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드래곤 슬레이어 (5)
성공과 실패, 그리고 승자와 패자는 언제나 그랬듯 순간의 선택이 좌우한다.
그러니 소환 몹의 수가 많기는 해도 이대로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이 순간을 이겨낼 정답을 떠올려야만 했다.
혼자였다면 도무지 답이 없었겠지만, 다행히 내게는 믿음직한 동료들이 있었다.
[산드로: 레벤다스는 방어 모드로! 나머지 분들은 치던 대로 치세요. 카이저 님과 저, 라챤이 셋이서 어떻게든 가디언을 정리하겠습니다.]
[카이저: 알겠다.]
레벤다스는 나이트급임에도 불구하고 방어력을 200% 향상시키는 ‘집중 방어’라는 스킬이 있다.
그래서 아직 메인 탱커 역할을 조금 더 맡을 수 있었다.
‘궁수병 30명의 딜은 꽤 대단하지만 각 1명의 딜은 보잘것없어. 그러니 레벤다스가 공격 불가인 집중 방어 상태로 돌입해도 어그로가 튀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체력을 보충할 수 없는 레벤다스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없었다.
난 투 메르타스에게 넣던 공격을 멈추고, 곳곳에 소환된 거대 엔트들을 향해 단검 투척과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일단 내가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 간에, 소환 몹들이 파티원들에게 달려들어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을 방지부터 한 것이다.
“산드로!!”
순간 왼쪽에서 카이저의 외침이 들렸다.
화염 모드였던 배리어를 어느새 얼음으로 바꾼 상태의 그.
그의 눈빛을 보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음 배리어의 빙결 효과로 왼쪽에 있는 10마리 정도를 어그로 끌겠단 뜻이구나!’
잡지는 못해도 이속 감소의 디버프가 걸린 엔트 10마리를 끌고 도는 건 할만 했다.
카이저는 라푼젤의 힐을 받으며 버틸 생각으로 내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내가 이쪽의 10마리를 잡아내고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내겠다고!
10마리 또한 벅찬 건 매한가지였지만, 달리 생각하면 감당해야 할 놈들이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었다.
난 다가온 녀석들을 상대로 옆으로 무빙하며 둘러싸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 마리씩 폭딜을 넣어 잡아나갔다.
라챤이 또한 내가 치는 놈을 향해, 불굴의 용맹함 효과로 증폭된 화살 공격을 더 해줬다.
그렇게 침착하게 한 마리씩 줄여나가다 보니 다행히 정리가 돼가는 것 같았다.
한데 역시나 쉽지 않은 보스 몹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 정신없는 난전(亂戰) 중에 녀석은 또다시 브레스를 썼다.
“피하세요, 브레습니다! 강화 마법진!”
엔트들을 데리고 파티원이 있는 볼포의 곁으로 갈 수 없었기에, 나는 다시 투 메르타스에게 그림자 밟기를 써서 피했다.
멀리 떨어져 나와 몹을 끌고 있던 카이저도, 본인 앞에 못 보던 얼음 벽 소환 스킬을 사용해 브레스를 버텨냈다.
가까스로 닿은 라푼젤의 힐 보조와 특화 방어막이 돕지 않았다면 즉사했을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축복받은파볼: 와! 진짜 정신없어!! 난장판이야 난장판!]
[산드로: 누님! 이제 폴보까지 해제됐으니 아시죠? 다음 브레스부터는 누님이 막으셔야 합니다!]
[축복받은파볼: 웅웅 알겠어!!]
부하 몹 소환과 브레스를 동시에 사용한 한차례의 폭풍을 버텨냈다.
잠시의 안정이 찾아온 순간, 난 빠르게 남아있는 자이언트 엔트들을 정리해 나갔다.
몹을 끌던 카이저도 몇 마리 남지 않자 함께 도와 순식간에 마무리 지었다.
“소환 몹을 잡고 있는데 브레스라니,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산드로, 만약 소환 몹이 한 번 더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을 건가?”
“어렵긴 해도 놈의 체력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잖아요! 아직 타이탄이 남아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놈의 체력을 깎아 보죠!”
각자의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죽었을 테고, 그럼 분명 남아있는 파티원들 또한 차례대로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성공을 장담할 수 없지만 끝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투 메르타스 공격에 집중한 우리는 계속해서 체력을 깎아나갔다.
몇 차례 브레스가 이어졌지만, 이제는 축볼 누님의 타이탄이 모두의 방패막이가 되어 골렘 없이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차례의 연계 공격을 견디며 딜을 한 결과, 결국 대망의 25% 구간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역시나 미친 난이도의 보스 몹, 드래곤다웠다.
“캬오오오!”
퐈아아아!
다음 페이즈에 돌입하자마자 불시에 드래곤 피어를 날리고 브레스를 쓰는, 극악스러운 연계 공격을 날린 것이다.
처음에 한 번 사용하고는 쭉 쓰지 않던 드래곤 피어라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이렇게 브레스 공격을 쓰기 전에 갑자기 사용하니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레벤다스는 타이탄인지라 드래곤 피어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집중 방어 상태라 스턴을 넣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 우리에겐 불운이었다.
3초간의 경직이 끝나는 순간.
파티원들은 브레스에 조금 노출되기는 했으나, 다행히 각자의 이동 스킬 등을 사용해 축볼 누님의 타이탄 뒤로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티원을 제외한 NPC 궁수병들은 모두 허망하게 전멸해 버리고 말았다.
타이탄 양 옆으로 나와서 공격하다 경직을 당한 탓이었다.
“미쳤어 정말! 이런 놈을 어떻게 잡아!”
“매스 힐! 그레이터 힐! 축볼아! 그딴 소리 할 시간에 다가가서 딜이나 한 대 더 때려! 이젠 보호해야 할 궁수병도 없잖아!”
그랬다.
NPC 궁수병들이 전부 죽어버린 이상, 지금부터는 차근차근 안정적으로 잡는 것이 아닌 극딜 모드로 승부를 거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죽어!!”
그렇게 축볼 누님이 탄 타이탄이 달려가 긴 장창을 쑤셔 넣으려는 순간, 녀석은 마지막 페이즈답게 또 하나의 새로운 패턴을 공개했다.
두 날개를 활짝 펴더니, 그대로 자리에서 날아올라 공격들을 피한 것이다.
[축복받은파볼: 망했다 망했어.. 저걸 무슨 수로 잡아ㅠㅠ]
[축복받은얼굴: 저 곧 소환 풀려요. 이제 HP 다 닳았습니다!]
밀폐된 레어 안인지라 30미터 정도 높이밖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파티원들이 절망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궁수병이 다 죽어버린 탓에, 이제 타이탄 등과 함께 근접 딜로 극딜을 먹이려 했는데 사정거리가 닿을 높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투 메르타스가 써대던 포이즌 노바를 오롯이 견뎌내고 있던 레벤다스도, 드디어 체력이 다해 역소환 돼 버리고 말았다.
곧바로 천상의 방패를 쓴 탓에 연계되는 마법에 죽지는 않았으나, 현중이도 제자리에 선 채 그저 멍하니 공중에 떠 있는 투 메르타스를 바라만 봤다.
이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레이드를 준비하면서 혼자 수없이 시뮬레이션해봤던 놈의 패턴 중에, 분명 이 상황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날개가 달린 보스가 아니잖아? 도박이긴 하지만…… 분명히 먹힐 거다!’
나는 얼른 프로스트 울프, 램보를 소환해 순식간에 벽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곧장 날듯이 점프해 나무 벽에 붙은 다음, 대도 부츠를 활용해 위를 향해 달렸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마냥 주저 없이 움직였기에, 금세 공중에 떠 있는 투 메르타스의 머리 위 천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탓!
그리고는 바로 밑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첫 공격을 시작할 때와 똑같은 다이빙.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맨몸이 아니었다.
“루이투스 소환!”
공중에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순식간에 루이투스가 튀어나왔고, 나는 그대로 타이탄과 한 몸이 된 채 떠있는 투 메르타스의 몸 위로 떨어져 버렸다.
쿠웅! 콰쾅!
한 차례 루이투스가 그린 드래곤의 등 위로 떨어지며 생긴 충돌음이 들려오고, 이어서 같이 지상에 처박혀 버리는 둔탁한 낙하음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물리 엔진이 정교하게 구현된 타연답게, 녀석의 등 위로 떨어져 내린 타이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목 부근을 부여잡고, 거대한 검을 이리저리 되는 대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전략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그저 무조건, 동선 낭비 없이 한대라도 더 데미지를 입히는 것만이 최선이고 최고의 전략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충분히 전달받았다는 듯이, 모든 파티원들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스킬들을 쏟아부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드래곤의 발밑에는 현중이와 카이저가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고, 축빙 형님과 라푼젤 같은 힐러들도 스태프를 활로 스위칭(switching)해 화살을 날려댔다.
뛰어들기 전에 미리 소환했던 램보도, 땅 위에 떨어진 투 메르타스의 옆구리에 붙어 발톱 공격을 날리며 빙결 효과를 집어넣고 있었다.
램보는 필드 보스 출신이었기에, 드래곤 같은 보스 몹을 상대로도 디버프가 들어갔다.
다만 시동 걸 때 확인했던 바로는 원래와 같은 공속과 이속의 50% 감소가 아닌 딱 절반 수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도 남았다.
마지막 20% 구간은 오직 루이투스의 몸빵과 다굴만으로 깎아낼 생각이었기에, 그 정도의 데미지 감소라도 굉장히 도움이 됐다.
거기다가 이놈 또한 고레벨의 ‘펫’이었기에, 딜이 헛방 없이 100% 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NPC 궁수병들이 전멸했어도, 지금까지 투 메르타스의 HP가 감소하던 속도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15%.
녀석이 또다시 드래곤 피어를 사용하고 브레스를 사용하려 했으나, 혼자만 경직 상태에 빠지지 않은 내가 심판의 전진을 날리자 넉백 당해 캔슬당하고 말았다.
10%.
녀석이 다시 또 뭐라 외치며 천장으로부터 쫄병 엔트들을 소환했다.
이번엔 그 숫자가 무려 2배인 40마리였기에, 순간 패닉이 올 뻔했다.
하지만 주저 없이 매직 미사일과 파이어 스톰을 쓴 카이저, 그리고 멀티 샷을 날린 라챤이가 몹들의 어그로를 순식간에 절반씩 나눠 먹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미리 짠 것 마냥, 몹을 끈 채로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빨리 잡으세요 형님!!”
정신없이 검을 쑤셔 넣던 나는, 라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러자 손을 흔들며 백스텝을 쓰는 라챤이, 그리고 내 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 채 몹을 끌고 나가는 카이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무작위로 공격하기 시작한 투 메르타스의 앞발 공격을 절묘한 무빙으로 피하는 현중이와 쉬지 않고 장창을 쑤셔 넣고 있는 축볼 누님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원거리 마법 공격을, 서로에게 힐을 걸어주며 버티고 있는 축빙 형님과 라푼젤의 모습이 보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혼전(混戰) 속에서 각진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을 척척 해내고 있는 듬직한 동료들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해내는 것이 아닌, 가장 훌륭한 대응법을 찾아 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 내게도 정말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기쁨과 감격이!
가슴이 벅차도록 차올랐다.
5%, 4%, 3%…….
길고 화려했던 녀석의 네임 바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다.
녀석은 이리저리 공격하는 와중에도 날개를 홰치며 날아오르고 싶어 했으나, 루이투스와 티에스 나이츠가 올라탄 탓에 솟구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길고 험난했던 전투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아가리로부터 포이즌 브레스가 아닌,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온 것이다.
“한낱 인간들에게 내가! 하지만 그분께서는, 너희를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마지막 외침과 함께 녀석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대한 녹색 바람에 휘감겼다.
그리고 허공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놈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 어떤 보스 몹 레이드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갖가지 드랍 아이템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시야 한켠의 알림 창에도, 어느새 수많은 시스템 로그 기록이 주르륵 도배되듯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업적 ‘자격을 갖춘 자’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소수 정예’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드래곤 학살자’를 획득했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연계 퀘스트, 일회성 퀘스트’를 해결했습니다.]
……………………
심지어 이제까지 어떠한 필드 보스 레이드 성공에도 기록된 적 없는 전체 알림창에도, 방금 우리가 세운 업적이 새겨져 있었다.
[현존하는 용족 ‘태초의 숨결을 머금은 투 메르타스’가 최초로 토벌되었습니다.]
우리가 방금 이룩한 것이 마치 ‘건국’과 맞먹을 만큼…….
그렇게나 위대한 업적이 막 달성됐다고 전 서버에 알려주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