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일인 성주 (3)
워낙 타겟팅을 벗어나기 위한 무빙을 하느라, 줄어든 마나보다 죽이고 빼앗은 마나가 더 많은 상태였다.
“저, 저 자식 뭐래? 어…… 으악!”
콰앙!
대꾸와 함께 한 명 더 리타이어시킨 순간, 나를 피해 난간 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마법사들에게 화염구가 꽂혔다.
과연 훼라리.
보스 몹 출신다운 뛰어난 AI 전투 능력이었다.
녀석은 쿨타임이 차자마자 내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화염구 스킬을 자동으로 쏜 것이다.
기왕 날아온 공격.
나는 생각난 김에 후속타로 날개 돌풍까지 날려 줄 것을 명령했다.
펄럭! 펄럭!
첨탑 가까이에서 돌다가, 갑자기 난간 앞으로 다가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멈추는 훼라리.
휘잉!
그에 따른 후폭풍으로, 첨탑 위에 있는 마법사의 절반이 넉백당하며 넘어졌다.
허공에 쳐진 쉴드가 앞선 화염구로 깨졌기에, 마나 쉴드를 익힌 몇몇 밖에는 넉백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굿!’
원래부터 넉백이나 스턴걸린 마법사는 근접 딜러의 주된 먹잇감!
나는 그대로 그들 중앙에 들어가 회전 베기부터 한 대 넣고,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크아! 뭐냐고 저 자식!”
“미쳤어! 딜이 말도 안 돼! 으악!”
사방에서 터지는 비명과 탄성!
그리고 여러 명이 한꺼번에 죽으며 휘날리는 죽음의 잿빛 먼지.
이 정도 공격력은 그 어디에서도 맞아본 적 없었을 테니, 녀석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임드 필드 보스의 메인 스킬보다도 더 아플 평타 공격.
그것이 바로 여러 버프와 템빨로 증폭된, 지금 나 산드로의 공격력이었다.
[마나 쉴드가 257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421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펑, 퍼퍼펑!
아까와 마찬가지로 옆 첨탑에서 마법들이 끊임없이 날아왔지만, MP 수치는 도무지 2만 밑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첨탑도 손쉽게 전멸시켰다.
남은 것은 이제 네 번째 첨탑 하나.
이제 히든캬드에게 귓속말을 보낼 타이밍이었다.
(나: 3번 첨탑도 클리어. 지금 내성문으로 전진하시죠. 4번 첨탑도 1분 안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히든캬드: 설마 타이탄도 없이 이럴 줄은... 알겠습니다. 궁금한 사항은 일단 접어두고 진격부터 하겠습니다. 마무리 잘 부탁드립니다!)
피닉스의 진입 메시지와 함께, 나는 답장도 없이 곧바로 마지막 첨탑을 향해 그림자 밟기를 써서 넘어갔다.
“왔구나 이 자식! 깝치던 것도 이제 여기서 끝이다!”
허나 이번 첨탑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새 십여 명이 넘는 기사와 전사들이 올라와, 마법사들 사이에 섞여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길드창을 통해 상황을 전달받았구나. 근데 너무 늦은 거 아니냐?’
[방패 후려치기!]
[차징!]
[리프 어택!]
마법사들 뒤에 숨어 있던 기사와 전사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오며, 여러 상태 이상기를 시전했다.
팅! 티티팅!
하지만 어떠한 상태 이상기도, 내게는 조금의 위협도 주지 못했다.
애초에 난,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자 캐릭을 새로 키운 것이기 때문이다.
“마, 마나 쉴드?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아니 이 자식이 도대체 누군데? 이렇게 센 놈이 어떻게 처음 보는 아이디냐고!”
아쉽겠지만 놈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재빠른 몸놀림을 쓰고, 탱딜러들은 무시한 채로 뒤편의 마법사들에게 달라붙었다.
“어? 어?”
당연히 자신들을 공격할 줄 알았던 기사들은, 내가 본인들을 지나치고 마법사에게 붙자 크게 당황했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달라붙어 검과 도끼 등을 살벌하게 휘둘러댔다.
퍽! 퍽!
사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게임 속에서 같은 시스템을 적용받고 있는 일개 유저에 불과했다.
즉 다시 말해, 내가 마법사들을 공격하는 동안은 기사들의 공격 또한 어쩔 수 없이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난 10강화 유니크 갑옷과 레전더리 악세를 도배한 랭커급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8성 마나 쉴드로 ‘75%’라는 무시무시한 데미지 경감 효과를 적용받고 있었다.
[집중 회피!]
거기에 잠시동안 머리와 몸통을 제외한 신체에, ‘확정 회피’ 판정을 주는 스킬까지 사용했다.
그 때문에 마법사 한 명을 죽이며 흡수하는 마나의 양은, 탱커들에게 다굴 맞으며 감소하는 마나량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 죽는 거냐고!”
놈들로선 이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분명 도둑이 맞는데 수십 명의 일점사 공격을 버텨내고 있으니…….
아니 단순히 버티는 것을 넘어서, 펄펄 날아다니며 마법사들을 차곡차곡 죽여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주옥됐어! 피닉스 놈들이 정문으로 몰려오고 있어!”
“끝났다……. 길마님께 이번 일을 아무리 말씀드려도, 절대 믿지 못하실 거야. 여기서 직접 본 나도 거짓말 같은데…….”
결국 공격하기를 포기한 채, 혼잣말을 중얼대는 기사마저 생겨났다.
마침내 내가 네 번째 첨탑 위의 마법사를 전부 리타이어 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신네 길마가 당장은 못 믿어도, 곧 믿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태성과 저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주변의 탱딜러들을 뿌리치며 난간으로 달려가 첨탑에서 뛰어내렸다.
의뢰는 첨탑 위 마법사들의 전멸이었기에 나머지는 피닉스 길드의 몫이었다.
첨탑을 빙빙 돌며 날고 있던 훼라리.
나의 애룡이 내 낙하를 받아주고는, 곧바로 높이 솟구쳐 날아올랐다.
(나: 4개 첨탑 모두 전멸시켜 의뢰는 완수했습니다. 부디 공성에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히든캬드: 네, 확인했습니다. 지금 막 성문을 뚫고 내성 안으로 진입에 성공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신검이란... 정말 대단하군요...)
공성하는 걸 잠시 도와줄까 싶은 마음도 조금 들었지만, 내 공적을 애써 폄하하는 듯한 말투에 바로 마음을 접었다.
히든캬드는 이미 내게 신뢰를 잃은 사람.
아직도 고깝게 구는 그와, 굳이 전투를 함께하면서 리스크에 노출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로젠타스 성을 뒤로하고 외성 마을로 향했다.
“우와! 저 사람 좀 봐! 레드 드레이크를 타고 왔어!”
“뭐냐? 저거 실화냐? 유저가 어떻게 필드 보스를 타고 다니는데? 저 사람 도대체 누구야?”
“산드로? 듣도 보도 못한 아이디인데?”
마을은 한적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훼라리를 타고 착륙하는 내 모습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예상했지만 그래도 좀 민망하네. 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쭉 살게 되겠지?’
그들의 시선이 낯설고 따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하튼 나는 할 일이 바빴기에, 소환을 해제하고 곧바로 공간이동술사에게 다가갔다.
목적지는 칼젠 성.
내가 이번 공성전의 메인 목표로 삼은 성이었다.
그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것으로!
* * *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길드가 참전했구나…….’
태성이 가장 최근에 점령한 것으로 유명한 칼젠 성.
고레벨 지역에 위치한 성이라, 성을 지키는 초기 NPC들의 레벨이 상당히 높았다.
거기에 드나드는 유저들이 적은 탓에 세금의 메리트까지 떨어져, 뒤늦게야 점령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3달이나 지난 일.
그 사이 유저들의 레벨도 많이 올랐기에, 이곳을 노리는 길드들도 처음보다는 많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결국 내성문이 뚫렸다! 전부 밀고 들어가!”
“오예! 고고고!!”
아무리 중요도와 세금 메리트가 떨어진다 해도 성은 성.
로젠타스와는 달리 그래도 덤벼는 볼 만한 성이었기에, 지난 30분 동안 치열하게 공성 중인 메인 길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아틀란티스’.
길드 순위 2위를 자처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대형 길드도, 이번에 성을 하나 더 차지하고자 이곳 칼젠 성을 집중 공략 중이었다.
올림푸스, 피닉스, 아틀란티스, 고조선.
이 4개의 대형 길드가 태성 다음가는 4강(强)이었는데, 각기 전략적인 동맹을 맺어 라인을 형성한 관계였다.
올림푸스는 고조선, 피닉스는 아틀란티스.
바로 이 구조로 말이다.
‘지옥불 님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어.’
엊그제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난 우연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계획한 대로 첨탑 위 마법사 제거에 성공하신다면, 아마 저희는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오벨리스크 점령에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서둘러서 진행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 아무래도 성을 빨리 먹고 수성을 도와야 하니까요……?
-그건 아닙니다. 태성은 이번에 무조건 번스타인 성 탈환에 집중할 겁니다. 현재 세금이 가장 많이 걷히는 성이 그곳이니, 이미 국가가 된 태성이 절대 포기할 곳이 아니지요. 그렇기에 이번이 기회입니다. 상대적으로 수성 인원이 빠졌을 태성의 다른 성을 공략할 수 있는…….
거기까지만 대답하고 말을 아낀 지옥불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공성 판도를 예측하는 데 문제없었다.
태성은 번스타인 재탈환에 집중할 테니, 굳이 본인 성들의 수성을 돕고자 로젠타스 점령에 성공한 인원이 뒤늦은 지원을 갈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그 붕 뜬 인원이 갈 곳은 뻔했다.
바로 아틀란티스의 지원군.
히든캬드를 비롯한 200명의 피닉스 정예 길드원들은, 로젠타스를 점령하자마자 이곳 칼젠 성으로 합세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까지 숨어서, 태성의 전력을 조금씩 약화시키며 양 진영의 전력을 팽팽하게 맞춰주면 됐다.
* * *
“으악! 또 왔다!”
“저 산드로란 새끼,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간파로 보이질 않는 건데!”
오벨리스크 뒤편에 있는 주성 건물의 옥상.
이곳에는 궁수 부대 3개가 널찍이 떨어진 채 오벨리스크가 있는 광장을 엄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이곳에 도착한 후부터 20분 동안, 오직 이 궁수들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연속 베기!]
은신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목표했던 궁수에게 평캔과 함께 폭딜을 넣었다.
마법사와 맞먹는 종이 몸 궁수로선 버티기 힘든 데미지.
궁수는 단 3대 만에 잿빛으로 산화되며 죽어 버렸고, 나는 그 직후 약점 포착을 사용해서 옆에 있던 다른 궁수 3명도 차례로 죽여 버렸다.
[마나 쉴드가 633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524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
파파파파팍!
이미 같은 방법으로 몇 번이나 당했기에, 궁수 부대들로부터 즉각 화살이 쏟아져 나와 박혔다.
[그림자 밟기!]
하지만 의미 없는 일.
나는 곧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뒤, 멀찍이 지나가던 유저에게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서 도망쳤다.
‘크크. 당하는 입장에서는 이거 진짜 개빡치겠는데?’
이건 쫓는다고 잡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쫓다 진형이 무너지면 태성 입장에선 더 막심한 손해였다.
그러니 놈들은 내가 올 때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성 안에서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 혼자 야금야금 옥상에 있던 태성의 원딜러들을 1/3이나 죽여 버렸다.
물론 주성에서 부활한 궁수들이 옥상으로 복귀하려 했지만, 부활 후유증으로 느릿느릿한 그들을 몇 차례 죽였더니 지금은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
원래 진형이 갖춰진 후방의 원거리 딜러들을 잡는 건, 공성전에서 가장 까다로운 일 중 하나.
작다면 작은 일이지만, 크다고 생각하면 무시 못 할 큰 활약을 벌인 셈이었다.
그런 내 게릴라 공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지지부진하던 바리케이드 앞 공방도 어느새 아틀란티스 쪽으로 흐름이 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몇 분 전, 히든캬드를 비롯한 피닉스의 정예병 200명이 새롭게 참전해온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 곧 시작되겠구나!’
마침내 바리케이드 선봉이 무너지는 것을 본 나는, 더 이상의 암살은 그만두고 성벽 위로 올라가 전장을 훑어봤다.
남은 공성 시간은 어느덧 10여 분.
내성문이 뚫린 지 20분이나 지났기에, 태성의 지원군이 올 거라면 진작 왔을 터였다.
하지만 여태 잠잠하다는 건 태성도 번스타인 공략 때문에 뺄 인원이 없다는 뜻.
거기다 오벨리스크가 파괴되면, 그 즉시 해당 성의 공성은 끝이 나고 모든 유저는 성 밖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난입한다 해도,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모든 상황이 내가 예측한 방향대로 진행된 것을 확인한 지금.
남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아틀란티스가 아닌 바로 내가, 오늘 칼젠 성의 오벨리스크를 차지한다!’
남아있던 태성의 탱커진까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본 나는, 훼라리를 소환해 칼젠 성 상공으로 높이 솟구쳤다.
그러자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가운데 두고 2, 3천 명의 유저들이 전투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리야. 너도 오늘 제대로 눈도장 찍는다만…… 아무래도 오늘 공성전의 최대 핫이슈는 이게 되겠지?”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나 산드로의 정식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검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수없이 각오한 일!
나는 제자리에서 홰를 치던 훼라리의 머리를 지상으로 돌려 강하했다.
쉬익- 쉬익!
뺨을 스치는 세찬 바람 소리.
순식간에 지상에 거의 다다른 순간, 나는 훼라리에게 오벨리스크를 타겟으로 화염구와 날개 돌풍을 명령하고는 뛰어내렸다.
그리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루이투스 소환!”
콰앙!
오벨리스크를 두고 혈투를 벌이던 두 길드원들.
그 위로 백색의 악몽, 멸절(滅絕)의 빛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