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6화 (6/350)

6화 악연 (3)

“아, 까비요! 이 자식 운 졸라 좋았네요, 쫌만 빨랐으면 먹는 거였는데! 근데 태민이 형, 뭐예요? 얘 쪼렙 아니에요? 왜 쪼렙을 괴롭히고 있어요? 귓속말로 하도 급히 부르길래 중요한 일인 줄 알고 부랴부랴 나왔고만요.”

“아, 별거 아냐. 웬 놈이 주제도 모르고 열심히 입을 털어대길래 불러봤지. 우리집 앞마당에서 주인을 봤는데도 겁도 없이 지껄이더라고.”

“헐, 이 자식 미친 거 아니에요? 완전 주제도 모르고 나댔네요? 하필 그것도 형한테…….”

“그러게 찬영아, 네가 잘 좀 먹었어야 재밌어졌지! 니가 놓친 그거, 레이몬드 퀘템이었단 말야.”

“네? 정말요? 유니크 악세 주는 여기 레이몬드요? 와! 이 쪼렙,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완전 황금 고블린이었네요? 아…… 그럼 꼭 먹어야 했는데!”

일도양단에게 죽을 착착 맞춰주며, 내 퀘템을 원래 제 거였던 것마냥 아쉬워하는 놈의 아이디도 눈에 들어왔다.

‘홍길동’.

역시나 도둑 랭킹 5위안에 드는 랭커이자, 태성 길드의 주축 멤버로 아주 유명한 유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성의 출입문이 열리며 비싸 보이는 로브를 두른 또 한 명의 유저가 걸어 나왔다.

“태민 오빠, 무슨 일인 거예요? 대충 보니 적 길드원도 아닌 솔플 유저 같던데……. 오빠 말만 듣고 무작정 공격하긴 했지만, 괜찮겠어요? 저희 길드 이미지도 있는데 말이에요.”

“뭘 이런 거 가지고 그러니, 지수야. 이 일은 오히려 길드 이미지를 지키려다 보니 생긴 거야. 요놈이 먼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길드까지 무시하더라고? 내가 또 이런 건 못 참고 넘어가는 성격인 건 알지?”

“알기야 잘 알죠 오빠. 그래도 혹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떡해요. 비록 타연에 개인 녹화 기능은 없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사람도 많이 모여 있으니까 조심하셔야죠.”

“이런 허접한 놈이 언플은 무슨…… 근데 넌 갑자기 왜 그렇게 혼자만 착한 척이야? 내 척살권 한 장 준다고 귓말 주니깐 당장 달려와 놓고서. 너 자꾸 그런 식이면 오빠 서운하다?”

“오빠! 제가 지금 척살권 한 장이 아쉬운 상태라는 거, 뻔히 잘 알고 계시면서 그런 말씀하세요! 어디 간만에 태성 간에 내전 한번 해 볼까요?”

뒤늦게 나와서 앙칼지게 소리치고 있는 유저 또한, 여성 랭커로 유명한 ‘홍당무’였다.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던 터라 마법이 어디서 날라왔나 했더니만, 시야의 사각인 옥상에서 저격한 모양이었다.

“하하! 알겠다 알겠어, 그만할게. 어쨌거나 너도 그놈의 성격 좀 고치고 게임해라. 얼굴도 이쁘장한 것이 뭐 그렇게 잡아 족치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 많은 건지 원. 사람들은 절대 모를 거야. 암! 저 얼굴로 그렇게 악착같이 겜 하는지 세상에 누가 알겠어?”

“또 또!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요. 오빠들도 이제 장난은 그만 치시고 얼른 들어오세요. 곧 있으면 태후 오빠 대관식 시작하잖아요. 방송 시작 전에 미리 가 있어야죠!”

내겐 평생의 행운을 뺏길 뻔했던 가슴 떨리는 큰일이었다.

한데 놈들은 금세 웃고 떠들며 뭔 일 있었냐는 듯이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없는 사람인 것 마냥, 눈앞에 있는 나를 철저히 무시하면서.

“아아, 그 전에 이 새끼부터 제대로 조져야 해. 퀘템은 못 주웠어도 죽여서 잡템이라도 떨구게 만들어야 속이 좀 풀리겠어.”

하지만 역시 일도양단은 뒤끝이 많은 놈이었는지, 검을 치켜들며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난 결국 울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장난?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도대체 내가, 너희한테 뭘 그렇게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이 자식들아!”

“어쭈, 이 자식 봐라? 그건 네 건방진 입한테 책임을 물으셔야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맞춰 줬는데, 너희 태성 놈들은 진짜 하나같이 전부 다 개 같은 놈들뿐이구나!!”

정말 이 자식은 욕밖에 안 나오는 미친놈이었다.

아무리 이곳에 자기네 식구들뿐이라곤 해도,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단 채로 이렇게나 노매너로 플레이하다니?

아니, 하는 걸 봐서는 나머지 놈들도 똑같은 놈들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럴 확률은 낮았지만, 혹시나 여기서 죽었다가는 특급 치유 물약을 드랍할 수도 있었다.

울화는 울화였고 아이템은 아이템이었기에, 나는 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척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여기선 도망쳐야 돼. 어느 쪽으로 도망쳐야 벗어날 수 있지? 그림자 밟기를 누구에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출입문을 막고 있던 도끼 전사를 타겟팅하려는데, 뜬금없이 그가 막고 있던 출입구 안쪽에서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갑자기 길동이가 뛰쳐나가길래 따라 나와 봤더니만…… 또 무슨 사고라도 친 거냐?”

“태, 태후 형! 아니, 대관식이 곧 시작하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나왔어……?”

크진 않았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음성.

그리고 언뜻 봐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호화 장비.

이렇게 게임 속에서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당연히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타연에서 가장 유명한 유저이자 우리 집안의 원수.

바로 오늘 대관식의 주인공인 다리우스였다.

“태민이 넌 오늘 같은 날까지도 가만있지를 않구나. 정말 고모님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아니다, 일단 무슨 일인지 설명해봐라. 방송 관계자가 근처에 있는 이곳에서, 뻔히 이런 소란을 피우고 있었던 이유를 내가 납득할 수 있게끔 말이다.”

“소란이라니 형? 그, 그런 게 아니야. 오히려 대관식에서 꼬장 피우려고 작정했던 놈을 미리 발견해서 조치하고 있었던 거지. 얘들아, 어서 형님께 말씀 좀 드려봐! 내 말이 맞잖아? 어?”

“네, 맞습니다, 길마님. 일도양단 님은 통제 중이던 출입문을 억지로 통과하려 한 저 도둑 유저를 저지한 것밖에 없습니다. 좋게좋게 얘기했는데도 워낙에 말을 들어 처먹질 않아서 일도양단 님이 안 계셨다면, 저희도 애먹었을 겁니다.”

일도양단과 도끼 전사는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이, 나를 순식간에 꼬장 유저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그렇기에,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박태…… 아니, 다리우스 님! 저는 그저 레이몬드 퀘스트를 깨러 이 성에 왔을 뿐입니다. 그걸 완고히 막고 있기에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척살 운운하면서 제 천만 원짜리 아이템을 억지로 빼앗으려 했던 게 바로 여기 있는 태성 길드원 세 명이고요!”

이곳에 갑자기 나타난 다리우스에게는 이 상황을 순식간에 무마시킬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척살령이 떨어지면 그동안 키운 캐릭을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기대는, 그저 순진한 망상에 불과했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도둑님. 저는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관여할 잠깐의 시간조차 없다는 말이 더 맞을 듯싶군요. 이곳에서의 일은 당사자들이 직접 해결하도록 하십시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

녀석은 외모를 전혀 커스터마이징하지 않았기에, 예전에 보았던 현실 속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반면 난 캐릭터 생성 시 외모를 조금 변경하고 복면도 쓰고 있었기에, 녀석은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게 무슨……? 지금 당신네 태성 길드원들이 일반 유저를 핍박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꾸 저희 태성 길드를 언급하는 건 그만두시길 권고하겠습니다. 제 눈앞에서 태성을 운운했던 유저치고, 여태껏 멀쩡하게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니, 다리우스 님, 한 번만 제대로 들어보세요! 제 아이템을 님네 길드원이 강탈하려고 했다니까요? 거기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날 죽이고, 심지어 척살하겠다고 협박하는 중이었고요!”

“죽여서 드랍시키는 것 외에 남의 아이템을 강탈할 수 있는 방법이 이 게임에 있었던가요? 보다시피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군요. 들어줄 시간도 없지만 들을 가치도 없어 보이니, 그럼 이만.”

“아니, 그럼 최소한 척살한다는 말만이라도 취소하게…….”

“하, 당신!”

척살만큼은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내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다리우스는 돌아서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네?”

“정말 어지간히도 착각이 심하군요? 당신 같은 허접에게 도대체 누가 척살을 건다는 말입니까? 당신 따위에게 우리 길드원들이 척살을 할애하고 드잡이를 할 만큼, 나의 태성은 한가하지 않습니다.”

“허, 허접이라고요……?”

“태민아! 그만 어서 들어와라. 대관식이 코앞이니 이번 소란은 끝나고 다시 얘기하겠다. 홍당무, 홍길동! 너네도 어서 따라 들어와!”

“네.”

“넵! 국왕님!”

더는 나 따위와 나눌 대화는 없다는 듯, 다리우스는 내 말을 끊으며 휘하 길드원들을 재촉해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 랭킹 1위이자 현실 속 재벌 3세의 삶은 이런 거란 건가?’

나 같이 볼품없는 일개 개인 유저에게는 단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시간조차 아까운, 비싸디비싼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가?

나 같이 초라하고 힘없는 유저에게 척살을 운운하며 협박은 할망정, 실제로는 실행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막강한 길드다 그거지?

다리우스, 아니 박태후…….

넌 분명 일도양단이 어떤 놈인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내 얘기는 들어보려고조차 않는구나?

그럼 예전에 있었던 협박도 분명히 네가 시킨 거였겠지?

역시 넌, 예전부터 개자식이었어!

“야 이! 씨발놈들아!!”

이런 취급까지 받고 나니 아무리 게임이라 해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제 척살령이 내려지든 말든, 상대가 랭킹 1위든 뭐든지 간에 상관없었다.

“저 새끼 왜 또 저래? 지금 누구 앞에서 욕질인데? 진짜 보기 드물게 미친 새끼였잖아?”

멀리 떨어져 있는 유저들마저 이곳을 쳐다볼 만큼 크게 외친 고함.

그 때문에 건물 안으로 막 사라지려던 일도양단이 걸음을 멈춘 채 뒤돌아봤다.

“모두 잘나고 잘나셨네 정말……. 네놈들이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쓰레기들인지는 이렇게 게임 속에서 잠깐 만나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겠다.”

“너 돌았냐? 그만 안 꺼져? 좀 꺼져라! 훠이!”

“그래그래, 얌전히 꺼져 줄게. 하지만 기억해라. 오늘은 이렇게 꺼져 주지만, 다시 내가 너희 앞에 나타나게 되는 날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걸…….”

“크크크, 뭐래? 저거 진짜 골 때리는 놈이네? 척살령 내려지면 당장 게임 접을 새끼가 우리를 뭐 어쩐다고?”

“너희들! 그리고 태성!”

나는 일도양단의 말은 무시한 채,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리우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외쳤다.

“내가 다 무너뜨리겠다고. 랭킹 1위니, 최초의 국가 길드인지 뭔지는 다 상관없어! 내가 모조리 다 쓸어버릴 거니깐 그렇게 알고 있어. 나 따위와는 대화조차 나누기 싫다는데 내가 너희와 할 게 뭐가 남아 있겠어? 전쟁밖에!”

“크크큭, 하하하! 그래그래, 그날이 오길 기다릴게. 어이구 안 무서워라! 허접한 놈들은 왜 하나같이 두고 보자는 말을 하면서 꺼지는 거야? 하류 인생들끼리 말 맞추자고 약속이라도 한 거야? 크하하하!”

일도양단은 그렇게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안타깝네요 저 쪼렙분. 실력은 없는데 성격만 있으면 저렇게 초라해지는 거구나. 나도 늘 명심해서 렙업에 열중해야겠다.”

“길동 오빠, 그렇게 대놓고 들리게 말하면 못써요! 들릴락 말락 조용히 말해야죠!”

이어서 녀석의 패밀리도 한마디씩 조롱의 말을 내뱉으며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있었던 다리우스는 일행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내 눈을 노려보다가, 이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뒤돌고는 마지막으로 들어갔다.

‘아마 넌…… 날 죽일지 말지 잠시 고민하다가 뒤돌아 선 거겠지? 결국 죽일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그렇게 놈들은 떠나갔다.

내게 잊지 못할 굴욕감과 분노, 그리고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만을 남겨준 채.

* * *

“저기요! 도둑님!”

뚫어져라 출입문을 노려보던 내게, 길을 막고 있던 2군 길드원 중 하나인 방패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 저 말입니까?”

“네, 님 말이에요. 괜찮으세요? 너무 속상해하지는 마세요.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도 있는 게 인생이잖아요.”

“…….”

묵묵히 서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방패 기사가 재차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잘은 모르지만, 저 사람도 당하고 사는 게 많더라고요.”

“연우 님! 지금 말이 너무 많으신 거 알고 계세요? 심심하셔도 일단 대화는 자제하고 뜨내기는 그냥 돌려보냅시다.”

곁에 서서 잠자코 보고만 있던 도끼 전사가 방패 기사의 말에 제재를 걸어왔다.

어째 아까부터 보면 볼수록 밉상인 놈이었다.

“알겠어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할게요. 어쨌든 저쪽 패밀리는 항상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해서 밑에서도 뒷말이 많기는 해요.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요? 워낙 잘나가는 랭커들에다가 현실에서까지 로얄 패밀리다 보니, 길드원들도 전부 모시고 사는걸요……. 그러니깐 너무 우울해하지는 마시고 힘내세요. 그래 봤자 고작 게임일 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고작이라……. 그렇죠, 고작 게임이기는 하죠…….”

“네, 워낙 뜬금없이 봉변당하셔서 억울하시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면 별일 없이 무사히 넘어갔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니에요? 힘내세요, 도둑님.”

최선을 다해 위로의 말을 건네는 방패 기사의 말 덕분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투구까지 풀 플레이트로 착용한 ‘연우’라는 아이디의 방패 기사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네, 알겠습니다. 이러고 있어 봤자 저만 손해겠죠. 태성 길드란 곳이 생각보다 악질이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됐지만, 님을 보니 또 전부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같네요.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 결심은 변함 없겠지만……. 어쨌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아! 사실 저희는 휘하 동맹 길드지, 엄밀히 따지자면 태성 길드는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떠나시게요? 운영자가 내려주는 축복은 안 받으시고요?”

“네? 축복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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