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장비 파밍 (3)
칠흑 마탑 마도사 세트를 구매한 지도 5일이 흘렀다.
하지만 내 일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거래소에서 살 만한 아이템이 매물로 올라왔는지 확인하고, 빛나는 마력석을 꾸준히 구매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오로지 굴에서 개미들만 때려잡았다.
거대 전투 개미, 거대 갑옷 개미, 전투 불개미, 대형 불개미 등등…….
온갖 개미들만 이 악물고 주야장천 잡은 결과, 나는 결국 목표했던 15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다시 신검을 들게 되는 건가!”
방금 레벨업으로 달성된 8성 은신.
신검을 든 채 필드로 나갈 최소한의 자격이 드디어 갖춰졌다.
소드 마스터리 또한 5성까지 찍어 8성이 됐더니 명중률도 16%가 추가됐다.
이 정도면 대략 100레벨 차이가 나는 듀메인 성 몹들도, 신검이라는 템빨로 충분히 사냥할 만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사냥을 시도하기엔 말도 안 될 정도로 이른 레벨.
하지만 어떻게든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면, 그곳은 최고의 레벨업 장소가 분명했다.
맵 리셋으로 무한 사냥이 가능한 인던의 특성과 몹 속성에 따른 우위.
거기에 드랍하는 아이템이 무척이나 끝내 준다는 장점까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피닉스 길드가 차지하고 있는 듀메인 성으로 순간이동했다.
먼저 외성 안 신전을 들러 귀환 등록을 마친 뒤, 그동안 창고에 아껴 뒀던 풀 템을 꺼내서 착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산드로(도둑) Lv. 150]
* HP: 6582/6582 MP: 17131/17131
* 근력: 177 체력: 266 민첩: 198 지력: 243 마력: 723
신검과 칠흑 마탑 세트 덕분에, 150레벨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스펙이 완성됐다.
총 스탯의 합만 해도 어지간한 동 레벨의 2배.
특히 마력 스탯만 찍으면서 마력 증가 템 위주로만 착용한 탓에, MP 수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 피통에 신검을 찬 공격력이라면, 예전 232레벨의 매그넘 10명쯤은 한꺼번에 덤벼도 가뿐히 전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긴 이 정도쯤 됐으니, 신검을 착용한 채로 필드로 나갈 생각이 들었지만 말이다.
사냥 준비를 끝마친 나는 히든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나: 히든캬드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히든캬드: 오, 산드로님.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그동안 생각은 좀 바뀌셨나요?)
(나: 네? 무슨 생각요?)
(히든캬드: 저희 길드에 가입하시기로 해서 간만에 귓말 주신 거 아닌가요?ㅎㅎ)
(나: 하하! 아닙니다. 다름 아니라 전에 말씀드렸던 뱀파이어 남작 인던에 지금 들어갈 수 있을까 해서 귓말 드렸어요.)
(히든캬드: 아! 그거라면 진작 길드창 공지 명단에 올려뒀습니다. 한데 아직은 칼도 안 박히실 텐데 위험하시지 않을까요? 제가 애들 시켜서 도와드리라고 말해 놓을까요? 제가 가고 싶지만 지금 좀 바빠서...)
(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레벨 차이가 나는 곳이라 더 들어가 보려는 거기도 해서요. 이걸 극복하는 새로운 테크트리를 연구 중입니다.)
(히든캬드: 렙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테크트리라... 뭔지 모르겠지만 기대되네요^^ 나중에 성과가 있으면 꼭 힌트라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 네. 이렇게까지 편의를 봐주셨는데 그 정도야 해드릴 수 있죠.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사전에 얘기가 다 됐다고 하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마나 회복 물약을 충분히 챙겨 들고, 곧바로 듀메인 성으로 이동했다.
은신을 쓴 채로 이동할까 했지만, 아무도 발견 못 한 상태로 인던 앞까지 도착한 게 드러나면 괜히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내성문 입구부터 대놓고 걸어 들어갔다.
착용한 템들은 전부 외형 변경해 두었기에, 겉보기로는 평범한 중레벨 유저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광장을 지나 주성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따로 저지하거나 돌아다니는 유저는 없었다.
하지만 1층 중앙 홀에 들어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다가서자, 위에서 유저 한 명이 내려와 막아섰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죠? 타 길드원들도 주성 안을 돌아다니는 건 허용되지만, 중앙 홀은 길드 전용 던전이 있어서 출입이 통제된 곳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히든캬드 님의 배려로 인던 출입을 허락받은 산드로라고 합니다. 확인해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어디 보자……. 아! 명단에 등록된 분이시군요. 못 보던 분이셔서 실례했습니다. 올라가셔도 좋습니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쉼터에 오르자, 제법 넓은 공간에 십여 명 안팎의 유저들이 앉아있었다.
피닉스 길드 마크보다는 2, 3군으로 보이는 길드 마크가 대부분이었는데, 삼삼오오 파티원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 뒤로 한 남자의 거대한 전신 초상화가 기다랗게 걸려있었다.
뱀파이어 인던으로 출입시켜주는 비밀 입구.
바로 듀메인 남작의 초상화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길마 님께 입던을 허락받아서 온, 산드로라는 개인 유저입니다. 앞으로 이곳을 종종 찾아올 예정이니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님 같으신 분 많이 계시니 부담 갖지 마시고 사냥하세요. 다만 획득한 특수 아이템을 거래소나 개인 거래 등으로 처분했다가는 척살령이 떨어질 수 있으니, 득템하셨다면 본인이 조용히 쓰시거나 꼭 저희 길드 측에 판매해 주세요. 독점이라도 제값은 쳐 주니까 손해는 아니실 거예요.”
“네. 그 점은 잘 숙지하고 왔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확실히 2, 3군 길드원이라고 해도 피닉스 길드 소속답게 매너가 좋은 모습이었다.
혼자서 들어가려 다가서자 몇몇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신경 쓰지 않고 서둘렀다.
첫 방문이라 살짝 긴장한 상태로 이곳에 찾아왔던 탓에, 얼른 안전한 인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레벨이 낮은 상태에서 신검을 들고 다닌다는 건…… 역시 좀 후달리긴 하네.’
뱀파이어 남작 초상화의 발끝에 손을 가져다 대니, 입장 여부를 묻는 시스템 창이 떠서 YES를 터치했다.
[‘뱀파이어 남작 듀메인의 지하 던전’에 들어왔습니다.]
던전의 입구는 성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 통로였다.
조금 전까지 서 있던 홀의 벽과 같은 석재로 이루어진 통로.
아무래도 성의 지하 공간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마법적인 효과로 숨겨 놨다는 설정의 던전인 듯싶었다.
“생각보단 밝아서 할 만하겠는데?”
유저 편의를 위해 횃불들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잠시 내려가자 곧 성의 지하 공간인 공동(空洞)이 나왔다.
공동은 세 갈래의 길로 갈라져 있었는데, 각기 지하 감옥, 지하 수로, 남작이 있는 비밀의 방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걸 미리 숙지하고 왔다.
일단 이곳에 출몰하는 몹들과 레벨 차이가 워낙 컸기에, 각개격파가 가능하다는 지하 감옥으로 이동했다.
감옥 입구에 들어서자, 곧바로 몬스터 한 마리가 마치 순찰하듯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대 양식의 옷을 입은 좀비 같은 흉측한 모습.
하급 마물인 ‘뱀파이어의 추종자’였다.
‘레벨 차이가 나니깐 하나씩 차근차근 잡아보자. 2대1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말고!’
마쉴은 진작부터 활성화해 두었기에, 재빠른 몸놀림과 약점 포착을 사용한 뒤 추종자에게 달라붙었다.
휙, 휙, 휙, 퍽! 휙, 휙, 휙, 퍽!
이 던전에서 가장 초반부에 나오는 제일 약한 녀석이라 그런지, 공격 성공률이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아무래도 소드 마스터리가 8성이라는 점이, 크게 도움이 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녀석 또한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나 쉴드가 1,105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098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역시 레벨 보정이 있어서 그런지, 이 던전의 핫바리 잡몹임에도 불구하고 무시 못 할 데미지가 들어왔다.
녀석의 평타 한 방 한 방에 MP가 푹푹 깎여 나갔지만, 그래도 75%라는 사기적인 데미지 감소 탓에 제법 버틸 만은 했다.
“아무리 레벨 차이가 커도 평타 한 방에 2천 데미지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냥터를 찾아왔구나?”
하지만 공격력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질 유저가 아니었다.
번쩍!
가뜩이나 기본 데미지도 사기급인데, 언데드나 암속성 몹들에게는 추가 데미지가 2배 더 들어간다.
거기에 25%의 확률로 발동되는 빛 속성 마법 데미지까지 터졌더니, 추종자는 금세 쓰러져 버렸다.
“오케이! 잡았다!”
[62골드를 획득했습니다.]
무려 100레벨 차이의 몬스터.
그걸 유효타 단 4방 만에 잡았다.
얼른 경험치 칸을 살펴보니, 이 한 마리로 경험치 바가 20%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마침맞게 왔구나! 역시 신검 들고 사냥하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어. 괜히 다른 곳 찾는답시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여기서만 쭉 250레벨까지 달리자! 그때까지 잘하면 한 개는 먹을 수도 있겠지!”
혼자서 보스 몹을 잡을 레벨이 되면, ‘그’ 레전더리 템을 먹을 가능성이 생긴다.
아주 낮은 확률이었지만 나오지 말란 법도 없었기에, 행복한 상상을 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크르르.”
지하 감옥의 수감실에는 수감자들 대신 ‘뱀파이어의 추종자’와 ‘하급 뱀파이어’ 등이 안에 있었고, 통로 곳곳에는 ‘헬 하운드’가 돌아다녔다.
하지만 뭉쳐있는 몹들은 없어서 확실히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하나 잡고 만피를 채우고 하나 잡고.
그렇게 만피를 채우며 천천히 안전하게 사냥했는데도, 금방 두 번이나 레벨업했다.
“와! 그동안 개미굴에서 뭔 헛고생을 한 거지?”
개미굴에서의 사냥도 남들이 봤으면 경악할 수준의 레벨업 속도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고작 첫 코스에 있는 지하 감옥의 몹들만 정리한 것뿐인데, 레벨업을 두 번이나 해버렸다.
원래 사냥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의 던전인데, 거기에 솔플이라 그런지 말도 안 되는 폭업이었다.
“여긴 다 잡았으니 이제 옆 방 차례인가?”
비밀의 방은 보스 몹인 뱀파이어 남작이 있는 곳으로 연결되는 곳이라 패스하고, 다음 갈림길이었던 지하 수로로 이동했다.
통로로 들어서니, 뜻밖에도 입구부터 추종자와 하급 뱀파이어로 이루어진 파티형 몹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확실히 파티 사냥 위주로 디자인된 인던인 만큼, 솔로 플레이로 사냥하기에는 다소 위험해 보였다.
“이 방부터 파티 몹들이네. 그럼 그냥 인던 리셋하면서 지하 감옥에서만 레벨업 하는 게 낫겠다. 20레벨 정도 더 올려서 헛방 좀 덜 나올 때쯤이면 지하 수로도 할 만해지겠지.”
결정을 내린 나는 곧바로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인던은 특성상, 안에 단 한 명의 유저도 남아 있지 않으면 그 즉시 초기화된다.
그래서 마을로 귀환하는 대신, 입구로 나가서 인던을 리셋하고 재입장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간편했다.
[‘뱀파이어 남작 듀메인의 지하 던전’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던전에서 나와 홀의 계단 쉼터로 돌아오자, 뜻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오죠? 시도해 본다는 게 생각보다 잘 안 됐나 보죠?”
타임 어택에서 마주쳤던 라스트챤스.
내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연락받았는지, 그가 다른 피닉스 길드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던전 입구를 둥글게 에워싼 채.
“……?”
녀석이 기다리고 있던 의도를 알 수 없어 빤히 쳐다보자, 이내 라스트챤스의 말이 이어졌다.
“대답하기 싫으신가 보네요? 먼저 전에 타임 어택을 경신했을 때 제가 드렸던 귓말은 사과드릴게요. 근데 바로 날 차단한 건 너무 심하지 않았어요? 열흘간 노력해서 겨우 경신했던 건데, 그렇게 몇 분 만에 1위를 뺏겨서 제가 얼마나 빡쳤는지 알아요?”
매너 있게 시작했던 녀석의 어투가, 갑자기 공격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차징!]
둘러싼 십여 명의 길드원 중 기사 한 명이, 갑작스럽게 차징을 시전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림자 밟기로 피하려다, 생각을 바꿔 일단은 한 대 맞아 주었다.
[마나 쉴드가 1,08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상태 이상 ‘넉백’에 저항합니다.]
팅!
MP는 소모됐지만 마쉴 덕분에 넉백에 저항한 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라스트챤스에게 담담히 말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죠? 부길마 님한테 허락받고 온 사람을 공격하다니……. 방금 이건 피닉스 길드의 공식적인 태도라고 간주해도 되는 거겠죠?”
“설마 그 이펙트는…… 마쉴? 하하하! 도둑이 마쉴을 배웠다니, 이거 상상도 못 해본 일이네요! 어쩐지 여기까지 겁 없이 혼자 온 이유가 있었군요?”
“쳐 웃지 마시고, 어서 제 물음에 대답부터 하시죠?”
“산드로 님. 일단 저를 차단한 귓속말부터 좀 풀 수 있을까요?”
“자꾸 헛소리하지 말고 태도부터 제대로 밝히라고요!”
“이거 참, 먼저 귓말부터 좀 풀어 보세요. 대놓고 말하긴 좀 그러니깐요.”
사냥을 허락해 놓고 뜬금없이 이렇게 나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놈의 속셈이 뭔지 직접 듣고 싶어졌다.
나는 여차하면 타이탄을 소환할 준비를 하면서, 녀석이 바라던 대로 녀석을 차단 목록에서 해제했다.
[‘라스트챤스’의 귓속말 차단을 해제했습니다.]
(나: 자, 차단 풀었습니다. 뭐 때문에 이러시죠? 설마 타임 어택 때의 앙심 때문에 그럽니까?)
(라스트챤스: 에이, 제가 그렇게 쪼잔한 놈으로 보이세요? 다시 도전해 볼까 싶었지만, 기록을 보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포기한 지 오래예요.)
(나: 그러면 도대체 뭡니까? 말씀해 보시죠, 저도 맞고 가만히만 있을 성격은 못됩니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조용한 침묵 속에, 우리 둘만의 귓속말이 소리 없이 오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녀석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보내온 귓속말에, 내 평정심은 사정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라스트챤스: 당신이 지금 들고 있는 그 외형 변경 템... 신검 맞죠? 안 그래요 산드로, 아니 매그넘03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