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오크 로드 레이드 (4)
내 갑작스러운 귓속말에 당황했는지, 연우님이 고개를 돌리며 내 아이디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나: 당황하시는 걸 보니 라스트챤스님이 제가 누군지 말씀 안 드렸나 보네요.)
(연우: 당신이 라챤이에게 이번 제보를 부탁한 장본인이군요?)
(나: 네, 맞습니다. 거기다가 얼마 전에 우리는 만난 적도 있었죠. 그때 제가 님한테 은혜를 입은 게 있어서 지금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합니다.)
악의든 호의든 백배로 갚자는 내 성격상, 이대로 나 때문에 그녀가 험한 꼴을 당하게 놔둘 순 없었다.
(연우: 네? 처음 보는 아이디신데 만난 적이 있다고요? 그리고 무슨 은혜요?)
(나: 그건 나중에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요. 곧 오크 로드가 광폭화에 빠지게 되면 최대한 뒤로 물러서세요. 잘못하면 님도 맞으실 수 있거든요.)
(연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잠시 연우님과 귓말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변에는 어느새 다른 유저들이 계속 도착해서 구경 중이었다.
얼추 200명은 넘어 보이는 유저들.
이 많은 유저들 중에는 오크 로드가 죽는 순간, 태성의 척살을 감수하면서까지 먹자하려고 달려들 유저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런 주변 상황과 상관없이 레이드는 어느새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줌바카의 이름이 새겨진 네임바(name bar)가 어느새 25%에 다다랐고, 놈의 외형은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문득 예전 매그넘 시절에 몹 선공 문제로 시비가 붙었던 기사 캐릭이 생각났다.
비슷한 레벨이었지만 빵빵한 장비와 직업 상성 때문에, 일대일 싸움으로는 잡아낼 수 없었던 초라한 기억.
하지만 원래 도둑이란 게 대놓고 일대일하라고 만들어둔 캐릭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녀석이 자주 가는 사냥터에서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은신으로 쫓아다니면서 뒤치기했다.
간혹 파티와 함께 사냥을 나서면, 여러 몹과 싸우는 순간 힐러만 치고 빠졌다.
그렇게 일주일을 했더니 결국 녀석이 사정사정하며 내게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으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제발 뒤치기 좀 오지 말아 달라고…….
사냥 도중의 뒤치기.
치사하기는 해도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이것만큼 유용하고 확실한 건 없었다.
태성만 해도 조금 전 이 방법으로 유저들을 쉽사리 정리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너희들은! 지금 내가 흘린 피보다! 수백 배의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드디어 광폭화 구간에 접어든 오크 로드.
그와 동시에 녀석의 공격을 제자리에서 받아내던 동키호테가, 뒤로 물러나 공터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물론 달린다고 안 맞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대는 덜 맞게 되니 그사이에 원거리 폭딜로 잡을 작정인 듯싶었다.
하지만 전에는 그렇게 잡았는지 모르겠다만, 이번만큼은 그 방법이 소용없었다.
오늘 오크 로드를 잡는 것은 바로 나일 테니까!
(나: 연우님. 지금 들어갈 테니까 죽기 싫으시면 꼭 뒤로 물러나 계세요. 최대한 님만큼은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시겠죠?)
(연우: 뭘 들어가신다는 말씀이세요? 마지막에 먹자 시도하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나: 라스트챤스님이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가 누군지... 여기서 뭔 짓을 벌일 것인지도요!)
(연우: 대체 당신이 누군데요?)
“루이투스 소환.”
작게 속삭인 내 소환 주문에, 은신인 채 머물고 있던 내 주변이 거대한 빛기둥에 휩싸였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의 모습이 된 채로 나타났다.
[광휘의 방패!]
[심판의 전진!]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루어진 타이탄의 습격!
나는 먼저 오크 로드를 향해 총공격을 쏟아붓는 후방 원거리 유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공터를 둘러싼 나무 근처에서 공격을 날리던 궁수와 마법사들은, 숲 안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내 뒤치기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었다.
우지끈!
나무 수십 개를 부러뜨리며 순식간에 다가온 내 전진기에, 뭉쳐 있던 2, 3십 명의 태성 길드원들이 공격당해 넘어졌다.
일부러 가장 많이 뭉쳐 있던 이곳을 노렸기에, 나는 곧바로 영광의 검을 연계해 폭격과도 같은 후속 광역 공격을 먹여주었다.
“으악! 타이탄이다!”
“매그넘, 매그넘이다! 그 자식이 여기 나타났어!”
“아! 하필 광폭화 구간에 뒤치기하고 지랄이야!”
퍼퍼퍼펑!
요란한 쉴드 터지는 소리와 함께, 태성 길드원들의 비명도 함께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과연 태성.
전진기와 광역기를 연달아 날렸음에도 한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살아있었다.
심지어 오크 로드의 광폭화 구간을 위해 아껴두던 고급 스킬을, 재빠르게 나를 타겟팅해서 날리는 유저도 있었다.
“오크 로드는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타이탄부터 점사해! 매그넘, 저 도둑놈이 우선이다!”
오크 로드로부터 도망 다니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는지, 동키호테가 외치는 지시가 들려왔다.
퍼벙, 펑! 펑!
[광휘의 방패가 1,024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광휘의 방패가 2,655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내게 날아오는 마법 공격들이 광휘의 방패에 막혀 터졌다.
하지만 확실히 딜이 되는 유저들이라 그런지, 쉴드가 몹에게 맞을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소모되고 있었다.
쾅! 쾅!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일단 계획했던 대로 주변에 있는 태성 놈들을 하나씩 내리찍으며 확실하게 죽여나갔다.
전진기와 광역기에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거기까지일 뿐, 종이 몸인 마법사와 궁수들이 연이은 후속타까지 버틸 리 만무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넘는 원거리 딜러들을 잡아낸 나는 다른 유저들을 바라보는 척하다, 여전히 오크 로드의 어그로를 담당하고 있는 동키호테에게로 성큼성큼 달려갔다.
“무빙 훼이크다!”
뭉쳐 있던 원거리 딜러와 힐러들은 이미 내가 십여 명을 잡는 사이에 뿔뿔이 흩어졌다.
그걸 전부 잡아내고 오크 로드까지 레이드 하려면, 타이탄의 소환 시간인 3분 정도로는 촉박했다.
‘최대한 동선 낭비 없이 치고 빠진다!’
내 난입으로 죽거나 흩어지느라 잠시 멈췄던 힐과 쉴드.
그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든 상태였는데, 갑자기 나까지 달려오자 돈키호테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안 돼! 빨리 힐 좀 줘! 녀석이 날 노린다! 매그넘 이 새……!”
기사 캐릭의 최대 단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몸빵은 강해도 이속이 빠르지 못해 쉽게 도망치지 못한다는 점!
오크 로드의 도끼에 찍히고 있는 동키호테의 후방으로 몇 번 검을 휘두르자, 녀석은 잠시 버티는 가 싶더니만 결국 산화해 버리고 말았다.
일부러 막타는 오크 로드가 치도록 간을 좀 봤는데, 아쉽게도 템을 드랍하지는 않았다.
‘아! 머더러였는데, 아깝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태성 길드원들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나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메인 탱커였던 동키호테가 죽은 이상, 이제 이 레이드와 태성 놈들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크어엉!”
돈키호테가 죽자마자 시원하다는 듯 고성을 크게 내지른 오크 로드는, 그대로 뒤돌아 뛰쳐나갔다.
목표는 후방.
지금까지 자신을 향해 강력한 원거리 공격을 먹였던 마법사와 궁수 놈들이었다.
‘예상대로 탱커가 죽으니 미쳐 날뛰는구나! 후딱 나머지를 정리하고 레이드를 끝내야겠다.’
광폭화에 돌입한 오크 로드의 이속은 정말 미치도록 빨랐기에, 한 번 어그로가 찍힌 대상은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루이투스 또한 6미터에 달하는 체고 덕분에 이속이 빠른 편이었기에, 흩어져 있는 태성 측 잔당들을 쫓는 데 유리했다.
그렇게 한 명씩 집중적으로 딜을 누적하며,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나갔다.
‘역시 사냥 중에 들어오는 뒤치기가, 타연에서 가장 무섭다니까!’
약 10분간 체계적인 진형과 공략으로 한 명의 이탈도 없이 레이드를 진행한 태성.
하지만 광폭화 구간에 들어온 뒤치기 한 명 때문에 순식간에 궤멸 상태로 접어들었다.
물론 타이탄을 고작 ‘한 명’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표현이겠지만!
“접어! 그냥 모두 튀어! 이번 레이드는 쫑났다!”
눈치 빠른 태성 길드원 몇몇은, 동키호테가 죽자마자 곧바로 레이드 실패를 직감했는지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어서인지, 내 주변에 있던 법사와 힐러들도 하나둘 공터 반대편 숲 안쪽으로 도망쳤다.
외곽을 둘러싼 채 어느덧 300명이 넘도록 모여 구경 중이던 일반 유저들도, 하나같이 뒷걸음질 치며 멀찌감치 물러섰다.
‘이제 원딜러는 잡을 만큼 잡은 것 같다.’
이 정도면 태성이 충분히 무너졌으니 더 늦기 전에 오크 로드를 잡아야 했다.
아직 레벨이 낮은 편이라 남은 소환시간이 빠듯했다.
나는 반대편에서 여전히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오크 로드에게 심판의 전진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6 금사자 기사단장의 장궁(유니크)을 획득했습니다.]
[상급 마력 회복 물약(33)을 획득했습니다.]
[+10 셀다린 공방의 마력 반지(레어)를 획득했습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 습득 로그가 시스템창으로 올라왔다.
심판의 전진으로 이동하는 동선에 태성 길드원들이 죽으면서 드랍한 몇몇 아이템들이 습득된 것이다.
‘개, 개꿀! 나 말고 오크 로드한테 죽은 유저들은 아이템을 떨군 거구나!’
머더러가 많은 태성이었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보너스가 들어왔다.
하지만 일단은 오크 로드를 잡는 것이 중요했기에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보스 몹인지라 유저들의 상태 이상기가 통하지 않지만, 내 심판의 전진에는 넉백 당했기에 후속타를 쉽게 먹일 수 있었다.
“와! 오크 로드도 넉백이라는 걸 당하는 놈이었구나! 보스 몹이 자빠진 모습을 보니깐 왜 이렇게 이상하냐?”
이 생소한 광경에, 죽은 유저들의 아이템을 먹자하기 위해 다가온 유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은 유저들이 그냥도 아닌 태성 길드원들이었기에, 비싼 드랍 템이 있을 수도 있어 속이 쓰렸지만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머더러라 해도 드랍 확률이 그렇게 높은 편도 아니었고, 어차피 포기할 건 포기하고 취할 건 확실하게 취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일.
미리 한마디 해 둘 필요성은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이 오크 로드를 마저 레이드 하겠습니다! 태성은 제 주적인 만큼 주저 없이 죽였지만, 그렇다고 먹자 유저들까지 배려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먹자들은 저와 오크 로드 사이에 껴들지 말아 주세요!”
오크 로드에게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면서 여기 모인 모든 유저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 게 어딨냐! 원래 필드 보스는 막 잡는 거야!”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템에 눈이 돌아간 유저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먹자들 외에도, 태성 때문에 줄곧 눈치만 보던 유저 몇몇이 새롭게 참전한 것이었다.
“요동치는 대지!”
쾅!
하지만 잠시 잊었는지 몰라도, 오크 로드는 필드 보스 몹.
광폭화에 돌입해서 이리저리 이동하느라 잠시 쓰지 않고 있었지만, 내가 제자리에서 말뚝 딜을 시작하자 곧바로 전매특허인 광역기가 터져 나왔다.
[광휘의 방패가 10,23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상태 이상 ‘넉백’에 저항합니다.]
들고 있는 도끼로 땅을 내리찍으며 시전한 광역 스킬에, 반경 20미터의 땅이 쩌저적 갈라지며 주변 모든 유저들이 땅 위로 나자빠졌다.
오직 스킬 데미지를 모조리 흡수한 나만이, 넉백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요동치는 대지!”
쾅!
한데 예상치 못하게 2초의 텀을 두고 또 한 번의 광역 스킬이 들어왔다.
마지막 페이즈인지라 광폭화 전과 다르게, 어느새 공격 패턴이 바뀐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워낙 피통이 깡패인지라 상관없었지만 다른 유저들의 입장은 달랐다.
첫 번째는 어떻게 버텼었지만, 두 번 연속으로 이어진 광역 스킬에 전부 다 사망해 버린 것이다.
‘오크 로드야, 이거 너무 친절한 거 아니냐? 먹자까지 알아서 정리해 주다니?’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며, 어느새 쿨타임이 돌아온 광휘의 방패를 다시 두르고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렸다.
순식간에 전멸당한 모습을 지켜본 나머지 유저들은, 더는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요동치는 대지!”
팅!
연속된 광역 스킬은 광휘의 방패에 막혀 데미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원래도 붉었던 오크 로드의 안광이 터질 듯이 새빨갛게 빛났다.
녀석의 도끼질도 점차 빨라지더니 이제는 허공에 잔상이 남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검을 열심히 휘둘렀다.
그렇게 오크 로드의 얼굴에 흐르던 핏줄기가 점점 더 굵어진다 싶을 때쯤, 녀석으로부터 마지막 고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 일족 제일의 투사인 내가! 고작 인간에게!”
쿵.
마침내 오크 로드 줌바카가 쓰러졌다.
동시에 녀석의 시체가 사라져 드랍템이 채 보이기도 전에, 서둘러 템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차징!]
[블링크!]
[그림자 밟기!]
마치 내가 신검을 줍던 때처럼, 먹자 유저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