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최후의 날
헤겔, 벨라, 르미, 셀시아.
가상현실학과를 다니는 그들은 신입생들을 잔뜩 데리고 모라타에 왔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이곳이 아르펜 제국의 발상지야.”
헤겔이 턱을 치켜들며 설명했다.
“흑색 거성에서부터 반경 2, 3킬로미터 정도? 역사적인 구역이지. 여긴 폐허 시절부터 있던 장소라고. 지금처럼 대도시가 되기 전에 말이야.”
가상현실학과의 신입생 80명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설명을 듣고 있었다.
로열 로드를 모라타에서 시작한 신입생들도 많아서 도시에 대해 잘 알지만 그들이 바라는 목적은 따로 있었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등까지 기른 파엘라가 손을 들었다.
“거기, 말해 봐.”
“헤겔 선배님, 그럼 오늘 위드 선배님도 볼 수 있는 건가요?”
“어…… 그건 말이지.”
헤겔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위드와 친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수업도 같이 들었지만 지금은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전화는 맨날 걸고, 문자도 남기는데 안 받는 걸 어떻게 해.’
위드의 주가가 치솟아서 방송국에서도 함부로 연락을 못 했다.
용건이 있더라도 PD급에서는 감히 전화도 하지 못하고 이사급으로 넘기는 수준이었으니, 연락이 잘되기가 힘들었다.
사실은 헤겔이 수시로 전화하고 문자를 보내서 이미 차단된 상태였지만.
“으이그. 그럴 줄 알았다.”
“우리도 오빠를 본 게 언젠데 신입생들까지 데려와서는. 내일이 전쟁인데 오빠한테 시간 내 달라고 할 수 있겠어? 그냥 모라타나 구경하자.”
벨라와 르미가 바로 구박을 하며 그렇게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파엘라가 다시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나이드 선배님은 볼 수 있나요?”
“나이드?”
헤겔은 자신의 친구 이름이 들려오자 제법 놀랐다.
“그 자식은 왜?”
“요즘 학과 최고의 인기인이잖아요!”
“그놈이?”
“네. 나이드 선배님 보고 싶어요!”
나이드는 위드와 함께 케이베른의 레어를 털면서 일약 도둑 영웅으로 떠올랐다.
신입생들에게 위드는 대단하고 전설적인 존재였고, 그의 동료 역시 마찬가지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나이드를 보고 싶다고?”
“네! 선배님.”
“너희들도 다 그래?”
“그럼요! 꼭 만나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신입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었다.
헤겔은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나이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어디냐.”
― 나이드 : 응? 내일이 케이베른과 싸우는 날이라서 모라타에 있어.
“여기 와라.”
― 나이드 : 어딘데? 너도 모라타야?
“흑색 거성 앞. 나 번쩍이는 날개 갑옷 입어서 금방 눈에 띌 거다.”
― 나이드 : 금방 나갈게.
헤겔은 대화를 나누고 나서도 어딘가 답답함에 한숨을 푹 쉬었다.
무언가 자신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들을 다 빼앗긴 느낌이랄까.
잠시 후에, 흑색 거성의 입구에서 나이드가 걸어 나왔다.
“헤겔아!”
“꺅!”
“진짜 나이드 선배님이다.”
신입생들은 멀리서부터 나이드를 보고 좋아했다.
나이드가 착용하고 있는 망토는 신입생들만이 아니라, 헤겔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저절로 펄럭이는 신비로운 소재에는 묘하게 시선을 뺏는 검은색 광택이 흐른다.
헤겔은 왠지 물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예감을 느끼면서도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원래 나이드는 자신보다 레벨도 높았고, 도둑이라서 좋은 장비들을 많이 가졌지만 이번에 처음 보는 건 어떤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망토 뭐야? 나도 요즘 돈 좀 모아 놨는데 얼마면 살 수 있어?”
“가격? 판매하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 어디서 구하는데?”
“위드 형이랑 드래곤 레어 빈집 털이 도와주면서 받은 물건이거든.”
“허엇.”
“처음에는 무난해서 선택했는데, 이게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더라. 그래도 이동 속도 상승이랑 비행 기능이 있어서 좋아. 방어력, 마법 저항력도 높고.”
“설마 이거 재질이?”
“응. 블랙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어졌어.”
나이드의 솔직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헤겔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느낌이었다.
“선배님!”
“저희 사인 좀 해 주세요.”
“혹시 모험하셨던 이야기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마음에 들어 했던 신입생들이 헤겔의 곁을 떠나서 나이드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오늘은 특제 요리입니다. 모라타의 모든 고급 재료들을 몽땅 써 봅시다!”
“우아아아앗!”
황소 광장에는 요리사들이 모였다.
풀코스의 바르베로타, 해산물의 미하엘, 고기 굽기의 산젤리, 디저트의 모쿠.
요리의 전문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누가 최고라고 부르기 힘들었지만, 대륙에서 유명한 요리사들이 모라타에 집결했다.
― 대륙제일요리대회.
주최 아르펜 제국.
후원 마판 상단, 가몽 상단, 불패 상단, 뭐든 싸게 상단.
이른바 요리대회.
우승 상금만 500만 골드에 아르펜 제국의 영주 자리까지 수여가 된다.
미심쩍은 입맛을 가진 심사위원들에 의해 진행되는 요리 대회들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규칙이 간단했다.
― 케이베른이 공격해 오는 전날 밤에 개최합니다.
대회 시간은 해가 저물면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음식을 먹어 본 손님은 1점에서 5점까지 점수를 줄 수 있음.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요리사가 승리!
요리사들은 제공되는 식자재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되었다.
“밤새도록 요리를 해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면 되는 건가?”
“어. 근데 많이 팔수록 유리하니까 인기 순서 같은데.”
“인기도 실력이잖아. 그리고 유명하다고 해서 먹어 봤는데 맛없으면 표 안 줄 거야.”
“맛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실망하는 거처럼?”
“맞아. 인기는 초반에 잠깐만 차이가 날 거야. 옆에 맛있는 거 놔두고, 굳이 맛없는 걸 먹으려고 사람들이 몰리지도 않잖아.”
“그 말이 맞겠네.”
유저들은 원하는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베르사 대륙의 산해진미들이 일제히 요리되었다.
요리사들이 벌이는 화려한 불 쇼에 유저들이 몰려들었다.
“엄청난 향기군.”
“아렌 성에서도 이 정도 수준의 요리들은 못 먹어 봤는데.”
드래곤과의 전투를 앞두고 헤르메스 길드에서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헤르메스 길드원만 하더라도 30만 명은 훌쩍 넘는 인원들이었다.
수백 골드 정도 하는 최고급 요리라도 금전적인 부담이 갈 정도는 아니었고, 그들에게 식사는 매우 중요했다.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 식사는 전투 시에 힘과 체력을 크게 높여 주니까.
보에몽이 양념을 바른 멧돼지 꼬치구이를 뜯었다.
“설마 우리가 잘 먹고 잘 싸우라고 위드가 행사를 주최한 건가?”
학살자 칼쿠스도 고기 위주의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모라타의 소고기볶음을 맛봤다.
“그런 것 같지요. 요리사들에게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을 제공하고.”
가르나프 전투에서 7군단을 이끌었던 크레볼타 역시 그들과 함께 있었다.
“크으. 맛있기는 합니다.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하지만 이런다고 드래곤을 상대로 승산이 1%나 높아질까요? 거의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군단장들은 보통의 몬스터가 아니기 때문에 효과는 미약하리라고 봤다. 하지만 사기를 높이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었다.
자신들부터 얼마 후면 벌어질 드래곤과의 전투에 대한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으니.
보에몽이 멧돼지 꼬치구이를 하나 더 집으며 말했다.
“근데 여기 물가가 꽤 비싸지 않습니까? 꼬치구이 하나에 10골드라니요?”
크레볼타가 웃으며 말했다.
“전쟁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상인들이 비싸게 팔 수도 있지요.”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비싸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 납득하며 지갑을 열었다.
* * *
모라타의 거리마다 횃불과 마법 등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판자촌에서도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축제를 열고, 자신들의 집에 있는 물품들을 정리했다.
“휴. 손때가 묻은 건데…….”
“오랫동안 쓴 거야?”
“아니, 중고로 사서 전 주인 손때가 묻었다고. 아직 얼마 쓰지도 못했는데.”
판자촌마다 유저들이 가구들과 살림 도구들을 실어 가거나 팔고 있었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는 아직까지 모라타에 와 본 적이 없던 유저들이 들어왔다.
“정말 멋진 도시잖아. 이제야 여길 와 보다니…… 집이라도 한 채 사 놓을걸.”
“광장마다 열고 있는 축제가 다 달라.”
“어디든 빨리 가 보자.”
유저들은 밤을 바쁘게 즐겼다.
빛의 광장에서는 바드들에 의해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대륙 최고의 바드로 인정받는 마레이!
그가 1,000명의 유저들과 함께 악기를 연주하였다.
한쪽에서는 마법사와 사제들이 하늘로 빛을 뿜어냈다. 빛과, 음악만 있으면 그곳이 놀 수 있는 무대였다.
“신나게 놀아 봅시다!”
유저들이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전투를 앞두고 있기에 더욱 광란의 밤을 보내는 유저들.
그동안 남부 사막에서 사냥했던 타격대의 유저들이나 헤르메스 길드원들까지 뒤섞여서 밤을 즐겼다.
“흠흠! 미안합니다.”
“거 주변 사람 조심 좀…… 안녕하십니까, 칼리스 님.”
“네. 렌슬럿 님도 오셨군요.”
“그냥 기다리기는 좀 아쉬워서요.”
“재밌게 노시기를…….”
“칼리스 님도.”
광장에 사람이 북적이다 보니 실수로 발을 밟기도 했다.
원한이 깊은 흑사자 길드의 대표와, 헤르메스 길드의 군단장의 부딪침이었지만 그들은 그냥 슬쩍 자리를 피했다.
아르펜 제국의 질서 아래에 감정을 내세울 시점도 아니었고, 이 밤에는 긴장을 풀고 실컷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모라타에 모인 유저들을 마법에 걸린 것처럼 즐겁게 만드는 빛의 광장.
“우리도 한 곡 출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요?”
광장의 한쪽 구석에는 이빨이 툭 튀어나온 오크 가면의 남자와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다.
위드와 서윤.
그들은 가면을 착용하고 모라타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무도 우릴 못 알아볼걸.”
“춤은 춰 본 적이 없어요.”
“대충 음악에 몸을 맡기면 될 거야.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라서 금방 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운동도 못 해요.”
“잘할 거야. 몬스터 때려잡던 걸 보면 충분히…….”
“뭐라구요?”
“몸이 가볍고 날렵하더라고.”
위드는 서윤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들어왔다.
빛과 음악에 몸을 맡긴 사람들.
그들과 섞여서 어설프지만 마음대로 춤을 추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위드는 서윤의 손을 잡고 이끌고, 때론 몸을 바싹 붙이며 끌어안았다.
“어때?”
“나쁘지 않아요.”
“가끔 이런 시간도 가질까?”
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악사들의 연주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상대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
서윤은 흔한 여행복을 입었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고양이 가면을 썼다. 그럼에도 드러난 입가와 표정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게 사랑인가.’
위드는 감정을 배워 간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녀를 알던 때와는 다르게, 목소리와 표정, 행동에서도 감정들이 물씬 전해진다.
행복을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지금이 행복하단 걸 깨닫게 만드는 시간.
케이베른에 의해 모라타가 파괴되어 버릴지라도 이 순간만은 영원히 기억에 남으리라.
위드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안고 춤을 추었다.
‘얼굴을 못 보는 게 다행이구나.’
서윤의 눈동자가 불빛에 비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빠져 버리면 정신이 몽롱하게 되어 버릴 테니까.
한 곡, 또 한 곡.
시간을 잊은 것처럼 어설프지만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빛의 광장에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어서 슬슬 춤을 출 공간도 부족해졌다.
“다른 곳에도 놀러 가자.”
“좋아요.”
요리가 펼쳐지는 황소 광장에 가서 다양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정말 맛있어요.”
“문어 요리가 좋네. 여기 투표하자.”
“그래요.”
사람들 틈에 줄을 서서 요리들을 먹고 투표도 했다.
“저기 대회의 공정성 때문에 익명으로 투표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대회를 주관하는 마판 상단의 상인이 제지하기도 했다.
“이름을 말씀해 주십쇼.”
“위드. 그리고 이쪽은 서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위드랑 서윤이라고요.”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을…….”
발끈하려던 상인은 위드가 가면을 들어 올리자 얼굴을 보고는 조용해졌다.
“헙. 화, 황제 폐하.”
서윤은 굳이 가면을 들지 않아도 되는데, 위드를 따라서 얼굴을 보여 주었다.
“전 서윤이에요.”
“으으윽.”
가까운 곳에서 서윤의 얼굴을 본 상인은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
“뭐야, 무슨 일인데?”
“뭐가 있어?”
뒤에서 투표를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상인의 주변에서 서윤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그냥 입만 크게 벌렸다.
“으헉.”
“서, 서윤…….”
모라타 방어전을 준비하면서 서윤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되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외모였다.
위드는 서윤의 가면을 다시 씌워 주었다.
“우리 인증됐죠?”
“네, 네.”
“그럼.”
위드는 더 소란이 벌어지기 전에 서윤과 재빨리 빠져나왔다.
으슥한 뒷골목 구경도 하고, 시장에서 기념품도 구입.
예술의 언덕에서 사람들이 안 보일 때에는 진하게 키스도 했다.
* * *
해가 떠오르고, 마침내 모라타 방어전이 시작되는 시간.
위드와 서윤은 흑색 거성에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을 꼭 잡았다.
“드디어 오늘이네.”
“꼭 이길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았잖아요.”
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는 전혀 믿지 않았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이 레어에서 날아올랐습니다. 방향은 예상대로 북쪽입니다.
첫 번째 보고가 들어왔다.
조인족이 케이베른의 레어에서부터 관찰하고 있었다.
― 페일 : 타격대 준비 완료입니다.
― 아크힘 : 헤르메스 길드도 전원 배치 끝. 언제라도 싸울 수 있습니다.
드래곤을 상대로 성벽을 지키는 공성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유저들은 건물들과 참호에 숨어 있었다.
특히 헤르메스 길드는 25만 명의 길드원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1만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희생의 화로를 쓰기로 하고, 드래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상태.
― 모두 떠나세요! 드래곤이 출발했습니다!
모라타에서는 긴급 대피를 알리는 길고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래곤이 곧 오겠네.”
“진짜 조마조마하다.”
축제를 즐기며 머물던 유저들이 성문을 급하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또한 일부는 죽음을 각오하고 구경을 위해 들어왔다.
“우리 오늘 살 수 있을까?”
“몰라. 밟혀서 죽을지, 불에 타서 죽을지.”
“건물이 무너져서 죽을 수도 있겠다.”
아르펜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대피령을 내렸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유저들에게 모라타를 떠나도록 적극적으로 권고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유저들이 도시 내의 건물들에 머물렀다.
구경꾼들의 목숨은 모라타가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케이베른을 물리치는 데 달려 있었다.
“마법공학대포 최종 점검!”
“공성 무기들도 확인하고, 각자 위치 보고도 해!”
케이베른이 북부까지 날아오기 전에 헤르메스 길드가 가장 바빴다.
장비 점검도 하고, 전술에 맞춰서 드래곤을 공격할 준비도 갖췄다.
창과, 대검, 도끼, 철퇴 같은 대형 무기들을 장비한 부대도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헤르메스 길드만이 가능한 대비 태세.
“발리스타에는 성수를 바른 은 작살을 장전해 놨어.”
“드래곤에게도 은 작살이 효과가 있나?”
“모르지. 쏴 본 사람이 없잖아. 오늘 쏴 보면 알 거야.”
방어탑마다 대형 발리스타의 다양한 종류의 화살을 장전했다.
드래곤을 향해 공성 무기들을 실컷 쏴 댈 계획이었는데, 도시의 건물들이 파괴되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 날쌘 찬바람 : 도착까지 20분 예상합니다.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드워프와 타격대, 헤르메스 길드!
그 외에 독자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참여한 유저들.
모두가 숨을 죽이며 드래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케이베른이 모라타의 남쪽 하늘에 모습을 드러냈다.
― 크라롸라라락! 모두 죽어라!
블랙 드래곤이 모라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레어를 털리고 나서부터 더욱 사납게 변한 케이베른이었다.
―드래곤 피어에 의해서 신체 능력이 제약을 받습니다.
절대적인 위엄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생명력이 41% 감소합니다.
일시 신체의 마비 증상이 일어납니다.
이동 제약!
11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부족한 지혜로 스킬 사용이 89% 제약을 받습니다.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하며 실패 확률이 상승합니다.
드래곤 피어의 작렬!
드래곤의 광량한 목소리가 도시로 넓게 퍼져 나갔다.
― 아크힘 : 군단장마다 피해 상황 보고하라.
― 보에몽 : 전투단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조금 마비 증상이 있는 이들이 있지만 금방 풀릴 정돕니다.
― 가우슈 : 끄떡없습니다.
― 라미프터 : 3분에서 5분 정도. 마법사들이 완전한 정신력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장비와 액세서리들을 맞춰 놓았기 때문에 드래곤 피어를 견뎌 냈다.
아르펜 제국의 편에 선 타격대 유저들은 대체로 전투력 상실이 심했다.
“크흠, 괜찮습니까?”
“시끄럽긴 하군요.”
“아직도 우리가 헤르메스 길드보다 약하긴 한 것 같습니다.”
“저놈들이야 워낙 오랫동안 해 먹었으니…….”
멋진 전투를 기대하며 도시에 남은 구경꾼들은 꽤나 많이 목숨을 잃었다.
“꽥!”
“으악!”
드래곤 피어가 도시의 넓은 지역을 휩쓸었다.
판자촌, 뒷골목, 상가 건물에서 유저들이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살려 주세요!”
“치료 좀. 곧 죽어요!”
죽기 직전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은 초보 유저들은 뛰쳐나와서 치료를 요청했다.
어떤 이들은 사제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붕대를 빌려서 몸에 칭칭 감았다.
― 오베론 : 위드 님! 유저들의 피해가 큽니다!
“에휴.”
위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점을 우려해서 대피령을 내렸던 것이지만 대도시인 모라타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걸 강제로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전부 쫓아낼 수가 없었다.
― 오베론 : 구조대를 보내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하세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제들이 거리로 나가서 유저들을 구하면서 초보 유저들은 회복 마법 한두 번에 완전히 몸이 나았다.
하늘에 떠 있는 블랙 드래곤의 눈에 띄지 않게 허리를 바싹 숙이고 돌아다녔다.
케이베른은 다른 도시에서처럼 원을 그리며 유유히 모라타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 인간들! 쥐새끼처럼 숨어 있었구나.
결국은 발각되고야 말았다.
수만 명이 넘는 인원들이 도시에서 움직이고 있었기에, 케이베른의 눈에 보이고 말았다.
블랙 드래곤 케이베른!
인간과 드워프들을 저주하고 있는 가장 위험한 드래곤이다.
케이베른이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닿는 거대한 포효를 터트렸다.
― 너희들을 기다리는 건 파멸과 죽음뿐이다.
몬스터들이 가끔 내뱉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가 드래곤이다 보니 엄청난 위압감이 유저들에게 전달되었다.
“으어어어!”
“망했다. 우리…… 이제 죽는 거야?”
지상에 있던 유저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케이베른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블랙 드래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거대한 몸을 부풀기 시작했다.
“브레스다!”
“모두 도망쳐!”
거리에 나와 있던 유저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서 사방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투를 위해 기다리던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시작부터 브레스야. 이렇게 되면 플랜B네.”
“변수가 큰 대도시라는 점을 감안하긴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진행이 되다니.”
위드도 그냥 한숨을 푹 쉴 따름이었다.
“브레스는 피해가 너무 클 텐데.”
도시를 향해 브레스를 쏘는 것이 꼭 초보 유저들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케이베른이 전투를 시작하는 몇 가지 방식 중의 하나였으니까.
그럼에도 마법 공격이 아니라 브레스라면 직격당하는 쪽은 누구라도 살아남기 힘들다.
위드도 그것은 마찬가지.
― 쿠와아아아앗!
케이베른의 입에서 칠흑처럼 어두운 브레스가 쏟아져서 도시를 강타했다.
폭풍이 일어난 것처럼 바람마저 빨려 들어가고, 건물들과 대지를 한꺼번에 휩쓸었다.
모라타에 있는 유저들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디야, 어느 쪽이지?”
“북서쪽으로 날아간 것 같았는데.”
“대도서관이 당한 건가?”
“정확히 그쪽 방향은 아닌 느낌이었는데…….”
잠시 후에 조인족 유저가 상황을 보고했다.
― 삼비둘 : 야단맞는 케이베른 조각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건물들도 녹았고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케이베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만들어 놓은 초대형 조각상.
블랙 드래곤이 드워프에게 꿀밤을 얻어맞는 조각상이 첫 번째 목표가 되어 주었다.
조각상과 함께 도시의 일부가 날아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는 경미한 피해였다.
― 아크힘 : 미끼를 물면 그때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모두 철저히 준비!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은신처에서 나올 준비를 했다.
케이베른이 지상에 내려오는 순간부터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리라.
빙룡 광장, 와이번 광장에 상단들이 보물을 엄청나게 쌓아 놓으면서 케이베른의 착륙을 유도했다.
북부만이 아니라, 중앙 대륙의 상단들도 조금씩 모아서 만들어 놓은 번쩍번쩍한 황금의 산.
빙룡 광장과 와이번 광장에는 드래곤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보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구경꾼들이 몰리기도 했다.
‘미끼만 물어라.’
‘드래곤이라면 보는 순간 빨려 들걸?’
‘빙룡 광장이 좋다. 거기라면 헤르메스 길드가 총공격하기 가장 유리한 장소야.’
‘지상으로만 내려오면 단숨에…….’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투지를 잔뜩 일으켰다.
그동안 드래곤을 상대하기 위해 보스 몬스터 사냥으로 연습하며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 삼비둘 : 케이베른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나쁜 소식.
케이베른이 땅으로 내려와서 건물을 부수지 않고, 하늘에서 마법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의 마법이 아니라 화염 계열의 궁극 마법이었다.
― 페일 : 위드 님, 어떻게 하죠? 도시의 피해가 엄청날 텐데…….
위드는 창문을 통해 하늘에 떠 있는 케이베른이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았다.
화염의 줄기들이 뒤섞이며 드래곤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듯이 엮이고 있었다.
“답답하지만 기다리는 수밖에요.”
― 페일 : 타격대가 출동하면 마법 주문을 취소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공격 대상을 바꿀 수도 있고요.
“그건 안 됩니다.”
― 페일 : 모라타가 타격을 당하면 사람들의 피해도 더 클 수 있어요.
“정해진 계획에 따라 움직이세요. 타격대는 기다립니다. 시작부터 드래곤과 공중전을 펼치면 승산이 줄어들어요.”
위드는 싸우기 전에도 이 정도의 상황까지는 감안하고 있었다.
케이베른 정도의 드래곤이 발휘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란 워낙에 다양하기에 변수의 폭도 넓게 잡았다.
“그래도 시작부터 잘못되어 가는 느낌이 있긴 한데…….”
화염 계열의 궁극 마법이 모라타에 입힐 피해를 떠올리면 끔찍하기만 했다.
케이베른이 지금까지 파괴한 도시들만 봐도 웬만한 재난 영화를 능가하는 모습들이 펼쳐졌었다.
그나마 그때는 사람들이 없는 도시였지만, 이번에는 유저들이 건물마다 숨어 있었다.
― 절대 태양!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 케이베른은 화염 계열의 궁극 마법을 발동시켰다.
태양을 하나 더 만들어 내는 마법.
모라타의 하늘에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이 생성되었다.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극도로 뜨거운 열기가 지상을 강력하게 내리쬐었다.
활짝 피어 있던 꽃과 풀이 빠르게 메말라 갔다.
모라타의 냇물과 개천이 바싹 마르며 바닥을 드러내고, 판잣집들이 열기에 못 이겨 불이 붙었다.
판자촌을 중심으로 불이 번지면서 거침없이 확산되어 갔다.
“불이다! 불!”
“화재다! 여기서 어서 빠져나가야 돼요!”
“도망쳐요. 안전한 석조 건물로요!”
판자촌에서 전투를 구경하려던 유저들에게는 대재난이었다.
집이 타오르면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열기를 직접 몸으로 접하며 목숨을 잃어야 했다.
< 절대 태양!
피부를 태우고, 숨을 옥죄는 열기에 휩싸였습니다.
마법 저항력을 무시합니다.
화염 피해로 매초마다 생명력이 1,340씩 감소합니다.
피해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
화염 계열의 궁극 마법을 견뎌 내는 초보 유저는 드물었다.
건물과 벽에 바싹 붙어서 움직이면 피해를 덜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레벨 200 이하의 유저들에게는 무의미한 수준.
“꺄아아아악!”
“몸이 탄다, 불에 탄다!”
유저들이 숱하게 거리에서 타 죽었다.
타격대 소속의 사제들이 출동해서 치료 마법을 써서 살리긴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 파보 : 방재 작업을 했지만…… 판자촌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네. 미안하네.
파보가 지역 채팅에 사과했다.
건축가들과 유저들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건축물마다 불이 붙지 않도록 물을 뿌려 놓거나, 모래를 쌓아 두었다.
판자촌은 부수고 새로 짓는 편이 낫기에 돌보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먼저 피해를 입으며 대형 화재를 일으켰다.
“대피, 대피해.”
유저들이 그나마 안전하리라 예상했던 장소가 판자촌이었다.
다른 건축물들에 비해서 드래곤의 관심을 덜 끌리라고 생각했는데, 넓은 범위에 피해를 미치는 궁극 마법에 의해 초토화가 되었다.
화염은 건물들을 태우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모라타의 도시의 약 10% 정도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나마 화재 방지를 위해 정해진 구역의 건축물들을 미리 파괴해 놔서 불이 나도 도시 전체로 번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놨던 것이 다행이었다.
― 인간들아, 나에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케이베른이 검은빛의 창을 무수히 많이 만들어서 지상에 돌아다니는 유저들에게 쏘았다.
― 창의 쇄도!
하늘에서 폭격이 이루어지듯이 마법 공격이 이루어졌다.
건물과 도로를 꿰뚫는 검은 창에 유저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 살려 줘!”
“아무 곳으로 도망치지 마. 우리가 방해되어선 안 됩니다!”
거리마다 일대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드래곤을 피해서 성문을 향해 달리는 유저들, 큰 건축물이나 참호로 찾아 들어가는 유저들.
로열 로드를 하면서 목숨을 잃는 경우야 흔했지만, 드래곤의 엄청난 존재감과 마법 공격에 의해 전부 공포에 빠진 모습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전투에 방해될 것을 우려해서 제자리에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검은빛으로 이루어진 창이 계속 도시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페일 : 모두 자리를 지키십시오! 아직은 싸울 때가 아닙니다.
타격대를 이끄는 페일이 급하게 채팅 창에서 외쳤다.
그 역시 유저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드래곤을 사냥하기 위해 계획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더구나 거리에 극심한 혼란이 벌어지면서 도저히 병력을 끌고 나갈 수가 없었다.
― 파이톤 : 오베론 님! 특히 오베론 님 못 움직이게 막아요!
웬만하면 나서기 좋아하는 드워프!
오베론의 몸을 타격대의 유저들이 단단히 붙잡았다.
그사이에도 거리의 유저들은 목숨을 잃었다.
건물들이 파괴되고, 화재가 커지면서 숨어 있던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은신처를 벗어나서 움직여야 했다.
지하 동굴과 참호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 *
“젠장! 자리를 잘못 잡았어.”
렌슬럿은 판자촌을 나오며 주위를 살폈다.
그의 부대는 후방 지원과 기습을 맡았기에 조금 떨어진 구역의 판자촌에 숨었다. 걷잡을 수 없이 화재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도로로 나왔다.
“안전지대로 간다. 서둘러서 움직여.”
1천의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판자촌을 나와서 상업 지역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케이베른의 눈에 띄었다.
― 거기에도 있었구나. 모두 죽어라!
케이베른이 날갯짓을 하며 판자촌을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렌슬럿이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놈이 날아온다!”
“전투, 전투 준비해!”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주변으로 퍼지며 무기를 뽑았다.
수많은 보스 몬스터 전투 경험이 바탕이 된 매우 빠른 대응이긴 했지만, 곧 하늘에서 날아드는 드래곤이 그들을 덮쳤다.
― 크롸라라라라라락! 인간들 따위가 저항할 셈이더냐!
드래곤이 두 발로 유저들을 밟고, 꼬리를 휘둘렀다.
“큭. 막지 말고 피해라.”
“하필이면 제대로 준비도 못한 지금…….”
렌슬럿의 부대는 자신들만으로는 역부족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드래곤에게 물리고, 밟히고, 채이고.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꼬리에 맞은 충격으로 날아가 불타는 판자촌 구역에 떨어졌다.
― 크오오와아아아아아아!
케이베른이 신이 나는지 지상에 서서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포효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은 반격해!”
렌슬럿의 부대는 무기를 휘두르며 저항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거대한 드래곤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처박히거나 죽어 갈 뿐.
그때 아크힘의 귓속말이 전달되었다.
― 아크힘 : 힘든 건 알지만 버티면서 빙룡 광장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빙룡 광장이 가장 가깝습니다.
렌슬럿의 부대가 흩어져서 도망치게 되면 드래곤이 어느 쪽으로 가게 될지 몰랐다.
헤르메스 길드의 입장에 모라타가 초토화되는 것은 관심이 없지만, 케이베른과의 전투 승리가 달려 있었다.
― 렌슬럿 : 놈의 관심을 끌며 빙룡 광장까지만 가면 된다. 그러면 전투조에 맡기는 것으로 우리 임무는 끝난다.
렌슬럿은 부대원들을 격려하며 드래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벼락의 검!”
쿠르르릉!
검에서 번개가 치며 뻗어 나가 드래곤의 몸을 강타.
케이베른의 시커먼 광택이 흐르는 비늘에 미세한 흔적이 새겨지게 되었다.
― 인간 주제에 별거 아닌 저항이구나.
드래곤의 맷집과 마법 저항력이 워낙 높기 때문에 피해의 대부분이 흡수되었다.
“관심을 끌었다. 공격하면서 서서히 물러나자.”
렌슬럿을 시작으로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일제히 스킬을 발동시켰다.
“방패 방벽!”
“경계자의 수호!”
“바람 사격!”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저마다 자신 있는 스킬들을 활용했다.
초보들을 대량 학살할 수도 있는 그들의 공격이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지만 대부분은 가벼운 타격에 그칠 뿐이었다.
― 인간들은 약하면서도 어리석지. 감히 위대한 이 몸에게 도전할 셈이냐!
케이베른이 날개를 좌우로 펼치며 걸어왔다.
땅이 흔들리고, 불이 붙은 판자촌 건물들이 힘없이 무너졌다.
화살이나 마법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면서 걸어오는 드래곤.
거대한 생명체답게 가볍게 걷는 것임에도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빨랐다.
“마, 망할!”
“이거 무슨 괴수 영화야? 이런 크기의 드래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라고!”
“미치겠네, 이거!”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들의 무기나 원거리 공격은 케이베른의 단단한 비늘을 깨뜨리지 못했다.
애초에 지원 부대에 속해서 희생의 화로를 쓰지도 않았고, 현재는 안전하게 빙룡 광장까지 철수하는 것이 목적.
―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케이베른은 뒤쫓으며 입으로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하나씩 물어서 땅바닥에 내뱉었다.
“크억!”
갑옷과 방패를 꿰뚫는 이빨은 헤르메스 길드원들을 전투 불능으로 몰아넣었다.
< 극심한 부상!
맹독이 온몸에 퍼지고 있습니다.
3분 내로 치유하지 않으면 사망합니다. >
드래곤의 독까지 결합되어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쿵쿵!
달려오는 케이베른에 의해 한 명씩 집어삼켜지는 광경은 지켜보는 유저들에게도 끔찍한 일.
당하는 입장에서는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몰라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젠장!”
“관심은 끌었으니 이동 스킬을 사용해!”
“신속한 달리기!”
“빛의 쇄도!”
렌슬럿과 헤르메스 길드원들은 이동 스킬까지 발동시키며 빙룡 광장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 죽어라, 죽어. 내게 거스른 인간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리라!
케이베른이 뒷발로 땅을 강하게 내리치자, 대지가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퍼졌다.
― 가시 지옥!
두꺼운 가시들이 벽처럼 튀어나와서 헤르메스 길드원들의 몸을 꿰뚫었다.
가시에 박힌 채로 수십 미터 공중에 매달린 헤르메스 길드원들!
“살려 줘!”
“저주를 해소해 주면…… 20초는 버틸 수 있다고!”
그들은 최소 대여섯 가지씩의 상태 이상을 한꺼번에 당해야 했다.
매초마다 생명력도 빠져나가기 때문에 간절하게 외쳤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제기랄, 이건 너무 강하잖아!”
숲처럼 자라난 가시들이 장애물이 되어 제대로 도망치기도 힘들었다.
렌슬럿의 부대는 케이베른에 의해 한 명씩 사냥당했다.
― 아크힘 : 판자촌에서 전투가 계속 벌어집니다. 저곳은 위치가 너무 안 좋은데.
― 슬래터 : 우리가 가선 안 됩니다. 저긴 언덕 지형이라서 싸우기가 나쁩니다.
― 라미프터 : 저들을 다 잃더라도 기다리는 쪽이 낫습니다. 섣불리 구원을 나가려다가는 대계를 망치게 됩니다.
헤르메스 길드에서는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무자비한 반격!”
렌슬럿은 메시지 창을 보고는 케이베른에게 돌진했다.
상대의 공격이 강할수록 더 강하게 받아치는 스킬!
“내 이름이 바로 렌슬럿이다!”
렌슬럿이 케이베른이 휘두르는 꼬리를 검으로 튕겨 내고 이어서 따라붙었다.
두 개의 검으로 베고, 찌르면서 드래곤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존재를 만났습니다.
무자비한 반격이 3200%의 공격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렌슬럿은 죽음을 각오했다.
케이베른을 피해서 달아나려면 부대원들을 버려야 했고, 헤르메스 길드가 구원을 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적어도 무의미하게 죽진 않겠다.’
헤르메스 길드의 군단장답게 최후까지 실력을 발휘하는 쪽을 선택했다.
― 오베론 : 무자비한 반격. 저건 원래 워리어 스킬인데. 특수 퀘스트를 수행하면 검사도 익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워리어들이라고 해도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오베론이 지역 채팅 창에 설명하는 것처럼, 무자비한 반격은 렌슬럿의 체력과 생명력을 사정없이 쥐어짜 내고 있었다.
“나 렌슬럿의 이름을 똑바로 기억해라, 이 도마뱀아!”
케이베른은 거센 공격을 당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지만 곧이어 분노했다.
― 비탄의 사슬로부터, 영겁의 저주에 옭매여라.
무려 12가지의 저주가 렌슬럿을 덮쳤다.
고통, 중독, 약화, 쇠약, 혼란, 마비, 부패 등등…….
케이베른은 입을 크게 벌려서 마지막까지 날뛰던 렌슬럿을 잡아먹었다.
* * *
위드는 조각 변신술을 쓴 채로 드워프 전사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종족의 미래를 위해 드래곤을 반드시 잡아야 해!”
“암. 꾹꾹 참아 왔던 드워프들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자고.”
드워프 전사들이 무기를 점검하며 자신에 차서 떠들었다.
‘사기는 높군. 장비발도 세워 놨으니 잘 버텨 주겠지.’
위드는 드워프들과 함께 빙룡 광장 근처의 건물에서 대기했다.
바바리안 크나툴, 요정 말린, 하프엘프 비슈르.
세 종족의 영웅들은 타격대에 배치해 두었다.
드워프들이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데다, 하이엘프나 바바리안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레스다!”
케이베른이 브레스를 쏠 때에는 드워프들과 함께 몸을 바짝 엎드렸다.
다행히 대형 조각품과 그 일대를 파괴!
“휴, 한숨 돌렸군.”
위드는 가슴이 철렁했다.
위대한 건축물이 부서졌다면 시작도 전에 그 피해가 엄청났을 테니까.
“건물보다는 차라리 여신상이나 빛의 탑을 부수는 게 낫지. 조각술 마스터가 되었으니 새로 만들어도 될 테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인하고, 용맹한 드워프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드워프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두려움에 떨었다.
“우리 아직 살아 있나?”
“아아, 대지가 흔들려. 역시 드래곤이란…….”
“너무 무섭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케이베른이 우리에게 화가 많이 나 있겠지?”
“틀림없이. 난 오래전에 할아버지에게 직접 드래곤을 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어땠는데?”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 같았다더군. 스스로 심장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두려웠다고 해.”
“으으음. 우리 드워프의 팔다리를 뚝뚝 끊어 내고 잡아먹을 거야.”
겁쟁이가 되어 버린 드워프 전사들!
용감한 드워프들에게 있어 지상에서 두려움을 주는 존재가 하필이면 드래곤이었다.
‘사기를 높이는 건 우선 좀 나중에 하고…….’
위드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하늘에 절대 태양이 만들어지고, 렌슬럿의 부대가 전투를 시작했지만 기다려야 했다.
광장까지 드래곤을 끌어들이면 모든 병력들이 공격에 나서는 것이 전투 계획.
드래곤이 모라타의 어디로 내려올지 몰라서 어설프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더 꼼꼼한 계획을 만들 수 없었다.
‘드래곤을 상대로는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에서 싸워야 해. 광장이 아닌 곳에서는 건물들 때문에라도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
렌슬럿의 부대를 상대로 케이베른이 날뛰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 미개하고 비천한 인간들! 너희들이 감히 나에게 덤벼들다니!
인간 혐오는 기본!
헤르메스 길드원들이 죽어 나가고, 건물들이 붕괴되고 있었다.
나쁜 소식도 계속 들어왔다.
― 날쌘 찬바람 : 위드 님, 모라타에 일어난 화재가 너무 큽니다.
“어느 정도인데요?”
― 날쌘 찬바람 : 정확한 피해 규모는 모르지만 멀리서는 모라타가 불타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기도 무시무시하고요.
절대 태양의 영향으로 인해 수십여 군데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번져 가고 있었다.
건축가들이 방재선을 만들어 놓긴 했어도, 새로운 건물들이 계속 화염에 휩싸였다.
― 날쌘 찬바람 : 조인족들이 열기와 호흡 곤란으로 하늘에서 픽픽 떨어지고 있습니다.
“판자촌이 다 타 버리면 금방 꺼지긴 할 텐데…….”
― 로뮤나 : 위드 님, 절대 태양은 마력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져요. 아마 5분 정도 더 지나면 사라질 거예요. 아, 진짜 익히고 싶은 마법인데.
화염 계열의 마법사인 로뮤나에게는 케이베른의 마법 하나하나가 탐나는 것이었다.
“날쌘 찬바람 님, 모라타의 예상 피해는요?”
― 날쌘 찬바람 : 연기로 시야가 가려져서 확인이 안 됩니다. 나무로 지은 건물이나 가로수는 다 타 버리지 않을까요? 일반 건물들도 꽤 많이 타고요.
― 레몬 : 예술회관 근처가 위험해요. 몇몇 건물들이 타고 있어요.
석조 건물이라고 해도 부분적으로는 나무를 쓰기도 했다.
내부의 집기와 가구들에 불이 붙기도 할 테고, 무엇보다 역사가 짧은 모라타는 다른 대도시들과는 다르게 판자촌이 아주 넓었다.
언덕을 뒤덮은 판자촌만 하더라도 엄청난 면적이었다.
― 서윤 : 흑색 거성에서 보고 있어요. 불을 멈추지 못하는 이상 모라타의 삼분의 일 이상은 탈 것 같아요.
“그렇게나 많이?”
― 서윤 :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그래요.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위드만이 아니라 모라타의 유저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 페일 : 세상에…… 너무 심각한 거 아닙니까?
― 이리엔 : 엄청난 피해예요. 고작 마법 한 번인데요.
― 마판 : 불에 타서 사라지는 건물들의 값을 고려하면 천문학적일 겁니다. 아무리 목조 건물이라도요.
― 미블로스 : 손을 쓸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군.
― 파보 : 이게 다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내 잘못 같네.
건축가들은 구역별로 쉽게 파괴되지 않도록 성벽을 세우고, 방재선을 세웠지만 절대 태양은 도시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마법.
모라타라는 대도시에서 드래곤을 상대로 시가전을 펼치며 받은 아픈 대가였다.
― 레몬 : 집집마다 구경하고 있는 분들. 여유가 있다면 케이베른이 없는 지역에서는 화재를 끄도록 해요.
― 프레임 : 알겠습니다.
― 톳쿵 : 주요 건물들로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합시다. 드래곤을 도발하지 않도록 먼 구역에 있는 유저들만 움직여요.
모라타에 남아 있던 유저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케이베른이 지상에서 렌슬럿의 부대를 뒤쫓고 있는 이상, 가까이 있는 건물의 불을 끄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북부 유저들이 도움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위드는 모라타가 버텨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더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 날쌘 찬바람 : 모라타의 하늘까지 날아왔습니다. 깃털이 그을릴 정도로 뜨거운데…… 아무튼 지금 드래곤의 모습이 보입니다.
“렌슬럿은요?”
― 날쌘 찬바람 : 부대 전멸! 전투가 벌어지면서 주변 지역의 파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건물이 부서질 때마다 유저들이 도망치며 케이베른이 쫓아가고 있습니다.
“방향은 어디죠?”
― 날쌘 찬바람 : 어느 한곳으로 뛰어가지 않고, 판자촌 근처를 여기저기 파괴하고 있습니다.
케이베른이 빙룡 광장이나 와이번 광장으로 유인되지 않고 있었다.
조각품이나 그림, 탐나는 보물들까지 놓아 두어서 함정을 파 놓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 지금은 파괴와 학살에 푹 빠져 있었다.
“곤란한데…….”
위드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모라타의 맑고 푸르던 하늘은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다.
케이베른은 닥치는 대로 유저들을 학살하고, 대규모 마법을 도시로 퍼붓고 있었다.
높이만 200미터가 넘는 드래곤의 거대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도시의 건물들이 짓밟히고 무너졌다.
헤르메스 길드의 채팅도 들렸다.
― 아크힘 : 케이베른은 피와 제물을 바쳐서 흑마법을 사용합니다. 더 이상 유저들이 죽으면 안 좋습니다.
― 헤로이드 : 기왕이면 유저들에게도 빙룡 광장으로 도망치라고 전달합시다. 아무 곳이나 흩어지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초토화가 된다고.
― 보에몽 : 어차피 죽을 것, 매복 장소로나 달려오라고!
헤르메스 길드의 분위기도 조급해지고 있었다.
케이베른이 날뛰면서 퍼붓는 마법이 도시의 건물들과 함께 무작위로 헤르메스 길드원들도 덮치고 있었다.
마법 폭발, 진동, 비명.
모라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전쟁터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 날쌘 찬바람 : 케이베른이 예술가의 언덕을 올라가서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보니 예술가의 언덕을 블랙 드래곤이 부수는 대단한 장관이…… 흠흠. 죄송합니다. 아무튼 도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위드의 머릿속에도 그려지는 장면이 있었다.
블랙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러서 건물들을 부수고, 마법으로 파괴한다.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그 속도란 도시 하나를 1, 2시간이면 없애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모라타가 파괴되고, 유저들이 연달아 죽어 나가고, 흑마법이 충전되어서 무작위로 터트리는 모습들이 연상되었다.
흑마법을 주특기로 삼는 케이베른의 공격은 이제부터였다.
“에휴, 이놈의 세상…… 왜 쉽게 풀리는 것이 없냐. 미끼도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오지도 않고.”
헤르메스 길드는 이번 전투에서 독자적인 작전권을 보유했다.
바드레이나 아크힘이 있는 이상 무시하고 병력을 지시하기는 곤란했고, 손발을 자주 맞춰 본 이들끼리 더 잘 싸우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복 장소로 와 줘야 헤르메스 길드가 마음 놓고 드래곤을 덮칠 게 아닌가.
“이렇게 된 이상 누구 나서 줄 사람이…… 그래, 나밖에 없겠지. 모두 여기서 기다려요.”
위드는 드워프들을 대기시켜 놓고 거리로 나갔다.
“꺄아악, 살려 줘요!”
“도망쳐! 케이베른이 마법을 쓴다.”
“대피, 대피!”
예술가의 언덕 방향에서 들리는 비명들이 상황의 긴박함을 알려 주고 있었다.
위드는 사자후를 터트리며 케이베른이 있는 지역으로 달려갔다.
― 이 시커먼 도마뱀아, 여기 네 집을 털어 간 위드핸드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