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던전 스틸 (1)
-산드로가 태성 애들 완전 조졌다는 거 진짜야?
바빴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올타의 게시 글들을 뒤지다가, 나에 관한 발제 글을 하나 열어 보았다.
-진짠가 보던데? 오늘 필드에서 태성 애들 PK 당하는 걸 본 애들이 몇 명 있었나 봐. 산드로가 정말로 말한대로 태성만 조졌다던데 ㅋㅋㅋ
└ 아니, 그거야 나도 아는데 그거 말고... 한 백 명? 그 정도를 혼자서 조졌다는 얘기가 있던데?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쫌ㅋㅋ 암만 산드로라고 해도 태성을 상대로 100:1을 잡았다고? 타연 하루 이틀 하냐? 타연이 그런 게 가능한 겜이야?ㅉㅉ
└└└ 그런 겜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런 겜이었습니다. 아직 소식이 느리시네요. 오늘 번스타인 성도 불났대요, 산드로가 혼자 성까지 난입해서 뒤집어 놓은 듯
└└└└ 벤토 숲에서도 백 대 일로 혼자 잡은 게 맞대요! 제 친구 길드원이 숲에서 사냥하다 우연히 봤다네요! 근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진짜 지리는 듯ㄷㄷㄷ
태성 길드원들은 워낙에 입이 무거워서 첫 필드전 결과가 알려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오늘 벌인 일은 이미 올타에 급속도로 퍼진 상태였다.
‘하긴 타연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몇 명인데, 한 번에 백 명 단위를 죽인 소식까지 통제가 되겠어? 어제 내가 경고문을 올려둬서 게임 기자들도 예의주시했을 텐데 말이야.’
게임 출시 후, 하루 동안 혼자서 나보다 더 PK를 많이 했던 유저가 타연에 있었을까?
기억하건대 ‘살신’이라고 불리는 ‘머독’도, 나만큼은 죽인 적이 없었다.
원래 PK를 많이 하기가 힘든 구조인 것이, PK를 꽤 많이 하게 되면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머더러 사냥꾼들이 붙기 마련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워낙 신출귀몰하게 여기저기를 이동하며 태성만 잡아, 거의 붙지 않았던 거였지만 말이다.
아마 태성의 독식 사냥터가 아닌 일반 필드 한 군데에서 PK를 오래 했다면, 신검을 먹기 위해 분명 온갖 유저들이 죄다 몰려들었을 것이다.
“아! 사냥꾼들이 붙긴 붙었었구나! 그게 태성 10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였지, 크크.”
거물 취급만 받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정말로 거물이 된 게 실감 났다.
하루라도 내 이야기가 올타 게시판에 도배되지 않은 날이 없었고, 게임 기자들은 내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타연 내에서 가장 핫한 스타.
그게 바로 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끄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의 나는, 정말 내가 원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유명인의 삶이라…….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쁜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관종 짓이라고 일컫는 행동을 할 때는, 사실 나도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공성전에 참여할 때마다.
타이탄에 탈 때마다.
그리고 오늘 대규모 필드전에서 혼자 적들 사이에 뛰쳐 들던 순간마다…….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아드레날린은 급격히 쏟아져 나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미건조했던 현실에서는 평생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살아 있다’는 느낌을, 이 가상현실 게임 안에서는 벌써 몇 번이나 느낄 수 있었다.
‘신검을 주운 그 날부터 말이지!’
28년을 살아오는 동안…….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것이, 그리고 목표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간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꼭 다리우스를 잡아내고 태성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내가 게임에 재능이 있어도 정진하지 못하게 됐던 계기.
그 어린 날의 트라우마와 이곳 타연에서 악연으로 다시 만나게 됐다.
그러니 내 손으로 직접 이 악연을 정리해야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매너 있고 좋은 길드였다면 이럴 마음을 먹지도 못했을 텐데……. 너희가 나쁜 놈들이라서 참 고맙다. 내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너희를 조질 마음을 갖도록 해줘서!’
태성!
오늘 시작한 내 필드전은, 나는 너희 티에스 국이 이 타연에서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유난히도 길었던 하루를 마감했다.
* * *
“산드로 니임! 정말 그거 정말 거래소에 다 올리실 꼬예요? 제가 자알 팔아 드린다니까요오?”
“뭐 이런 유니크 템 파는 것까지도 직접 하시려고 그러세요? 이런 건 제가 거래소 경매로 알아서 정리할 테니깐 말씀드린 레전더리 매물 좀 구해주세요. 괜찮은 거 나온 거 없었어요?”
어제 필드전을 벌이며 내가 죽인 태성의 유저의 수는, 어림잡아 300명이 넘어갔다.
300레벨이 넘어가는, 그것도 돈 많은 태성의 길드원들답게 드랍한 템도 수준이 높았다.
유니크 템 4개와 고강화 레어 템 11개.
총 이만큼을 득템했는데, 그걸 핑크래빗이 알아채서는 이렇게 자신이 중개 매매 하겠다고 내게 매달렸다.
사실 PK로 이만큼이나 많은 아이템을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죽을 때마다 장비를 이렇게나 잘 떨군다면, 타연은 접는 유저들로 넘쳐나서 진작에 망했을 테니 말이다.
이런 결과는 내가 죽인 유저들이 전부 다 태성 길드원이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태성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무자비한 척살 시스템인 만큼, 어제 잡아 죽인 태성의 유저들 중에는 머더러가 상당히 많았다.
만약 머더러가 없거나 적었다면, 이렇게 많은 득템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어느 누구도 태성과 이렇게 전면전으로 싸울 생각을 못 해서 그랬지…… 태성 길드원들은 한마디로 ‘노다지’였다.
“저번에 나왔던 레인젤 몇 피스 말고는 없네요. 워낙 마력 관련 레전더리 장비는 매물이 드물어서요. 잘만 하면 대박 하나가 나올 것 같기는 하지만요…….”
“대박 템이요?”
“네. 멀린 아시죠? 예전 다리우스 뒤통수치고 고조선으로 넘어간 첩자 놈이요.”
“네. 제가 그놈을 모를 리가 없죠. 흐흐. 근데 걔가 왜요?”
“예전부터 멀린이 특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혹시 아셨나요? 스킬 쿨타임을 줄여주는 종류로 의심되는……. 어쨌든 그게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멀린이 그걸 팔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아마 특별한 퀘스트로 얻는 템 같은데, 한 개 더 얻었다는 얘기가 돌았거든요.”
아직도 멀린이 신검을 놓치고 벙쪄 있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났다.
오랜만에 들은 이름에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멀린이 수상한 능력을 보였던 것이 생각났다.
다리우스에게 이동 디버프 스킬을 걸 때, 높은 마법 방어력 덕에 연달아 실패가 떴음에도 불구하고 연속 시전으로 결국 속박에 성공했던 것이…….
“오, 정말요? 근데 이상하네요. 그런 게 있다면 시중에 풀릴 템이 아닌데요?”
“멀린이 지금 고조선 소속이긴 한데, 워낙에 돈을 밝히는 유저로 유명해요. 원래도 태성에 돈 때문에 스카우트됐다가, 나중에 배신한 이유도 돈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깐요. 프로게이머 시절부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에 환장한 놈으로 유명했대요!”
태성도 돈을 많이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준다고 했길래 배신을 했을까?
그것도 후환이 어마무시할 그 다리우스를 상대로?
내 생각에 돈 때문이 맞긴 하겠지만, 아마도 디바인급 템이 나오면 먹고 튈 생각으로 배신했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진실이 뭐가 됐든, 인제 와서는 나와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와! 그럼 만약 정말 매물로 풀리게 된다면 장난 아니겠네요?”
“역대급 경매가 펼쳐지지 않을까 싶어요. 앗! 만약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별로 없겠네요. 이런…….”
“이런 소식을 알려주시는 분은 핑크래빗 님 밖에 없어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멀린이 정말로 매물을 내놓는다면, 저한테 바로 알려주세요! 뽀찌는 꼭 챙겨드릴게요!”
“네네! 역시 산드로 님은 돈 쓸 줄 아신다니까요!”
예전 내 짠돌이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어쩐지 더 무섭다.
어쨌든 쿨타임을 줄여주는 템이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든 무조건 사야만 했다.
만약 적들 사이를 쿨타임 없이 그림자 밟기로 이동하는 게 가능해진다면……?
‘그거야말로 레알 홍길동 아니냐? 그럼 태성의 홍길동은 나한테 아이디 반납해야겠네? 크크.’
핑크래빗에게서 좋은 정보를 얻었다.
무조건 얻어야 하는 템을 컬렉션 목록에 하나 더 추가한 나는, 곧바로 가트웰 산맥 지역으로 이동했다.
어제는 PK를 실컷 했으니 오늘은 카이저의 충고대로 레벨업에 몰두할 생각이었다.
‘매일같이 필드에 PK를 나서는 게 아니라, 예측 못 할 타이밍에 한 번씩 PK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거야. 그렇게 한 달만 지나게 나면, 태성의 길드 마크 달고 필드에 솔플 사냥하러 나올 생각은 절대로 못 하게 될걸?’
이렇게 야금야금, 태성은 고작 나 한 명에게 휘둘리며 조금씩 성장 동력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에는, 태성이라는 거대한 성도 와르르 무너질 날이 도래하게 되리라.
휘이이잉.
훼라리를 타고 이동했더니 금세 ‘와이번 둥지’가 있는 봉우리에 도착했다.
확실히 훼라리를 테이밍한 이후부터는, 사냥터에 도착하여 사냥을 시작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단축됐다.
가뜩이나 사냥 효율이 높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최고의 펫이나 다름없었다.
근래 들어 내가 주로 사냥하는 몹은 와이번이었다.
400레벨에 달하는 높은 레벨, 그리고 이 와이번 둥지는 꽤나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탓에 일반 유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몹들이 주는 드랍 템은 보스 몹 빼고는 전혀 관심도 없던지라, 오직 레벨업을 위한 장소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 덕분에 초반에는 이곳에서 2번이나 몰이 사냥용으로 타이탄을 소환해서 폭업을 하기도 했다.
‘몹 몰이를 하면 타이탄의 피가 너무 닳아서, 소환 쿨이 너무 길어진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기는 해.’
언제 어느 곳에서 타이탄을 써먹을 일이 생길지 몰라, 처음 구상했던 것보다 타이탄으로 사냥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할 때마다 300레벨대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먹곤 했다.
물론 이제는 335레벨인지라 칼이 그나마 박혀, 타이탄 없이도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었다.
늘 그래 왔듯이 남들은 동렙을 사냥할 때, 나는 이렇게 60, 70레벨 높은 몹들을 솔플 사냥을 하며 레벨업을 해왔으니 말이다.
[마나 쉴드가 3,155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쉭, 쉭, 쉭!
3미터에 달하는 중대형 몬스터인 와이번도, 신검을 든 내 평타 공격에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와이번의 공격력은 꽤나 높았지만, 이곳은 파티 몹 없이 각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사냥하는 게 아주 쾌적했다.
여기서는 공격 스킬들은 봉인한 채 버프 위주의 평타 공격으로만 사냥했다.
아무래도 즉발 스킬은 사용할 때마다 MP가 줄어드니, PK처럼 폭딜을 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평타 위주로 딜을 해서 휴식시간 없이 사냥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만약 멀린처럼 쿨타임 없이 스킬을 쓸 수 있어서 재빠른 몸놀림만 계속해서 쓸 수만 있다면?’
아, 그렇다면 정말 레벨업 계의 혁명이 일어나는 일일 텐데!
기계적으로 와이번을 썰어 재끼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온통 멀린의 아이템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둥지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와이번을 사냥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연우님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연우: 산드로 님 바쁘세요?)
(나: 아니요. 그러고 보니 어제 감사했다고 말씀도 못 드렸네요.)
(연우: 어차피 잘 빠져나가셨을 텐데요 뭘. 그나저나 의논드릴 게 있어서 귓말드렸어요.)
(나: 네, 말씀하세요.)
(연우: 제가 요즘 돈키호테 님과 함께 있을 일이 종종 있거든요. 어제도 산드로 님 때문에 모인 거긴 해도 만났고요. 그런데 조금 전에 중요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요.)
(나: 중요한 얘기라고요?)
얼마 전 지옥불로부터 연우님이 왜 캐릭을 새로 키우면서까지 태성의 산하 길드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나로선 무슨 그런 일로 그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막상 태성에 아는 스파이 한 명이 있으니 내게는 더없이 좋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연우님이, 뭔가 어마어마한 것을 물어 온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우: 태성의 랭커진이 이번에 새로운 던전을 하나 오픈했는데 클리어에는 실패했나 봐요. 그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인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걸 얼핏 들어서요.)
(나: 이상한 소리요?)
(연우: 네.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 던전의 보스 몹이 타이탄이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이거 뭔가 수상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