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타임 어택 (2)
약속했던 분수대 앞에 도착하니, 현중이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먼저 와 있었네?”
“어. 우리 길드에 ‘축복받은파볼’이라고 친한 법사 누님이 있는데, 30분만 쓴다고 하고 모조리 빌려왔다. 30분이면 충분하겠지?”
“충분하고도 남지. 근데 이런 고가의 아이템을 턱 하니 빌려주셔? 너 설마 그 누나랑 사귀냐?”
“이 자식이 무슨 큰일 날 소릴! 10년을 동고동락하며 게임 했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내 장비를 대신 맞교환해서 받아오기도 했고.”
“아니면 말지, 뭐 그리 수상하게 발끈해? 아무튼 고맙다 현중아. 이건 잘 쓰고 금방 돌려줄게.”
건네받은 아이템은 무기를 제외한 총 12피스의 아이템이었는데, 전부 고강화의 유니크급이었다.
“와, 8강화 이상 유니크 템도 3개나 있네? 네 장비로 이 정도 급을 받아와도 돼? 딱 봐도 네 장빗값 2배는 돼 보이는데?”
“야 야! 우리 길드가 그렇게 정 없는 길드인 줄 알아? 형이 10년 넘게 쌓아놓은 신용도가 얼만데? 그리고 우리 길드는 추천제에다 죄다 오래된 길드원들뿐이라 거의 다 현실로 알고 지내는 사이야. 어때? 이런 돈독한 실체를 직접 보고도, 아직도 들어올 맘이 안 생기냐?”
“현중아. 그새 잊었냐? 그렇게 현실로 알고들 지내시니깐 내가 더더욱 들어가면 안 되는걸? 한동안 내 신상 명세를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은, 너뿐이어야 하는 걸 왜 자꾸 까먹니?”
“아…… 네가 우리 길드에 들어오면 재밌을 텐데. 아쉽네. 키워주는 맛도 제법 쏠쏠할 텐데.”
사실 예전에 제의받았을 때는 스펙이 딸려서 자존심상 못 들어간 것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스펙은 충분히 되는데도 못 들어가게 된 걸 보면, 길드 생활이란 것은 나와는 참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30분 있다 돌려드려야 하니까 빨리 가봐라. 경험치 추가라도 따내야 이 형님을 따라잡을 눈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생기지 않겠냐?”
“인마! 누가 너 따위 따라잡자고 1위 하려는 줄 알아? 넌 안중에도 없어 자식아. 넌 딱 두 달, 아니 한 달 컷이다! 크크크.”
“됐고, 어서 가기나 해라. 내가 뭐 더 도와줄 건 없지?”
“어. 됐으니깐 여기서 인터넷이나 하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어디 딴 데 가 있지 말고!”
그렇게 난 현중이와 헤어지고, 곧바로 창고에서 오랜만에 신검을 꺼냈다.
며칠 만에 다시 차 보는 신검이지만, 산드로라는 이름으로는 처음 차 보는 것이라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산드로란 이름이 세상에 등장하는 건가!”
디바인급 무기와 유니크급 이상으로만 도배한 방어구와 액세서리.
그리고 타연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특별한’ 테크트리의 조합!
이제 타연 역사상 절대로 깨지지 않을 불후의 기록을 새기는 일만 남아 있었다.
* * *
제도(帝都) 오스타그.
타연의 가장 메인 국가이자 대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가이라 제국의 수도.
이 오스타그의 북부에는 거대한 황궁이 존재했는데, 내가 가려는 제국 기사단의 건물이 바로 이 황궁 안에 있었다.
NPC가 워낙 많은 곳으로 유명했지만, 그에 따른 수많은 퀘스트와 이벤트 때문에 유저들도 넘쳐나는 곳.
거기에 관광 명소 1위로 선정될 만큼 더없이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의 풍경 때문에, 관람차 찾은 유저들까지 더해져 이곳은 항상 북새통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황궁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들과는 달리 ‘안전지대’라는 부분이 컸다.
유저들이 공성전을 통해 점령이 가능했던 다른 성들과 달리, 설정 상 이 황궁은 오직 국가 간의 전쟁 관계가 성립돼야지만 점령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 간 전쟁에 돌입하지 않는 한 황궁의 모든 곳은 안전지대였는데, 덕분에 난 99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신검을 차고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퀘스트가 있는 기사단 훈련소로 향하면서 현재의 내 스펙을 다시 한번 확인해봤다.
[산드로(도둑) Lv. 99]
* HP: 6340/6340 * MP: 12590/12590
* 근력: 166 * 체력: 255 * 민첩: 187 * 지력: 232 * 마력: 564
사실 다른 템은 전혀 차지 않고 신검 룬 페이토나 하나만 착용해도, 타임 어택의 순위권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일단 신검 하나만으로 올 스탯이 108씩이나 올라갔기에, 무슨 99레벨 주제에 200레벨 중반대의 스탯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한데 현중이네 법사 누님의 방어구와 액세서리까지 차게 됐더니, HP와 MP 증가 및 각종 스탯 증가로 거의 300레벨 수준의 스펙을 갖춰버리게 되었다.
이쯤 되니 ‘대여’까지 하고 온 건 너무 오버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야. 신검이 뜬금없이 풀렸던 것처럼 다른 7신기 또한 금방 풀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러면 누군가 그 7신기를 가지고 나처럼 레벨다운해서 도전할 수도 있어. 그러니 5년, 아니 10년이 지나도 1위로 유지될 그런 기록을 세워놓고 떠나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그냥 1위가 아닌, 도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수준의 기록이었다.
그래야만 차후에 내가 랭킹 1위를 달성하더라도, 다른 랭커들과 격차를 벌리며 1위를 쭉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벽보에 아이디가 적히기 때문에 조금 일찍 주목받게 되겠지만, 영구적인 경험치 20% 추가 효과를 그것 때문에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큰 보상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계획대로 성장한다면 타연에서 날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될 테니, 크게 대수롭지는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이어서 스킬들도 한번 살펴봤다.
[마나 쉴드(심화 스킬): ★★★★★☆☆☆]
* 마나 소비: 15
* 사용 대기 시간: 10초(on, off시)
* 피격당하는 데미지를 현재 보유한 MP의 소모로 대신하는 쉴드가 온몸을 감쌉니다.
* 생성된 마나 쉴드는 피격당하는 모든 데미지를 75% 경감시킵니다.
* 마나 쉴드의 활성화가 해제되기 전까지는 물리적인 상태 이상에 저항합니다.
* MP 수치가 0이 되면 마나 쉴드는 자동으로 비활성화 상태로 전환됩니다.
99레벨까지 주어진 스킬 포인트는 모두 19개.
이 중 절반 이상인 10개를, 쉴드와 마나 쉴드 5성까지 찍는 데 사용했다.
덕분에 타연 최초로 8성을 달성한 마나 쉴드는 75%라는 미칠 듯한 데미지 경감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현재 MP 수치를 4배만큼 HP로 환산해서 계산하면 대략 5만 정도.
경악스럽게도, 평범한 동 레벨 유저들보다 피통이 10배 가까이 높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었다.
‘물론 템이 최상위 유저급이라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그래도 100레벨도 안 된 캐릭의 몸빵이 이 정도라니……. 템과 레벨이 랭커급에 이르게 되면 어떤 캐릭이 돼 있을지, 나조차도 가늠이 안 되는구나.’
스킬 포인트는 연속 베기와 매직 미사일, 그림자 밟기를 배우는 데 이미 5개를 썼기에, 남은 4개로 재빠른 몸놀림과 약점 포착, 그리고 무기 던지기를 찍는 데 빠듯하게 사용했다.
[재빠른 몸놀림(고유 스킬): ★★☆☆☆]
* (passive)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10% 증가시킵니다.
* (active) 마나 소비: 180, 사용 대기 시간: 60초
-10초 동안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20% 증가시킵니다.
[약점 포착(고유 스킬): ★☆☆☆]
* (passive) 일반 공격 시에 12%의 확률로 공격력의 150% 피해를 줍니다.
* (passive) 대상의 후방에서 일반 공격 시에 100%의 확률로 공격력의 150% 피해를 줍니다.
* (active) 마나 소비: 120, 사용 대기 시간: 60초
-2.5초 동안 일반 공격 시에 100%의 확률로 공격력의 150% 피해를 줍니다.
[무기 던지기(공통 스킬): ★☆☆☆]
* 마나 소비: 없음
* 사용 대기 시간: 2.5초
* 투척용 무기를 던질 수 있게 됩니다. (최대 거리: 35m)
* 무기 자체 데미지의 175% 피해를 줍니다.
도둑을 가장 많은 DPS(Damage Per Second)를 뽑아내는 캐릭으로 만들어 주는 두 개의 스킬, ‘약점 포착’과 ‘재빠른 몸놀림’.
특히 약점 포착은 도둑들이 몹 뒤에서 딜 욕심을 내다가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힐러들의 원성을 듣게 만드는 스킬로 유명했다.
거기에 멀리 있는 유닛들의 어그로를 끌어오기 위한 무기 던지기도 비교적 일찍 배웠다.
고수 중에는 무기 던지기에 스킬 포인트를 아끼고 활을 겸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로선 옵션 때문에 신검을 항상 착용해야 하기에 그냥 찍게 되었다.
‘마지막 체크까지 완료.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차후에 나 정도 템을 갖추고 도전할 수도 있는 유저는 혹여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스킬 조합과 테크트리를 가지고 도전하지 않는 이상, 내가 세울 기록은 절대 깰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몹들의 공격을 전부 피하는 완벽한 무빙?
시작점부터 클리어할 때까지의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한 동선 계산?
압도적인 템빨과 전무후무한 몸빵 앞에 그따위 것들은 전부 시간 로스(loss)의 요건들일 뿐.
전부 나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얘기들이었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이번 타임 어택에서 오늘 내가 증명할 격언이었다.
Hit and Run!
모든 공격들을 전부 다 맞으면서, 직진으로 전진하며 썰어버리고 클리어하는 것이 바로 오늘 내가 세운 전략이었다.
머릿속으로 최단 직진 코스를 되새김하다 보니 어느덧 제국 기사단 훈련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백 등 안에 들고야 만다!”
“난 오늘도 안 되면 걍 포기하고 렙업이나 할래!”
웅성웅성.
역시나 어제와 같이, 오늘도 이곳은 붐비고 있었다.
[내 기록 묻기]
[산드로: 132,421위(6분 32초 55)]
벽보에서는 내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따로 NPC 병사로부터 어제 내가 세운 기록을 다시 한번 확인해봤다.
어제는 차근차근히 몹의 배치를 꼼꼼히 살펴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마지막으로 타임 어택에 도전해 봤던 게 2년 전이었기에, 구조는 단순해도 여러 가지 사항들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었다.
‘1위하고 100위 기록은 어제랑 변한 게 없나?’
[명예의 전당]
-1위 관우(2분 31초 15)
-2위 라스트챤스(2분 31초 88)
-3위 불꽃남자(2분 32초 08)
……………………
-100위 데스나이트(2분 41초 36)
기록이 상향평준화가 된 지 오래됐는지, 1위와 100위의 차이는 10초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혹시 아는 랭커의 아이디가 있나 궁금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유명한 아이디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의 랭커들은 3년간 쉬지 않고 레벨업을 해 왔던 유저들이었기에, 지금도 수시로 경신되는 이 타임 어택에 남아 있기에는 너무 초창기에 도전했던 사람인 것이다.
‘어? 저 아이디는, 그분이잖아?”
-79위 연우(2분 39초 79)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익숙한 아이디가 눈에 띄었다.
예전 번스타인 성의 주성 입구를 통제하다가 비켜줬던 방패 기사, ‘연우’님이었다.
‘아직까지 100위 안에 남아 있을 정도면 당시엔 10위 안에 들었던 거 아닌가? 방패 기사 테크트리는 타임 어택에 적합하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탄 건가? 그러고 보니 날 주성 안에 들여보내 줘서 내가 신검을 먹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후로 별일 없으셨는지 모르겠네.’
정말 평생을 고마워해도 모자란 사람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나중에 어떻게든 보상을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에 문득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야! 저 사람 피닉스의 히든캬드 아니야? 성기사 랭킹 1위!”
“오, 맞네! 저 레드 드레이크 갑옷 세트는 아직 몇 세트밖에 안 풀린 거잖아! 캬! 실제로 보니깐 간지 장난 아닌데?”
“근데 랭커가 여기에는 왜 왔지?”
벽보 앞에만 있다 보니 입단 시험을 주는 NPC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 유명 랭커가 와 있었다.
태성 길드만큼은 안 되지만 견주어 볼 만한 몇몇으로 늘 손꼽히는 유명 길드, ‘피닉스’의 히든캬드였다.
부(副)길드 마스터이기도 한 그는, 착용하고 있는 화려한 갑옷 덕분에 자연스레 눈에 띄는 군계일학의 자태였다.
“저거 그거네. 치트키.”
“저 라스트챤스, 피닉스 길드 마크 달고 있었잖아. 며칠을 치열하게 도전하더니만 결국 치트키를 쓰고 마네.”
잉? 치트키라고?
이 게임에도 치트키라는 게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