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일인 성주 (2)
나는 마지막 귓속말을 끝으로, 지켜보던 한 마법사 유저의 뒤로 다가갔다.
이곳에서 첫 포문을 열 공격은, 오랜만에 사용하는 고유 스킬 ‘덫 설치’였다.
[덫 설치(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150
* 사용 대기시간: 20초
* 밟는 순간 특수 효과가 발생하는 덫을 설치합니다.(지속 시간: 240초)
* 설치하는 재료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발생합니다.
2초간의 캐스팅이 필요해서 즉시 써먹기는 어려운 스킬.
하지만 동료의 스턴 공격에 이어 연계 스턴을 먹일 때 자주 쓰이는, 도둑의 대표적인 메즈 스킬이기도 했다.
덫 설치는 재료에 따라 광역 폭발, 실명, 스턴, 이동 불가, 회복 등 다양한 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데, 오늘 내가 사용할 것은 ‘연막’이었다.
“그러니깐 내가 그때 쉴드로 막으며 캐스팅해서 잡았던 거라니깐? 어? 뭐야, 이 사람 누구야?”
자신의 레이드 경험담을 늘어놓던 화염 마법사.
신나게 떠들던 그는, 자신의 발밑에서 쭈그려 앉아 덫을 설치하는 나와 뒤늦게 눈이 마주쳤다.
“왜요? 조용해서 심심했다면서요?”
펑!
허나 설치는 이미 끝난 상태.
덫은 ‘제자리 밟음’ 판정을 받아, 곧바로 자욱한 연막이 터져버렸다.
“뭐, 뭐야! 습격이다!”
“피닉스다! 도둑이 잠입했어!”
“쉴드!”
이렇게 좁은 곳.
그것도 수십 명이 뭉쳐있는 공간에서 연막이 터져 버리면, 비록 잠깐이지만 모든 사람의 시야는 제한된다.
그건 시전자인 나 또한 피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상관없었다.
적들과 달리 나는, 검에 걸리는 그 누구라도 족족 죽여 버려도 되는 상황이니까!
[연속 베기!]
원샷 원킬!
앞에 있던 화염 마법사는 평캔 연속 베기 한 방으로 잡아버리고, 곧바로 재빠른 몸놀림을 쓴 뒤 옆에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차례로 검을 휘둘렀다.
비록 공격력의 260%가 들어가는 연속 베기를 쓸 때처럼 한 방에 죽진 않았지만, 단 ‘3방’을 버텨내는 마법사가 드물었다.
누군가는 마나 쉴드를 배웠는지 얼핏 투명하게 일렁이는 푸른 보호막도 보였지만, 그 역시도 상관없었다.
지금 나는 불굴의 용맹함과 재빠른 몸놀림의 액티브 효과가 적용된 상태!
덕분에 일반 유저보다 공격 속도가 68%나 빨라져 있었다.
순식간에 난도질하듯 들어오는 후속타에 마쉴 법사는 금세 쓰러졌고, 나는 곧바로 옆 사람에게 이동하며 검을 쑤셔 넣었다.
[에어 밤!]
순간 어느 센스 있는 마법사의 기지로 첨탑 바닥에 에어밤이 터졌다.
그러자 스킬 효과에 따른 후폭풍으로, 첨탑 안의 연막 대부분이 순식간에 밀려나며 흩어졌다.
“뭐야? 고작 도둑 한 명이었어? 다들 당황하지 말고 일점사 해! 별거 아니다!”
“매직 미사일! 한 명이니까 매직 미사일로 점사 해버리자!!”
확실히 태성의 마법사들다웠다.
시야가 보이자마자 다들 무빙으로 뒷걸음질 치며, 즉발 스킬인 매직 미사일만 쏘아대기 시작했다.
비록 매직 미사일의 데미지가 약하다지만, 유도(誘導) 효과와 적중 시 짧은 경직 효과가 있었다.
잠깐만에 제법 잡았다곤 하나 아직 20명은 남은 상태.
그들 전원이 난사하는 매직 미사일이라면 도둑 한 명 잡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지라, 정말이지 적절한 판단이었다.
‘내가 평범한 도둑이었다면 말이지!’
[마나 쉴드가 85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03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팅! 팅! 팅! 팅!
마법 공격이지만 경직 효과는 물리적인 상태 이상 판정!
‘물상’은 전부 저항하는 마나 쉴드 덕에, 적들의 바람과 달리 난 경직 당하지 않았다.
“뭐야 저 자식? 경직에 면역이야?”
“버, 버근가?”
“아니야! 저 미친 도둑놈, 마나 쉴드다!”
“뭐라고?”
피해는 미미했지만, 그렇다고 스무 명이 날려대는 수십 개의 마법 미사일을 계속 맞고만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난 5명 정도가 뭉쳐있는 오른편으로 파고들며, 회심의 스킬을 날렸다.
[회전 베기!]
마나 흡수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나의 MP!
끊임없는 매직 미사일 폭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하는 내 모습에, 놈들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회전 베기에 맞은 녀석들에게 연이어 검을 날려댔고, 그렇게 5명도 순식간에 잡아버리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도둑 캐릭이 이 정도 일점사를 버틸 수 있다고?”
“지가 무슨 성기사야? 아니, 랭커 성기사도 이건 무적 안 쓰곤 못 버텨!”
연막을 터뜨린 지 20초도 안 되는 시간.
이 짧은 시간 만에 첨탑에 있는 30명의 마법사 중 절반을 리타이어 시켰다.
펑! 퍼펑! 펑!
정신없는 와중에도 잠시 뿌듯한 감정이 드는 순간, 예상 밖의 각도에서 파이어볼이 날아왔다.
쏘아진 곳은 바로 옆의 첨탑.
가까이 붙어있는지라, 이곳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뒤늦게나마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같은 길드원이나 동맹 간에는 광역 데미지 피해가 없어, 캐스팅이 길고 강력한 광역 스킬을 대놓고 시전 중인 마법사의 모습도 보였다.
[약점 포착!]
나는 그걸 확인하자마자, 재빠른 몸놀림과 쿨타임이 같아 아껴뒀던 공격 버프를 사용했다.
그리고 남은 잔당들을 서둘러 정리해 나갔다.
“라이트닝 볼트!”
“아이스 스피어!”
계속해서 안팎에서 들어오는 마법 공격들.
하지만 높은 마법 방어력 덕분에 데미지는 생각보다도 약하게 들어왔고,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심심치 않게 저항이 뜨기도 했다.
‘셋, 둘, 마지막 하…… 어라? 저놈은 알아서 떨어져 버렸네?’
최후의 한 놈이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을 끝으로, 첫 번째 첨탑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이 정도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피닉스 측이 예상한 타이탄의 소환 시간은 대략 5분 정도.
첨탑 4개 정리를 부탁한 시간도 그 정도였기에, 이 정도면 타이탄 없이도 상당히 빠른 페이스였다.
이곳과 15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바로 옆 첨탑.
원래 타이탄이었다면 뛰어내린 다음, 옆 첨탑의 벽을 손수 타고 올랐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욱 빠르고 간편하게 이동할 방법이 있어, 시간을 더욱 단축할 수 있었다.
[그림자 밟기!]
방금 파이어 볼을 날렸던 옆 첨탑의 화염 마법사.
나는 그를 타겟으로 그림자 밟기를 시전해, 순식간에 옆 첨탑으로 넘어가 버렸다.
“뭐, 뭐야!”
당황해하는 태성의 마법사들.
하지만 마침맞게도, 넘어온 난간은 내게 마법을 쏘기 위해 한군데로 뭉쳐있던 상태였다.
[회전 베기!]
폭격당하는 상태로 첫 번째 첨탑을 정리하느라 제법 닳은 내 MP가, 순식간에 가득 차올랐다.
‘와! 적들 한가운데서 쓰니까 진짜 미친 듯이 흡수되는구나!’
30초마다 쓸 수 있는 광역 스킬?
아니, 내게 회전 베기는 최고의 마나 회복 스킬이라고 불려도 할 말 없었다.
특히 이렇게 방어력이 약한 마법사들 한복판에서 사용하니, 마나가 차오르는 양이 직접 보고도 못 믿길 지경이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이렇게 뭉쳐있는 곳에서 검을 휘두르다 보니, 한 번에 두세 명이 궤적에 걸렸다.
그리고 종이 몸들인 마법사들로서는, 내 신검의 공격력을 몇 대 더 버텨낼 방도가 없었다.
“괴, 괴물! 이런 자식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산드로? 처음 보는 아이딘데?”
“아니 탱커들은 도대체 왜 안 올라와! 이 자식이 설친 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신검, 각종 8성 스킬, 불굴의 용맹함, 그리고 마나 흡수 쌍 반지.
처음 내가 캐릭을 구상했던 것 이상으로 갖춰진 지금.
나는 274레벨임에도 불구하고 400레벨 못지않은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타이탄을 타고 있지 않더라도 타이탄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캐릭터.
신검을 먹었기에 떠올릴 수 있었던.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목표에 다가간 ‘올 마력 마쉴 도둑’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첨탑에 올랐다가 오느라, 이제야 올라오는군요?”
자신감이 붙어 더욱 과감하게 움직였더니, 2번째 첨탑은 좀 더 빠르게 전멸시켰다.
그 직후, 뒤늦게 계단을 통해 탱커와 근접 딜러들이 허겁지겁 뛰어 올라왔다.
하지만 난 이 첨탑에서의 볼일이 모두 끝난 몸.
멀리 떨어져 있는 건너편 첨탑으로 건너가기 위해 난간에 선 채로, 나는 내 애룡의 이름을 외쳤다.
“훼라리 소환!”
키에엑-!
평온했지만 순식간에 난리통이 된 로젠타스 성.
그곳 내성 상공에, 필드 보스인 레드 드레이크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게 뭐야!”
“공성전 도중에 갑자기 웬 보스 몹?”
착!
허공에 새겨진 마법진에서 휙 하고 튀어나온 내 애룡.
녀석의 거대한 크기와 위용에 놀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난간에서 점프해 훼라리 위로 올라탔다.
아무리 보스 몹이라 하더라도 펫은 펫.
나와 달리 훼라리는, 수많은 원거리 공격들을 장시간 버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곧바로 공중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어떤 마법 공격도 날아오지 못할 만한 거리에서 멈춘 다음, 잠시 첨탑을 내려다봤다.
뜬금없이 첨탑 절반이 전멸당해 소란스러워진 내성의 모습.
그 전장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윽고 모든 스킬들의 쿨타임이 채워진 순간 나는 훼라리를 급강하시켰다.
목표는 반대편에 있던 나머지 2개의 첨탑이었다.
“브레스!”
내성문 옆에 붙어있는 세 번째 첨탑.
그 첨탑을 향해 훼라리의 광역공격 스킬인 화염구 브레스를 쏘아 보냈다.
펑!
뭉쳐있던 수십 명의 마법사들 사이로 화염구가 터졌다.
하지만 척봐도, 대부분 쉴드에 막혀 별다른 데미지를 주진 못했다.
위협적인 훼라리의 외형과 달리, 크게 대단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놈들은 곧장 원거리 마법을 날리며 반격해왔다.
“몬스터 라이딩!”
거기에 어느새 내성문 뒤편에서 달려와 화살을 날려대는 궁수 부대의 화살까지.
수많은 원거리 공격들이 오직 나와 훼라리를 맞추고자 날아왔으나, 난 몬스터 라이딩 스킬의 액티브 효과를 발동시켜 훼라리를 가속했다.
10초 동안 이동 속도가 80%나 증가하는 전진기!
하지만 동시에 비장의 ‘탈출기’이기도 했다.
과연 급가속하며 튀어나간 훼라리의 비행 속도 덕분에, 겨누고 쏘아진 원거리 공격들은 죄다 애꿎은 허공만 갈랐다.
이번에도 타연이 논타겟팅 게임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어그로는 충분히 끌었다.’
난 훼라리에게 첨탑 주위를 계속 빙빙 돌도록 명령을 내린 후, 슬그머니 자버프를 시전했다.
그리고 비행 궤도 중 첨탑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난간 안쪽에 있는 마법사를 향해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매직 미사일을 날려! 너무 빨라서 논타겟팅 스킬들은 맞출 수가 없어!”
“화염구가 또 날아올 수 있으니까 쉴드를 계속 두르는 것도 잊지 말고!”
쉭!
워낙 빠르게 비행 중인 훼라리였고 덩치도 컸던지라, 마법사들은 내가 첨탑 안에 들어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로서는 최적의 조건인 셈.
그대로 공중을 향해 뒤돌아 있는 마법사의 후방에 검을 휘두르니, 약점 포착의 패시브 크리티컬이 터지며 두 방 만에 쓰러져버렸다.
“뭐야? 녀석이 안에 들어왔다! 큭!”
옆에서 소리 지르는 화려한 로브의 머더러 마법사.
그에게 다가가 연속 베기를 먹여줬더니 그대로 쓰러져 잿빛으로 산화했다.
[+10 셀다린 공방의 마력 반지(레어)를 획득했습니다.]
‘이게 웬 보너스?’
아무리 레어급이라 해도 득템은 언제나 즐거운 법!
눈앞의 적들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드랍 템을 챙기는 건 잊지 않았다.
“만약 템을 떨구기 싫은 머더러가 있다면, 그냥 난간 밖으로 뛰어내리십시오. 머더러 만큼은 예외로 눈감아 주겠습니다!”
나와 태성은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지 오래.
하지만 이런 일반 길드원들에게까지 원한을 갖고 있진 않았다.
즉흥적인 충동으로 경고를 날렸으나, 그렇다고 휘두르던 검을 멈추지는 않았다.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너 하나에 겁먹어서 뛰어내리라고?”
“죽여! 이만큼 날뛰었으면 이제 피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자비를 베풀어봤자, 놈들은 들은 척도 안 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오히려 녀석들은 내 선한 의도를 허세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피가 없을 거라고요? 저 지금…… 만피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