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불청객 (3)
도와주러 왔다고?
대체 우리가 언제 도움을 요청했는데?
“제독 형님. 이게 무슨 짓이시죠?”
“짓이라니? 급하게 필드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성은 예전부터 공통의 적. 피닉스와 아틀란티스, 그리고 너희 버닝스타가 힘들게 전투하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어서 이렇게 왔다.”
“그러실 거면 귓속말이라도 미리 하시든가요. 기껏 다 뚫어놨는데, 이제 와서 도와주신다니요?”
제독을 따라서 온 100여 마리의 페가수스 라이더.
그들이 지상의 태성 유저들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잠시 공백이 생겨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진작부터 태성과 전쟁 상태였던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설마 지금 우리가 온 게 불만이라는 건 아니지? 조금 늦은, 이 타이밍에 왔다고?”
조금 늦었다고?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왔으면서, 이미 싸운 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 시점에 도착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우리가 막 놈들을 뚫고 레어 안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누가 봐도 우리가 진입할 때 함께 들어가려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형님께서 고작 숟가락이나 얹으려고 오실 줄이야.”
“말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저희 길마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이 난장판에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우리 곁에 착지한 유저.
올림푸스의 간부인 뉴요커가 내 말을 끊으며 대꾸해 왔다.
난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제독을 향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맞잖아요? 올림푸스만으로는 드래곤을 꿈에도 꾸지 못할 것 같으니, 저희에게 꼽사리 끼려고 오신 거잖아요. 아무리 상황이 난장판이라지만, 레이드에도 매너란 게 있는 건데 꼭 이럴 때 이런 방식으로 오셨어야 했습니까?”
“……부정하진 않으마. 드로, 네 말대로 함께 드래곤을 레이드하러 온 건 사실이다. 근데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계속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냐?”
초창기 올림푸스가 레이드 길드일 당시 만났던 사람이 맞는 건지…….
그동안 내심 제독을 좋게 생각해왔던 나로서는, 그의 이런 모습이 너무나 큰 실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여기서 그와 실랑이를 계속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산드로 님! 어서 전진하시죠!”
우리 앞에선 고작 200명으로 그 몇 배나 되는 태성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상당히 벅찬 상황.
그나마 타이탄을 소환해 시간을 벌고 있었지만, 태성 측에서도 타이탄을 소환한 건 마찬가지라 얼핏 봐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들어가서 지옥불 님과 함께 다시 얘기하죠. 따로 챙겨드릴 순 없으니까 알아서 잘 따라오세요!”
“이미 말하지 않았어? 우린 너희를 돕기 위해 온 거라고! 전원 돌격!”
제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인근에 있던 그의 페가수스 부대가 전방을 향해 뭉쳐서 날아갔다.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는 전투마의 랜스 차지(lance charge)처럼.
페가수스가 공중 돌격으로 달려드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사실 스턴이나 넉백기를 보유한 탱커군들이 탈것으로 빠른 이동 속도까지 갖추게 되면, 타 직업군 입장에서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한데 그런 라이더 백여 기가 나타났으니, 길은 순식간에 뚫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소문도 없이…… 언제 이만큼이나 모아뒀지? 과연 세 번째 국왕이, 거저 된 건 아니란 건가?’
페가수스는 그리폰과 달리 템으로 얻을 수 있는 루트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펫은, 지금까지 오직 테이밍 몬스터 스킬로만 얻을 수 있는 비행 탈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데 이렇게나 많은 페가수스를 구해서, 몰래 100여 명의 비행부대를 만들어 뒀다니…….
어떤 방법을 쓴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보통 노력과 수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무언가 꿍꿍이가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 정도 숫자라면 그 철옹성 같은 로젠타스 성도, 기습적으로 점령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나: 지옥불님, 어쩌다 보니 올림푸스 병력과 함께 들어갈 것 같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지옥불: 이미 전달받았습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오십시오!)
마치 오벨리스크를 지키는 수성 측 병력처럼.
우리 버닝스타와 피닉스는 50미터쯤 되는 레어 입구에 가운데가 튀어나온 V형 바리케이드를 친 뒤, 놈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허나 광활한 평지가 아닌 옆과 뒤가 막힌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점.
그리고 진형이 단단하게 잘 갖춰진 상태라는 이유로, 태성은 도무지 입구를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역시나 한 명 한 명이 일당백 수준으로 커버린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들이 한몫하고 있었다.
먼저 바리케이드 앞에서도 가장 선봉에 서 있는 현중이.
지금도 끊임없이 쉴드와 힐들이 들어오고 있어, 녀석은 마치 이곳에서 혼자만 특별한 존재인 것마냥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 뜬금없는 정장 차림만 아니었다면, 진짜 간지 났을 텐데!’
남들은 멋있다고 난리인 드라코닉 방어구를 도대체 왜 외변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축빙 형님의 영혼 연결까지 걸린 상태라 그런지, 수많은 원거리 공격 일점사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쉭! 쉭!
유달리 긴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는 화살.
일반적인 원거리 공격 범위 밖에 자리 잡은 힐러와 버퍼들을 노리고 쏘아진, 초장거리 저격수 라챤이였다.
이런 필드전에서 힐러의 생명력은 전투 지속력과 바로 직결되기 마련.
그 때문에 남들보다 2배는 긴 사정거리와 타연 최강의 공격력을 보유한 궁수의 활약은,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날파리들 뭐야! 올림푸스잖아!”
“피닉스 이 자식들! 아틀란티스로 모자라 올림푸스와도 연합했냐!”
급속도로 전진하다 보니, 전투 중이라 뒤늦게야 후방이 뚫린 걸 알아차린 태성 유저들이 외쳤다.
비록 초대하지 않은 지원군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보기도 힘든 페가수스 라이더들이라 빠르게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다.
“지나가세요! 저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가겠습니다!”
“넵!”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탱커들끼리 맞부딪힌 최전방까지 뚫어 아군과의 합류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댜크홀스가 끌고 온 피닉스의 후발대가 다가갔다.
그러자 바리케이드 한쪽이 자연스럽게 열리며, 그곳으로 물이 빠져나가듯 차례로 쑥쑥 들어갔다.
쉬잉!
그 모습을 본 티에스 나이츠가 성큼성큼 다가와 들고 있던 장창을 휘둘렀다.
가뜩이나 피해를 감수하며 이동하던 후발대들이 당황할 수밖에 없는 순간!
챙!
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갑자기 리버스 나이츠가 소환되어 놈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역시 서로의 공격을 블로킹할 수 있는 타이탄의 존재는 이런 순간일수록 빛이 났다.
모두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전투에선 역시나 타이탄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것이 다시금 각인될 만큼!
‘막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알겠다만…… 감히 내 앞에서 겁도 없이 타이탄을 꺼냈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 타이탄 킬러가 있는 줄 알면서도 꺼낸 건, 명백한 실수였다.
파팟!
자버프와 함께 쓴 그림자 밟기.
그 뒤에 이어진 연속타에, 우리 앞길을 가로막은 티에스 나이츠의 막대한 방어력과 체력은 순식간에 깎여나갔다.
타이탄 파괴자 업적, 용살검의 대형 및 단일 대상 추가 데미지, 약점 포착의 후방 공격 데미지 등등.
기본적으로 뻥튀기된 상태에서 이런 데미지가 추가로 들어가다 보니, 유저들의 공격은 그렇게나 잘 버텨내던 타이탄도 내겐 덩치 큰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저, 저, 저 미친 새끼!”
“돌았네, 돌았어. 게임 밸런싱이 뭐 이따위야!”
상대도 여럿 해봤고 직접 소환도 해봐서 잘 아는데…… 타이탄은 체력뿐만 아니라 보유 마나량도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만만한 타이탄 하나를 잡다 보면 금세 풀 MP가 돼버리기 일쑤였다.
유저들을 상대할 때보다 더 많은 추가 데미지가 들어가다 보니, 오히려 흡수가 더 많이 됐던 것이다.
번쩍!
역시나 순식간에 타이탄은 역소환당해버리고 말았다.
[연속 베기!]
[은밀한 일격!]
[급소 공격!]
그리고 곧바로 내가 가진 즉발 스킬들을 시전해 역소환된 타이탄에서 튀어나온 라이더를 잡았지만!
아쉽게도 타이탄의 정수를 떨구지는 않았다.
‘아무리 머더러가 아니더라도, 드랍률이 너무 저조해진 거 아니냐?’
조금 전에 잡은 타이탄 라이더까지 벌써 둘이나 잡았는데, 전부 꽝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태성 놈들을 잡았지만, 괜찮은 템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태성이 머더러를 엄금시킨 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진짜 대박이었어!”
피닉스의 후발대는 각자 직업에 따라, 바리케이드 안으로 들어가거나 앞에 서서 진형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남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내가 합류하자 축빙 형님이 말을 건네왔다.
“고생했다. 정신없겠지만, 일단 뒤에 가서 지옥불 님과 대화부터 나눠 봐.”
“네. 조금만 더 방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뒤를 보자 저 멀리 투 메르타스가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조금 앞에선 지옥불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곁에 다가온 제독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드로야. 이곳까지 날아오면서 대충 살펴봤는데, 태성의 후발대를 뒤집어 놓은 게 전부 너 혼자 한 짓이었지? 진짜 대단하더구나!”
“…….”
“고생하셨습니다, 산드로 님. 그간 어느 정도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늘 보니 여전히 제가 산드로 님을 과소평가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말 대단한 활약을 하셨습니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제독 님과는 얘기가 됐던 건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산드로 님께 진작 말씀드렸겠지요. 이번 일은 아틀란티스 길드 외에는 공유한 바가 없었습니다.”
“매그…… 아니, 드로야.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왜 자꾸 그렇게 틱틱대는 거지? 이런다고 네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계속 애같이 구는 거야?”
나와 지옥불이 나누는 대화를 듣던 제독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껴들었다.
“애라고요? 제독 형님.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죠? 그저 드래곤이 줄 업적과 아이템이 탐났다고! 왜 자꾸 마음에도 없는 도와주러 왔다는 소리만 하시는 겁니까? 도와주실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오셨겠죠! 병력을 아끼려고 막판에 합류했다는 걸, 누가 모를 거 같아요?”
“네 말은 지금, 우리 올림푸스가 고작 보스 몹 스틸이나 하려고, 몰래 재고 있었다는 거냐?”
“두 분 다 그만하시지요!”
격앙되어가는 우리 두 사람과 달리, 줄곧 침착한 태도로 일관하던 지옥불이 언성을 높였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순간입니다. 곧 태성의 후발부대가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아무리 저희 길드원들이 시간을 벌어준다 해도 입구가 뚫릴지 모릅니다.”
“…….”
“이 상황에서 선택할 정답은, 이미 두 분 다 알고 모르시진 않겠지요? 이미 이렇게 된 거, 원래 계획했던 멤버들이 바로 레이드에 돌입하고 제독 님이 이끄는 신화국의 병력이 화력을 돕는 것으로 하시지요. 그러면 오히려 레이드 시간이 줄어들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걸 누가 모를까?
‘한데 지옥불 님……. 올림푸스가 그걸 전부 계산하고 온 듯한 이 타이밍이, 너무 불쾌하다는 거라고요.’
그간 태성과의 직접적인 대립으로 힘겹게 성장해온 피닉스 덕분에, 어찌 보면 편하게 성장해서 건국까지 한 올림푸스.
사실 내 덕분에 번스타인 성을 먹었던 것도 그렇고, 그간 제독은 알게 모르게 어부지리로 많은 이득을 봐왔었다.
이번 일만도 그런 것이, 줄곧 그렇게 욕하던 태성과는 흔한 소규모 필드전 한번 없다가 갑자기 도움을 핑계로 전투에 참가해왔다.
그것도 속 보이게 지금 막 드래곤이 리스폰된 레어 앞에서!
‘이번 한 번만이다. 다음에도 이런 식이면…… 그때는 가차 없이 버린다!’
좋게 말하면 수완 좋고 전략적인 행동.
하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약삭빠른 양아치였다.
향후 시공의 틈새 주도권을 장악할 이번 드래곤 레이드의 중요성만 아니었다면,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었더라도 절대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함께하는 것으로 결론짓고 빠르게 진행하죠. 드래곤을 잡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업적이 2개입니다. 놈의 광역 스킬을 버틸 수 있는 유저는 한정적일 테니, 아마 업적은 일정 데미지 이상을 입히기만 하면 전원에게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이건 레이드 도중 알아서들 잘 공격하는 거로 하죠.”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드랍템은 어떻게 할까요?”
“이번 레이드의 메인 길드는 아무래도 피닉스니까, 지옥불 님 단독으로 획득하신 다음 차후 분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반대입니다. 비록 메인이 아닌 보조라 할지라도, 지금 이 상황에선 우리 중 하나라도 빠지면 성공이 불투명한 상태지 않습니까? 각 길드의 마스터들끼리 루팅이 되는 대로 획득하는 게 가장 공평해 보이는군요.”
“정말 이러실 겁니까…… 제독 형님?”
자신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를 리 없는 사람인데…….
제독은 계속 ‘선’을 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