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1308화(53권-8화)
3. 불타는 아렌 성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가 끝나고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방송국마다 선물 꾸러미들을 들고 이현의 집으로 급하게 찾아왔다.
“약소하지만 산삼을 좀 가져왔습니다. 최근 5년 사이에 시장에 나온 것 중에 가장 오래되고 큰 것인데, 원기를 보충하시라고 준비해 봤습니다.”
“으하아아암!”
이현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그에게도 가르나프 전투는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잠을 푹 자도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다고 할까.
“이런 거 귀하지 않나요 ”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겁니다.”
“안 그래도 몸이 허한 느낌이었는데 비빔밥에 넣고 비벼 먹으면 딱이겠네요.”
“허헛. 그렇죠. 요즘 비빔밥하면 200년 묵은 산삼 비빔밥 아닙니까. 더 좋은 게 있으면 언제든 구해 오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야……. 고맙게 받긴 하겠지만 자꾸 염치가 없어서요.”
“뭘요. 다 정이죠. 정.”
KMC미디어의 강 부장은 넉살 좋게 웃어넘겼다.
이현과는 어떤 말을 나누더라도 속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관계였다.
- 산삼입니다.
- 비싸겠네요.
- 값을 따지기 어렵죠.
- 몸에 좋은 거니 부담 없이 잘 먹겠습니다.
- 편안히 드십쇼. 다른 거 더 가져오겠습니다.
대략 이런 뜻을 나누었다.
그 뒤로 강 부장은 30분에 걸쳐서 가르나프 평원의 전투에 대한 특집 영상 계약이나, 로열 로드의 방송 협조 등을 요청하고 갔다.
베르사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아르펜 왕국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둘러 협상을 마친 것이다.
CTS미디어에서는 신임 전무이사가 직접 찾아왔다.
“그러니까 우리 CTS미디어에서는 로열 로드에 대한 프로그램 편성을 늘리고, 다양한 취향의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무려 10분에 걸친 방송국 소개.
“알고 있긴 하지만 역시 유명한 방송국이라 다르긴 하네요.”
이현의 미간이 찌푸려질 무렵에 전무이사는 상자를 하나 꺼냈다.
“참, 프랑스에서 직접 버섯을 좀 가져왔습니다.
“집에 버섯은 많은데…….”
“트러플. 정말 귀한 송로버섯입니다.”
“라면에 넣어 먹어야 되겠군요.”
“라면이요 그럼 향과 맛이 다 죽을 텐데요. 이거 트러플 중에서도 최상품입니다. 드실 줄을 모르시는군요.”
이현은 눈치 없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상대방이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지 의심도 되었다.
‘쏟아지는 뇌물 속에 싹트는 거래 관계와 정이 있는 건데.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더라도 인간관계가 그런 게 아닌데 말이야.’
상대방의 정성과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뇌물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뇌물이 나쁜 게 아니지. 뇌물을 받고 해선 안 될 걸 해 주면 문제가 되는 거고. 양심껏 깨끗하게 받으면 문제가 안 돼.’
세계적인 사회학 잡지가 있다면 반드시 실려야 할 양심 뇌물 이론.
그에 비해서 다른 방송국들은 기본적으로 접대를 할 줄 알았다.
“동네 마실용 자전거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이탈리아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었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와 동일한 한정판입니다.”
“흠. 빛깔이 좋아 보이는군요.”
“페인트에 금가루를 좀 뿌렸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개국한 RTP입니다. 수도권 지역 위주로 방송을 하고 있는데요. 백화점 상품권을 100장 정도 챙겨 왔습니다. 지역 시장을 자주 가신다고 해서 시장에서 쓸 상품권도 가져왔습니다.”
“적절하네요.”
“약소한 성의니까 부담 없이 받아 주십시오. 하하하.”
“혹시 술 좋아하십니까 세계 5대 와인들을 좀 챙겨 왔는데 명성에 비해서는 그냥 별것 아닙니다. 쥐포랑 같이 드세요.”
“운동 기구를 좀 사 왔습니다. 로잉머신이라고……. 체력 관리하기에는 좋습니다.”
“최신형 컴퓨터와 가전제품들이 곧 올 겁니다. 특히 냉장고가 괜찮은 건데요. 천만 원이 좀 넘긴 하지만, 작은 마음의 선물입니다.”
이현이 방송국 관계자들과 돈독한 정을 쌓는 동안에 대문에는 물건들이 끝도 없이 쌓이고 있었다.
“오빠! 집 앞에 트럭들이 가득해!”
집 밖으로 나갔다 온 이혜연이 놀라서 외쳤다.
전 세계 방송국들이나, 팬들이 헤르메스 길드와 바드레이를 이긴 기념 선물들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과자류가 많았지만 어떤 것들은 명품도 있었다.
평소에 이현은 팬들로부터 선물을 일체 거절한다고 했었다.
- 역시 위드 님은……. 츤데레야. 말로는 우릴 막 착취한다고만 하면서도 부담 안 가도록 해 주는 거 봐.
- 캬……. 인성 보소. 위드 님처럼 실제 성격과 거꾸로 소문이 났던 분이 없어요.
- 위드 님이 무슨 마법의 대륙에서 학살자였다던데요.
- 아마 그쪽의 길드들이 헛소문을 퍼트린 거겠죠. 직접 안 본 건 믿지 마세요.
- 악의적인 소문이 확실함. 제 눈썹도 걸 수 있음.
실제로 이현의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마법의 대륙에서부터 나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대학교가 알려진 것도 문제지만 주소도 알아낸 이들이 너무 많아.’
언제 적과 마주칠지도 몰라서 더 열심히 육체를 단련했다.
로열 로드에서 레벨이 오를 때마다 실제로도 그만큼 강해져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팬들이 선물이라고 보내온 것 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
‘폭탄, 화학 약품들이 괜한 걱정은 아닐 거야. 세상은 오랫동안 길게 살아야 해.’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선물들을 거절했지만 이제부터 주는 건 그냥 받기로 했다.
로열 로드에서 명성을 날리면서 그는 유명인이 되었다.
정부에서도 테러를 의심해서 미리 점검을 해 주기로 했고, 집 주변에 경찰들도 상주하고 있었다.
‘집에서 쓸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다 기부하면 되겠지.’
동네에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
공짜로 받은 선물들을 돌려보낼 바에야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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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은 오른쪽에는 서윤, 왼쪽에는 이혜연을 데리고 동네에 나섰다.
바드레이를 이기고, 하벤 제국을 격파한 이후의 첫 나들이.
특별히 머리에 젤도 발라서 멋을 부리고, 깔끔한 새 옷도 입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슬슬 사람들의 이목에도 신경을 써야 될 때지.’
예전처럼 봄에 입기 시작한 청바지를 한 번도 안 빨면서 3년 내내 입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청바지는 원래 그런 낡은 맛에 입는 거긴 하지만, 앞으로는 석 달에 한 번씩은 빨아야지.’
이현의 패션 감각도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깔끔한 남방에 면바지.
그동안은 노가다를 뛴 직후의 옷차림이었다면 적어도 평범하게 봐줄 정도는 되었다.
‘동네 사람들부터 나를 보고 좀 놀라겠군. 확 바뀐 외모에 말이야. 평소에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꽤나 쓸 만했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나선 대문.
이혜연이나 서윤도 흰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따라왔다.
“와…….”
“미모가 장난이 아니다. 작년에 본 적이 있는데, 더 예뻐졌어.”
“풀죽신교의 단결력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알겠다. 이건 충성해야 한다.”
“미모가 범죄야. 무조건 다 빠져들게 만들잖아.”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마다 서윤을 보고 정신을 놓고 있었다.
이혜연도 혼자 돌아다닐 때는 남자들의 시선을 모았는데, 곁에 서윤이 있으니 평범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 서윤만 비친다.
심지어 이현은 존재감마저 희미해서 사라질 지경!
“예쁘면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크흠……. 골고루 다 나오긴 하는구나.”
아름다운 외모가 지배하는 더러운 세상!
이현은 여동생과 서윤을 데리고 단골 부동산에 방문했다.
“오. 자네 왔는가.”
부동산 중개사 아저씨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릴 때부터 반지하 월세 집을 몇 번이나 계약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름 부족한 금액으로 좋은 집을 얻어 주려고 노력했었다.
집주인이 횡포를 부리기도 하면 막아 준 추억 덕에 그 이후로도 쭉 이용하고 있는 부동산이었다.
“네. 별일 없으셨죠 ”
“그럼. 뭐. 이쪽이야 자네 덕에 관광지가 다 되어서 상가 가격이 많이 올랐지. 저 앞쪽의 빵 가게는 세 달 사이에 2억이 올랐어.”
“2억이나요 ”
“응. 장사가 예전보다 훨씬 잘 되어서 팔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으윽.”
이현은 배가 살살 꼬이는 걸 참으며 소파에 앉았다.
동네에 꽤나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지만 상가들은 손을 대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커피 한 잔 주세요.”
“믹스 괜찮나 ”
“그럼요. 커피는 역시 믹스죠.”
이현은 부동산에 오면 꼭 믹스 커피를 마셨다. 밥을 먹고 오지 않았을 때는 공짜 짜장면은 필수!
“여기 있네.”
부동산 중개사 아저씨는 이현과 서윤, 이혜연에게도 커피를 한 잔씩 타 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저씨는 이혜연을 보면서 씩 웃었다.
그녀에게는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왈가닥 꼬맹이였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막 부동산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부모 없이 자랐던 이현과 이혜연이 어느새 훌쩍 성장했다.
특히 이현은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으며 동네의 유지로 인정을 받았다.
‘어릴 때는 딱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꾼이 될 줄 알았는데…….’
이현이 커피를 다 마시고 말했다.
“아저씨. 이 앞에 있는 빌딩 사러 왔습니다.”
“빌딩 ”
“예. 1층에 마트 있는 여울 빌딩이요. 매물로 나온 거 맞죠 ”
“나와 있는 건 맞는데……. 저걸 정말 사려고 ”
이현이 여동생과 서윤까지 데리고 부동산 나들이를 온 목적은 건물 때문이었다.
1년 반 전부터 노려 오던 대로변의 8층짜리 빌딩!
가격이 무려 150억이나 되는 큰 매물이었는데, 이번에 방송국들의 광고 수입이나 캐릭터 사업들을 정산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돈은 빌리는 게 아니야.’
은행 대출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고, KMC미디어에서는 시청료를 바로 정산해 주기로 했다.
이현은 입꼬리를 쓱 올리며 웃었다.
‘건물주야말로 꿈의 종착지. 인생에서 최종 테크라고 할 수 있지.’
부동산 부자의 마지막 단계.
동네에 땅을 조금씩 사 놓기는 했지만 자고로 건물주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한 층, 한 층 월세를 받아먹으면서 명함을 만들어서 건물주 이현이라고 적어 놓을 작정이었다.
‘어릴 때의 꿈을 드디어 이루는구나. 로열 로드가 망해도, 이 건물만 뜯어먹고 살아도 굶어 죽을 일은 없지. 이제 내 아들이 태어나면 건물주 아들. 딸이 태어나면 건물주 딸이야. 대대로 건물주 집안이 되는 거지.’
이현은 오후까지 기다려서 건물주를 만나 잔금까지 치러 버리고 명의 이전까지 당일에 모두 끝냈다.
“드디어 해냈구나.”
부동산을 나오며 이현은 허리를 쭉 폈다.
어릴 때부터 쭉 어깨를 억누르던 가난이라는 무거운 짐.
잠을 잘 때에도 머릿속을 옥죄어 오던 돈에 대한 스트레스가 후련하게 풀린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고생이 다 끝났다고 여겨지면서 후련하면서도 섭섭했다.
“내 건물이 있으니 앞으로 200원 더 비싼 소금을 먹으면서 살아도 되는 건가…….”
이제부터는 밝은 미래만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앞으로도 사냥을 하고, 퀘스트도 진행하고……. 후. 돈에 대한 욕심도 버리고 앞으로의 인생은 편안하게 살면 돼.’
자잘한 취미도 만들고, 때로는 마당에서 햇볕도 쬐면서 느긋하게 살아가리라.
‘내일부터는 달라질 거야. 돈이 다 뭐라고……. 더 이상은 연연하지 않고 삶을 즐기자.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날씨도 화사했고,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다.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이현은 저녁을 먹고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방송국들이 선물한 영양제와 비타민을 먹고, 부지런히 도장으로 달려갔다.
“열심히 훈련을 해야지! 몬스터들을 한 마리라도 더 때려잡기 위해서는 말이야.”
이현에게 사냥 속도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몬스터는 곧 돈!
이번에 떨어진 레벨도 올려야 하고, 전투 업적에도 슬슬 관심이 많아졌다.
조각사 시절에는 전투 업적을 얻기가 어려웠지만, 네크로맨서가 되고 나서부터는 꽤나 짭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