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일인 성주 (4)
[광휘의 방패!]
[영광의 검!]
지상에 떨어지자마자 안티 매직 쉴드부터 둘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변에 있는 유저들에게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으악! 매그넘이다! 매그넘이 이 칼젠 성에 떴어!”
“이런 제길! 저 자식이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오벨리스크의 체력은 필드 보스만큼 많진 않았지만, 주변에 수성 길드원이 있으면 자신의 HP를 바쳐 체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오벨리스크에는 힐러들과 버퍼들이 붙고, 그 앞에 원딜러와 탱딜러 순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이 정석적인 수성 진형이었다.
하지만 그걸 달리 생각해보면, 오벨리스크 바로 앞에는 수성 측의 몸빵 캐릭이 없다는 뜻!
내가 쓴 광역 스킬 한 방에,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간당간당하게 피를 유지 중이던 태성 측 유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리고 그건 태성뿐만 아니라 아틀란티스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타이탄이 도대체 누구 편인 거야? 왜 우리도 쳐?”
‘미안하지만 혼자 왔단다!’
혼란에 혼란이 거듭된 상황.
하늘에서 요란하게 떨어진 타이탄을 못 봤을 리 없기에, 히든캬드로부터 바로 귓속말이 들어왔다.
(히든캬드: 아니, 여기서 님이 왜 나옵니까? 저희는 로젠타스 성의 공성만 도와달라고 했던 겁니다. 근데 갑자기 칼젠 성에서 타이탄을 소환하다니요?)
허나 내게는 대답해 줄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또한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는, 바로 다음 순간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었다.
일단 난 다짜고짜 오벨리스크부터 치지 않고, 먼저 태성의 힐러들을 잡는 것을 최우선순위로 삼았다.
[심판의 전진!]
딱 20미터 정도만 이동한 짧은 심판의 전진.
하지만 이렇게 적들이 뭉쳐있는 곳을 향해 사용하니, 광역 넉백기나 다름없었다.
이 한 방으로 무려 30명이 넘는 태성 측 힐러와 버퍼들이 나자빠진 것이다.
난 그들을 향해 널찍하게 검을 휘둘러, 평타 한 방으로 네다섯 명이 적중 판정을 받는 멀티 히트 공격을 꾸준히 먹였다.
“아아악! 매그넘 이 개자식!”
여기저기서 산화되는 태성 측 유저들로 인해 잿빛 가루가 우수수 흩날렸다.
그 사이 다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어느덧 내게 화살과 마법 등의 원거리 공격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펑! 퍼퍼펑!
[광휘의 방패가 83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광휘의 방패가 1,005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광휘의 방패에 막혀 마법 데미지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화살 등으로 인해 HP가 슬금슬금 깎여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작 수를 줄여놔서 확실히 활 데미지는 무시할 만해. 힐러와 버퍼도 이 정도 잡았으면 됐다!’
애초에 수성 측이 오벨리스크의 체력을 회복시켜주지 못할 정도만 잡는 게 목적이었다.
나는 루이투스의 몸을 돌려 오벨리스크 쪽으로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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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줄어드는 오벨리스크의 체력 바.
한데 태성 측으로부터 원거리 공격이 날아오는데도, 아틀란티스 진영에서는 아직도 원거리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나름 의도했던 노림수가 먹혀든 모양이었다.
“뭐여? 매그넘이 우리 편이었던 거여?”
“피닉스 마크 달고 태성만 조졌잖아? 근데 우리가 치는 게 맞아?”
‘멸절의 빛 루이투스’란 이름 위에 떠 있는 피닉스의 길드 마크.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 마크를 달고 있는 이상, 아틀란티스에 혼동을 줄지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맞아 들었다.
덕분에 잠깐이지만, 나는 태성 측의 공격만 받으며 다소 수월하게 오벨리스크를 공격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원래 건물 체력이 높지 않은 오벨리스크라 그런지, 작정하고 공격에만 몰두하니 체력바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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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 저놈 저러다가 최다 공훈자가 되는 거 아닙니까?”
“설마……? 엿 됐다! 매그넘 저 자식, 지원군이 아니라 성을 먹자하러 온 거구나!”
“고, 공격! 빨리 오벨리스크에 달라붙어!!”
아무리 힘들게 내성문을 뚫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들, 성은 결국 오벨리스크에 가장 많은 데미지를 입힌 길드가 먹는 구조.
수천 명이 참여했더라도 결국 오벨리스크에 가장 많은 딜을 넣은 사람이 나라면, 결국 시스템은 성의 주인으로 나를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이론상으로야 가능하지만…… 아직까지 성이 먹자당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지. 그러니 바로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거야!’
뒤늦게 내 속셈을 깨달은 아틀란티스 측 인원들이 서둘러 오벨리스크를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조금 전 태성 길드원들이 삭제되듯 죽어 나간 사실은 까맣게 잊어먹은 모양이었다.
전방 10미터의 모든 대상에게 공격력의 350% 피해를 주는 밸붕급 광역 스킬.
심지어 쿨타임이 15초인지라 남발이 가능한 스킬을, 나는 한 번만 사용하고 잠시 아끼고 있었다.
이렇게 오벨리스크에 붙는 유저들에게 선사해주기 위해!
[영광의 검!]
쾅!
무방비로 광역 스킬을 맞은 수십 명의 아틸란티스 탱딜러를 상대로, 잠시 오벨리스크 공격을 멈추고 검을 풍차 돌리듯 휘둘렀다.
쉬쉬, 쉬쉬쉭!
그러자 탱커를 제외한 절반이 넘는 유저가 그대로 잿빛으로 산화해 버렸다.
대다수가 근접 딜러, 즉 만피와 방어력이 낮은 캐릭들이었다.
나는 살아남은 탱커들은 내버려 두고, 다시 뒤돌아 오벨리스크를 공격했다.
탱커는 곧바로 힐을 받아 체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들을 스킬 없이 평타만으로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어차피 탱커 따위는 붙어서 오벨리스크를 친다 해도 큰 데미지를 입히지는 못할 터.
무시하고 오벨리스크에 최대한 딜을 먹이는 게 상책이었다.
“미쳤다……. 저걸 도대체 무슨 수로 저지해?”
“우리도 타이탄은 무시하고 오벨리스크를 일점사한다! 모든 화력은 오벨리스크를 치는 데 쏟아부어!!”
아틀란티스의 간부진으로 추측되는 자의 외침이 들리고부터는, 나를 공격하던 원거리 공격들이 방향을 바꿔 오벨리스크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림없지!’
하지만 나는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타이탄을 움직여, 등으로 대신 맞아 소멸시켰다.
그 와중에도 오벨리스크를 향해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것 또한 논타겟팅 게임이기에 가능한 임기응변.
순식간에 광휘의 방패의 쉴드가 줄어들더니 결국 깨져버려 데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쿨타임이 돌아온 광휘의 방패를 다시 한번 둘렀다.
그러는 한편, 공중을 선회하고 있던 훼라리를 급히 불렀다.
목표는 후방 50미터쯤.
어느새 진형을 갖춘 채 집중사격 중인 아틀란티스의 궁수 부대였다.
키에엑- 휭!
훼라리는 내 명령대로 그쪽을 향해 화염구 브레스를 쏘아내고, 지상에 다가가 날개 돌풍을 사용했다.
테이밍 마스터 업적 덕분에 훼라리의 스킬 쿨타임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 너무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으악! 이건 또 뭐야!”
날개 돌풍 덕에 수십 명이 넉백당한 사이.
훼라리가 평타 공격을 먹이자 궁수 한 명이 금세 사망했다.
펫이 되면서 스펙이 절반 이상 줄어들었지만, 역시나 필드 보스 몹 출신다웠다.
일반적인 테이밍 몹들의 공격력보다 족히 네다섯 배는 강력했기에, 제자리에서 훼라리의 집중 공격을 감당하기에는 궁수의 체력으로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 뭔 놈의 펫이 최상급 정령보다 더 아파!”
“매그넘 이 새끼. 그동안 잠수탔던 이유가 있었구나! 이런 걸 꼬시느라!”
“말이 돼? 애초에 도둑이 테이밍은 왜 배운 건데!”
뜬금없는 레드 드레이크의 난입으로 궁수 부대의 진형은 잠시 흐트러졌고, 집중 포화도 한차례 느슨해졌다.
아무리 타이탄이라 해도 HP는 한정적이고, 무엇보다 회복할 수단이 없으니 무적은 아니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데미지가 누적되는 것을 최소화해, 소환 시간보다 먼저 역소환되는 걸 방지해야만 했다.
나는 오벨리스크를 향한 공격을 블로킹하는 한편, 최대한 HP 관리에도 힘쓰며 오벨리스크의 체력을 줄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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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다행히도 타이탄의 HP가 줄어드는 속도보다 오벨리스크가 파괴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다른 길드들의 참전 때문이었다.
이번 칼젠 공성전에 참여한 메인 길드는 아틀란티스였지만, 당연하게도 그들만 공성을 선포한 건 아니었다.
요행을 노린 자잘한 군소(群小) 길드들도 제법 참전한 모양.
한데 그런 길드의 유저들이 어느새 자리를 잡고는, 상당히 많은 원거리 공격을 오벨리스크를 향해 날려댔다.
그리고 난, 그런 길드 마크를 단 유저들의 공격은 일부러 블로킹하지 않았다.
어차피 최다 공훈 길드는 아틀란티스가 아니면 나, 둘 중 하나!
그들의 분산된 공격은 오히려 오벨리스크를 파괴를 가속해, 내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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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이대로는 성을 뺏긴다! 죽든 살든 오벨리스크에 달라붙어! 오벨리스크 체력부터 채워!”
“스킬들을 더는 아끼지 말고 몽땅 쏟아부어! 이대로 칼젠 성은 우리 아틀란티스가 가져간다!!”
양 진영에서 쏟아지는 고함들.
그리고 그 두 진영 가운데에서 묵묵히 검을 휘두르는 타이탄 한 기.
이 난장판 속에서 빠른 속도로 체력이 떨어져 가던 거대한 오벨리스크는,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타이탄을 소환한 지 2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만이었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유저들과 소환수, 심지어 날아오던 화살과 마법까지 전부!
거짓말처럼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피피피핑!
내성 안 광장에 타이탄을 탄 나와 훼라리만 남겨둔 채, 모든 유저들이 순식간에 추방당한 것이었다.
[칼젠 성의 오벨리스크가 점령당해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내집마련’ 길드가 칼젠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칼젠 성의 공성전이 종료되어 모든 유저는 내성 안에서 추방됩니다.]
[칼젠 성의 점령 길드원이기에 추방당하지 않습니다.]
[업적 ‘노블 패밀리’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지역의 패자’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오벨리스크 파괴자’를 획득했습니다.]
[칼젠 성 점령에 성공하여 길드 업적치 300,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동시에 시스템 창에 도배되듯이 후다닥 올라오는 로그 기록들.
그중 ‘내집마련’이라는 내 길드 명이 들어간 로그 기록은, 무려 전체 알림창으로 따로 떠올랐다.
“머, 먹었다……. 내가 진짜 먹어버렸다고!!”
겁도 없이 신검을 찬 채 적들 사이로 난입하는 계획.
그래서 나름의 확신을 가진 채 도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막상 실제로 성공하고 나니 얼떨떨했다.
도둑 주제에…….
일인 길드 주제에…….
무려 한 개 성의 주인이 됐다니?
전무후무(前無後無).
문자 그대로 이제까지 없었던 최초이자,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두 번 다시는 나오기 힘들 사건을 저질러 버렸다.
단어조차 낯선, ‘일인 성주’라는 거대한 위업을!
(축복받은얼굴: 우와 정말 먹고야 말았네ㄷㄷㄷ 득템으로도 모자라서 득성까지 해버리다니.... 진짜 넌 역대급이다 자식아ㅋㅋㅋ)
(라스트챤스: 형님! 지금 전체 알림창 이거 뭐에요? 설마 혼자서 성을 먹었어요? 와, 이 횽님 미춌네 증말!)
(히든캬드: 당신 도대체 뭡니까? 이렇게 저희를 배신하려고 용병으로 참여했던 겁니까!)
다른 귓속말들은 나중에 대답해 줄 수 있었지만 히든캬드의 귓속말만큼은 계속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닉스의 부길마였으니 말이다.
(나: 배신이라고요? 제가 언제, 님처럼 누군가를 배신했습니까? 전 당당히 공성에 참전해서 성을 먹은 것뿐인데요?)
(히든캬드: 분명히 이번 공성에서 저희를 도와주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따라 골드도 이미 지급해 드렸고요!)
(나: 뭔가 착각하시는 거 아니세요? 제가 의뢰를 받았던 것은 로젠타스 성이지, 칼젠 성이 아닙니다. 저는 용병 제의와는 별개로, 애초부터 이번 공성전 타임 때 칼젠 성 점령에 도전해볼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히든캬드: 혼자면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그리고 길드 마크도 저희 피닉스와 맞춰 놓고서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나: 잊으셨어요? 그거야 당신들이 맞춰달라고 먼저 요청했잖아요? 아무튼, 백번 양보해 드려서 피닉스가 이 칼젠 성을 먹으려 했으면 도의적으로 도와 드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 알다시피 그건 아니었잖아요?)
(히든캬드: 칼젠 공성에 메인으로 참여한 아틀란티스가 저희 동맹이라는 걸 설마 모른다는 겁니까?)
(나: 당연히 알죠. 그런데 그건 댁네 사정이고, 아틀란티스는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길드인데요? 아무튼 바빠서 답장은 그만하겠습니다. 지금 확인해봐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신검은 먹어 봤지만, 성은 처음 먹어 봐서요^^)
제 놈이 먼저 내 뒤통수를 쳤으면서, 무슨 이 정도에 발끈한단 말인가?
지옥불이라면 모를까, 내가 이놈에게 아쉬운 소릴 할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 이제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
방금까지 치열한 공방이 오가며 온갖 효과음과 고함이 울리던 격전의 한 복판.
하지만 지금 이 내성 안 광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했다.
난 이 고요함을 잠시 즐기다 발걸음을 옮겼다.
28년 인생 처음으로 장만하게 된 나만의 집.
칼젠 성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