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테이밍 몬스터 (1)
‘어차피 먹지도 못할 텐데, 괜한 헛수고를 하는구나.’
이렇게 열심히 다가와도, 딜을 하지 않은 유저들은 시스템상 루팅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필드 몬스터로부터 떨어진 템은 10초 동안 일정 데미지를 입힌 유저들만 루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줌바카의 머리(퀘스트 아이템)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오크 로드 학살자’를 획득했습니다.]
먼저 시스템 창의 로그 기록에 퀘스트 템과 업적이 자동 습득된 것이 보였다.
남은 소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바빴지만, 재빨리 인벤토리 창을 열어 방금 먹은 아이템을 직접 확인해 봤다.
<용맹한 오크 로드의 증표(레전더리, 목걸이)>
“오예!”
내가 목표로 했던 바로 그 레전더리 목걸이!
간절히 기대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떡 하니 인벤에 들어와 있는 걸 확인하니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첫 방에 떠버리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득템신이라는 분이 만약 존재한다면, 아무래도 요즘 나한테 제대로 강림한 모양이었다.
다른 템은 볼 것도 없었기에, 일단 이것만 확인해 보고 곧바로 인벤토리 창을 닫았다.
이제 마무리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0폭격기0로부터 345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탕탕탕탕으로부터 786의 마법 피해를 입었습니다.]
……………………
펑, 펑, 펑!
광휘의 방패는 이미 벗겨진 지 오래.
살아남은 태성 길드원들이 원거리 공격을 날려댔다.
주변을 훑어보니, 내가 오크 로드를 잡는 동안 이곳에 모인 유저들의 수가 2배는 늘어난 듯싶었다.
아무리 8성 은신이 있다 해도, 이 많은 유저들 앞에서 소환이 해제된다면 무사 생환을 장담할 수 없다.
서둘러 시야 위쪽을 힐끗 확인해 보니 소환 시간은 정확히 40초가 남아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미리 맵을 둘러봤던 게 정말 다행이었네.’
이곳은 조금 전까지 맵을 돌면서 유심히 살펴봤던 지역 중 하나.
레이드하기 좋은 널찍한 공터가 있기도 했지만, 인근에 있는 거대한 폭포가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심판의 전진!]
나는 곧바로 폭포가 있는 방향으로 전진기를 써서 이 공터에서 뛰쳐나갔다.
“매그넘이 빠져나간다! 잡자!”
“저놈 분명히 소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공성전 때도 금방 빠지더니 바로 해제됐었어!”
“잡아라! 저놈 잡으면 신검 떨어진다!”
주변 여기저기에서 유저들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어째 오크 로드를 레이드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전부 다 ‘매그넘03 레이드 공격대’로 돌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현중이가 말했던 게 이거였구나. 필드에 나만 떴다 하면 유저들이 레이드 하듯 몰려들 거라더니…… 딱 그 말 대로야!’
조금 전까지는 태성 놈들의 화살과 마법 공격만 날아왔었는데, 금세 그 3, 4배가 넘는 공격이 날아왔다.
그렇게 쏟아지는 화살 비를 맞으며, 오직 폭포를 향해 묵묵히 달렸다.
28%, 27%, 25%!
오크 로드를 잡을 때만 해도 절반 가까이 남아 있던 체력이 순식간에 위험 수치에 도달했다.
이제 해제까지 10여 초만을 남겨 둔 촉박한 상황!
하지만 다행히 정면에 있는 나무 뒤편에서 커다란 폭포음이 들려왔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이런! 설마 폭포 밑으로 뛰어내리는 건가!”
예상이 맞았지만,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마지막 나무를 벗어나자마자 나타난 절벽을 향해, 달려오던 그대로 점프했다.
슝! 풍덩!
대략 30미터는 돼 보이는 절벽에서 뛰어내린 나는, 그대로 거대한 폭포소(瀑布沼) 안으로 잠수하듯 빠져들었다.
그리고 타이탄의 몸체만큼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쳐 오르는 순간, 난 루이투스의 소환을 해제해 버렸다.
[은신!]
그리고 물 흐르듯 이어진 8성 은신.
풍덩! 풍덩!
나를 쫓아온 유저들도 쉴 새 없이 폭포소를 향해 뛰어내렸지만, 이미 은신에 성공한 이상 상황은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간 거야? 매그넘 이 자식, 타이탄 소환이 해제된 게 분명한데!”
“간파 써도 전혀 안 보여! 그사이에 로그아웃했을 리도 없는데…… 뭐지 이거?”
물속에서 간파와 광역 스킬을 이리저리 난사하는 유저들을 뒤로한 채, 나는 유유히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왔다.
* * *
[업적: 오크 로드 학살자(C)]
* 오크 로드 레이드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되는 업적입니다.(근력 +5, 민첩 +5)
* 업적 효과로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오크에게 선제공격 당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오크 로드를 레이드하면서 얻게 된 업적이었다.
사실 난 업적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타연에 수많은 업적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정작 별거 없는 업적이라도 획득하기는 굉장히 힘들었으니 말이다.
이 ‘오크 로드 학살자’ 업적만 하더라도 그랬다.
모든 필드 보스들이 이러한 업적을 주진 않는다.
특별하거나 사연이 있는 필드 보스들만 간혹 이렇게 업적을 줬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그마저도 레이드에 참여했던 사람 중 단 한 명밖에 얻지 못하는 업적이었다.
물론 C급답게 효과가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대단한 것이었다.
업적은 말 그대로 업적인지라, 새로 하나를 얻는다고 기존의 것이 사라지진 않는다.
따라서 업적을 누적해서 쌓아 갈 때마다, 그렇지 못한 유저들보다 조금씩 앞서나가게 된다.
그렇기에 고작 몇 레벨 조금 앞서 있는 랭커들이 대단하고, 또 대접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신규 몹과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새 역사를 써 내려가는 최선두 주자.
그런 그들은 이미 업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선점하게 될 확률 또한 높았다.
그러니 단순히 레벨 좀 높은 유저라고 쉽게 폄하할 수 없었다.
당장 나만 해도 3년이 지난 이제야 겨우 5개의 업적을 갖게 되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다리우스가 보유한 업적은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필드 보스.
앞으로 이놈들 레이드에 매진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으흐흐. 그나저나 업적은 업적이고, 도대체 얼마나 번 거야? 이런 레이드는 한 번에 이만큼이나 버는 거였어? 고렙들이 필드 보스만 죽어라 쫓아다닐 만했구나.”
오크 로드가 드랍한 아이템은 레전더리급 목걸이, 레전더리급 재료 아이템 ‘오크 로드의 어금니’, 그리고 유니크급 각반과 빛나는 강화석 21개였다.
확실히 잿빛 산맥에 있는 오크 부락의 규모가 큰 만큼이나, 이것저것 나눠주는 게 많은 알짜 보스 몹이었다.
거기에 운 좋게 태성 유저로부터 먹게 된 유니크 장궁 1개와 레어 반지까지…….
이번 레이드 한 번을 통해, 얼추 3억 정도 되는 아이템을 먹은 것 같았다.
‘인생 역전이구나! 정말 그때 신검을 먹었던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어!’
초반에 신검을 잠깐만 써본 뒤, 몇 주간 새로 키운답시고 둔감해져 있었는데 슬슬 실감이 났다.
만약 내가 단 1년 만이라도 이대로 죽지 않고 플레이한다면…….
그 1년 동안, 처음 이 신검의 가격으로 책정했던 100억만큼 버는 것도 꿈은 아닐 거라는 것이!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창고로 이동하는 도중, 흥분된 마음에 잠시 잊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연우: 뭐죠 당신? 매그넘03님과 관계 있는 분이셨나요?)
(나: 아! 제가 귓말 드린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어떻게 무사히 잘 돌아가셨나요? 연우님을 잘 피하면서 태성을 정리하긴 했지만, 오크 로드가 함께 깽판치는 바람에 확인을 못 했네요.)
(연우: 덕분에 눈치껏 미리 빠져서 괜찮았어요. 근데 말 돌리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죠? 도대체 어떤 관계신 건가요? 친구분이세요?)
(나: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접니다. 제가 매그넘03이에요. 아이디는 변경했고요.)
(연우: 네? 설마 렙따하고 새로 키우셨다고요? 아니 공성전 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새 캐릭으로 벌써 오크 로드를 잡아요!)
하긴 공성전이 끝난 지 이제 고작 3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이디가 바뀌었다면 새로 키운 게 분명한데, 그사이에 이렇게나 오크 로드를 잡을 정도로 레벨업했을 거라곤 쉽게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타이탄으로 잡은 거긴 하지만.
(나: 신검빨이 좋긴 좋죠? 대관식 이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느라 따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는데,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신검을 먹은 건 다 연우님 덕분이에요.)
(연우: 아....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정말 매그넘님인 것 같네요.... 그날 신검을 드신 건 순전히 님이 운이 좋았던 거죠. 물론 그 때문에 제가 곤란할 뻔하긴 했지만요....)
(나: 아!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괜찮으셨나요? 절 들여보낸 것 때문에 무슨 일 없으셨어요?)
(연우: 네. 결과적으로는 별일 없었어요. 대관식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도열을 위해 전부 다 광장 쪽으로 나왔거든요. 사실 비밀 유지가 중요했던 작전이라, 대부분의 길드원은 뼛속까지 태성이고 몇몇만 연합 쪽이었어요.)
우연히 이루어졌던 득템.
하지만 우연이 겹치면, 그건 운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혼잡했던 상황 속에서 신검의 주인은 결국 나로 정해졌다.
아직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직후부터 타연에는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연우님 또한, 그런 변화를 일으킬 사람 중 하나였다.
(나: 네? 멀린을 죽인 게 연우님이셨다고요?)
(연우: 네. 광장에 나왔던 저는 신검을 줍는 모습을 가까이서 전부 지켜봤어요. 그리고 님이 로그아웃한 순간, 넋 놓고 있던 멀린에게 가장 먼저 다가간 게 바로 저였죠. 결국 실패해버린 작전, 어차피 죽을 게 뻔한 멀린이라면 제가 죽이자는 판단이 들었거든요.)
방송에서는 주야장천 내가 신검을 줍는 장면만 리플레이 해줘서 모르고 있었다.
로그아웃을 한 후에 멀린이 어떻게 죽었는지.
당연히 죽었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멀린을 죽인 당사자가 연우님이었다니!
(연우: 노림수였지만 실제 멀린을 죽이기도 했고, 죽으면서 드랍한 유니크 템을 태성에 반납했더니 저를 좋게 봤나 봐요. 그 길로 동키호테의 눈에 띄어 이렇게 태성 1군 길드로 운 좋게 승격하게 됐네요.)
그녀가 산하 길드에서 쫓겨나기는커녕 1군에 들어와 있던 이유.
거기엔 놀랍게도, 내가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었다.
‘만약 신검을 멀린이 먹었다면…… 그렇게 맥없이 맞아 죽기는커녕, 오히려 연우님이 놈을 보호했겠지?’
나와 참 여러모로 얽히고설킨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나: 연우님. 예상했겠지만 전 앞으로 태성과 싸우기 위해 몰래 아이디를 변경하고 새로 키우고 있습니다. 방금 레이드에서 운 좋게도 아직 새 아이디를 노출하지 않은 것 같은데, 당분간만 제 정체에 대해 함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우: 그건 저야말로 부탁드리고 싶네요. 매그넘, 아니 산드로님이야 말로 단박에 제가 태성 측에 잠입해있는 스파이라는 걸 알아채셨잖아요. 그러니 제가 더 위험한 상황인데요?)
(나: 하하. 제가 은인이신 연우님께 무슨 해코지라도 하겠습니까?)
왠지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매그넘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줄곧 겸손함과 배려심이 가득한 말투 또한 현실에서도 선한 사람일 거라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한데 이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게임을 게임으로 즐기지 않고 ‘스파이’같은 욕 얻어먹을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라스트챤스: 산드로님. 레이드는 잘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원하시던 그 목걸이가 나왔나요?)
연우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라스트챤스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나: 네, 챤스님. 요즘 참 운이 좋은 모양인가 보네요. 어쩌다 보니 득템했습니다. 이번 한 번 만에!)
(라스트챤스: 네?? 그걸 첫 트라이에 드셨다고요? 와! 설마 했는데, 정말 산드로님의 득템 운은 레전드로 남을 겁니다ㄷㄷㄷ)
(나: 전부 챤스님 덕분이죠 뭐. 근데 챤스님께서는 연우님과 어떤 관계죠? 본의 아니게 연우님이 태성 측에서 제보해 주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됐네요.)
(라스트챤스: 헉! 그건 정말 비밀 중의 비밀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라스트챤스가 재차 말을 이어 나갔다.
(라스트챤스: 뭐 어차피 알게 되셨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친누나예요. 제가 타연을 하게 된 계기도 누나가 저를 끌어들여서였죠.)
‘응? 친누나라고?’
연우님과 라스트챤스가 친남매라니……?
그렇다면 내가 라스트챤스에게 내렸던 평가를 다소 수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분간 지켜볼 관계’에서, ‘조금은 믿어 볼 만한 관계’로.
(나: 사실 전 연우님 덕에 신검을 먹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 뵙게 된다면, 꼭 그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라스트챤스: 네? 그게 무슨?? 신검을 왜 저희 누나 때문에?)
(나: 연우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직접 여쭤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그래서 말씀드리죠.)
타연을 해왔던 지난 3년의 세월.
나름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난 타연에서 만난 그 누구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다.
신검을 줍고 난 이후로, 짧은 시간 만에 내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나: 전에 말씀하셨던 그 동맹이라는 거, 한번 해보기로 하죠. 하지만 이건 피닉스 길드가 아닌 저와 라스트챤스님, 그리고 연우님, 단 셋만의 동맹입니다. 서로 협력해서 태성을 함께 무너뜨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