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불청객 (4)
급박한 상황을 이용해서 최대한 이득만 챙기겠다는 심산.
이 정도면 어깃장이나 다름없었다.
“좋습니다. 원래 득템은 운에 맡기는 게 맞지요. 그럼 혹시 모를 먹자를 방지하기 위해 획득 권한은 저희 공격대장 셋으로 한정하겠습니다. 그럼 산드로 님, 새 멤버가 왔으니 간략하게 브리핑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옥불은 빠르고 원활한 진행을 위해 눈감아주기를 선택한 듯했다.
하지만 난 그렇기 싫었다.
제독이 먼저 이런 식으로 나왔는데, 호구처럼 계속 배려해줄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한 번 잡았다고 우습게 생각했나 본데…… 투 메르타스가 얼마나 강한 보스인지, 이번에 제대로 겪어보게 만들어 드리죠.’
그가 지금껏 숨기고 아껴온 페가수스 부대를 일부러 죽게 만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드 도중 전멸 상태에 빠질 위기에 처하더라도, 굳이 살려주려 애쓰진 않기로 마음먹었다.
“도중에 피해가 있더라도, 속전속결로 레이드를 마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페가수스는 중반까지는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으니, 그때까지 입구를 함께 막아주세요. 그동안 저희는 끌고 온 NPC들을 이용해서 드래곤의 체력을 깎겠습니다.”
“우리가 중반부터 공격하기 시작하면 루팅권에서 손해를 많이 볼 텐데?”
“그럼 저보고 뭘 어쩌라고요? 자신 있으시면 재주껏 브레스 피하면서 딜링해 보시든가요? 설마 드래곤을 상대로 프리딜하게 만들어달라고 물으신 건 아니죠?”
놈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어느 수준인지.
브레스 발동의 사전 징후는 어떻고 무슨 방법으로 피하는지.
혹은 소환 몹인 엔트는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얼마나 강한지 등등.
직접 상대하는 피닉스나 입구를 막으며 구경할 올림푸스나, 직접 상대하며 체감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새로운 패턴이 추가되는 후반 페이즈 전투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설명은 충분한 것 같군요. 그럼 시작할까요?”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옥불 님. 입구에 있는 태성은 제가 최대한 줄여놓고 합류하겠습니다!”
[산드로: 레이드 시작하겠습니다. 전원 뒤로 빠셔서 세팅해 주세요!]
[무적살라딘: 드디어!]
[축복받은얼굴: 우리 용잡이들이 다시 활약할 시간이 왔구나! ㄱㄱㄱ!]
[라스트챤스: 활이 안 박혔던 지난번의 굴욕을, 오늘은 제대로 풀겠네요ㅎㅎ]
[축복받은파볼: 라챤아~ 괜히 그러다 어그로 먹어서 레이드 망치지 말고, 그냥 적당히 살살 날리세용~]
역전의 용사들.
자랑스러운 우리 버닝스타가 투 메르타스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다가갔다.
이번엔 내가 곁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성 광장에서 많이 연습해봤으니까 괜찮겠지. 다들 겜이라면 한 가락씩 하는 실력이기도 하고!’
피닉스가 준비한 아이언 골렘 펫은 전부 20개.
그들과 함께 동선 체크를 위한 모의 훈련도 이미 몇 차례 진행했다.
확실히 레이드에 성공한 경험과 정보가 있다 보니, 우리가 처음 시도할 때보다는 여러모로 훨씬 좋은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다.
태성과 올림푸스 등에게 이런 공략법과 노하우가 노출되는 건 다소 아쉬웠지만, 어차피 앞으로 이 드래곤은 매 리스폰마다 ‘독식’이란 것이 불가능했다.
어쩌면 이번 대규모 필드전 같은 난리가 매달 반복될지도 모를 만큼.
“자, 이제 어그로 끌겠습니다!”
NPC들을 끌고 온 피닉스 정예 30명과 우리 길드원들.
벽에 붙은 공격대가 아이언 골렘으로 만들어진 강철벽에 몸을 숨기자, 현중이가 레이드의 시작을 외쳤다.
(나: 경직이 풀리면 바로 탱커들부터 공격하세요.)
(제독: 뭐? 경직? 갑자기 왜 경직에 걸린다는 거냐?)
(나: 설명할 시간 없어요. 아무튼 맨 앞줄의 탱커부터 집중적으로 공격하세요!)
현중이가 드래곤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독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공(公)은 공이고 사(私)는 사.
적들의 숫자를 한 번에 줄여버릴 찬스가 찾아왔는데, 굳이 페가수스 라이더들을 썩힐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적극적으로 써먹는 편이 좋았다.
그 과정에서 부서지고 죽어버릴지라도!
“누가 감히 나의 곤한 잠을 깨우는가!”
“캬오오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도중에.
마침내 현존하는 최강의 필드 보스가 깨어나 특유의 공격 스킬부터 사용했다.
덜컥!
“뭐, 뭐야 이 경직은!”
“사정거리 미쳤네!”
드래곤 피어.
브레스와 다르게 소리로 공격하는 이 스킬의 판정 범위는 레어 입구까지 닿을 정도였다.
덕분에 입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유저들까지 경직 상태에 빠져 멈춰버리고 말았다.
피어 공격은 피닉스와 태성을 구분하지 않고 들어가다 보니, 양쪽 다 일방적인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이런 상황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대비한 우리였기에, 첫 드래곤 피어도 이용해 먹기로 계획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분신!]
[천상의 방패!]
[신성한 보호막!]
각 직업군이 갖고 있는 저마다의 무적 판정이나 최상위 쉴드 스킬들.
우리 중 몇몇은 정확한 타이밍에 이것들을 사용해 경직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현중이가 크게 외친 소리는, 적에게는 그저 단순한 고함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겐 피어를 대비할 신호였던 것이다.
“작전대로요!”
힐러들이 본인 대신 넣어준 신성한 보호막 덕분에, 바리케이드 앞 열에 있는 탱커진들은 대부분 경직에 빠지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즉발 공격 스킬을 쏟아부으며 극딜을 하는 그들에겐, 아직 경직이 풀리는 타이밍에 맞춰 넣을 스턴 연계기까지 남겨져 있었다.
쉬쉭! 쉭쉭!
그러는 한편, 줄곧 바리케이드를 친 탱커 뒤에서 단검이나 던지던 이들도 드디어 활개를 필 순간이 찾아왔다.
얼마 안 되지만 십수 명은 넘는 도둑.
그들이 적진 한복판으로 그림자 밟기를 써서 이동했다.
펑! 퍼펑!
그리고는 곧바로 경직으로 멈춰버린 태성 놈들 발밑에 덫을 설치해 터뜨렸다.
다수에게 ‘시야 제한’이라는 광역 디버프 효과를 먹이는, ‘연막’ 덫이었다.
“한꺼번에 연막을 몇 개나 친 거야”
“피닉스 새끼들은 도대체 왜 경직에 안 걸린 건데!”
“주옥됐다! 이 자식들 힐러만 치고 있어!”
부활 합류가 용이한 마을 근처가 아닌, 이렇게 멀고 먼 필드 끝자락에서의 전투.
보통 이런 필드전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군은, 역시나 전투의 지속력을 책임지고 있는 힐러였다.
당연히 그들은 진형 한복판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보호받기 마련인데, 그걸 뚫고 잡아내기만 한다면 의외로 진형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회전 베기!]
[연속 베기!]
이번에 터진 연막은 대략 10개 이상.
아군 도둑의 수가 적어 다소 아쉬운 숫자였지만, 스킬 등을 통해 쉽게 흩어질 양은 아니었다.
사실 이 정도 숫자가 적진 한복판에서 한꺼번에 터진다는 것 자체가, 드래곤 피어라는 대규모 경직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연막 속에서 전장의 사신처럼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그레이터 힐!”
“날 치고 있잖아! 힐을 누구한테 주는 거야!”
짧지만 긴 3초의 경직이 풀리자, 주변은 온통 당황한 태성 놈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그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저들의 판단 능력은 급속도로 저하된다.
광역 스킬 파편에 맞아 조금 닳아버린 체력에 놀라, 정작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유저에게 줄 힐이나 쉴드를 본인에게 낭비하는 힐러가 속출했다.
반면 피닉스와 직접 칼을 주고받던 최전방의 탱커의 체력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가뜩이나 경직이 풀리자마자 연계 스턴과 넉백에 당해, 계속해서 맞고만 있던 그들이었는데!
솨아아- 솨아아-
제사장의 머리장식 덕분에 항시 간파 상태인 나.
덕분에 나는 연막 속에서도 철저히 힐러들만 골라서 공격해 죽여나갔다.
‘강하긴 강해……. 하지만 조금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
최강의 무기라는 디바인 검.
그걸 극딜러 중에도 손꼽히는 도둑 직업으로 2자루나 소유한 나였다.
하지만 워낙 생존에 중점을 두고 키웠다 보니, 종종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극딜러로 갔으면, 지금처럼 네다섯 방이 아닌 단 두세 방 만에 힐러들을 죽일 수 있었다.
혹은 마나 쉴드 대신 광역 공격이 가능한 다른 심화 스킬을 배웠다면 더 많은 인원을 순삭할 수도 있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캐릭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신검과 용살검을 둘 다 가진 유저라는 타이틀답지 않은 전투 방식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 많은 태성 놈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여기 산드로가 있다!”
“산드로고 나발이고 지금 정신없는 거 안 보이냐!”
1천 명이 고작 절반도 안 되는 인원의 반격에 조금씩 무너졌다.
거기에 함께 경직에 빠졌던 페가수스 라이더 백여 기까지 합세하자, 태성의 탱커진들이 거의 궤멸 직전의 상태까지 몰리게 되었다.
아무리 우리 측이 더 고레벨들로 이루어진 정예들이라고는 하지만, 보고도 믿기 힘들만큼의 압살(壓殺)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이었다.
“이제 바리케이드를 풀고 전진해라!”
이곳에 남겨진 부길마 두바이의 지시로, 줄곧 입구를 지키고만 있던 피닉스군이 전진했다.
순간의 역습을 버티지 못하고 탱커와 힐러가 당해버리자, 탄탄했던 진형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됐기 때문이었다.
와아아-!
기세가 오른 피닉스군.
후발대가 합류해 인원도 채워졌고, 올림푸스의 정예들도 함께했기에 거침없이 공격해 나갔다.
반면 태성군은,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원딜러와 근접딜러들을 보호할 탱커들이 뚫리자 허겁지겁 밖을 향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지, 지원군은 도대체 언제 와!”
“곧 도착이야! 조금만 더 버텨!”
“뭐로 버티라고! 뒤에서 말만 하지 말고 니가 직접 와서 막아보든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밀어붙이던 놈들이, 지금은 울상을 지으며 어거지로 싸우고 있었다.
난 그런 그들을 하나씩 하나씩, 조금의 딜 로스 없이 줄여나갔다.
몇몇이 그런 나를 보곤 공격해 왔지만, 이미 일점사를 할 만한 지휘 체계가 붕괴된 이상 오히려 내게 금세 당해버릴 뿐이었다.
‘후발대가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줄여놓는다!’
쿠웨엑!
그렇게 얼마나 죽였을까?
무아지경으로 눈앞의 적들을 무참히 쓸어버리던 도중, 낯익은 효과음에 정신을 차렸다.
흉폭한 오우거.
이 숲의 몬스터가 바로 앞에서 공격당하는 소리였다.
“뭐야? 여기까지 뚫린 거야?”
단단히 입구를 밀봉하던 태성 놈들이 흩어져, 구슬 때문에 이곳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과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설사 조만간 후발대가 도착한다 하더라도, 입구를 단단히 막은 피닉스의 바리케이드를 뚫기까진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해 보였다.
[산드로: 이제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축복받은얼굴: 오 벌써? ㅇㅋㅇㅋ]
[축복받은무빙: 브레스 조심하면서 와라!]
이 얼마나 어려워진 레이드인지!
미친 난이도의 레이드에 도전하는 동시에, 경쟁 적들의 공격을 디펜스해야만 했다.
첫 드래곤 레이드 당시 아무 견제도 없을 타이밍에 기습적으로 시도한 것이,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그러니까 더더욱 앞서가야 해. 아무 방해도 없이 무언가에 시도하려면, 타연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도전하는 게 최선이야!’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우리 길드.
아직 공개되지 않은 미오픈 지역이나 향후 진행될 업데이트의 과실을 빼먹으려면, 역시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며 레어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드래곤이 새로운 페이즈로 접어들고 있었다.
“건방진 인간 놈들! 너희가 감히 이곳에서 나를 대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놈의 피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을 때 나오는 패턴.
천장에서 엔트 열매가 떨어지는 부하 몹 소환 단계였다.
“올림푸스는 저와 함께 소환된 엔트를 정리하겠습니다! 나머지는 하던 대로 드래곤의 피를 깎는 데 주력하세요!”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친 다음, 떨어지는 열매를 향해 달려갔다.
당초 작전에서는 여기서부터 반씩 인원을 나눠 소환 몹을 따로 정리했다.
하지만 페가수스 라이더가 추가됐으니, 이 인원으로 소환 몹을 잡게 되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드래곤의 피를 깎을 수 있었다.
펑펑펑펑펑!
매직 미사일로 땅에 떨어져 엔트로 변한 놈들의 어그로를 끌어모았다.
본래 20마리 정도만 생겨났었는데, 이번에는 레이드 인원이 많아져서 그런지 그 서너 배는 더 많은 엔트가 소환됐다.
하지만 페가수스 라이더 한 명당 하나씩만 맞아도 문제없을 수준.
곧 정리하고 레이드에 돌입하면 됐는데 없어야 할 문제가 생겨버렸다.
“전원 원거리 공격 모드로!”
탱커가 대다수였던 페가수스 라이더들이, 들고 있던 검과 방패를 해제하고 두 손에 활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 지시가 아닌 제독의 지시에 따라, 투 메르타스를 향한 화살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 뭐 하세요! 소환몹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레이드는 실패합니다. 계속 열매가 떨어져서 금방 쌓일 거라고요!)
(제독: 너희만으로 피를 절반까지 깎았는데, 이제부터는 우리도 쳐야 템이 루팅될 거 아니냐! 네 지시대로 입구는 함께 막아줬으니 여기서부턴 우리 의지대로 행동하겠다!)
이 무슨 미친 짓을!
초대하지 않았는데 찾아와 쓸데없이 난이도만 확 높여놓고는, 이제 와 트롤 짓까지 하겠다고?
좋다.
그럼 이제부터는 이판사판이었다.
레이드가 늦어져 태성에게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독의 이런 행동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산드로: 다들 공격 중지하고 소환 몹만 잡으세요. 지금부터 드래곤은 치지 않습니다!]
[라스트챤스: 네? 왜요 형님?]
[산드로: 제독이 주제를 모르네. 드래곤한테 참교육 당하는 꼴 좀 구경하자. 비둘기들이 어떻게 타죽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투 메르타스가 내 뜻에 호응해주는 것마냥 타이밍 좋게 외쳤다.
“모든 것을 정화하는 태초의 공기를 머금노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