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카오스 스톤 (1)
“아, 진짜 짜증 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해놓고, 마지막에 이게 뭐냐고?”
“언제까지 그 소리만 할 거냐? 그만 좀 해라.”
“야! 너라면 안 열 받겠냐? 업적을 나만 못 먹었잖아!”
“그러게 누가 성기사 하랬냐? 진정한 탱커란 수많은 죽음 끝에 완성된다는 걸,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잖아?”
군단장 레이드를 훌륭히 마치고, 우리는 호라이즌 마을로 다 같이 귀환했다.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현중이는 아베르 성에서 넘어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방패를 넘겨준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쉬지 않고 징징댔다.
덕분에 함께 귀환한 지옥불과는 기쁨을 나눌 새도 없이 금세 헤어지고 말았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산드로 님. 이로써 타연에 족적을 남길 위업 하나를 남기시게 되겠군요. 차원 포탈은…… 역시나 아베르 성에 설치하실 생각이시지요?
-네 맞습니다. 지옥불 님의 결단과 아낌없는 도움이 없었다면, 저희만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저들이 대규모로 넘어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 적응하는 게 좋겠군요. 그럼 전 급히 해봐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아, 맞다! 그걸 만들어 보셔야죠? 제가 너무 오래 잡아두고 있었네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레이드 도중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일은……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소식으로 뵙지요!
약속대로 내가 드래곤의 드랍 템을 전부 넘겨준 것처럼, 그 또한 군단장의 드랍 템에는 일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선 손해는커녕 오히려 이득 본 것들이 더 많았다.
그가 끌고 온 피닉스의 정예들.
그들은 우리 버닝스타와 동등하게 A급 업적 2개씩을 전원 획득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자랑 같지만, 뛰어난 공격대장을 따랐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다음번에 리스폰 될 군단장은 무조건 우리가 또 잡는 거다? 알겠지?”
“귀환도 안 되고 마을에서도 먼 외통수 지형인 곳이라서, 앞으로 유저들이 몰리면 힘들겠는데? 아무 방해도 없었는데도 네가 죽을 정도로…… 위험한 보스였잖아?”
“인마! 너 자꾸 치사하게 나올래? 제발 좀 잡아주라. B급도 아니고 A급 업적 2개인데 나만 빼고 넘어갈 순 없잖아!”
“드로 형님, 축굴 형님도 고생 많으셨는데 깨드리죠. 물론 당장은 바쁘니까 한 반년 후쯤에는 어떠세요?”
“뭐? 라챤이 너 이 자식, 형한테 죽을래?”
“하하! 그래그래. 길드원들까지 이렇게 나서주니 고려는 해보마! 다들 400레벨을 넘기고 나면 좀 더 쉽게 잡을 순 있겠지. 크크!”
현중이를 계속 놀려대고 있지만, 녀석의 이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A급 업적.
그것도 오픈된 가장 고레벨의 필드에서 나온 보상답게, 상당한 좋은 놈들로만 나왔기 때문이었다.
[업적: 마계 군단장 학살자(A)]
* 마왕의 직속 수하인 군단장을 학살한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공격 속도 +5%, 시전 속도 +5%)
* 업적 효과로 일부 마계 몬스터들로부터 선공을 받지 않습니다.
* 마계 군단장을 추가로 학살할수록, 이 업적은 더욱 뛰어난 효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업적: 심연과 조우한 자(A)]
* 심연에게 잠식된 자를 통해 그것의 존재를 엿본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속성 내성 +10%)
* 심연의 몬스터들을 상대할 시, 추가 피해를 주게 됩니다. (모든 데미지 +20%)
공격 속도는 물론이고 시전 속도를 증가시켜주는 업적은 상당히 보기 힘들었다.
한데 둘을 한 번에 올려주는 희귀 업적이 떴으니, 스킬 사용과 일반 공격 비중이 모두 중요한 성기사 직업으로서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근데 난 심연과 조우한 자가 더 좋아 보이는데……?’
최정상급에 다다르고 나니, 대규모 전투든 레이드든 오래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만큼 스킬 하나라도 더 쓰고 도망칠 각을 엿볼 수도 있는 등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커지기 때문.
그런 생존력을 올려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첫째가 체력과 방어력 등의 스펙 수치였고, 둘째가 바로 보이지 않는 효과, ‘레벨 보정’이었다.
한데 심연과 조우한 자 업적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가 막힌 업적이었다.
세컨드 효과인 심연의 몹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것을 통해서!
‘어비스 수치를 경험치로 바꾸면서 폭렙업 중이었는데, 더 빨리 잡을 수 있게 됐다니……. 이제는 정말 목표까지 한 달도 안 걸리겠구나!’
다리우스가 10레벨 다운에도 불구하고 단시간에 랭킹 1위를 재탈환했던 이유.
시공의 틈새라는 이 신규 사냥터의 독특한 특징을 이제는 놈 대신 내가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번 레이드까지 열심히 사냥한 결과 현재 도둑 랭킹 5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날개까지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 타연을 해오면서, 언감생심 꿈에도 못 꿔봤던 통합 랭킹 1위,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그 자리가!
“드로 형님, 이제 그만 가보실까요?”
“어? 아아, 여기서 너무 지체했지? 그래, 어서 가보자!”
이제는 길드원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형님 호칭을 쓰는 당당검.
녀석은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 죽겠는지, 이동을 재촉해왔다.
“자, 다들 준비되셨죠? 갑니다?”
“어서 좀 가자! 후딱 포탈 뚫어야지!”
마을 북쪽에 있다는 환영의 마탑.
당연히 지난 며칠간 반복 퀘스트만 깨면서, 굳이 이곳을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어 미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전 필드를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마탑은커녕 어떠한 건물이나 NPC도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삭막한 평야에 숲이 조금 있을 뿐, 심지어 이동 불가 지역으로 다가갈수록 몹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타연은 어찌 됐건 간에 게임.
이곳에 마탑이 없을 리 없었다.
무려 이름에 ‘환영’이라는 명백한 힌트를 주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반응 없어요?”
“어. 좀 더 이동해 보자.”
광택을 잃은 카오스 스톤.
혹시 몰라 인벤토리 창에서 꺼내 직접 손에 쥐고 이곳을 전진했다.
하지만 한 바퀴를 다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드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효……. 내가 이래서 타연에서 퀘스트하는 걸 싫어한다니까……. 뭐가 이렇게 불친절해? 다른 게임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원사이드 진행인데!”
“그 말에 동의하진 않는 편이지만, 이건 좀 막막하긴 하네요. 환영의 마탑이라고 불리길래 당연히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퀘템까지 들고 왔으면 나타나 주는 게 정상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진행이 막혀버리자 한숨이 나왔다.
잘 투덜대지 않는 성격인 라챤이마저 같은 마음인지 동조해왔다.
쉽게 퀘스트를 깨고 싶어서 나온 투정이 아니었다.
우리가 군단장을 레이드하는 데 오죽이나 많은 준비 절차와 어려움이 있었던가?
그 모든 걸 해결하고 퀘템을 들고 와줬으면, 고생했다고 떡하니 나타나 보상을 주면 좀 좋냔 말이다.
굳이 난관을 뚫고 찾아온 유저들에게, 단서 하나 없이 계속 숨바꼭질이나 하게 만들어두었다니.
타연의 개발자란 놈들에게는 인정이라 것이 눈곱만큼도 없는 게 분명했다.
“퍼즐 풀어가듯 해답을 찾아가는 게, 타연의 묘미이기도 하잖아요? 드로 형님, 저를 한 번 따라와 보시겠어요?”
“응? 언제부터 그딴 게 묘미였지? 아무튼…… 어디로 가보려고, 당당아?”
“아까 짚이는 곳이 있었거든요. 다 둘러봤는데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곳으로 한 번 가보시죠!”
“그래? 그럼 진작 말하지! 바로 가자!”
함께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놀랍고 비범한 구석이 돋보이는 녀석이었다.
평소 게임 좀 한다고 자부하는 나나 현중이, 심지어 라챤이마저도 당당검 앞에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할 정도로.
그런 당당검이 앞장선 곳은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쳤던 거대한 나무 중 하나였다.
우리가 처음 귀환석을 통해 이곳에 넘어왔을 당시에 봤던, 무지갯빛으로 울긋불긋한 나뭇잎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나무.
제법 크기는 했지만, 그냥 흔한 오브제 중 하나인 것으로 보여 지나쳤던 건데 당당검에게는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여기예요, 이 나무. 다른 나무들보다 유독 1.5배 정도 크죠? 그게 좀 의심스럽더라고요. 다른 나무들은 다 비슷한 높이인데…….”
“당당아, 근데 우리가 찾는 건 마탑이잖아. 네 말은 이 나무가 마탑이라는 건 아니겠지?”
옆에서 지켜보던 축볼 누님이 반문해왔다.
유일한 마법사 캐릭터답게 마탑은 자주 방문해봤기에 나온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건 고정관념일 뿐, 난 당당검이 이 나무를 가리킨 순간 곧바로 이곳이 환영의 마탑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와! 우리가 완전 잘못 생각하고 있었네? 환영의 마탑이라고 하길래,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어!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환영’으로 평범한 나무로 변환시켜놨던 거구나!”
“맞아요. 형님이나 다른 길드원분들이나, 모두 게임을 잘 하시니까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하셨던 게 실수였던 거죠. 환영의 마탑이라는 이름은, 힌트가 아니라 그냥 정답이었던 거예요.”
“괜히 개발자들 욕이나 했네. 쉽게 가는 거였는데, 크크.”
곧바로 나무 밑동으로 다가갔지만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확신이 들 만큼 들었기에 이리저리 나무껍질을 만지작대자, 갑자기 손이 쑥 들어가는 부분을 통해 나무 환영 안으로 들어가 졌다.
“오! 환영이 맞다 맞아! 다들 따라 들어오세요!”
“캬! 당당이가 진짜 고수긴 고수네! 이걸 알아차리다니!”
“저도 필드를 다 돌아봤는데 마탑이 나타나지 않아서 생각난 거예요. 좀만 시간이 지났으면 모두 눈치채셨을걸요?”
겸손을 떠는 당당검이었지만, 우리 길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쟁쟁한 유저들로만 이루어진 우리 버닝스타에서도, 당당검은 가장 에이스라는 사실을.
나무 허상 속의 구조는 단순했다.
일단 우리는 전실에 들어온 듯, 작은 공간에 들어와 졌는데 앞에는 제법 커다란 문이 하나 있었다.
길드원들의 기대 속에 그 문 앞에 서게 되자, 마침내 기다렸던 반응이 나타났다.
“오랜만의 손님이로군……. 아니, 그대들은 누구지? 호라이즌의 주민이 아닌데?”
“저희는 ‘중간계’, 혹은 ‘본토’에서 ‘포탈’로 넘어온 ‘모험가’입니다. 괜찮다면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본토인들이라고? 믿을 수 없네. 아니, 어서 올라와 보게, 직접 만나보면 사실인지 알 수 있겠지!”
몇 가지 키워드를 있는 대로 던져주자, 하나 얻어걸렸는지 문이 금세 열렸다.
AI에 불과할 텐데도 연기력이 상당했다.
그저 목소리만 들렸는데 마탑주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될 정도로.
열린 문은 곧장 원통형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을 올라가자 곧 넓은 공간이 펼쳐진 2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와! 안은 넓은데요?”
“무슨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은데? 공간 확장 같은?”
“확실히 마도 시대 마법사다운 포스가 느껴지네요.”
타연에서 볼 수 없었던 희귀한 마법 효과.
그뿐만 아니라, 거대한 자신의 원목 책상에 앉아있는 NPC 또한 상당히 고풍스러운 고대 양식의 복장 차림이었다.
“이곳에 온걸 환영하네. 환영의 마탑주, 주나스 스타시커라고 하네. 이곳은 찾기 힘들었을 텐데, 제법 실력 좋은 모험가들인가 보군. 그러고 보니 요즘 내게 골칫덩이가 하나 생겼네만, 그대들이라면…….”
“저도 반갑습니다, 주나스 님. 괜히 다른 퀘스트 주실 생각은 말고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템 아시죠? ‘카오스 스톤’?”
“내 부탁을 들어줄…… 아니! 이건 카오스 스톤? 자네들 설마 마계 괴수 군단 군단장인 베르몬에게서 이 카오스 스톤을 뺏어온 것인가?”
“그럼요! 이걸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오! 정말인가? 정말 대단한 영웅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었군. 하긴 그러니 이렇게 시공의 틈새까지 넘어올 수 있었겠지만…….”
내 손의 카오스 스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주나스는 뻔한 멘트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께하는 멤버들도 있고 퀘스트는 빠른 진행을 선호하는 성격이기도 했기에, 주나스의 말을 듣지 않고 줄곧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았다.
“어때요, 이 돌을 회복시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네! 원한다면 마계가 아닌 ‘중간계’로 이어지는 포탈로 되살려 놓을 수도 있네!”
“나이스! 그럼 당장 그렇게 해주세요!”
확답까지 받아내자 더 망설일 것도 없이 쥐고 있던 카오스 스톤을 주나스에게 넘겼다.
그리고 곧바로 엄숙해진 그의 얼굴 위로 메시지창 하나가 떠올랐다.
[‘시공의 너머를 향하여: 메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