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대관식 (1)
“네. 대관식 중에 이벤트로 운영자께서 직접 축복을 내려주기로 했잖아요. 그것 때문에 여기 오셨던 거 아니었어요?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일주일간 추가 경험치 획득과 사망 페널티 제거 축복 내려준다고 공지 떴었는데요?”
“아…… 제가 요즘 노가다만 하느라 공지를 유심히 살펴보진 않았거든요.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네요.”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그저 대관식만 보러 왔다기에는 너무 많은 유저들이 모였던 것이다.
단순히 모니터링 권한만 있는 다른 게임들의 일반적인 운영자와는 달리, 타연 속 운영자는 총괄 디렉터를 포함해 오직 단 세 명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한, 어찌 보면 게임 속 신과 같은 매우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유저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 또한 매우 드물었는데, 확실히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에 간만에 대규모 축복 버프 이벤트를 공지했던 모양이었다.
“도둑님……. 그것도 모르셨다니, 퀘스트 아이템 때문에 오셨다는 게 정말 사실이었군요. 어휴, 저희가 애먼 사람들까지 통제하느라 일이 이렇게까지 커졌네요. 정말 죄송해요.”
“아닙니다. 님께서 왜 사과를 하시나요? 안하무인의 양아치 패밀리들, 그리고 제가 못난 자존심을 부렸던 탓이죠. 이곳에 잠시도 더 머물긴 싫지만, 앞으로 열렙할 일이 생겼으니 기다렸다가 버프는 받고 가야겠네요. 정보 감사드립니다.”
나는 이만 떠나기 위해 연우 님에게 꾸벅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미안해하던 연우 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뜻밖의 제안을 건네 왔다.
“도둑님, 대관식은 이제 곧 시작하니깐 광장 쪽으로 가 봤자 사람들에 막혀서 하나도 안 보일 거예요. 진짜로 퀘스트 때문에 오셨던 것이기도 하고, 저희 때문에 큰 손해를 당하시기도 했는데…… 그냥 제가 지금, 살짝 주성 안으로 들여보내 드릴게요.”
“네? 정말요?”
“네. 들어가셔서 1층에 있는 레이몬드에게서 보상받으시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도록 하세요. 거기에는 길드 사람도 없을 테고 구경하기에 좋은 방들이 많아요. 편안하게 대관식을 구경하시다가 축복 버프까지 받고 가세요!”
“연우 님! 진짜 왜 그러세요? 한 명이라도 누굴 들여보낼 거면 우리가 아침부터 여기를 왜 통제했는데요? 만약 들여보냈다가 딴 사람한테 걸리거나 다른 문제가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압구정바바 님, 이분은 저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누구가 아니잖아요. 방금 전부 다 지켜보셨듯이 그냥 퀘스트하러 오셨던 선량한 유저분이 맞잖아요? 이 분은 저희에게 거짓말했던 게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고 꽤 고레벨의 도둑으로 보이시니…… 아마 은신 쓰고 들어가시면 누구한테 걸릴 일도 없을 거예요. 안 그래요 도둑님?”
“아, 물론 말씀하신 대로 유저가 거의 없는 곳이라면…… 웬만해선 은신이 걸릴 일이 없긴 할 겁니다. 제가 또 은신은 5성까지 진작 다 찍어 뒀거든요.”
“오! 잘됐네요!”
은신은 투명화 상태로 이동이 가능한 도둑의 대표 스킬이자 밥줄 스킬이지만, 단점이나 카운터도 많아 그렇게까지 사기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나름 고레벨 구간에 속하면서 솔로 플레이 위주였기에, 은신만큼은 진작에 5성까지 찍어 둔 상태였다.
스킬 포인트를 은신에 많이 투자했다가는 파티원들에게 눈치 볼 일이 많았기에, 5성 은신을 가진 도둑은 생각보다 드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녀석들이 방금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아, 아마 그쪽 패밀리는 방송 때문에 대관식이 있을 1층 중앙에 있는 그랜드 홀로 갔을 거예요. 이제 이쪽에서는 마주칠 일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 위에서 느긋이 구경하시다 보면, 어쩌면 재밌는 광경을 직관하실지도 몰라요.”
“네? 재미난 거요?”
“어…… 운영자 말이에요! 축복을 주려면 나타날 텐데, 가까이서 운영자 볼 일이 흔하지는 않잖아요! 길드가 준비한 행사나 여러 랭커분들도 직접 볼 수도 있구요!”
‘분명 그런 뉘앙스로 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태성이 준비한 무슨 깜짝 이벤트라도 있는 건가?’
결국, 나중에는 퀘템을 바꾸는 것도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전 모르는 일입니다. 문제 생기면 연우 님이 혼자 책임지세요!”
“네. 제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 마세요, 바바 님. 도둑님은 여기서 은신 쓰시고 들어가세요. 3층 오른쪽 복도 쪽으로 가면 광장이 잘 보이는 방들이 몇 개 있어요. 대부분 1층 홀이나 옥상에 모여 있을 테니 빈방 하나 잡으시면 될 거예요.”
“네,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진작 들여보내 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즐타하시고 꼭 득템하세요!”
그렇게 나는 연우 님이 비켜준 출입문을 통해 성안으로 입장한 뒤, 곧바로 1층 복도 끝에 위치한 금기사단장을 향해 이동했다.
아침부터 출입을 통제했고 태성 길드원들은 중앙홀로 모여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유저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살그머니 집무실 안까지 들어온 뒤, 기사단장 앞에서 은신을 풀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는가?”
드디어 만나게 됐구나, 레이몬드!
널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넌 정말 모를 거다.
평소였다면 보상을 받기 전에 이런저런 마음의 준비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지체 없이 퀘스트의 키워드 단어를 말하며 퀘템을 전달했다.
“여기 애타게 찾으셨던 ‘특급 치유 물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줄 게 있을 텐데 얼른 건네주세요. 기왕이면 비싼 놈으로요!”
“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루이튼 님이시여, 하해와 같은 은총과 축복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로써 사랑하는 내 아내 마리안느가 회복될 수 있겠군요! 으하하, 정말 고맙구나! 매그넘영삼. 그대의 노고와 성의에는 모자라겠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것을 받아줬으면 좋겠구나. 우리 가문에 전해지는 유물 중 하나일세.”
[레이몬드로부터 ‘회생의 마력 목걸이’를 건네받았습니다.]
“대, 대박!! 목걸이다! 그것도 마력 템으로!!”
가장 싼 편인 반지만 나와도 평타였는데, 제일 비싼 목걸이가 나왔다.
그것도 가장 인기 있는 마력 옵션이 붙은 템으로!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며, 얼른 스펙을 확인해보았다.
<회생의 마력 목걸이(유니크, 목걸이)>
* 방어력 25
* 마법 방어력 65
* 지력 +20, 마력 +25
* 초당 MP 회복 +7
* 스킬 적중 시, 0.5%의 확률로 스킬 사용에 소모한 마나를 회복합니다.
* 켈븐 산맥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사파이어. 알 수 없는 힘을 간직한 이 보석에는 놀라운 힘이 담겨 있었다. 대역전(大逆戰)을 가능케 해줄 놀라운 기적이! -레이몬드 가문의 초대 가주, 드메인 레이몬드-
“헐! 마나 리커버리 옵션? 이런 건 레전더리 템에나 붙는 옵션 아닌가? 완, 완전 초대박이다!”
설마 했던 뽑기였지만, 2연속 크리티컬이 터져버렸다.
무려 스킬에 소모된 마나를 회복하는 대박 옵션이 붙어서 나왔던 것이다!
오늘은 정말 예감처럼 뭐가 되도 되는 날이었구나 싶었지만…… 섣부른 착각이었다.
“잠깐! 좀 다르잖아? 스킬 사용 시가 아니라 적중 시에 발동? 그리고 발동 확률은 0.5%? 아, 하필 왜……!”
보통 마력 관련 액세서리는 마법 계열 유저들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그런 캐릭들은 대부분 스킬 사용 속도와 쿨타임이 느리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러니 만약 이 아이템을 10강화에 성공해서 확률이 5% 남짓까지 높아진다 하더라도, 마법 계열들이 큰 효과를 보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목걸이에다 마나 악세니까 희소성은 충분해. 아니면 다른 직업군이 쓰기에는 제법 괜찮아 보이니까 평타 이상은 친 거 같은데?”
바라던 초대박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니크 액세서리답게, 지금 차고 있는 장비를 몇 단계 업그레이드해줄 정도로는 차고도 넘쳤다.
“일단 이걸 팔아서 장비 세팅까지 마치면, 죽어라 렙업만 해보자. 특히 경험치 버프가 이어지는 일주일간은 미친 듯이 해 보는 거야.”
나는 다시 은신 스킬을 사용한 뒤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와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개의 방을 둘러보다 시야에 내성 안 광장이 잘 들어오는 방을 골라 창가에 자리 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주성의 정문부터 광장 중앙까지, 길게 깔린 레드 카펫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오전이었구나…….’
혼자 남아 조용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를 갖게 되니, 문득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뽑기부터 시작했던 일들이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일인지라,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꿈이었을 리가 없지. 내 인벤토리 창에 이렇게 유니크 목걸이가 들어와 있으니…….”
일도양단을 비롯한 태성 간부진 놈들에게 당했던 모멸감 또한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압도적인 격차로 인해 실감했던 무력감과 차갑게 날 내려다보던 다리우스의 경멸 섞인 눈빛까지도 말이다.
그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오늘이 두고두고 떠오르며 평생 자기 혐오에 시달릴 거란 사실을!
“뭐 허접하다고? 내가 하류 인생이라고? 웃기지 마!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새끼들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나 있어? 그렇게 꿀만 빨 수 있다면 니들처럼 못 될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다리우스 박태후.
오래전 동등한 조건으로 겨룰 때만 해도 놈은 결코 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타고난 배경과 조건들 덕분에, 이곳 타연 안에서는 이미 극복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이 서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 줄게. 아니, 끝끝내 너희 머리 위에 올라가서 내게 했던 짓을 고스란히 갚아 주겠어. 불공평한 세상을 탓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핑계도,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대지 않겠어! 출발부터 갭이 있었다면, 미친 듯이 노력해서 그 갭이란 놈을 없애버리겠다고!”
알량하게 남아 있던 자존심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고,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가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지 간에, 지금의 내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의욕 없이 살아왔던 내가,
지금까지 한심하고 나태하게만 살아왔던 내가,
생전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다.
지난 과거와는 달리, 기어코 이 게임에서만큼은 정상이 돼보겠다는 꿈이!
그렇게 랭킹 1위의 대관식을 기다리면서…….
나는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될 각오를 가슴속 깊이 새겼다.
* * *
‘1차 목표는 역시 랭커 진입. 무슨 일이 있어도 1년 안에 랭커 순위에 이름을 올려보자. 랭커쯤 되고 나면 복수할 방법들도 보이기 시작하겠지.’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다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대관식이 시작될 시간이 다다랐기에, 문득 창밖을 보니 유저들이 더욱 많이 모여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특히 운영자가 마법으로 설치해 준 것으로 보이는 대형 스크린이 인상적이었다.
광장 상공에 무려 4개나 설치되어 있었는데, 유저들은 이를 통해 1층 그랜드 홀 안의 대관식 진행을 실시간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마치 전광판을 지켜보며 수만 명이 거리응원을 하는 광경이 떠오를 만큼, 수많은 유저들이 모인 광장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새삼 운영자의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연우 님의 말이 기억나 공지 창을 살펴봤다.
[(공지) 경축! 유저 최초로 국왕에 즉위하게 된 다리우스 님을 축하합니다!]
*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대관식에 참석하는 모든 유저분들께 GM 테오시스가 직접 축복의 가호를 내려드립니다. 많이들 참석하셔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시고, 축복 버프도 함께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 일시: 5월 13일 PM 12:00
* 장소: 번스타인 내성 안
* 버프: 테오시스의 가호(성장)
1. 일주일 동안, 경험치 획득률 150%
2. 일주일 동안, 부활 후유증 삭제
‘이게 그 내용이었구나……. 제목만 보고는 뻔한 내용이라 넘겼는데, 경험치 버프를 주는지는 몰랐네. 하긴 경험치 버프쯤 되니깐 이렇게나 많은 유저들이 몰려든 거겠지.’
운영자가 직접 축복 버프를 걸어주는 일은 매우 드문 일로, 지금 같이 게임 속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일절 없었다.
『드디어 타이탄 연대기에서 유저가 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고대해 왔던 대관식이 시작할 시간이네요!』
『그렇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 광경을 지켜보고 계시는 이곳 광장의 수많은 유저분들과 타이토닉 시청자 여러분들에게도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일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려봅니다. 이제 공표했던 12시가 거의 다 됐는데요, 아! 말씀드린 순간 다리우스 님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저 아저씨의 오바스러운 중계는 여전하구나. 아니 방송보다 실제로 들으니깐 더 오글거리는데? 그래도 대단하시다. 저 연세에…….’
타이토닉TV의 간판 앵커인 김석용 아나운서는 수많은 사건, 사고와 이벤트 장소에 빠지지 않고 찾아가 중계하는 타연 속 유명 인사였다.
20년 전에도 생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을 도맡아 하던 분.
한데 나이가 중년을 넘어선 지금까지도 분야를 바꿔가며 게임 속 앵커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문득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한 가지 일에 몰두해온 그 삶의 태도가 새삼 멋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빠라바라빰! 빠빠 빠바밤!
휘하 길드원들의 힘찬 관현악 연주 소리.
그와 함께 주성의 정문에서 홀로 걸어 들어오는 다리우스의 모습은, 마치 옛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이 멋진 모습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투구를 착용하지 않아, 남자답게 선이 굵고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노출됐다.
냉소 같지만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이는 미소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묘한 카리스마가 느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풀 플레이트를 입고 붉은 망토를 길게 휘날리며 입장하는 모습.
역시 천만 타연 유저들의 정점에 선 자답다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위엄이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