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91화 (91/350)

91화 타이탄의 시대 (4)

게임 내 경매장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고, 굳이 이렇게 사설 경매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한결같았다.

수수료 등으로 인한 단 한 푼의 손해도 아까워하거나,

안정적으로 적정한 금액에 판매를 하고 싶거나,

혹은 요행을 바라거나!

인게임 거래소에도 경매는 존재했다.

하지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대신, 경매로 매물을 등록하면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입찰하면 중간에 판매를 취소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등록 매물에 대한 입소문이 덜 나거나 가치가 평가 절하당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원래 가치의 반의반 값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낙찰되는 일도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레전더리급 아이템은 나처럼 특수한 유저가 아니라면, 대부분 장사꾼에게 판매하거나 장사꾼을 끼고 직거래로 매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런 실시간 경매로 판매를 진행하다 보면, 간혹 경쟁이 붙어 원래 가치보다 더욱 비싸게 팔리는 행운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따라서 돈에 환장한 멀린이라면, 당연히 사설 경매로 진행할 줄 뻔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인기가 없을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 전부터 쿨타임을 줄여주는 아이템이 판매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때만 하더라도, 이 아이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는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멀린이 판매를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매물을 홍보하기 위해 올타 사이트에 매물 정보를 업로드한 순간부터, 이 아이템에 대한 인기는 폭삭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걸 누가 돈 주고 사냐? ㅋㅋㅋ 진짜 이거 사는 놈은 호구 제대로 잡히는 거네 ㅋㅋ

-역대 레전더리 아이템 중에서 가장 최악의 아이템이네. 이 정도면 유니크 악세랑 1:1 교환하자고 해도 할 사람이 없을 듯?

-혹시 모르지? 멀린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제대로 써먹으려는 사람은 구매할지도? 아니면 인던에서 막타용?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거 사는 건 돈 갖다 버리는 짓일 듯 ㅋㅋ

소문은 사실이었다.

쿨타임을 없애 주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멀린은 실제로 쿨타임을 확연히 줄여주는 옵션의 레전더리 템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심각한 제약이, 아니 심각한 문제가 있는 템이었다.

‘악마 단테리오의 불공정한 계약’.

레전더리 템 치고는 평범한 스펙의 팔찌였지만, 옵션만큼은 평범하지 않았다.

팔찌를 터치하면 한 시간에 한 번,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무려 60초 동안 10배나 빠르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대로였다면 디바인 템을 넘어서는 최강의 사기템으로 등극했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간 동안 스킬을 사용한다면 마나 소비도 10배로 늘어난다는 극악의 페널티가 붙어 있었다.

한데 마나 소비 증가만 해도 엄청난 페널티였는데, 더 큰 문제는 한 번 발동시키면 그 상태를 멈출 수 없다는 점이었다.

즉, 잘못 발동시키면 금세 MP가 바닥나서, 사실상 1분 동안 스킬 사용이 봉쇄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마법사 유저들의 풀 MP는 끽해야 2만이 고작.

그러니 대부분의 유저는 괜찮은 스킬 몇 개만 사용해도 몇 초 만에 마나가 바닥나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의외의 타이밍에 변수로 써먹거나, 아니면 뒤가 없다는 각오로 누군가에게 한 방을 먹이고 싶을 때나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바로 멀린이 판매할 템이었다.

이러니 정상적인 플레이를 하는 유저라면 사실상 이 아이템에 대한 관심을 진즉에 꺼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경매가 이루어지는 광장의 분수대 앞에는, 이렇게 채 10명도 안 되는 초라한 숫자의 인원만이 모이게 됐다.

(핑크래빗: 제가 친분이 있는 장사꾼도 2명 불렀어요. 시작하자마자 가격 후려칠 테니까 적당한 가격이 되면 주저 말고 사세요~)

(나: 가격은 크게 상관없는데, 멀린이 저한테 판매할지 모르겠네요.)

(핑크래빗: 또 그 소리세요? 멀린은 돈에 환장한 놈이니 꼭 판매할 거예요. 걱정 마세용~)

눈치를 안 보려 해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이 광장에 나타난 순간부터 멀린은 오직 나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디를 변경한 초창기에 귓속말을 차단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기에, 대뜸 욕부터 퍼부을 거란 예상이 빗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꺼림칙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아마 내가 평생의 원수가 아닐까?

나 때문에 최고의 인생 역전 템을 눈앞에서 놓쳐 버렸으니 말이다.

“자, 이제 공지한 시간도 어느덧 10분이 지났으니 오실 분은 다 오신 것 같네요. 다들 스펙은 확인하고 오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판매 템이 하나뿐인 소규모 경매인 만큼, 길게 끌 것 없이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죠!”

“네, 시작하세요!”

멀린과 친분이 있는 장사꾼이 오늘의 경매 주관자인 듯, 진행을 시작했다.

시초가는 레전더리 템답게 백만 골드, 현금 1억부터 시작이었다.

“…….”

“…….”

한데 레전더리 템의 경매답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입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솔직히 우리도 장사꾼이니깐 사려고 온 거지. 아무리 레전더리라고 해도 그런 똥템을 누가 1억씩 주고 삽니까?”

“맞아요. 혹시나 누구 호구 있나 싶어 시작가로 백만을 불렀어도 가만있었는데, 보아하니 바로 반값 이하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무도 입찰을 하지 않자, 한두 명씩 소신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날 노려보고 있던 멀린도 이런 분위기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화들짝 놀라 장사꾼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이내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들 하십니까? 장사꾼들이시라 그런지 너무 하시는군요? 이거 정말로 좋은 템입니다. 얻기도 무척 힘들어서 아주 운 좋게 얻은 것이고요! 또한 타연 내에서 아직 2개밖에 없는 초희귀 템일 겁니다!”

“희귀한 건 희귀한 거고,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가격이 말해 주지 않을까요?”

‘불쌍한 멀린……. 정말 돈복만큼은 오지게도 없구나!’

돈이란 놈은 쫓으면 쫓을수록 더 멀어지는 놈이라고 했던가?

자신만만하게 경매를 소집했던 것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반응이었다.

멀린의 장사꾼은 멀린과 한참을 상의하다가, 결국 다시 경매를 재개했다.

입찰 시작가는 처음의 딱 절반, 50만이었다.

“51만 5천!”

“51만 8천!”

“51만 8500!”

하나, 멀린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역시나 반응은 신통찮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 행운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내가 이 아이템을 쓴다면…… 결코 디바인급에 꿀리지 않을 개꿀템이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레이드나 향후 타이탄을 상대할 상황 등을 예상해 볼 때, 이 아이템은 무시무시한 포텐셜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주어진 설명창 때문에 똥템 취급을 받고 있지만, 향후엔 나로 인해 어마어마한 사기템으로 불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지지부진한 경매를 끝맺기 위해 마침내 참전을 선포했다.

“60만!”

다소 높게 부른 가격이었지만 상대가 멀린이라면 그 정도는 뽀찌를 준 셈 치고 줄 만했다.

또한 경매에서 가격을 확 높이면 좋은 점이, 이러면 다른 경쟁자들이 따라붙지 않고 경쟁을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쿵쿵쿵.

결국 내 한 번의 외침으로, 낙찰 봉 역할을 대신한 전투 망치가 땅을 세 번 내리찍으며 짧았던 경매의 끝을 알렸다.

모였던 유저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멀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멀린,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이 개자식! 네가 내 팔찌를 사 가겠다고? 누가 너 따위한테 템을 팔기는 한대?”

“헐? 지금까지 경매 진행을 봤으면서도 상황판단을 못 한 거야? 이걸 돈 많은 나나 되니깐 60만이나 주고 사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팔면 천만 원은 손해 볼 텐데, 정말 그렇게 할 거야?”

“닥쳐! 네가 스틸한 신검이 얼마짜리인데 고작 천만 원 가지고! 도대체 넌 양심이란 게 있냐? 말은 또 왜 이렇게 짧은 건데?”

“내 양심보다는 다리우스를 배신한 네 양심부터 먼저 찾아보시고……. 아무튼 정말로 안 팔 거야? 나 시간 없는데 그럼 그냥 간다?”

정말 갈 생각은 없었지만, 핑크래빗의 조언을 믿고 배짱을 부려 봤다.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 준다면, 금세 경매 룰을 어기고 가격을 올리고도 남을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아…… 미친, 진짜 졸라 팔기 싫은 새끼인데……. 1만만……. 아니, 2만만 더 써 줘라…….”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2만만 더 올리라고 새끼야! 그럼 바로 팔 테니까!”

“하하! 알겠다 알겠어. 너라면 내가 그 정도쯤이야 줄 수 있지. 암 암!”

왠지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오르는 멀린의 태도에, 흔쾌히 62만을 올리고 교환창의 수락 버튼을 터치했다.

[악마 단테리오의 불공정한 계약(레전더리)을 획득했습니다.]

이로써 맨몸으로 타이탄을 상대하게 만들어 줄, 또 하나의 필살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 * *

[산드로: 곧 있으면 시작이네요. 이제부터는 모두 집중해 주세요. 축굴이 넌 계속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고!]

[축복받은얼굴: 오케이!]

[축복받은무빙: 그래. 정말 오랜만에 공성 참여하는 거라 은근히 긴장되고 떨리네.]

[축복받은파볼: 저도 그래요 오빠. 그래도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나 설마 공성 체질 아닌가 몰라 ㅋㅋㅋ]

의뢰받은 공성전의 날은 금세 다가와, 어느새 시작 2분여를 앞두고 있었다.

원래는 당연히 혼자 참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공성전에 용병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은 길드원들의 합류 요청에, 레벨업에 바쁜 라챤이만 빼놓고 전부 다 이번 공성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성전은 3년이 넘도록 방송으로밖에 구경 못 해 봤단 말이야. 그동안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 마음껏 좀 해보자!

-앞으로 태성과 공성전에서 싸울 일도 많이 있을 텐데, 공부하는 셈 치고 참여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세인트 길드는 레이드 위주의 소규모 친목 길드였기에, 그간 공성전에는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공성전이라는 것이, 보통 한 번이라도 참여하기 시작하면 다른 길드와 이런저런 갈등과 원한이 생기기 마련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제약이 사라졌기에, 다들 참여해보고 싶어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성전이야말로 타연 콘텐츠의 꽃이라 불릴 만큼 화제의 중심이었으니 말이다.

[산드로: 말씀드렸던 대로, 피닉스 길드원들은 먼저 새롭게 도전하는 길드가 없는지 확인하고 10분 후에 들어갈 겁니다. 그때 제가 신호하면 같이 공성에 들어가면 됩니다!]

[축복받은파볼: ㅇㅋㅇㅋ 누굴 초보로 아나 몇 번을 말하셔? 신규성 공략은 방송으로도 보기 힘든 경험인데 넘 기대된다~ 재미날 듯!]

오벨리스크를 점령하면 그 즉시 그 성의 공성은 끝이 나기에, 이런 신규성은 시작하자마자 후다닥 깨버리고 다른 지역에 지원 가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혹시나 이번 회차의 공성전에서 또 다른 길드에서도 동시에 공성을 진행할 수도 있었으니, 10분여간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고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빠빰! 빠빠빰!

목표로 삼은 지웰 성 내부에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공성의 시작을 알려왔다.

신규성이었기에 늘 태성에게 해왔던 전쟁 선포를 따로 할 필요는 없었다.

지웰 성은 오픈한 지 3년 반 가까이 지나도록, 아직 단 한 번도 점령되지 않은 성.

따라서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이 성은 어떠한 길드도 도전하지 않은 채 잠잠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던 듯싶었다.

공성 시작 전에는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태성의 길드 마크가 하나둘씩 보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백여 명이 나타나 지웰 성의 해자를 지나 내성문을 두들겼다.

하필이면 같은 날, 그것도 피닉스와 태성이 동시에 지웰 성을 공략하기로 전략이 겹친 것이었다.

(나: 지옥불님 보고 받으셨죠? 저희보다 지웰 성 공성에 먼저 도전한 길드가 나타났습니다. 길드는 태성, 숫자는 대략 백여 명입니다!)

(지옥불: 네. 방금 전달받았습니다. 백 명으로는 지웰 성을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터, 분명 타이탄을 대동하고 왔을 겁니다. 저도 금방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지옥불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한 달의 레벨업 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지난달까지만 해도 공성할 엄두도 못 냈던 성을 한 달 만에 고작 백 명으로 시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분명 지옥불의 예상대로 태성도 타이탄을 가지게 되었고, 그걸 이곳에서 써먹을 전략일 거라고 간주하면 아귀가 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성문 앞에서 지웰 성 NPC 궁수들의 폭풍 일점사를, 힐과 쉴드로 잠시 버텨내던 성기사가 뭔가를 크게 외쳤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주위에는 거대하면서도 익숙한 마법진이 새겨졌다.

<티에스 나이츠>

어느새 성기사는, 티에스 국의 상징인 새파란 색깔로 물들어진 솔저급 타이탄으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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