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대탈출
유병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계획대로라면 4주 안에 허수아비를 치는 일을 끝냈어야 한다.”
스탯을 목표치만큼 올리고 그다음에 성문 근처 사냥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손에 쥐가 나도록 목검을 휘두르는 건 미치도록 힘든 노가다였다.
그 짓을 4주 내내 한다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간 한계에 근접한 일.
적어도 자신은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젠 목검을 쥐기만 해도 쓰러져서 눕고 싶었다.
“초급 수련관이 이렇다고? 미쳤군, 미쳤어.”
- 박사님께선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열 로드를 설계할 당시,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인간에게는 강한 시련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바탕으로 인간의 한계와 잠재력을 평가하여……
유병준은 과거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륙을 통일할 정도의 영웅이라면 당연히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조건들을 실컷 떠들었는데 직접 해 보려니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육체가 따라 주지 않다니…… 나이가 든 탓이라 역시 어쩔 수 없는가?”
- 로열 로드에서는 나이로 인한 제한은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는 더 피곤함을 느끼겠지.”
-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인공지능의 말대꾸 때문에 자기 합리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로열 로드에서 빨리 성장하는지 방법들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자신이 따라 하는 것만도 보통이 아니다.
“으음, 아무래도 모든 사람의 노력이 동일하진 않지.”
유병준은 그러다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었지?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접속해, 내가 쓸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들을 몽땅 사들이는 거야.”
현질!
세계 최고의 부자인 자신의 자금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소한 장비들에도 1억씩 마구 지른다면 다른 유저들보다 몇 배는 빨리 성장할 수 있으리라.
- 박사님, 지난번에 현금으로 아이템 구매를 하는 건 로열 로드를 편법으로 즐기는 방식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그땐 내가 잘 몰랐던 것 같아.”
- 어떤 점을요?
“현질이 최고였어.”
* * *
위드는 데브라도 마을을 빠져나왔다.
나이드와 드워프 유저들이 함께 희생의 화로를 수레에 싣고 운반했다.
“여기서는 오른쪽으로 가야 해.”
“좁은 나무들을 뚫고 가느라 힘들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지. 케이베른에게 발각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니까.”
2미터가 넘는 크기의 희생의 화로를 수레에 싣고 산길을 타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바퀴가 나무뿌리에 걸려 덜컹거렸고 때로는 힘껏 밀어서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도 나왔다.
- 날쌘 찬바람 : 레어에서 몬스터들이 대거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추적을 해 올 것으로 보입니다.
“마판 상단은 어떻죠?”
- 날쌘 찬바람 : 일찍 출발한 탓에 먼저 달려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몬스터와 가까운 운송 팀은 몇 안 됩니다.
하늘에서 보면 광산을 시작점으로 해서 드워프들과 마판 상단이 사방으로 빠져나갔다.
도주로를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이들은 험한 울타 산맥으로 깊이 들어가기도 했다.
“파돈 님. 몬스터들을 조심해 주세요.”
- 땅파면돈나와 : 옙!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겠습니다. 위드 님이 가장 늦으실 텐데 조심하세요.
데브라도 마을의 드워프들이 흔적을 지운다고는 하지만 그들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퀘스트 자체가 위드 혼자의 단독 작전이 아니라, 대규모 도적단의 침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흔적들이 잔뜩 남을 수밖에 없을 테고 운송 팀들은 쫓기게 될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마판 상단에서는 미끼 작전을 준비해 두었는데, 토르 지역의 드워프 유저들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미끼 역할을 수행해 잘 도망치면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고, 만약 죽게 되면 상당한 위로금까지 추가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빈집 털이를 하며 이래저래 나가는 돈이 많지만 이것들은 전부 투자!
- 내 레어를 침입하다니 찾아라, 모두 죽여라!
먼 곳에서 울부짖는 악룡 케이베른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케이베른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화가 났으리라.
‘이젠 살아서 도망치는 것밖에는 안 남았지.’
위드는 운송 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퀘스트를 진행하느라 데브라도 마을에도 들렀고, 희생의 화로까지 옮기는 자신이 가장 위험했으니까.
“빨리 가자.”
“예, 형.”
위드는 나이드, 드워프들과 함께 울타 산맥을 부지런히 내려왔다.
데브라도 마을이 워낙 험한 장소에 있었기에 산맥을 벗어나려면 무려 8개의 능선을 넘어야 했다.
중간에 외부로 노출되는 위험한 지역들이 있어서, 그곳들은 미리 나무와 수풀들을 심어 놓았다.
‘도둑 영화를 보면 준비가 절반이지. 암, 그렇고말고.’
쿠구궁!
그때 산이 갑자기 흔들렸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이 브레스를 쏘았습니다! 최고 강도의 브레스 같습니다. 위드 님과는 거리가 있는 장소입니다만 피해는 없으시지요?
“……!”
살벌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진짜 화가 많이 났구나. 빨리 가죠.”
위드는 드워프들을 재촉하면서 계속 전진했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
‘드워프들이 흔적을 지운다고 했으니 적당한 위치에 숨어 있는 게 나으려나?’
숨는 쪽으로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의 규모가 확실히 커졌어. 용아병들에게 안 걸리고 희생의 화로만 빼 왔다면 드래곤이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젠 전력을 다해서 쫓아올걸?’
드래곤의 공격력을 감안한다면 주변 지역을 초토화시킬 수도 있었다. 가만히 숨어 있다가 지역 전체와 함께 박살이 나면 큰일이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을 관찰하느라 발견이 늦었습니다. 지금 데브라도 마을의 드워프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 날쌘 찬바람 : 드워프들이 불을 지르면서 막 뛰어다니고 있는데요.
“불을 지른다고요?”
아마 드워프들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산불을 내는 거라 생각했다.
- 날쌘 찬바람 : 예. 하피들이 몰려와서 저는 이만 철수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위드는 도망치는 게 급해서 날쌘 찬바람의 말을 크게 고민하지 않았지만, 곧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형, 하늘을 좀 보세요.”
“응?”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저건 또 왜 저래. 드래곤의 마법인가?”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마치 무언가 올라가는 게 연기 같지 않아요?”
시야가 조금 트인 곳에 오니 하늘이 검게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울타 산맥의 웅장한 산세, 푸른 나무들이 빼곡하던 경치는 어디로 간 것인지 다 사라지고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불바다만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불에 타서 쓰러지며 불씨들이 강한 바람을 타고 날린다.
경이로운 속도로 산불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설마 이거…… 드워프들이 낸 산불인가?”
“그런 것 같은데요.”
위드는 믿는 도끼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보통은 상식선에서 발자국을 지운다거나 하는 온건한 방법도 있지 않은가.
“나이드야. 그리고 드워프님들.”
“예?”
“여기서부터는 더 빨리 달립시다.”
“형,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이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맞아. 하지만 최대한 서둘러야 해. 왜냐면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오고 있어.”
“히엑!”
나이드와 드워프들은 이유를 깨닫자마자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산 너머에서 어마어마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번져 오다니!
주변에는 다른 높은 산들도 있었기 때문에 바람이 더욱 몰려들고 있었다.
“어서 가요, 형.”
나이드가 앞서서 길을 찾고, 위드는 로아의 명검으로 걸리적거리는 나무를 베었다.
“달려라!”
“속도를 내요.”
드워프들은 거침없이 수레를 밀며 뒤를 따라왔다.
“무슨 퀘스트가 이래.”
“난이도 S급이 이런 거구나. 아무 때나 막 위험하네.”
“완전 대박!”
희생의 화로를 운반하는 드워프 유저들은 나름 레벨 450대에 힘과 민첩을 중심으로 키운 정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래곤 레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지만, 험한 울타 산맥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났다.
산불은 바람을 따라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형, 매캐한 냄새가 나요.”
“알아. 조만간 우리 몸이 삼겹살처럼 구워질지도 모르겠어.”
위드는 진지하게 비유를 든 것인데, 나이드는 무언가 떠오른 듯 반갑게 말했다.
“학교 앞에 맛이 기가 막힌 고깃집 있는데, 신입생들이나 동기들이 형 한 번 만나 보길 기다려요. 복학하면 단체로 거기서 고기 한번 사 주세요.”
“……아직 날 모르는구나. 언젠가 복학은 할 수 있지만 너희들에게 고기를 사는 일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아.”
하늘에는 계곡 하피의 무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심술궂고 사나운 소녀의 얼굴을 한 괴조들이 깩깩거리면서 지상을 살폈다.
“케이베른의 명령을 따르는 하피들이 우리들을 찾고 있는 모양인데.”
“들키면 큰일 나겠네요.”
“케이베른이 나타나겠지. 그래도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추적이 분산되긴 할 거야.”
다른 드워프나 운송 팀은 걸리지 않길 바랐지만, 그들이 발각될수록 당장 위드는 더 안전해지긴 했다.
수레를 밀던 드워프 유저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산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데요.”
“침착해요. 아직 시간은 있어요.”
하피들이 하늘에 보일 때마다 나무 사이에 숨어서 기다렸다.
희생의 화로에는 나뭇가지들을 덕지덕지 붙여서 위장을 한 데다, 다행인 점은 하피의 시력이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점!
“불길이 더 다가오고 있어요.”
나이드는 얼굴에 화끈한 열기를 느꼈다. 검은 연기는 이미 자욱하게 밀려왔다.
타닥거리면서 타는 나무들의 소리까지도 들렸다.
수레를 밀고 있던 드워프 유저들도 즐거움보다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 죽는 거 아니에요?”
“저기, 불길이 너무 가까운데요.”
수레를 밀고 산을 내려가려고 했지만, 몇몇 구역들은 이미 불이 붙었거나, 나무들로 이루어진 엄폐물들이 부족했다.
“꽤 곤란하게 됐네.”
위드는 바람을 타고 온 불길이 가까운 곳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것을 봤다.
“역시 재수가 없으려니 바람이 기가 막히게 잘 불어 주는 날이야.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좋을 텐데. 하늘이 돕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해결해야지.”
산불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자신의 팔자에 이것이 최악의 상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에서 이보다 나쁜 일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거니까요.”
위드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말을 내뱉으며 품에서 조각칼을 꺼냈다.
“잠깐 쉬고 있어요.”
“형?”
“조각품을 좀 만들 거야.”
TO BE CONTINUED
KMC미디어, CTS미디어.
로열 로드의 수많은 방송 채널 중에서 최고는 둘로 정리가 되고 있었다.
높은 시청률을 가진 인기 프로그램들을 보유한 KMC미디어.
해외의 방송국들에서도 프로그램을 직, 간접적으로 수출하며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CTS미디어에서는 모기업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경영에 주저하지 않았다.
인기 진행자들을 중심으로 게스트 섭외, 방송 제작비에 있어서 한도 없이 과감하게 썼다.
그들이 가장 핵심에 두는 가치는 단 하나였다.
“위드다! 위드를 잡아.”
“위드만 잡으면 뭐든 다 된다. PD가 바뀌든 국장이 바뀌든 시청자 누가 알아줘? 위드가 프로그램에 한 번 더 나오면 그만큼 시청률 높아지는 거야.”
방송국 입장에서는 위드가 모험을 할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었다.
전투를 하든, 조각품을 만들든 언제나 시청률의 보증수표였고 때론 위드가 험한 고생을 할 때마다 속으로는 웃었다.
“프로그램 해외 수출도 걱정할 거 없잖아. 우리에겐 위드가 있다고 해.”
“그래도 전속권은 없는데요?”
“우리가 위드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었던 건 사실이니깐.”
해외 수출도 위드라는 이름으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방송국들이 단맛을 실컷 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매번 갑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생일이나 명절.
혹은 별것도 아닌 기념일을 어떻게든 찾아서라도 선물 공세를 퍼부어야 했다.
“위드 님한테 올해는 선물 몇 번 보냈지?”
“7번입니다.”
“더 늘려! KMC미디어에서는 벌써 10번을 채웠다는 얘기가 있어.”
“주려고 해도 마땅히 줄 이슈가 없는데요.”
“그 집 강아지 키우잖아. 새끼라도 태어나면 뭐든 챙겨서 줘.”
“너무 노골적이지 않을까요?”
“괜찮아. 노골적이더라도 받는 사람만 기분 좋으면 되는 거지.”
방송국에서는 드래곤 레어의 빈집 털이도 크게 홍보했었다.
“진짜 되는 건가? 바로 전멸하면 시청률은 쪽박 차는 건데.”
“그래도 위드이지 않습니까?”
반신반의하며 진행했던 생방송.
“용아병에게 들켰다!”
“전투다. 진짜 제대로 붙었어.”
레어에서의 공방전이 일어나면서 1분 단위로 시청률이 증가했다.
그 후로는 무난하게 탈출에 성공하는가 싶더니 드래곤 레어에서부터 몬스터들의 대대적인 추격이 개시되었다.
아울러 드워프들이 지른 불길로 울타 산맥과 사이고른 산맥이 타오르고 있었다.
진행자들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 화면으로 보시다시피 산불이 위드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500미터 정도로 보이는데요.
- 다가가는 속도로 봐서는 아주 금방이죠.
- 제가 저런 산불에 가까이 가 본 경험은 없었는데요. 벌써 열기가 느껴지리라 짐작합니다. 화끈하게 달아올랐을 겁니다.
- 절대적인 위기입니다.
“타라, 타! 시청률도 함께!”
방송국 관계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 * *
타다다닥!
산불이 바람과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위드는 침착하게 조각칼로 물방울을 깎았다.
“와, 신기하다. 물이 깎아져요?”
“진짜 조각을 못하는 게 없구나.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신기하네.”
나이드와 드워프들은 놀라움에 지켜만 볼 뿐이었다.
“후후후.”
위드는 조각술로 관심을 받을 때마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벽한 노가다로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조각술!
“형, 근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구름을 만들 거야. 그런 다음 비를 뿌리게 해야지.”
“그렇구나.”
조각술 마스터 데이크람의 자연 조각술.
비를 내리게 하는 기적을 일으켜서 산불을 잠재우리라.
‘먹구름도 일으켜서 어둡게 만들면 도망치는 데 효과가 있겠지.’
위드의 머릿속에서 착착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드래곤의 레어는 생각보다 쉽게 털었다. 용아병들에게 걸려서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오베론 님의 활약으로 막아 냈지. 이 정도의 고난쯤이야.’
불가능에 가깝게 여겨졌던 처음에 비한다면 순조로웠던 퀘스트.
마지막 마무리도 어떻게든 도망에 성공하기만 하면 됐다.
‘조각술은 역시 다양한 상황에서 쓸모가…….’
- 콰아아아앗!
하늘 위로 괴성을 지르는 케이베른이 날아가고 있었다.
“숨엇.”
위드와 나이드, 드워프들은 땅에 바짝 엎드렸다. 다행히 걸린 것은 아니고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케이베른이 연달아 괴성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며 날아가는 공포스러운 장면!
최소 30초 이상을 바짝 땅에 엎드려 있었다.
“안 되겠네…….”
“예?”
“미안, 시간 낭비만 한 것 같다.”
위드는 구름 조각술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비를 좀 내리게 할 순 있지만 산불이 너무 가까워졌어.”
“그래도 불이 번지는 걸 막는 데 도움은 되지 않을까요?”
“드래곤이 부근에 있는 이상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순 없지. 이런 쓸모없는 조각술 같으니라고.”
위드는 조각칼을 다시 품에 넣고 이동을 시작했다.
산불이 뒤로도 가까워졌지만, 능선을 따라 아래쪽에도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형, 점점 뜨거워져요.”
“내가 그럴 것 같다고 말했잖아.”
불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막 불을 지를 때부터 도주 경로를 바꾸는 게 옳았다.
울타 산맥의 지형상 산불의 경로에서 안전한 길목들을 살펴서 이동하는 것은 가능했다.
불과 연기가 오히려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은폐의 역할을 해 주었을 테니까.
다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건 다른 운송 팀들의 도주 경로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다른 운송 팀이 발각되어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고, 도주로가 뒤엉키면 그것 자체로도 새로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운송 팀들보다도 데브라도 마을에 들리고, 희생의 화로까지 옮기느라 가장 뒤처져 있었다.
“항상 중요한 건 뒤처리겠지. 그리고 지금은 조금 위기 상황이고.”
위드는 오랜만에 몸에 흐르는 긴장감을 느꼈다.
산불이 번져서 시야에 보이는 울타 산맥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압도적인 위협!
“나이드.”
“예, 형.”
“혼자서 먼저 빠져나가. 연기가 자욱한 지금이라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겠지.”
“형은요?”
“불길을 뚫고 화로를 가지고 갈 거야. 아예 불길이 번지도록 기다려서 말이지.”
“허억!”
위드는 산불이 다가오는 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불과 연기에 휩싸여서 그대로 통과한다면 공중 정찰을 하는 하피들에게 걸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희생의 화로도 어차피 불에 의해 파괴될 물건은 아니었으니까.
그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역발상이었다.
“위, 위드 님?”
“어떻게 그런 희생을…….”
“안 됩니다. 위드 님은 아르펜 제국의 황제입니다.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돼요!”
드워프 유저들이 경악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위드는 가볍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전 안 죽어요. 근데 여러분들은 죽을 겁니다.”
“…….”
“목숨 값은 챙겨 드리겠습니다.”
위드의 말은 불안에 떨던 드워프들을 안정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아르펜 제국의 황제로서 최고의 신망을 가진 상대. 더구나 지금은 드래곤 레어에서 빈집 털이까지 성공하며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다.
방금 봤던 그 보물들은 어떤 말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정 위드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불길이라도 못 뚫겠습니까?”
“이제야 소개를 드리는데 전 하론이라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목숨 값으로 장비 두 개만 받겠습니다.”
“저도 두 개면 됩니다.”
“직접 골라도 되죠? 아, 물론 엄청 좋은 건 아니고 제가 착용할 수 있는 장비에 한해서요.”
위드는 불길보다도 드워프들의 욕망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저기, 하나씩은…….”
“목숨 값으로 너무 야박하시네. 두 개는 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두 개 주세요, 두 개.”
드워프들은 합심해서 두 개로 올렸다.
여차하면 나이드까지 살아서 도망치지 않고 보물을 달라고 할 기세!
‘세상이 변했어.’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는 사람이 드문 야박한 세상이었다.
“알겠습니다. 계속 가 봅시다.”
위드는 나이드를 먼저 보내고 드워프 네 명과 함께 수레를 밀었다.
불길을 기다려야 했으니 조금 전처럼 서두를 필요는 없다.
무시무시한 산불이 점점 다가와서 그들을 덮쳤다.
* * *
“엄청난 산불이로군요.”
“정말 기막힙니다. 울타 산맥이 다 타 버릴 것 같아요.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을 다 보네요.”
북쪽으로 도망친 드워프들은 산 너머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다행히 우리 쪽으로는 불길이 오지 않겠네요.”
“그래도 쭉 도망칩시다. 쉴 여유가 없으니까요.”
드워프들이 자발적으로 성실하게 도망치게 만들어 주는 산불.
“몬스터다.”
“우리 이동 경로에 몬스터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어! 저곳에 운송 팀이…….”
먼저 갔던 운송 팀들이 몬스터에 의해 고립되어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드워프 전사들로 구성된 운송 팀.
마판 상단은 먼저 떠났고, 레어에서 마지막에 철수한 드워프 전사들이 모는 수레가 몬스터에 갇혔다.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어서 희망은 없겠네요.”
“다른 곳으로 돌아갑시다.”
드워프들은 안타깝지만 외면하고 몬스터들을 피해 가기로 했다.
약속대로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여야 했다. 어쩌다 발각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기고 감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의외의 사태는 항상 벌어지는 법이다.
몬스터들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드워프들에게 지원군이 나타난 것이다.
키가 작은 드워프 워리어!
“오베론 님이다.”
“이 근처에 있긴 했을 테지만…… 오베론 님도 운송 팀을 이끌고 있었잖아?”
“운송 팀은 보내고 혼자 나선 모양이네.”
오베론은 망치와 도끼를 동시에 휘두르며 맹렬하게 몬스터들과 싸웠다.
희생의 화로가 가진 효과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 듯 몬스터들을 마구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기적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운송 팀 2개를 구출!
그 대가로 수백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의 집중 공격을 당해야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드워프들은 고개를 저었다.
“오베론 님은 훌륭하신 분이기는 한데…… 정말 멋진 분이긴 한데.”
“어, 뭔가 좀 아쉽지. 드래곤 레어에서 그렇게 활약하고도 마지막까지 나서다니 말이야.”
“위드 님의 표현대로라면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우린 위드 님을 따르자. 위드 님 같은 분 옆에 있어야 인생에 이득이야.”
“응, 그게 맞지.”
TO BE CONTINUED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는 건 산맥 너머에서 지켜보는 유저들 입장에서도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우리 위드 님 어떻게 하죠?”
“구하러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리엔과 수르카는 울타 산맥의 초입에 있는 티스 마을에서 기다렸다.
드워프, 인간, 엘프들이 섞여서 살아가는 작은 개척 마을에는 로열 로드를 아는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위드가 과연 무사히 살아서 이곳으로 돌아오느냐!
이미 울타 산맥은 거대한 용광로처럼 변했다.
하늘은 화산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무사히 철수했던 페일이 자신 없다는 투로 얘기했다.
“저런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양념게장이 그 말을 받았다.
“위드 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같이 지낸 시간이 길진 않지만 바퀴벌레를 능가하는 생명력!
드워프 유저 네 명은 일찌감치 목숨을 잃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야가 있는 상태라서 방송국들의 화면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산불들.
나뭇가지들이 연달아 화르륵 하고 불길에 휩싸이며 다가오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낙엽들도 불에 타면서 솟아오른다.
불의 바다가 밀려왔다. 사방에서 덮쳐 오는 불은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생방송으로 중계하던 KMC미디어의 진행자들도 경악했다.
- 정말 무시무시한 산불이군요, 혜민 씨. 제 생각에는 위드 님이 죽음을 각오한 것일까요? 하피들에게 발각되느니 희생의 화로를 감추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위드 님은 최후까지도 살길을 선택하실 분이에요.
- 가까이에서 겪어 보셨으니 저보다는 훨씬 잘 아시겠죠. 그렇다면 여기서 위드 님의 선택은 무엇일까요?
- 짐작하기 어렵네요. 조인족들이 목숨을 걸고 출동하겠다는 이야기도 거부했어요. 하피들을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괜히 케이베른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이유에서요.
다른 여성 진행자인 이단아가 물었다.
- 변신술! 불의 정령 같은 걸로 변신하면 되지 않나요?
- 정령으로도 변신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정령이 되면 물리력이 약해져서 희생의 화로를 밀기가 어려워지니 그러진 않을 거예요.
- 앗. 그렇다면 먼저 빠져나오는 건요? 희생의 화로를 땅속에 숨겨 놓고 안전 지역으로 대피하는 거예요. 위드 님 혼자면 도망치기가 어렵지 않잖아요.
이단아의 생각은 방송국 게시판과 대화방을 뜨겁게 달궜다.
- 맞네, 저거네.
- 아이디어 굿!
- 근데 이미 늦은 거 아님? 이미 불에 갇혔는데 어떻게 도망쳐.
- 살자, 위드야. 제발 살아야 한다.
- 이미 죽은 목숨. 활활 타올라라!
- 여기 헤르메스 길드가 아직도 남아 있네.
신혜민은 그녀의 아이디어를 그럴 듯하게 여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위드 님은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에요.
- 예? 제 생각에 잘못된 게 있었어요? 희생의 화로니까 산불에 놔둬도 녹아 버리진 않을 것 같았는데요.
- 파손이나 성공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에요. 위드 님은 저런 귀중한 보물을 땅에 묻어 둘 수가 없는 분이에요.
- 아…… 신중하신 거예요? 드워프 종족의 보물이고, 케이베른을 퇴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물건이니까요.
- 그것과는 좀 다른데.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까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위드의 불안 본능!
이 정도로 귀한 보물이 손을 떠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버려 둘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진행자들의 입장에서도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드워프 유저들이 목숨을 잃고 나서도 위드의 영상은 계속 전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산불이 완전히 뒤덮어서 붉은 화면밖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 저 불길에서 살아 있다는 게 말이 안 돼요. 매초마다 엄청난 생명력의 피해를 입고 있을 텐데요.
- 상식적으로 그렇게 보는 게 맞긴 한데요. 위드 님이니 쉽게 죽진 않을 것 같습니다.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잠시 후, 신혜민에게 전달된 정보가 있었다.
- 위드 님은 멀쩡하답니다.
- 저 불에서요?
- 네, 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있다고 하네요. 웬만해서는 나오기 싫을 정도라고 해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위드는 산불에서도 건재했다.
- 아! 태양의 전사. 그 직업 때문에 불에 대한 피해가 최소화되겠군요. 불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 어쩌면 헤스티아 여신의 축복이 부여됐을지도 모르겠어요. 위드 님은 헤스티아 여신에 대한 공적치가 굉장히 높잖아요!
오주완과 이단아는 로열 로드의 진행 경험을 바탕으로 연달아 추측해 냈다.
신혜민도 처음에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페일로부터 전달된 설명은 그게 아니었다.
- 불에 저항력이 높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바드레이 덕분이라고 하네요.
* * *
위드는 드워프들이 불에 타 죽은 이후에도 수레를 밀며 묵묵히 걸었다. 그럭저럭 산불은 견딜 수 있었다.
< 화염의 피해를 34 받았습니다. >
< 화염의 피해를 11 받았습니다. >
< 화염의 피해를 63 받았습니다. >
…….
….
울타 산맥을 뒤덮고 있는 지옥 같은 불길에 비하면 미미한 피해!
‘역시 장비발이군.’
각종 장비들과 높은 저항력이 있다. 여기에 바드레이로부터 입수한 불꽃의 성배가 가진 옵션이 부여되었다.
< 화염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음. >
불 속성 몬스터들은 사실 꽤나 흔한 편이다.
하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워서 유저들은 불 속성 몬스터들이 많은 던전은 기피하는 현상까지 있었다.
덕분에 드워프들도 불에 대한 저항력은 좀 낮은 편.
‘바드레이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위드는 불꽃의 성배가 참 기특한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바드레이와 싸우면 또 좋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겠지. 역시 헤르메스 길드는 나쁘진 않다니까.’
수레마저 다 타 버린 후에는 희생의 화로를 밀면서 움직였다.
땅 위로 솟아올라 장애물이었던 나무뿌리들이 타서 사라지고, 잿더미 위로 길이 열렸다.
- 날쌘 찬바람 : 외곽에서 정찰 중입니다. 하피들이 불난 지역에선 물러가고 있습니다. 위드 님이 계신 곳의 하늘은 안전합니다.
다시 확보된 제공권!
위드는 케이베른의 레어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신할 때였다.
< 불꽃의 성배에 걸린 봉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진행률 1%
……
진행률 2%
……
진행률 3%>
‘봉인?’
위드는 정보 창을 띄워 보기로 했다.
“감정.”
불꽃의 성배 : 내구력 30/30.
불의 정화가 담겨 있는 잔이다.
인간들이 간 적 없는 땅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용암을 채취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백만 년 동안 타오른 불이 담겨 있다는 소문도 있다.
전설이 담긴 물품.
성배의 힘을 이끌어 내면 어떤 어둠도 물리칠 수 있으리라.
제한 : 없음.
옵션 : 소유하는 것으로 모든 스탯 53 증가.
생명력과 마나의 최대치 70,000 상승.
불과 관련된 모든 스킬의 위력이 200% 강화.
전투 스킬의 효과 +35%
화염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음.
열흘에 한 번씩 ‘성배의 평정’을 사용할 수 있음.
특수 : 전설이 봉인되어 있다.
밝혀지지 않은 옵션이 7가지 잠들어 있음.
성배의 평정 : 흐르는 용암의 강이나 폭발하는 용암 분출구를 소환하여 적을 쓸어 버린다.
전설이 봉인된 물품.
지금 상태로도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아이템이지만 아직 포장지도 뜯지 않은 상태였다.
‘그 봉인이 산불에…… 그러니까 엄청난 불의 기운에 의해 풀리고 있다는 것이구나.’
위드는 불꽃의 성배는 확실히 챙겨 놔야 할 물품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로아의 명검을 비롯해서 가지고 있는 아이템 중 가장 최고의 것일지도 모른다.
무기나 방어구는 드래곤의 레어에서 좋은 걸 꽤 얻었지만,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런 능력치를 주는 보물은 정말 귀한 것이니까.
중앙 대륙을 차지하고, 사실상 로열 로드를 지배했던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수장인 바드레이였기에 가질 수 있던 보물 중의 보물!
‘이 정도 등급의 아이템에 봉인된 전설을 풀어서 성배의 힘을 이끌어 낸다? 몇 가지 옵션들까지 추가로 생긴다면……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겠군.’
누군가와 거래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최고의 아이템이 될 것이다.
힘이나 민첩, 생명력을 높여 주는 부적 혹은 특수한 상징물.
경매장에서 가끔씩 거래가 되더라도 불꽃의 성배에 견줄 수 있는 물품은 아직까지 없다.
‘봉인이 풀리는 건 불에 넣는 것이었어.’
위드는 수수께끼치고는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화력을 가진 불이란 게 사실 흔한 건 아니었지만.
울타 산맥의 산불은 바람을 타고 계속 그 면적을 넓혀 가고 있었다.
수백 년간 자랐을 거대한 나무들이 불에 타며 쓰러져 내렸다.
< 불꽃의 성배에 걸린 봉인이 풀리고 있습니다.
진행률 33% >
안타깝게도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도 전에 부근의 나무들이 몽땅 타 버리고 말았다.
‘봉인이 먼저 풀릴 때까지 산불에서 기다려 봐?’
위드는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드래곤의 존재 때문에 울타 산맥을 그대로 벗어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위드 님!”
“이쪽입니다.”
티스 마을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올라오는 동료들이 보였다.
페일과 이리엔, 수르카…….
오랜 동료들을 시작으로 레어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양념게장과 파이톤도 보였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이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습니다.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목표는 서쪽의 드워프 마을로 보입니다.
케이베른도 다른 곳으로 갔다.
“다 끝났구나…….”
빈집 털이가 무사히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었다.
쐐액!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위드의 몸이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스르릉.
자세를 낮추고, 로아의 명검을 뽑아 들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고 흐릿한 형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오고 있었다.
고작해야 거리는 3미터 정도.
‘사형 집행자의 습격. 암살자 스킬이다.’
무기나 레벨이라는 변수를 제외하고도 순수 스킬 데미지만 8만이 넘는 공격 기술.
단검에 갑옷이 지켜 주지 못하는 부위를 맞아서 치명적인 일격이 발동되면 생명력 30만이 그대로 사라질 것이었다.
TO BE CONTINUED
상대의 스킬까지 확인하는 순간 기계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재생의 검!”
상체를 뒤로 눕히며 검술의 비기를 사용했다.
생명력과 방어력을 크게 높여 주는 기술.
< 생명력이 200% 증가합니다.
주변 식물들의 영향에 따라 방어력이 증가합니다.
황폐화된 나무와 풀들이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전달해 줍니다.
방어력이 12% 늘었습니다. >
차자장!
로아의 명검과 암살자가 들고 있는 단검이 짧은 거리에서 쉬지 않고 부딪쳤다.
처음에는 쇄도하던 암살자의 공격이 그대로 적중될 것 같았지만 그것을 간신히 막아 냈다.
“꺄아악!”
“위드 님!”
“피하세…… 응?”
다가오던 동료들이 볼 때에는 습격해 온 암살자에게 당할 순간이었는데 바로 대응하며 막고 있었다.
그러자 암살자가 손을 뿌렸다. 이번에는 다섯 개의 단검이 그대로 위드에게 날아왔다.
- 심판의 투척!
암살의 비기!
독을 바른 단검을 던져서 상대의 몸에 적중시킨다.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무섭도록 강한 기술이다.’
단검 하나로 생명력에 입힐 수 있는 피해가 10만에 달한다. 물론 그중에서 절반 정도는 독에 의해 지속되는 피해였지만.
암살자는 생명력이 적고, 방어 스킬이 없는 대신에 짧은 순간의 공격력은 최강이었다.
위드는 로아의 명검을 휘두르며 세 개의 단검을 쳐 냈다.
눈 질끈 감기와 같은 방어 스킬은 별로 의미가 없는 상태!
‘거리를 둬야 한다.’
몸으로 두 개의 단검을 맞아 주며 발동시킨 차원문의 장갑을 이용하며 공격 범위를 빠져나왔다.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나서야 숨을 한 번 고를 여유가 생겼다.
“치료의 손길!”
위드가 믿는 건 이리엔과 같은 든든한 사제들이었다.
줄어든 생명력이나 중독은 금방 치유해 줄 수 있었으니까.
- 드워프. 살아남는 실력이 제법이군.
칠흑 같은 어둠으로 몸을 감싼 즐탄이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케이베른의 레어를 지키던 보스급 적 중의 한 명이 나타난 것이다.
위드는 즐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귓속말을 전했다.
“반경 2킬로미터에 추적해 온 다른 적이 있습니까?”
- 날쌘 찬바람 : 죄송합니다. 아마 잿더미 사이에서 움직인 것 같은데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나간 일은 됐습니다. 적은요?”
- 날쌘 찬바람 : 소규모 몬스터들이 존재합니다. 그 외에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케이베른은요?”
- 날쌘 찬바람 : 서쪽의 드워프 마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견적이 나왔다.
‘암살자들은 추적 계열의 스킬이 있긴 하지. 어쩌다 내 흔적을 따라온 건가.’
위드는 페일이나 양념게장에게 가볍게 눈짓을 했다.
- 페일 : 알겠습니다.
- 양념게장 : 후후후후.
티스 마을에서 기다리던 동료들이나, 고레벨 유저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더니 주변을 둘러싸며 자리를 잡았다.
양념게장의 경우에는 그림자로 그대로 몸을 숨겼다.
위드가 로아의 명검을 손바닥에 탁탁 내려치며 말했다.
“야. 너 혹시 혼자 왔냐?”
- 하찮은 드워프 따위를 죽이는 데는 혼자로도 충분하다.
즐탄은 위드를 케이베른의 레어를 털어 간 수많은 드워프 중의 한 명으로 알고 있었다.
도적단의 진정한 악당 보스도 몰라보고 순진하게 쫓아오고 말았다.
위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우.”
- 두려운가. 걱정하지 마라. 죽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
보스급 몬스터를 유인해서 잡는 경우는 많았다.
다른 부하들을 먼저 제거하거나, 사냥하기 좋은 장소에서 덫을 깔아 놓고 기다린다.
위드는 보통의 경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유인하는 방식은 취하지 않았다.
“이걸 보고 굴러들어 온 떡이라고 하는 건가. 드래곤 레어를 신나게 털었더니 덤까지 딸려 오네.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재수가 없으려면 운이란 운은 오늘 다 써 버린 걸까.”
페일이나 파이톤 그리고 티스 마을에서 합류한 드워프 전사들.
최소 백여 명의 유저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보통의 보스급 몬스터라면 도망이라도 칠 텐데, 즐탄은 인간들과 드워프들을 한참이나 얕잡아 보고 있었다.
케이베른이 인간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그 부하마저 비슷한 행동을 취하는 것.
“바로 시작합시다.”
위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즐탄의 오른쪽에서 페일의 화살이 쏘아졌다.
“가자아!”
“죽여!”
유저들도 사방에서 일제히 덤벼들었다.
드래곤의 레어에서야 불리한 상황이었으니 방어하는 싸움을 했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제 발로 온 보스급이라면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인 것!
- 나약한 놈들! 전부 죽여 주지.
즐탄은 단검을 뿌리고, 연막을 터트리며 싸움을 시작했다.
“조화의 빛!”
“강렬한 섬광!”
“일렁이는 바람!”
수많은 마법들이 연막을 그대로 씻겨 나가게 만들었다.
은신술을 펼칠 수 없게 유저들이 가까이 달라붙었고 그다음에는 화염과 얼음, 벼락의 마법 공격도 집중되었다.
“섬광 폭풍!”
“으아악!”
“누가 광역 마법 공격했어!”
“진정하고, 적당히 자제하면서 싸워요.”
매초마다 온갖 마법들이 적중되는 즐탄!
놀랍게도 대부분의 마법들이 어둠에 사로잡혔지만 그럼에도 일부는 그대로 적중되었다.
드워프 10명을 죽였지만 암살자인 탓에 금세 생명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위드는 로아의 명검을 쥐고 인간적인 고민에 빠졌다.
‘막타를 칠까, 말까.’
아무래도 즐탄을 처치하면 전투 공적을 올릴 수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을까? 솔직히 나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무리들도 꽤 있을 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좀 먹더라도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멍청한 일이었다.
‘그래, 그게 맞지. 양심의 가책은 조금 뒤에 느껴도 돼.’
파바바바밧!
드워프나 다른 유저들의 공세가 한층 거세지고 있었다.
그들도 즐탄의 최후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잡자.’
‘내 것이다.’
독을 바른 장검을 꺼내서 휘두르며 저항하자 드워프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즐탄의 최후를 자신이 가지려 마구 덤벼드는 유저들.
마법사들, 사제들도 최강의 공격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건 1초도 안 되는 싸움이다.’
즐탄의 남은 생명력을 확인할 시간도 없다. 그냥 본능에 맞기고 공격을 때려 부어야 하는 것.
모든 유저들이 그의 최후를 노리고 있을 때였다.
즐탄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더니 바로 덤벼들었다.
- 사형수의 칼날!
상대의 생명력이 5% 이하로 떨어져 있으면 그대로 즉사시키는 암살자 스킬.
양념게장의 출현이었다.
“아, 안 돼!”
“이게 뭐야, 이럴 순 없어!”
드워프 유저들이 비명을 질렀다.
“에잇, 잔혹한 도끼질!”
“종말의 내려치기!”
“광분!”
저마다 최고의 스킬들을 즐탄에게 적중시키는 유저들.
케이베른은 높은 저항력과 생명력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암살자 즐탄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 울타 산맥의 죽음을 관장하는 암살자 즐탄이 영원한 안식에…… >
위드는 양념게장이 나타나는 순간, 차원문을 연달아 통과했다.
유저들이 차원문의 입구나 출구에 있는 경우도 있어서 조금 헤맸고, 그 짧은 순간 찰나의 조각술을 쓰는 것도 고민했다.
‘찰나의 에너지가 얼마 안 남았고, 케이베른을 상대하기 위해 모아 두어야 하는데…….’
딱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 놓았는데, 최후의 안식을 맞이하는 즐탄!
어둠과 함께 흩어지는 즐탄의 몸에는 근접 공격 외에도 마법, 정령술, 화살 등의 수많은 공격들이 뒤늦게 적중되고 있었다.
유저들의 관심사는 즐탄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뭐야, 누가 먹었어!”
“누구지?”
유저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찾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누가 먹었는지를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양념게장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즐탄이 떨어뜨린 아이템들을 주웠다.
“뭐야, 결국 게장 님이 먹었어?”
“암살자 양념게장. 양념게장 님이 먹었다.”
“완전 재수 없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막타는 양념게장 님이 쳤네.”
유저들의 원망을 한 몸에 받게 된 양념게장!
양념게장으로서도 억울하고 할 말은 있었다.
본래 드래곤 레어에서도 즐탄을 견제했던 건 자신이었다.
치명적인 공격력을 가진 암살자들은 원래 기습을 하고 마지막 최후의 숨통을 노리는 것도 전투의 정석.
그렇지만 정작 막타를 치고 나니 이곳에 모인 모든 유저들의 원망을 받을 수밖에는 없었다.
전투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공적 치가 나눠지긴 했어도 마지막에 죽인 것만큼은 못하니까.
위드는 로아의 명검을 집어넣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
“저도 막타를 칠 줄 몰라서 안 친 게 아니에요.”
“…….”
* * *
토르의 드워프 유저들은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먼저 울타 산맥과 사이고른 산맥에 걸쳐 큰 불이 일어났고 그다음으로는 케이베른이 지휘하는 몬스터들이 침공했다.
“위드의 도둑질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완전. 집도 대장간도 다 날아가고 망했어.”
“고향이 사라진 건 어떻고. 4년이나 살던 고향인데…….”
케이베른은 드워프들을 복수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빈집 털이를 당한 날 드워프 도시 5개를 박살 내고,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
평소에 제공하던 드워프들의 상납품도 10배씩으로 늘어나게 된 바!
“이걸 어쩌라고……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
드워프 유저들은 위드가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로열 로드와 관련된 종족 게시판마다 위드에 대한 비난과 하소연들이 줄을 이었지만, 그 파장이 심각하게 커지지 않았다.
드워프 종족 퀘스트!
드래곤 레어를 턴 것은 드워프 종족의 숙원을 해결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퀘스트 자체에서는 희생의 화로를 훔치라는 것이었지, 보물을 최대한 많이 털라는 말은 없었지만…….
- 케이베른은 심각한 악룡이죠. 드워프로 사는 유저들이라면 모두 느끼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 저 드래곤을 해치울 수 있는 퀘스트가 언제든 생길 거라고요.
- 그게 지금일까요? 도무지 힘에서부터 불가능하게 보이는데.
- 드워프의 숙원. 종족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건데 피해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드워프들이라면 참아야죠.
- 집 잃어 봤어요? 저는 1년 넘게 장만한 집이 이번에 날아갔어요.
- 그건 인정. 위드가 우리 드워프들에게 너무 큰 피해를 입혔음.
- 꼭 퀘스트에 성공해서 케이베른을 물리쳤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번에 인간들이 표적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쭉 드워프들이 괴롭힘을 당했잖아요? 적어도 더 이상 삥 뜯기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르펜 제국에서는 신속하게 성명을 발표했다.
위드는 별 관심도 없었지만, 서윤이 피해자를 안타까워하면서 구제안을 만들었다.
- 피해가 생긴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토르 지역에서 집이나 대장간을 잃은 유저 분들은 아르펜 제국으로 오세요. 더 좋은 집과 대장간을 무료로 지어 드릴게요. 편하게 정착을 할 수 있도록 3개월간 철광석과 각종 재료들도 원가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할게요.
드워프들은 터전을 잃긴 했지만 아르펜 제국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로열 로드에서 퀘스트로 인한 피해가 생기더라도 이를 보상해 주는 일은 없었다.
명문 길드가 죽이거나 약탈을 해도 힘의 원리에 의해 짓밟혀야 했었다.
그런데 종족 퀘스트의 진행에 따른 피해를 아르펜 제국이 나서서 보상을 해 주니, 드워프들의 불만은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