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빛조각사 52권 : 8. 두 마리의 드래곤 (354/520)

8. 두 마리의 드래곤

검치는 하벤 제국군의 진영에서 사막 전사들과 시미터를 휘둘렀다. 

“으리야아아아아!”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며 야성을 터트리는 사내들이었다. 

“앞쪽이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냐.” 

“스승님. 막내가 왔답니다.” 

“그래? 잘하면 만날 수도 있겠구나. 우리도 시끄러운 곳으로 가자!” 

“예. 스승님!” 

검치와 사막 전사 군단은 방향을 바꿔서 하벤 제국군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랴하!” 

쌍봉낙타를 모는 검치의 손끝에서 빙빙 도는 시미터! 

곡예를 하는 듯한 그 손놀림 이후에는 섬광처럼 빠른 베기가 이어졌다. 

< 눈부신 일격이 적중했습니다. 

상대의 생명력을 19,429 감소시킵니다. > 

“적당히 싸워라. 애들아.” 

“예. 스승님!” 

수련생들은 말 그대로 적당하게 싸웠다. 

때를 맞춰서 적당한 힘과 속도로 시미터를 휘둘렀다. 

상대방이 피하거나 막지 못하며, 그 다음의 연속 공격까지 할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 

“뭐, 뭐야. 이거?” 

사막 전사의 낙타 부대가 하벤 제국군을 무섭게 돌파하고 있었다. 

위드도 넓은 시야로 병력들이 짚단처럼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중앙 대륙 유저들을 이끌고 양쪽에서 제국군을 무너뜨렸다. 

“막내야!” 

“스승님!” 

“여긴 정말 재밌구나! 한 번 신나게 달려보자.” 

“예. 스승님!” 

위드는 검치와 합류하며 선두에서 황소와 낙타를 두고 나란히 달렸다. 

“이랴하!” 

“가자. 가!” 

푸흐헹! 

헤르메스 길드 유저들의 저항이나 제국 기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전장 한복판에서 쓰러지는 이들도 속출하고 있었지만, 적진을 돌파하며 일으킨 열기가 식지 않았다. 

“오늘이 내 로열 로드 인생 최고의 날이야!” 

“캬하. 이 맛에 기사하는 거지. 달리자. 달려!”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쾌감! 

평생 동안 기억될 한순간을 경험하며 유저들은 달렸다. 

제국군의 선두 쪽에 몰려 있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후방의 상황을 알고는 분노했다. 

“위드까지 오다니 미친 거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죽을 각오는 하고 왔겠지?” 

아무리 바드레이까지 이긴 위드라고 해도 여긴 자신들의 진영 아닌가. 

사막 전사들이나 그리폰 군단, 조인족. 

여기에 황소 기사단까지 출현했는데, 자신들이 힘이 없어서 당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아크힘님. 제가 가서 쓸어버리겠습니다.” 

보에몽이 다시 나서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긴 가르나프 평원과는 다릅니다. 거긴 끝도 없이 유저들이 밀려들었었고, 여긴 우리가 숫자도 많고 더 강합니다. 저들 정도는 다 제압할 수 있습니다.” 

헤르메스 길드는 병력이 많이 깨졌지만, 그래도 로열 로드 최상위권의 유저들로 바글바글했다. 

“위드를 죽이고 오겠습니다.” 

보에몽은 자신을 따르는 유저들과 함께 위드를 잡기 위해 뒤로 처졌다. 

“저도 갑니다.” 

“위드는 제 손으로 목을 따주죠.” 

헤르메스 길드의 실력자들이 전투를 위해 후방으로 빠졌다. 

“나도 싸우지 못해서 아쉽군.” 

아크힘은 드래곤 때문이라도 퇴각을 계속 지휘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잠시 후에도 보에몽이 위드를 제거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양념게장! 

조용히 눈독만 들이고 있던 그가 거인기사 보에몽이라는 대어를 낚아챈 것이다. 

* * * 

“여기가 천국이로구나!” 

위드는 하벤 제국 기사들의 장비들을 듬뿍 획득할 수 있었다. 

검, 갑옷, 부츠, 액세서리. 

최고급 명품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많은 비싼 베스트셀러 모델들. 

경매장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가는 물품이었다. 

“실컷 챙깁시다!” 

위드와 황소 군단은 힘차게 달렸다.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위험하긴 했지만 복수를 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전리품까지 얻어서 기쁘고 행복했다. 

위드가 앞에서 부숴놓은 틈새로 파고들면서 닥치는 대로 베어버리는데, 그 강대했던 제국 기사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검치와 수련생들도 단단히 한 몫들을 해냈다. 

그들의 시미터는 날카롭고 빨랐으며, 스킬보다는 돌진하는 낙타를 타고 임기응변을 해야 하는 상황에 꼭 알맞았다. 

앞에서 부수고, 뒤에서 짓밟는다. 

처음 함께 달리는 것이지만 완벽한 호흡. 

중앙 대륙의 유저들은 진심으로 후회했다. 

‘미쳤다. 이 즐거운 일을...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어.’ 

‘아르펜 왕국으로 진작 넘어갈걸. 뭐하러 중앙 대륙에서 핍박받으며 살았을까.’ 

로열 로드의 두 명의 유명인 위드와 바드레이. 

위드에 대해서 중앙 대륙 출신 유저들은 자신들의 레벨이 높을수록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 불사의 군단 퀘스트로 유명해졌을 때만 해도 운이 좋다고 평가했다. 

‘좋은 퀘스트를 잘 잡았네.’ 

‘마법의 대륙과는 다르지. 로열 로드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고.’ 

로열 로드의 초창기부터 중앙 대륙에서는 이름을 날린 유저들이 꽤 많다. 

위드가 로자임 왕국 출신이란 걸 알고 레벨도 자신들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무시했다. 

훗날에는 전투와 퀘스트를 해내면서 존중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리고 함께 전투를 치러보고 나서는 흥분으로 손발이 떨려왔다. 

전투에 최대한 집중을 하면서도 위드를 한 번씩 쳐다보게 된다. 

적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달려들면서 진영을 붕괴시켜 버리는 전쟁의 신을. 

‘미쳤다. 저건 미친놈이야.’ 

‘앞으로 위드의 세상이 열리겠구나. 아부를 잘 해야지.’ 

‘아. 재밌다. 너무 재밌어서 맨날 따라다니고 싶어질 정도네.’ 

‘풀죽신교가 왜 생긴 건지 알겠다. 지겨운 광신도라고 생각했는데... 저러니까 좋아하지!’ 

‘인생 뭐 있나. 즐겁게 살면 돼!’ 

중앙 대륙 유저들은 단단히 결심했다. 

앞으로 위드가 사냥이나 퀘스트, 그 어떤 일이라도 함께 하자고 제안하면 수락하기로. 

물론 순간의 이끌림에 의해 후회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 * * 

KMC미디어의 스튜디오.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를 중계하면서 진행자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불타는 유성 소환으로 시작된 전투는 잠깐도 쉬지 않았고, 수천만의 유저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싸우고 죽어나갔다. 

‘앞으로 일주일은 푹 쉬어야지.’ 

신혜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해설에 열을 올렸다. 

“네. 위드와 추격대가 퇴각하는 하벤 제국군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런데 취재팀. 드래곤 케이베른의 상황은 어떻죠?” 

방송 화면은 급박하게 푸른 하늘로 전환이 되었다. 

KMC미디어에서는 신규 직원을 채용하면서 단서를 달았다. 

< 베르사 대륙의 어느 장소나 취재가 가능할 것. > 

기자라는 직업은 사건 사고가 벌어진 장소라면 어디든 가야 한다. 

모험을 위해서는 험악한 지형들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자들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찾아갔다. 

위드가 다녔던 지골라스 같은 대륙의 10대 금역도 기자들은 당연하게도 가봐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기자실의 벽에 쓰여 있는 문구도 남달랐다. 

- 몬스터와 인터뷰가 안 되면, 맞아서 죽기라도 해라! 

- 시청자들은 원한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 취재를 위해서는 용암에 몸을 던져라. 

극한 직업 중의 하나가 로열 로드의 취재 기자라는 방송국의 속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악룡 케이베른의 취재를 위해서 신규 기자들이 대거 달라붙었다. 

마법사 직업을 가진 기자들은 지상에서 움직였지만, 가장 가까이 달라붙은 건 벌새 파르타니라는 이름의 기자였다. 

벌새가 방송국으로 보내주는 영상에는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하늘을 빠르게 날고 있었다. 

지상의 풍경들이 무섭게 지나가고 있었고, 케이베른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시커먼 연기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 여... 기는 현장...입니다. 드래...곤이... 정말... 빠릅니다. 

현장의 기자는 케이베른의 뒤를 따라가기도 버거운 모습이었다. 

오주완이 눈치 없게 물었다. 

“케이베른이 파괴한 도시에 대해서 말인데요. 드래곤 브레스도 직접 보셨지요?” 

- 그...렇습니...다... 운이... 좋아...서... 

“얼마나 위력적이던가요?” 

- 멀리...서... 보고...도... 죽는... 줄...만... 

말을 잠깐 나누는 사이에도 벌새는 날갯짓을 쉴 수가 없었다. 

체력의 한계에 도달해도 날고 있는 기자 정신! 

옆에서 지켜보던 신혜민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수고해 주세요. 한 3분만 더 날면 힘이 좀 날 거예요.” 

- 예...? 

“사제인 미율 기자가 지금 수잔 봉우리에 등산하며 올라가고 있어요.” 

- 거기... 엄...청... 험한...데... 

봉우리에는 만년설까지 덮여 있는 산 중의 산이었다. 

“체력 회복 마법을 걸어주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답니다.”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벌새를 계속 날게 하기 위해 사제까지 출동했다. 

“케이베른이 가르나프 평원에 도착할 때까지 끝까지 수고해 주시고요.” 

- 독한... 놈들... 

기자의 불평이 들리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애교였다. 

요즘 기자들은 더럽고, 어렵고, 힘든 일을 많이 해야 시청자들이 좋아했다. 

얼마 전에 위드가 투쟁의 길을 걷고 나서, 그걸 따라하던 기자가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짓은 아니라고 불평했던 일도 유명했다. 

신혜민은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케이베른의 현재 이동 경로를 보면 북쪽으로 쭉 올라가고 있어요.” 

오주완도 말을 받았다. 

“예. 영상에 나온 드래곤의 알이 깨진 장소가 가르나프 평원입니다. 상황으로 봐서 그곳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방송 화면이 전환되어 가르나프 평원의 모습이 보였다.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하던 유저들은 잠깐 사이에 많이 흩어졌지만 꽤 남아 있는 상태였다. 

위드가 이끄는 중앙 대륙 유저들이 추격전을 벌인다는 소식에, 뒤늦게 따라오는 유저들의 무리도 많았다. 

방송 화면은 하벤 제국군의 무리와 중앙 대륙 유저들, 사막 전사들이 뒤섞여 있는 광경으로 전환되었다. 

신혜민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케이베른이 10분 안에 도착하리라고 봐요. 그러면 아마도 저곳에 있는 유저들은 다 죽을 거예요.” 

* * * 

헤르메스 길드의 반격은 빠르고 무서웠다. 

거인기사 보에몽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허무하게 죽었어도 그에 버금가는 유저들은 널리고 널려 있었다. 

- 빙하 지역! 

- 절대 경계선! 

최고 수준의 마법들이 발동되면서 사막 전사들이나 중앙 대륙 유저들을 휩쓸었다. 

하벤 제국군이 도처에 있었지만 아군의 존재를 무시하는 대단위 마법 공격이 발휘된 것이다. 

- 푸흐히힝! 

낙타와 황소들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마법 공격에 의해 큰 피해를 입는 건 위드도 마찬가지였다. 

< 몸이 얼어붙었습니다. 

신체 능력 저하! 

모든 스탯이 12초 동안 절반 이하로 저하됩니다. 

생명력이 25,291 감소합니다.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 

마법 저항력은 장비에 의해서 많이 의존하는 부분이다. 

비싼 갑옷들은 전부 따로 빼돌려 놓았기 때문에 피해를 거의 고스란히 입어야 했다. 

평소에 노가다를 뛰며 맷집을 키워놓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피해를 입었을 상황! 

위드가 이끄는 중앙 대륙의 유저들도 수백 명씩 쓸려나갔다. 

“이럇햐! 달리자! 바람마저 따라잡자!”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순간 불태우면 그걸로 족한 인생이다!” 

“멋진 순간을 위하여!” 

로열 로드를 하면서 그동안 억눌러왔던 쾌감을 터트리고 있었다. 

참았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모든 감정들을 해방시키고 쏟아낸다. 

“젠장. 다 죽여!”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쳤다. 실력자들이 양쪽에서 정면으로 들이받으니 사상자들이 헤아릴 수도 없었다. 

위드와 검치의 주변에 있는 유저들도 우수수 쓰러지고 새로 채워졌다. 

- 위드님!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 어서 제 다리를 잡아요. 

하늘에서 커다란 목소리들이 들렸다. 

조인족들이 낮게 날면서 위드를 구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하벤 제국군의 한복판, 헤르메스 길드의 공격에 악룡 케이베른까지 다가오고 있으니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본 것이다. 

“꿰뚫는 창!” 

헤르메스 길드의 마법 공격이 하늘로 향하며 조인족들도 우수수 추락했다. 하지만 조인족들은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위드를 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풀죽신교의 전체 통신 채널. 

위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 위드 : 조인족을 비롯해서 북부 유저들은 지금 철수하세요. 전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통신 채널로 전달된 놀라운 이야기에 모든 유저들이 잠시 침묵했다. 

위드가 죽을 각오를 했다는 건 처음 알려지는 것이었다. 

- 위드 : 지금까지 우릴 위해 싸워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혼자 떠날 수는 없습니다. 떠나지 않겠습니다. 

아르펜 왕국의 유저들을 감동시키는 뜨거운 한마디. 

물론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는 멘트였다. 

- 위드 : 가르나프 평원에 모여서 전쟁을 함께 준비해 주신 분들. 용감하게 사악한 하벤 제국에 달려가신 분들. 알킨 병에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분들. 이분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진 못해도 그 고마움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눈물 나는 뜨거운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서 고추 찌개를 만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집주인에게 줄 월세를 만들기 위해 빙판 길에 넘어지면서도 우유 배달을 했던 나날들을 추억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힘들면서도 할 만은 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딘가에 더 어려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힘들던 시절의 추억이 아름답게 남지만은 않는다. 

돈이 없으면 서럽고, 배고프고, 눈물이 나는 것이었으니까. 

- 위드 : 모든 사람들의 도움과 헌신, 기대. 이 감정들을 모아서 저는 마지막까지 싸울 겁니다. 하벤 제국에 대항하고, 대륙을 황폐화시킬 케이베른을 향해 로아의... 도끼를 휘두를 겁니다. 

로아의 명검은 죽음을 예상하고 빼돌린 후였으니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 

“와...” 

“위드님이 그런 마음을 품었다니.” 

위드의 말을 들은 유저들은 깊은 감격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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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런 때에.” 

아크힘은 바드레이가 없는 상태에서 총지휘관의 역할을 하며 상황을 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위드를 잡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에서는 이미 패배했다. 

위드를 죽인다고 해서 아르펜 왕국군의 사기가 꺾인다거나, 전투의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놈이 중앙 대륙 유저들을 이끌고 추격해 온 것은... 솔직히 무모한 자살 행위다. 지금까지 저런 멍청한 짓을 했던 적이 없었는데.’ 

상처 입은 맹수를 뒤쫓아 왔지만 오히려 물리칠 수 있으리라. 

위드를 그렇게 죽이거나 물리치는 건 가능할 테지만 문제는 악룡 케이베른이 날아오고 있다. 

KMC미디어의 방송이 나오는 수정 구슬에는 케이베른의 위치와 도착 시간을 알려왔다. 

- 가르나프 평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습니다. 

도착 예정 시간 6분 12초. 

기차를 기다리더라도 6분 정도 남았다면 금방이다. 

하물며 드래곤이 날아온다면 하벤 제국군의 퇴각을 책임져야 하는 아크힘의 입장에서는 난처했다. 

“도대체... 더 빨리 떠날 수는 없는 건가?” 

말과 마수들은 충분했는데도 가르나프 평원을 벗어나는 속도가 자꾸만 늦어졌다. 

“어렵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탓에 뒤쪽에서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젠탈이라는 이름의 유저가 옆에서 대답했다. 

그도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지만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선두에서 퇴각하던 헤르메스 길드원들 중에서 실력자들이 위드와 싸우기 위해 대거 후방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아크힘은 무언가가 떠오르며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아뿔싸! 자살 공격이구나!” 

아무리 봐도 무모하기만 한 위드의 공격이었다. 

복수심에 의해서 덤벼든다고 보기에는 평소의 행동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모든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덤벼드는 건... 드래곤을 이용해서 우릴 전멸시키겠다는 의도였구나!” 

비로소 위드가 따라온 이유를 깨달은 아크힘이었다. 

자기 자신을 불태워서라도 드래곤을 끌어들여 하벤 제국군을 몰살시키려는 음험함. 

아크힘은 위기를 느끼고 옆에 있던 라페이에게 말했다. 

“지금 위드가 죽음을 무릅쓰고 쫓아와서 하벤 제국군과 함께 죽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페이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역시 위드의 의도에 대해서 조금 더 일찍 파악하긴 했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다. 

패배하고 도망치고 있는 헤르메스 길드다. 

위드와 추격대로부터 끊임없이 피해를 감수하면서 벗어난다면 전력상 손실은 물론이고, 심리적인 타격 역시 굉장히 크리라. 

‘아니. 어차피 우리의 말도 듣지 않겠지.’ 

눈앞에 베르사 대륙의 정점에 오른 위드가 있는데. 

절대적인 명성과 전리품을 얻을 기회라고 보고 욕심에 눈이 멀어서 떠나기 쉽지 않으리라. 

사실 위드가 잃어버릴 장비라고 해봐야 좋은 것들은 다 빼돌려 놓은 이후였지만. 

‘발목을 잡혔다. 위드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이건 성공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겠지. 위드가 스스로 죽기를 작정한 것이니까.’ 

라페이의 입에서는 길고 긴 한숨이 나왔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되겠습니다.” 

“어떤 선택 말입니까?” 

“이미 위드는 100% 죽은 목숨입니다. 우리 헤르메스 길드에 의해서든, 아니면 드래곤에 의해서든. 문제는 우리가 악룡 케이베른과 마주하는 경우입니다.” 

아크힘에게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피해가 큰데 드래곤까지 나타난다면...” 

“그러니 최대한 빨리 위드를 죽여야 합니다. 그 후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늦는다면...” 

“우린 드래곤을 상대해야 되겠죠.” 

아크힘도 그런 끔찍한 상황이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헤르메스 길드원 전체에 전달했다. 

- 아크힘 : 드래곤이 다가오고 있다. 모든 전투 병력은 위드를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해라! 

라페이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까지 나를 무너지게 만드는구나.’ 

끈질기게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 셈이었다. 

* * * 

위드와 함께 하벤 제국군을 추격해 온 유저들은 점점 거센 저항에 휘말렸다. 

“사라지는 대지!” 

“섬멸의 불꽃 확산!” 

“공간 왜곡!” 

무차별적인 마법 공격에 당했고, 도처에서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덤벼들었다. 

중앙 대륙에서도 만나기 힘든 랭커들이 이곳에서는 흔히 널려 있었다. 

“위드!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다. 막내야. 앞으로 가라!” 

선두에서 함께 달리던 수련생들이 이탈해서 적들을 상대했다. 

“으하하하. 우리 다 같이 미치자!” 

“이렇게 시원할 수가. 아주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전방에서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공세를 퍼부었다. 

두두두두 

수십만 황소 군단의 성난 질주가 벌어지면서 막으려는 자들과 뚫으려는 자들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뒤쫓아서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죽여!” 

헤르메스 길드에 속한 기사 유저들도 속속 나타나서 말을 타고 뒤를 쫓아왔다. 

벌떼를 건드린 것처럼 강력한 유저들이 모조리 동원되고 있었다. 

“이젠 정말 위드를 잡는다.” 

“진짜 끝을 여기서 보여주자고.” 

중앙 대륙 유저들이나, 사막 전사들이나 방어선을 돌파하며 급격하게 소모되고 있었다. 

하벤 제국군도 마찬가지로 손실이 막대했지만 그럼에도 사방에서 옥죄어 왔다. 

< 마법 공격! 

모든 것이 얼어붙는 빙하 파열이 터졌습니다. 

갑옷이 얼어붙는 극심한 추위! 

빙하의 파편들이 몸에 박혔습니다. 

생명력이 37,485 감소했습니다. 

이동 능력을 7초 동안 상실합니다. 

10초 동안 모든 저항 능력이 64% 줄어들었습니다. > 

위드는 선두에 있는 만큼 가장 많은 공격을 입어야 했다. 

“치유의 손길.” 

“프레야의 은혜.” 

이리엔을 비롯한 사제들의 헌신적인 치료가 없었더라면 진작 죽고 말았으리라.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는 만큼 어마어마한 치유량이 집중되었다. 

- 여기까지다! 

마수들을 탄 바드레이의 친위대. 

그들이 헤르메스 길드에서 자랑하는 실력자들과 방어선을 형성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위드는 멈추지 않고 도끼를 붕붕 휘둘렀다. 

“전속력으로 뚫어라!” 

수십만의 황소 군단과 낙타를 탄 사막 전사들 누구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으랴차아!” 

“갑시다. 마지막 한 줌의 힘까지 모아서 불태웁시다.” 

“활활 타오르자아!” 

선봉의 위드에게 수백 발이 넘는 화살이 날아왔다. 

그 모습에 워리어 중의 누군가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위드님. 아르펜 왕국을 부탁합니다. 섬광 방패!” 

화살 공격을 대신 맞고 죽은 유저. 

위드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그에게 고개를 잠시 숙여주었다. 

“헤라임 검술!” 

바드레이의 친위대라면 그 실력은 500대의 후반일 정도의 레벨과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어설프게 단숨에 뚫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어쩌면 막힐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이미 달리고 있기에, 여기서 멈추는 건 최악의 결정이기에. 

“어리석은 놈들. 다 쓸어버려!” 

헤르메스 길드로부터 화살과 마법 공격이 퍼부어졌다. 

“으아아.” 

“멋진 하루였다.” 

위드를 따르던 유저들은 그동안의 피해가 누적되어 우수수 쓰러졌다. 

“차앗! 막내야. 우리가 간다!” 

검치는 낙타를 달리며 적진으로 먼저 뛰어들었다. 

“막내야. 이 전투 끝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다.” 

“그래. 김치찌개는 직접 끓여줘라.” 

사범들과 수련생들이 우수수 사막 전사들을 이끌고 죽을 곳을 향해 들어갔다. 

“위드님.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여긴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쇼. 지금이라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사이에 위드의 주변에는 중앙 대륙의 유저들로 빼곡하게 감싸졌다. 

흑사자 길드의 칼리스나 사자성의 군트, 클라우드 길드의 샤우드도 있었고, 그 외에 한 시절을 풍미한 유명 유저들이 즐비했다. 

그동안 방송이나 영상으로 이름을 날리진 않았어도 어딘가에서 묵묵히 사냥을 하며 성장을 해 온 이들. 

로열 로드에 대한 애정이 깊기에 헤르메스 길드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살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한 몸을 던져서라도 위드를 구하려고 했다. 

‘이거 참... 죽기도 쉽지가 않네.’ 

위드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벤 제국의 한복판이기는 하지만, 아직 황소 군단의 전력이 절반은 남아 있었다. 

하늘에서는 조인족들이 피해를 입으면서도 지상까지 내려오며 구출 작전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 째잭! 위드님. 어서 피하세요! 

- 위드님이 이곳에서 죽으시면 안 돼요! 

헤르메스 길드의 원거리 공격 부대가 황소 군단보다도 조인족들을 우선 목표로 할 정도였다. 

‘죽으려고 왔는데도 안 죽이나. 진짜 살려고 한다면 아직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위드는 크나큰 유혹에 휘말렸지만 황소에 타고 있는 유저들의 얼굴을 봤다. 

‘미래의 단골 고객들이다.’ 

중앙 대륙을 먹어치우면, 앞으로 꾸준히 성실하게 납세의 의무를 해 줄 유저들. 

북부 유저 100명보다 고레벨 유저 1명이 납부하는 세금이 더 크다. 

위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할 때 함께 달렸던 우린 끝까지 함께입니다. 그러니 같이 갑시다.” 

“위드님...” 

감동한 중앙 대륙의 유저들. 

그들은 극한의 상황에 닥쳐야 사람의 본성이 나온다는 말을 떠올렸다. 

위드는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죽을 줄 알면서도 떠나지 않고 무리를 이끌려고 한다. 

그 책임감, 헌신! 

훌륭한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도 착각이었다. 

‘극한의 상황에도 사기는 치는 법. 훌륭한 사기꾼과 투기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위드가 이끄는 황소 군단의 돌격이 계속 이어졌다. 

바드레이의 친위대, 최정예들로 구성된 헤르메스 길드에 부딪쳐서 장렬히 목숨을 잃어갔다. 

선두에 있는 위드는 동시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고레벨 유저들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게다가 앞에서 오래 몸을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이 불타고 있습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화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사악한 저주가 어느새 깃듭니다. 신체가 약화되고, 질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신앙이 몸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습니다. 

-얼음 계열의 마법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몸이 결빙됩니다. 이동속도와 움직임이 저하됩니다. 

-전격 계열의 공격에 의해서 육체가 일시적으로 마비됩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러 마법들이 집중되었다. 

혼자라면 정말 순식간에 죽었을 테지만, 사제들의 보호 마법도 집중되었다. 

옆에 있는 다른 유저들이 앞으로 나가서 맞아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화력이었다. 

“반드시 죽인다!” 

친위대 소속의 유저 스무 명 가량이 황소 군단의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위드. 

모든 마법 공격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이 위드와 가까워졌다. 

채쟁챙! 

위드가 도끼를 휘둘렀지만, 쇄도해 오는 창과 검을 모두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 속박! 

깊은 뿌리의 얽매임으로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 

[ 연이은 쇠약! 

몸이 느려집니다. 

민첩이 저하되고, 명중률이 크게 약화됩니다. ] 

적절한 타이밍에 저주까지 사용되었다. 

원래의 장비들을 다 갖췄더라면 저주들을 막아낼 수 있을 테지만 가벼운 차림의 상태로는 무리. 

페일이 화살을 쏘며 엄호했음에도 절반의 공격이 그대로 허용되었다. 

-대량의 피해! 막대한 생명력이 감소되었습니다. 

-신체의 마비. 몸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전투 불능 상태! 

몇 개의 메시지 창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생명력의 저하로 사망하셨습니다. 

“위드님!” 

“안 돼!” 

위드가 회색빛으로 변해서 사라지는 걸 본 황소 군단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이며, 숱한 모험을 성공시킨 위드의 사망! 

그 순간, 뒤를 따르던 중앙 대륙 유저들이 몸을 던졌다. 

샤샤샥! 

‘위드가 떨어뜨린 전리품이라면 뭐든 초대박이지.’ 

‘줍자. 줍고 죽더라도...’ 

‘용기 있는 자가 템을 얻는다.’ 

필사의 각오로 몸을 던진 유저들. 

< 3실버 24쿠퍼를 획득하셨습니다. > 

< 하벤 제국 기사의 검 장식을 획득하셨습니다. > 

< 싱싱한 소뼈를 획득하셨습니다. > 

< 저주가 깃든 가죽 갑옷을 획득하셨습니다. > 

< 막 다뤄서 부서지기 직전의 도끼를 획득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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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의 죽음. 

그 소식이 방송을 통해 베르사 대륙 전역으로 알려졌다. 

- 전쟁의 신, 위드! 위드가 황소 군단을 이끌고 선두에서 돌격 중에 사망했습니다. 

- 헤르메스 길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위드가 장렬하게 목숨을 잃는 모습입니다. 

- 용맹하게 싸우기는 했지만 집중 공격에 의해 방금 사망함으로써... 

가르나프 평원에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 유저들이나, 대륙의 곳곳에서 활동하는 유저들. 

그들은 위드의 죽음 소식을 접했지만 사기 저하 같은 일은 없었다. 

“위드님은 끝까지 우릴 위해 싸웠어.” 

“맞아. 그냥 도망가셔도 됐는데. 의리 때문에 죽은 거지.” 

“헤르메스 길드. 진짜 지독한 놈들. 드래곤까지 일으키고 이번에는 위드님까지...” 

유저들은 위드의 숭고한 죽음에 경의를 표했다. 

“아르펜 왕국의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했네.” 

“국왕이라면 그래야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마지막까지 전투를 이끌면서 영웅적인 전투를 치르다가 죽었다. 

그 대단함이야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헤르메스 길드의 아크힘은 통신 채널을 통해 전 병력에 명령을 내렸다. 

- 아크힘 : 이제 모두 도망쳐라! 

방송에 따르면 악룡 케이베른이 도착하기 2분 전. 

아쉬움이 남은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소리쳤다. 

“위드가 목숨을 잃었으니 죽은 자의 힘에 의해서 언데드로 되살아날 겁니다.” 

“그전에 드래곤이 도착한다. 드래곤과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진형이 무너져도 상관없으니 전속력으로 모두 철수해!” 

아크힘이 전면 퇴각을 선언하자 흩어지는 헤르메스 길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놈들을 잡아라!” 

위드까지 목숨을 잃으니, 사막 전사들과 황소 군단은 집요하게 그들을 쫓아갔다. 

“죽이려면 우리까지 다 죽여라!” 

“우리들을 절대 벗어나지 못할 거야. 끝까지 달린다.” 

거센 추격전이 벌어지면서 하벤 제국군은 짧은 시간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조인족들의 육탄 공세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조인족들 여럿이 동시에 부딪쳐서 말을 탄 제국 기사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헤르메스 길드원이라고 해도 날파리 떼처럼 덤벼드는 이들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악룡 케이베른 도착 1분 20초 전. 

“으하하하. 내가 검삼치다!”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낙타를 탄 사막 전사들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들이 마구 돌격하면서 하벤 제국군을 공격했다. 

“빌어먹을 놈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욕을 퍼부으면서도 드래곤이 도착하는 것이 두려워서 멈추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발목 잡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악룡 케이베른의 도착 예정 시간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54초. 

32초. 

시간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위드가 죽은 후에 페일이 이끌게 된 황소 군단이 전장을 우회하며 다시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빌어먹을. 좀 빠져나가자고. 어서 가!” 

마수를 탄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박차를 가했다. 

황소 군단과 뒤엉켜서 드넓은 가르나프 평원을 전력으로 달렸다.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간다. 그래도 설마 여기로 오진 않겠지.’ 

‘어쨌든 조금만 더 가면...’ 

16초 무렵이 남았을 때는 남쪽에서 시커먼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저건... 독수리의 눈!”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시야를 확대시키는 스킬을 사용했다. 

드래곤이 날개를 양옆으로 활짝 펼치고 날아오고 있었다. 

“케이베른이다.” 

“놈이 여기로 온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하늘에서 조인족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케이베른을 이곳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 크우오오오오오오오! 

지상의 군대를 본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이 섬뜩한 포효를 터트렸다. 

-드래곤 피어에 의해서 신체 능력이 제약을 받습니다. 

절대적인 위엄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생명력이 36% 감소합니다. 

일시 신체의 마비 증상이 일어납니다. 

이동 제약! 

9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부족한 지혜로 스킬 사용이 87% 제약을 받습니다.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하며 실패 확률이 상승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다가오는 드래곤을 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드래곤 피어가 무슨... 괴물 아니냐.” 

“이렇게나 세다고?” 

대부분 생명력이 절반도 넘게 줄어들었으며, 스킬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조인족들은 목숨을 잃으며 땅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얼마 안 되는 북부 유저들도 드래곤 피어를 견디지 못하고 바로 즉사했다. 

강인한 체력과 생명력을 가진 대형 마수들조차도 드래곤의 위엄에 굴복하며 땅에 엎드리고 있었다. 

- 쿠오오오오오오! 

악룡 케이베른은 등장만으로도 가르나프 평원에서 전투를 하던 무리를 침묵시켰다. 

검치가 이끄는 사막 전사들과 수련생들도 몸이 굳었다. 

그들은 난전을 치르면서 이미 생명력이 바닥까지 줄어 있었기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위압 상태에 빠져들었다. 

“우으으...” 

“저것이 블랙 드래곤이더냐. 아주 강해 보이는구나.” 

“예. 스승님.” 

블랙 드래곤의 무시무시한 육체가 날아와서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압도적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위용! 

“저걸 사냥해야 할 텐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승님.” 

“음. 아쉽구나.” 

검치와 사범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만 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공격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수많은 보스 몬스터들을 사냥해 봤지만, 드래곤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대륙의 질서를 좌우하는 절대 강자.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은 인간들을 둘러보다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후우우우우웁! 

짧은 순간에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대량의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저, 저거 설마...” 

“브레스닷! 피해라!”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피하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였던 것이다. 

중앙 대륙, 북부 유저들은 그냥 멍하니 쳐다만 봤다. 

* * * 

위드는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주위는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되살아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나?’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상황에 따라 10분씩 걸렸던 적도 있었다. 

그사이에 전투가 끝난 게 아닌지 걱정했지만,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하벤 제국군이나 중앙 대륙 유저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 날아온 악룡 케이베른도! 

‘케이베른이 여기에 있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 

오래 전에 조각사 퀘스트 때문에 케이베른의 레어에 가본 적이 있었다. 

진귀한 보석 조각품을 바친 적이 있긴 하지만, 블랙 드래곤이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위협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어떤 모험가의 영상으로 본 골드 드래곤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역시 황금빛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급스럽다고 할까. 

블루 드래곤이나 레드 드래곤도 그 특유의 세련된 멋이 있지만, 블랙 드래곤은 이름 그대로 어두침침하다. 

강하고, 위험하고, 잘 싸우게 생긴 드래곤! 

드래곤 계의 생양아치라고 할까. 

‘하벤 제국군과 케이베른을 만나게 했으니 계획은 성공이야.’ 

계획이랄 것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케이베른이 제대로 잘 찾아왔다. 

문제는 케이베른이 날아오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다는 것. 

‘브레스를 쏘려고 한다.’ 

위드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는데 뭔가 감각이 이상했다. 

팔다리가 짧아진 것 같고, 몸은 커졌고, 옆구리와 등에서는 날개까지 느껴졌다. 

- 크루롸아아아? 

위드가 입을 벌리자 독성을 머금은 검푸른 연기까지 새어나왔다. 

“이게 뭐냐. 스탯창!” 

캐릭터 이름 : 위드 

성향 : 증오와 저주를 바탕으로 태어난 언데드 

레벨 : 506 직업 : 하늘을 지배하는 본 드래곤 

생명력 : 2,391,562 마나 : 972,173 

힘 : 2720 민첩 : 1631 

체력 : 1731 

지혜 : 351 지력 : 274 

투지 : 917 지구력 : 763 

인내력 : 1542 맷집 : 813 

+강력한 물리, 마법 저항 

+전투의 달인. 

+느린 비행 속도. 

+저주를 퍼뜨림. 

+지역 패자 

< 최근에 많은 생명이 잠든 저주받은 땅에서 죽음을 거부하며 되살아났습니다. 

행운과 불행이 동시에 적용되었습니다. 

매우 특별한 육체적인 능력을 보유하지만, 동시에 마법력이 취약합니다. > 

“아...” 

무려 본 드래곤으로 되살아난 위드! 

‘엄청 강한 육체잖아.’ 

가르나프 평원에서 언데드들을 일으키기도 했고, 워낙 많은 이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서 강력한 본 드래곤으로 탄생했다. 

그럼에도 하필 드래곤 앞에서 본 드래곤으로 되살아나다니! 

고민의 순간은 길었지만, 악룡 케이베른의 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몸이 반응했다. 

‘일단 살고 보자. 죽었지만 그래도 바로 죽을 순 없지.’ 

- 콰콰콰콰! 

산성 브레스가 대규모로 쏘아져 나온다. 

하벤 제국군이나 뒤섞여 있던 황소 군단, 사막 전사들을 넘어서 위드에게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 아이고. 

파다닥! 

위드는 즉시 날갯짓을 하며 하늘로 치솟았다. 

대지가 검게 물들었다. 

용암처럼 거품을 내며 녹아내리는 땅. 

하벤 제국군과 유저들이 뒤엉켜 있던 정중앙을 관통하며 브레스에 맞거나 스쳐 지나간 유저들은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한 번의 공격에 수만 명을 사망시키는 초절한 위력. 

‘그냥 평범한 해골 병사 정도로나 태어났으면 어디 구석에 계속 죽은 척 누워 있을 텐데... 이놈의 팔자는 왜 되는 게 없냐.’ 

* * * 

“위드가 바드레이를 이겼군.” 

유병준은 후계자를 위한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젊을 때에 치기 어린 목표를 세우고 ‘로열 로드’라는 세상을 만들었다. 

- 이 대륙을 통일하는 황제에게 내 모든 걸 물려주겠다! 

로열 로드를 막 계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만큼 막대한 부는 아니었다. 

유니콘 그룹은 첨단 기술에서부터 금융, 로봇, 전통 산업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경제 제국을 구축했다. 

그는 은둔의 지배자였지만,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베르사 대륙을 통일할 후계자에게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근데 내가 왜 그랬을까.” 

유병준은 최근 들어서 가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세상을 비웃고 싶다는 패기로 가상현실을 만들었고 결국 모든 걸 다 넘겨준다. 

“죽 쒀서 위드를 준다는 거잖아?” 

- 그렇습니다. 

“위드는 내 덕분에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게 되겠지. 근데 그놈이 지금까지 내게 해 준 건 코코아를 마시라고 200원을 준 게 전부야.” 

-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것일까.” 

유병준은 과거를 회상해 봤다. 

연구실에서 살아온 경험을 제외하고는 그가 겪어본 세상은 거의 없었다. 

로열 로드를 만들 당시에도 인공지능을 먼저 개발한 후에 지구의 환경을 고려하여 베르사 대륙을 생성한 것이기에 가능했다. 

“지금까지 한 것은 연구밖에 없어. 그리고 남들이 로열 로드를 즐길 때에도 난 그저 모니터만 보고 있었고...” 

- 정확히 맞습니다. 

홧김에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남는 게 없었다. 

인공지능의 대답을 들으며 더 열이 나는 유병준이었다. 

“모든 걸 물려주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건강도 점점 안 좋아졌다. 

의학의 힘으로 극복이 가능했지만 그다지 세상에 오래 살고 싶은 미련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죽기 전에... 나도 로열 로드나 시작해 볼까?” 

- 정신 건강을 위해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박사님의 정신 건강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나쁩니다. 

“난 그다지 나쁜 걸 느끼지 못했는데.” 

- 타인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공격적이며 짜증을 잘 냅니다. 

유병준은 깊게 탄식했다. 

나이는 먹었지만 그동안 고생하며 이룬 것은 다 물려줘야 했고, 삶에 보람도 없었다. 

“대체 난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을까. 내가 창조해 낸 인공지능까지 나를 비난하다니...” 

- 비난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널 자식처럼 아꼈는데...” 

- 음성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원래 자식은 부모에게 솔직한 법입니다. 

유병준이 한 가지 다행으로 생각하는 측면도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서는 위드가 후계자가 되겠지. 위드 놈도 이 건방진 인공지능에게 실컷 고생을 했으면 좋겠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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