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뉴 하우스 (3)
“혹하는 제안이기는 하네요. 제국의 군단장이라……. 이거 어쩌면 나중 가선 유저가 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만약 일루전이 거기까지 설정해 두었다면, AI인 세라자드가 연관 퀘스트나 루트 등을 제작해 두긴 했겠지. 어쨌든 그건 한참 후의 일이 될 테니 당장 염두에 둘 일은 아닐 거다. 어떻지? 나와 같은 루트로 갈 생각이 드나, 산드로?”
“먼저 제게 좋은 제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와는 맞지 않는 길 같네요.”
“그런가?”
“죄송해요. 그런 식으로 복수해 버리면, 역시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요. 놈을 그런 식으로 무너뜨려 버리면, 제 울분이 깨끗이 없어질 것 같지가 않거든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처음 등장하며 했던 선포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군.”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녀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무기력하고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나를 변화시킨 기적.
매일 13시간 이상씩 사냥하며 모든 걸 걸고 정진하게 만든 원동력!
그건 바로 녀석을 향한 나의 ‘증오심’ 덕분이었다.
대관식 날 생긴 원한만이었다면 어쩌면 진작 녀석을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과의 원한은 그 한 번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한 번으로 인해 애써 묻어두려 했던 진정한 원한이 깨어나 버리고 말았다.
녀석이 평생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놈이 밟아온 약자가 어떤 업보가 되어 돌아오게 되는지!
놈을 짓밟고 면전에서 모든 걸 밝히게 되는 날이, 내 복수를 종지부 짓는 순간이 될 것이다.
“여하튼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타연에 유저 대 유저의 대립이 아닌, 유저 대 NPC의 대립 루트가 있다는 사실…… 추후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 있을 것 같네요.”
“네 도움이 없었다면 나도 힘들었을 거다. 조만간 더 좋은 소식을 안겨주도록 하지. 내 호승심을 자극해 즉흥적으로 선택했던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된 루트를 탄 것 같으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운영자에 대한 정보도 들어오는 대로 바로바로 공유드리겠습니다.”
“알겠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산드로, 너가 있어 왠지 든든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야 말로요.”
제국의 군단장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인데 과연 더 좋은 소식이란 뭘까?
아직 내 앞에 따라잡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기쁘게 다가왔다.
역시 난 타연, 이 게임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 * *
“역시 당당검 님도 모르고 계셨다는 말이죠?”
“네. 저로선 처음 듣는 얘기예요. 들어보니 무척 불쾌해지는 데요? 타연에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놈들이 있었다는 게?”
카이저 형님의 조언을 따라, 사냥에 앞서 당근당근단검을 만났다.
-너희 길드에 당근 님이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 한번 공유해 봐라. 이리저리 소문낼 사람은 아닐 테니.
아직 떠벌리고 다닐 정보는 아니었지만, 같은 길드원도 믿지 못해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짚이거나 수상했던 적 없었나요? 도둑 1위셨으면 뭔가 이상한 기색을 눈치챘을 법도 한데요.”
“달리 말하면 제가 모를 정도로 그들이 은밀했다는 거겠죠. 만약 운영자가 개입된 게 사실이라면…… 아마 이오네스와 테오시스, 둘 중 하나일 거예요. 듣기론 테오시스가 개발 막바지에 참여해서 큰돈을 분배받진 못했다곤 하더군요.”
“네? 나머지 한 명, 젠티스는요?”
“그분은 그런 일에 연관됐을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 나머지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겠죠.”
“죄송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뭐, 믿기 싫으면 마세요. 거기까지는 말씀드리기 싫으니까요.”
올해 24살이라는 민시혁.
그가 우리 길드에 가입하면서 알려준, 개인 정보의 전부였다.
현재 그는 기존 멤버들과는 달리, 길드 내에서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접속 인사라든지 채팅창 내 대화 등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고, 길드 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물론 애초부터 그런 것들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으니 괜찮았다.
그저 이렇게 타연 내에서 한 손에 꼽을 만한 비밀 정보를 다룰 때, 함께 의논을 나눌 만한 아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존재가치는 충분했다.
‘지옥불 님과 테오시스처럼…… 당당 님과 젠티스도 어쩌면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겠구나…….’
물론 그의 말만 믿고 무작정 배제할 순 없겠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우선순위를 좁히는 데는 참고할 만했다.
“아무튼,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공유 좀 부탁드릴게요. 아참! 이번 공성전에 성을 하나 점령하려고 하는데, 혹시 참석 가능하세요?”
“불참입니다. 막 만인살을 얻은 터라 머더러가 풀리려면 한참 걸려요. 이거 아마 보름 동안 사냥만 해도 안 풀릴 것 같은데요? 레벨도 많이 따라잡혀서 사냥 좀 해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이번에 성을 먹게 되면, 전용 사냥터에서 안전하게 푸시면 되겠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머더러를 공성전에 참여하라곤 할 수 없는 법.
굳이 참석을 바랐던 건 아니었으니 흔쾌히 발길을 돌렸다.
* * *
데스라 사막 서부.
훼라리를 타고 잊혀진 마도 시대 유적지에 도착했다.
아직 접속하지 않은 축볼 누님을 기다리는 동안, 간만에 이곳에서 레벨업을 할 생각이었다.
“어! 산드로 님이다!”
“와우! 여기서 볼 줄이야!”
이 던전에서 레벤다스를 스틸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이 던전은 알려질 만큼 알려져서, 입구 주변은 고레벨의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역시 꿀 사냥터로 소문나서 그런지 유명한 유저도 제법 보이네.’
가장 최근에 활성화된 6인 인스턴트 던전.
거기다 마계 몹들이 나오는 곳이라 그런지, 얼핏 봐도 빛과 신성 속성 테크트리나 템을 맞춘 유저들이 많아 보였다.
“반갑습니다, 산드로 님. 이번에 랭킹에 올라오신 거 봤습니다. 이렇게나 빨리, 정말 대단하시네요!”
레미제라블 길드의 ‘성박휘’.
랭킹 10위의 성기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혼자 오신 거세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파티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산드로 님이 사냥하는 모습을, 꼭 한번 구경해보고 싶었거든요.”
고조선 길드의 ‘아프지말자’.
역시나 현재 8위를 기록 중인 사제(priest) 랭커가 파티를 권해왔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맨날 어중이떠중이들한테 시비나 붙던 신세였는데, 이렇게 랭커들이 먼저 아는 척을 해오다니? 그것도 무려 힐러가 도둑한테 선 파티 권유까지 하면서!’
이래서 사람은 출세하고 봐야 하는 건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내 위상이, 아직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어…… 죄송합니다. 전 솔플이 편해서요. 그나저나 이곳이 많이 유명해졌나 봐요? 랭커분을 두 분이나 뵙게 되네요.”
“다 산드로 님 덕분이죠. 님 덕분에 태성이 이곳의 통제를 포기해서, 고렙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아요. 그러고 보니 다른 버닝스타 길드원들은 자주 뵀는데 산드로 님은 잘 뵙지 못했네요. 혹시 다른 꿀 사냥터라도 있으신가 봐요?”
“그냥 여기저기 안전한 곳에서 주로 사냥하고 있었습니다.”
“에이, 그런 것 치고는 레벨업 속도가 어마무시하던데요? 조만간 통합 100위 안에도 들 기세시던데!”
“하하!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 이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즐타하세요!”
박휘님과 말자님 외에 다른 유저들도 다가오려 해서, 황급히 대화를 끊고 인던 안으로 들어왔다.
뭣 모르던 시절, 현중이와 나는 훗날 필드에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신검을 들고 다니는 내가, 마치 레이드 몹마냥 모든 유저들로부터 항상 쫓길 것으로 예상해서…….
하지만 그 당시 바랐던 랭커 수준까지 다다르고 나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보여줬던 압도적인 무위(武威).
더불어 훼라리와 루이투스라는 최강의 생존 수단.
이미 이것들이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탓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공격은커녕 나와 일면식을 나누기 위해 친근하게 다가왔다.
물론 나중 가서는 어떻게 변할지 몰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를 통해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의 내실과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것이, 결국 상대방의 전투억지력을 키우게 될 거란 사실을.
현실과 다른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영락없이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 타연이었다.
* * *
깨갱! 깽!
몹 몰이로 뭉친 수십 마리의 케르베로스들 사이로 뛰어들며, 각종 스킬을 쏟아냈다.
화르륵!
놈들의 주둥이에서 이리저리 수십 개의 불길이 토해졌지만, 그저 따뜻하기만 할 뿐 조금의 위협도 주지 못했다.
마계 출신의 마법 생물체답게, 놈들이 가진 MP가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크아! 역시 사냥은 몹 몰이가 제대론데! 한두 마리씩 잡다가 몰아 잡으니까 사냥하는 맛이 나는구나!”
필드인 침묵의 숲보다는 경험치가 적지만, 간만에 몰이 사냥하는 게 재밌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사냥을 시작한 지 2시간,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축볼 누님이 접속했다.
[축복받은파볼: 하이~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 렙업 중이었네?]
[산드로: 어서 오세요, 누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축복받은파볼: ㅇㅇ? 나를?]
[산드로: 네. 데스라 유적지 인던에서 로그아웃하셨죠? 저도 이곳에 와있으니까 입구서 봬요!]
[축복받은무빙: 어라? 시간 맞춰 사냥할 거라서 우리도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산드로: 잘됐네요! 설명 드릴 게 있었는데! 바로 파티 요청드리겠습니다!]
공성전이 며칠 남았지만, 제독은 타이탄의 쿨타임이 채워진 상태로 전해주길 부탁했다.
그래서 축볼 누님으로부터 미리 타이탄을 건네받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
서둘러 사냥을 마무리 지은 후 인던 입구로 나가자, 와순이를 타고 온 라챤이와 축빙 형님 등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드로 형님, 여기까진 웬일이세요?”
“누님한테 볼 일이 좀 있어서…… 아무튼 들어가서 말하자!”
궁금해하는 축볼 누님으로부터 파티 초대를 받은 뒤 다 함께 인던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이지만 작은 길드 모임을 갖게 된 터라, 이참에 모두에게 제독과 있었던 거래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아하! 그러니까 내 타이탄을 받으러 왔다는 거지? 괜찮아! 난 사실 이거 좀 부담스럽더라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해요 누나. 다음엔 더 좋은 놈으로 꼭 다시 구해드릴게요.”
“아니, 안 그래도 돼! 난 그냥 타이탄 어깨에 올라타서 마법 쓰는 게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더라, 히히.”
이미 누님 것이 된 타이탄이라 거절하시면 난감했는데, 고맙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배려해주시는 누님이었다.
“드로야, 근데 타이탄을 주고 성을 먹는 건 너무 손해 아니니? 쉽게 얻은 편이라곤 하지만…… 다시 또 쉽게 얻으란 법은 없는 거잖아. 거기다 드래곤을 또 잡거나 차후 업데이트될 콘텐츠에서 타이탄이 필요한 순간이 많을 수도 있는데…… 조금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맞아요. 성을 먹는 거야 이번에 도움받아서 운 좋게 먹는다고 쳐도, 당장 다음 공성전에서는 어떻게 지키실 생각이세요? 우리 길드만으로는 한 달 후 공성전에서 바로 뺏겨버리지 않을까요?”
축빙 형님에 이어 라챤이까지.
사뭇 반발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타이탄이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성을 먹음으로써 얻는 실익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먼저, 미리 상의드리지 않고 혼자 결정해서 죄송합니다. 말씀드리면 다들 이렇게 말리실 것 같아서 그랬네요. 다만 아무 생각도 없이 결정한 건 아닙니다. 나름 확신이 있었습니다. 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응? 그게 뭔데?”
“간단합니다. 자발적으로 아베르 성을 지키고 싶게 만들면 돼요. 바로 타연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직접!”
“뭐? 유저들이? 우리 길드원이나 동맹 길드를 늘리는 게 아니라?”
“네. 아베르 성은 버닝스타만의 성이 아닌, 일반 유저들의 성이 될 겁니다. 타연 최초로!”
* * *
“굳이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넌 정말 대단하긴 참 대단한 새끼다.”
“왜 또? 형님의 계획을 듣고 나니 그렇게나 감탄스럽냐?”
“어디서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샘솟냐? 하여간 짠돌이라 그런지, 그런 쪽으로는 잔머리가 알차게 돌아간다니까?”
빈집을 계약했던 터라 이사도 빠르게 결정했다.
덕분에 오전 접속을 끝내자마자 몇 개 안 되는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보내고는, 현중이의 차에 얻어 탔다.
“예전엔 갖고 있던 게 없어서 활용할 생각을 못 한 거야. 지금이야 가진 것도 많고 우리 길드원들도 함께니까 이것저것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뿐이지.”
“암만 그래도…… 난 사실 우리 길드가 성을 먹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고작해야 10명도 안 되는데 어떻게 성을 먹을 생각을 하겠어?”
“너 벌써 까먹었냐? 혼자서도 성을 먹어본, 그 대단하신 분이 옆에 계신단 걸?”
“먹자로 먹은 거랑 이거랑 같냐?”
“그러니깐 이번엔 제대로 먹어드리겠다고. 이 형님께서!”
“네 네. 앞으로 새집에서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연에서도, 테라에서도!”
“크크크, 오냐!”
새롭게 구한 집.
그곳은 아무리 봐도 혼자 살기엔 상당히 큰 편이었다.
-야, 너만 서울 가면 좀 그렇지 않냐? 이제부턴 함께할 일이 더 많을 텐데,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겠다?
-그래? 그럼 너도 서울로 와. 맨날 백수처럼 집에서 구박만 받고 있지 말고.
-내가 부모님 건물도 관리하는 거 잊었냐? 근데 어떻게 가?
-이젠 너도 결정해야 하지 않겠냐? 제대로 타연에만 몰두해도 모자랄 시간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흠……. 역시 선택의 순간이 온 건가? ……그럼 나도 서울에 집 좀 구해볼까? 니가 구한 동네 근처로?
-피곤하게 구할 거 뭐 있어? 그냥 우리 집으로 와. 집을 버닝스타 전용캡슐방으로 만들어 버리지 뭐.
-뭐? 하하하! 너 두말 하기 없기다?
타연에서 새 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새로운 집에서 함께 살 멤버도 한 명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