돌진으로 상대방의 생명력을 92,395 감소시켰습니다.
치명적인 일격.
적이 저항하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돌격으로 인해 공격력의 700%가 발휘되고 있습니다.
10초 동안 속도가 2% 빨라집니다.
황소의 체력이 미약하게 회복됩니다.
현재의 속도를 유지하는 한, 최고의 공격력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
위드는 다음 상대를 향해서 대형 도끼를 휘둘렀다.
돌격 상태를 유지한 채로 보이는 족족 베거나 내려치면서 돌파했다.
“다 죽여주마. 도끼 내려찍기!”
힘을 바탕으로 해서 죽거나 아니면 수십 미터씩 밀려났다.
이번에 얻은 전리품들은 로아의 명검 등과 함께 드래곤이 나타날 걸 대비해서 따로 빼돌려 놓은 후였다.
“위, 위드다!”
“위드가 나타났잖아!”
하벤 제국군의 진영은 위드의 등장에 당황하고 말았다.
- 시원하게 뚫읍시다!
위드가 돌파하자마자 동료들과 황소 기사단이 하벤 제국군의 진영으로 난입했다.
무지막지한 힘과 속도로 측면을 들이받아 버리는 황소 군단.
푸슈슉!
페일은 황소의 등에 서서 사방으로 화살을 쏘는 기예를 내보였다.
“속사! 다중 화살!”
수십 발의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고 나아가서 적 기사들을 맞춰서 떨어뜨린다.
하이 엘프의 활에 정령의 도움까지 받는 페일의 화살은 화재를 일으키거나 물 분수를 높게 솟구치게 했다.
“이랴합!”
파이톤은 대검을 휘두르며 위드의 바로 뒤를 따랐다.
단단한 갑옷을 입은 제국 기사들.
막대한 힘으로 대검을 휘둘러서 제국 기사들을 날려버렸다.
“크하하핫. 다 쓸어주마. 바로 이 느낌인 것이지.”
수르카의 주먹도 밝게 빛났다.
힘과 마나를 한껏 끌어모아서 적을 향해 터트렸다.
“천둥 주먹!”
주먹에 얻어맞은 기사가 그대로 나가떨어지면서 뻗었다.
꽈르르릉!
그 주변으로 벼락이 내려치면서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사망했다.
주먹술의 비기.
모라타의 대도서관에 누군가 보관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 니플하임 제국 역사의 한 농부의 이야기다.
웰턴 지역의 농부였던 그는 마을에 쳐들어온 도둑 떼를 보며 괴로워했다.
“한 대만 때려도 다 죽어버릴 것 같은 약한 녀석들. 저렇게 허약해서 세상 살기가 얼마나 힘들까.”
도둑들이 화를 내며 덤벼들었지만, 농부의 주먹을 견뎌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훗날 이 소식을 들은 니플하임 제국의 유명한 기사들이 찾아왔지만, 주먹을 휘두르는 그를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
대도서관에 정보를 보관한 이는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수르카도 소속되어 있는 북부의 권사연맹체에서는 이 종이를 발견하고는 적극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주먹술의 비기라는 것을 확인하고 추적하여 마침내 바위에 깊게 새겨진 흔적에서 천둥 주먹을 알아냈다.
“살아 있는 불의 정화여. 전부 싹 쓸어요!”
로뮤나도 마법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으킨 불길이 하벤 제국군을 뒤덮더니 옆으로 퍼져나가며 활활 타올랐다.
“꺄하핫. 다 태워버려라!”
양념게장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사라진 후였다.
“컥!”
“크흡!”
암살자인 그는 마음껏 그림자를 이용하면서 습격했다.
“크... 위드. 저놈이 겁도 없이 여길 쳐들어오다니. 정신 나간 거 아냐? 무조건 죽을 텐데.”
양념게장은 헤르메스 길드원의 등 뒤에 슬며시 나타났다.
“먼저 네 걱정이나 해.”
“뭐라고? 누구... 컥!”
단숨에 사망.
암살자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면서 모두가 등 뒤를 조심해야 했다.
이리엔도 신바람을 냈다.
“치유의 손길, 샘솟아서 넘치는 활력!”
그녀가 신성 마법을 쓰는 대상은 황소들이었다.
사람이 다쳤을 때도 신경 써서 치료를 해 주지만, 동물들을 무척이나 예뻐하는 그녀였다.
- 푸흥! 푸흥!
돌진하는 황소들도 콧김을 내뿜으며 마음에 들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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