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던전 스틸 (2)
수상하다 뿐일까?
나는 처음으로 채팅 글을 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나: 99퍼, 아니 이건 100퍼센트네요! 와, 카이저님이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연우: 네? 누구요? 산드로님, 카이저님과 아시는 사이 셨어요?)
(나: 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잠시 얘기를 나누게 됐어요. 제게 퀘스트나 던전으로 타이탄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곧 타연에 등장할 거라고 그러더라고요.)
타이탄의 외형은 누가 봐도 한눈에 타이탄인 줄 알아볼 수 있었다.
비록 2대밖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강철 기사와도 같은 모습을 비슷한 크기의 아이언 골렘과 착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 어디에도 타이탄이 보스 몹으로 등장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새로 발견했다는 그 던전은 타이탄을 획득할 수 있는 ‘최초’의 던전임이 분명했다.
‘일루전이 생각이 있다면, 던전을 클리어할 때마다 타이탄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타이탄은 당연히 던전의 퍼스트 클리어 팀이 가져가는 건가?’
항상 완성도에 있어서 철저했던 일루전의 행보를 고려해 볼 때, 이렇게 추측하는 편이 타당했다.
이미 몇몇 아이템은 그런 전례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나: 이런 귀중한 정보를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쩌다 보니 연우님께 신세만 지고 있네요.)
(연우: 앗! 산드로 님! 그런데 이거 공짜 정보 아니에요!)
(나: 네?)
(연우: 제가 지옥불 오빠보다 산드로님께 먼저 말씀드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하긴 그동안 라스트챤스와 함께 3인 동맹이랍시고 맺고는,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받아먹기만 한 게 많았다.
특히나 연우님에게는 더욱!
(나: 아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제 마음이 더 편하네요ㅎㅎ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세요?)
(연우: 사실 여기 랭커진도 클리어에 실패했다고 하니 공략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망 페널티가 없는 인던인데도 말이죠. 제 생각에 여긴 신검을 든 산드로님이나 마신검을 갖게 된 다리우스가 낀 파티만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런 까다로운 조건이라 산드로님께 먼저 말씀드린 것이기도 하고요.)
(나: 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게 저도 편하답니다.)
(연우: 혹시 이번 정보로 타이탄을 한 대 더 얻게 되신다면, 나중에 제가 타이탄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꼭 타이탄 라이더가 돼보고 싶거든요.)
여자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방패 기사 테크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타이탄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공짜로 얻는 게 아닌 만큼 조금은 무리한 부탁이었지만, 나중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등장 초반인 지금, 우리가 얻는 것보다는 태성이 타이탄을 갖지 못하게 하는 측면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 값진 정보이기도 했다.
(나: 연우님 덕분에 신검도 먹었었는데 그 정도 부탁이야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죠. 다만 단기간에는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으세요?)
(연우: 지금 타이탄이 몇 대나 풀린 줄 뻔히 아는 데, 저도 급하게 부탁드릴 생각은 없어요. 다만 언제가 됐든 꼭 한 대 갖고 싶네요. 제 로망 중의 하나거든요.)
(나: 네.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데 제가 그 로망은 꼭 이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극비인 거 같은데 이런 정보가 새어나가도 괜찮으시겠어요? 혹시나 연우님의 정체가 의심받으실 수도 있는 건 아니죠?)
얼마 전 섣부르게 다리우스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 지옥불이 큰 피해를 봤던 것은, 내게 많은 반성을 하게끔 만든 사건이었다.
신검을 먹은 후부터, 난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생각에 오직 ‘내 안위’만을 염두에 두고 플레이를 해왔다.
그래서 함정을 파면서도 무의식중에 나만큼은 절대 안전하다는 생각에, 다른 조력자들의 안전에는 방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닌 딸린 식구가 있는 한 길드의 마스터가 되었다.
그리고 연우님은 말로만이 아닌, 정말 내 은인 중의 은인인 사람이었다.
또다시 내 섣부른 행동으로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기에, 이번 일은 무엇보다 연우님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연우: 괜찮아요. 제가 그 얘기를 들은 줄도 모를 거예요. 그리고 애초에 새로 발견했다는 던전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길드원도 거의 없어요. 그러니 절 의심할 일은 없을 거예요.)
(나: 아! 그러고 보니 던전의 위치를 어떻게 알죠?)
(연우 : 제가 던전의 위치는 몰라도 던전 클리어에 도전할 랭커들의 위치는 알 수 있어요. 지금 슈타트 성안 제 바로 앞에 있거든요 ㅋㅋ 제가 얘네들 동선을 알려드릴 테니 은신으로 쫓아다녀 보세요. 안 그래도 요즘 PK 한다고 뒤치기 많이 다니셨잖아요?)
(나: 아하! 연우님은 귓말 주시기 전에 전부 계획이 있으셨구나! 그러면 연우님이 의심받을 일이 없겠네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연우: 헤헤, 감사합니다. 산드로님께는 처음으로 칭찬받아 보네요. 어쨌든 다리우스가 합류하면 금세 깰 수도 있으니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그런데 던전 공략하는데 솔플은 불가능할 텐데, 인던에 같이 들어가실 분들은 계시죠?)
(나: 그럼요. 타연 최고의 유저들이 항시 대기 중입니다.)
* * *
[산드로: 비상입니다. 다들 지금 바쁜 일 없으시죠?]
[축복받은파볼: 드로야, 무슨 일인데 그래?]
[산드로: 태성이 공략 중인 던전의 퍼스트 클리어를 스틸 할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한바탕 싸우고 인던에도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모두들 참가 가능하시죠?]
[축복받은얼굴: 오 레알? 닥치고 렙업만 하느라 지겨웠는데 드디어 싸우는 겨? 굿굿!]
[축복받은무빙: 태성과 싸우는 일이라는데 빠질 순 없지! 난 된다!]
[라스트챤스: 저도 됩니다~]
[산드로: 아뇨아뇨, 싸우는 건 저 혼자 할 겁니다. 제가 정리하면 그 사이에 인던 들어가서 최초 보상 스틸하려는 게 오늘 목적이에요. 그러니 모두들 인던 공략할 세팅 단단히 하고 계세요. 일단 지금 파티 초대 드릴 테니, 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들 거리를 두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축복받은얼굴: 아 뭐야~ 맨날 잼있는 건 지 혼자만 하네!]
길드 채팅창을 보니 다행히 전원 다 합류가 가능한 듯싶었다.
이런 의도로 만든 길드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말 한마디에 금세 뭉칠 수 있는 동료가 내게도 있다고 생각하니 참 든든하단 생각이 들었다.
‘혼자였다면 고렙 인던의 퍼스트 클리어는 꿈에도 못 꿨을 텐데…….’
PK라면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인던이란 곳은, 몇몇 특수한 곳을 제외하고는 솔플로 깨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태성의 랭커진도 클리어에 실패한, 현존하는 최고 난이도의 인던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연우: 제대로 발견하셨죠?)
(나: 네. 필드로 나오는 거 확인한 다음부터, 계속해서 쫓고 있습니다.)
연우님의 제보로 인해 내가 찾은 태성의 유저는, 다름 아닌 일도양단과 그의 패밀리였다.
아무래도 기사 랭커이자 다리우스의 사촌인 만큼, 가진 능력에 비해 중책을 자주 맡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불쌍한 일도양단……. 오늘도 나 때문에 니네 형한테 오지게 깨지겠구나.’
아무것도 모른 채 소환 말을 타고 데스라 사막을 횡단 중인 일도양단.
아마도 입장 제한이 6명인 인던인 듯, 그 옆에는 모두 5명의 유저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놈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끔 재빠른 몸놀림을 써 가며 몰래 쫓아가는 중이었다.
내 이속이 빠르다고는 해도, 아무래도 은신을 쓴 채로 소환 말을 따라가기엔 조금 벅차 이렇게 거리를 두고 쫓아가고 있었다.
녀석들도 필드에서 꼬이는 몹을 무시하면서 달리고는 있지만, 간혹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만 하는 몹들은 몇 마리 잡으면서 가야 했기에 따라잡을 만했다.
그렇게 사막을 횡단한 지 20여 분.
드디어 놈들이 멈춰 서며 소환 말을 해제했다.
도착한 곳은 데스라 사막 서부 지역에 흔하게 존재하는 폐(廢) 유적지 중 하나.
그 안의 여러 무너진 건물들을 지나치고 한 제단에 다가간 그들 앞에는, 녀석들이 활성화한 것으로 보이는 인던용 포탈 하나가 파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구나!’
저 닫혀 있던 포탈을 활성화하기 위해, 놈들은 얼마나 애를 쓰며 퀘스트를 진행해 왔을까?
그 고생에 대한 보상으로, 퍼스트 클리어의 보상은 원래 저놈들의 것이었을 터였다.
[산드로: 던전 발견했습니다. 이제 5분 안에 제가 있는 위치로 도착해 주세요. 위치 정보 링크 겁니다. 산드로(!)]
하지만 내 레이더에 걸린 이상, 오늘의 그 행운은 안타깝게도 녀석들이 아닌 우리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진짜 깰 수 있겠지?”
“이번에도 안 되면 군주님을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요즘 마신검 들게 되신 후부터는 이런 먼 필드까지는 일체 나오려 하지 않으셔서 가능할진 모르겠지만요.”
목적지에 도착한 일도양단을 비롯한 태성의 힐러와 마법사, 전사와 궁수로 포함된 파티는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포탈 앞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마 당분간은 떨어진 레벨 복구하시느라 바쁘실 거야. 거기다 이 던전의 보상이 정말로 ‘그것’이 확실하다면 형님한테는 필요 없기도 하니까.”
“요컨대 군주님은 저희가 클리어하실 거라 믿고 계시다는 말씀이신 거죠? 하긴 몇 번 실패하니깐 이젠 감이 오는 거 같아요. 그리고 솔직히 타연에서 저희가 아니라면 현재 누가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항상 거의 웬만한 던전과 보스 몹들의 퍼스트 클리어와 킬은 태성의 최상위 길드원들이 가져갔었으니 말이다.
너희는 여전히 건방진 소리만 하는구나?
그래도 이렇게 대꾸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순간을 위해 꾹 참고 기다렸다.
“자, 잡담은 오면서 많이 했으니 어서 들어가 보자. 보스 잡을 때 동선 체크했던 거 이번엔 절대 실수 없도록 집중하고! 알겠지?”
“넵!”
“그래. 오늘 드디어 나도 타이탄 라이더가 되는구나! 자, 나부터 들어간다.”
파티원들을 리마인드 시키며 포탈에 앞장서 들어가는 일도양단.
그가 포탈을 통과함과 동시에, 난 은신을 풀며 자버프를 걸고 유일한 힐러인 ‘힐보따리’부터 공격했다.
[은밀한 일격!]
“엇! 뭐야!”
포탈에 다가가던 힐보따리의 뒤통수로 공격 스킬이 제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힐러 랭커답게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돌아 후방을 방어하며, 뒷걸음질 치며 무빙 셀프 힐을 시전했다.
“산드로야! 놈이 뒤치기 왔다!”
“쉴드! 슬립!”
재빠르게 옆에 있던 마법사인 홍당무가 힐보따리에게 쉴드를 걸어주고, 내게 CC(crowd control)기 스킬을 시전해 왔다.
하지만 항상 그러해 왔듯 마법은 저항이 떠버렸다.
“오! 제법인데? 그동안 나에 대해서 연구 좀 했나 봐?”
마나 쉴드는 물리적인 상태 이상 상태에만 면역이었지, 마법적인 상태 이상에는 저항하지 못한다.
따라서 원래라면 슬립 같은 메즈(mesmerize)기를 걸고, 그동안 딜러들이 둘러싼 후 필살의 스킬을 동시에 퍼붓는 식으로 잡아내려는 시도는 훌륭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내가 올 마력 스탯으로 찍은 이유에는, 처음부터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레벨이 최상급 유저에 이를 때까지 오직 한 우물만 판 마력 스탯.
덕분에 독보적인 마법 방어력까지 갖추게 된 내게 이런 CC기들을 쓰는 것은, 그냥 허무하게 MP를 낭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하튼 그런 홍당무의 마법 공격과 리프 어택으로 내 옆에 다가온 전사의 공격은 무시한 채, 오직 치고 있던 힐러에게만 달라붙어 계속해서 연속 베기와 평타 공격을 먹여댔다.
“이, 이놈 좀 빨리 떼놓아 봐! 신성한 보호막!”
“양단 형님! 빨리 좀 나와 보세요!”
“이 미친 새끼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야!”
역시나 예전처럼 입에서 욕부터 나오는 홍당무.
랭커답게 온갖 스킬을 남발하며 잘 죽지 않는 힐러를 치는 중에도, 알리바이를 위해 한마디 해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어제부터 너희 태성만 졸졸 쫓아다니면서 PK 했는데 몰랐어? 이렇게 뭉쳐 다니는 먹잇감을 내가 어떻게 놓치겠어!”
“아, 저 거머리 같은 새끼! 윈드 커터!”
거듭된 CC기 저항으로 이내 공격 마법으로 전환한 홍당무.
하지만 그 공격은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제자리에서 피하며, 계속해서 힐러를 공격해 나갔다.
“안 돼! 나 이제 피 없어! 이놈 스턴이나 넉백 좀 걸어봐!”
“안 걸리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근데 이 자식 도둑 주제에 몸빵 뭔데? 아주 제대로 미친 캐릭이네!”
내 MP는 현재 4만이 넘어섰다.
마쉴의 데미지 감소율을 감안하면 거의 16만이 넘어가는 HP를 보유한 것과 마찬가지.
동레벨 기사 HP의 대여섯 배가 훌쩍 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나는 이 미친 몸빵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맞으면서, 오직 힐러만을 공격했다.
랭커답게 화려한 무빙을 열심히 해댔지만, 내 빠른 이속 때문에 공격을 피하지 못하던 힐러는 결국 비참하게 멀쩡한 동료들 사이에서 혼자 사망했다.
솨아아.
그렇게 잿빛으로 사라지는 힐러의 모습을 뚫고, 나는 홍당무에게 뛰어가며 연속 베기를 시전했다.
“꺅!”
한 대 맞자마자 곧바로 블링크로 내 뒤편으로 이동하며 마쉴을 켜는 홍당무.
확실히 랭커답게 빠른 반응 속도와 적절한 판단력이었다.
내가 다시 뒤돌아서 다가가려는 순간, 여전히 전사가 따라붙으며 동선을 방해해왔다.
난 그의 공격을 내버려 둔 채 홍당무를 쫓았으나, 그녀는 힐러와 달리 기지를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애초에 블링크를 포탈 근처로 사용한 덕에, 곧바로 포탈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여간 저런 애들이 꼭 생존 본능만큼은 특출 나다니깐…….”
하지만 그녀를 꼭 죽이겠단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내 최우선 목표는 힐러의 죽음.
힐보따리를 죽이는 데 성공한 이상, 다른 멤버들은 전부 다 살아도 상관없었다.
이 사막 한복판에서 힐러가 리타이어된 이상, 일도양단 파티의 이번 인던 공략은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