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불굴의 의지 (1)
“너무 다운되진 마.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오히려 대비할 시간을 벌었으니 잘된 일일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야말로 괜히 더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있는데 어떻게 그래? 굳이 누군가가 널 저격했다기보단, 게임하다 보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 너한테 벌어진 거라고 생각해 봐. 따지고 보면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잖아?”
다시 찾은 도네타의 안식처 인던 안.
라챤이로부터 소식을 들은 현중이가 찾아와 잠시 합류했다.
제 딴에는 사냥을 돕는다고 말해왔지만, 누가 봐도 위로하러 온 느낌이었다.
“알아. 옛날 안드로황이나 지옥불 형님이 현역에 계실 때도, 워낙 압도적인 승률을 보여주니까 메인 종족이나 주요 캐릭들을 너프했다는 걸. 어쩌면 이번 일도 내가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그동안 너무 나대서 생긴 일일 수도 있다는 걸 말야.”
“그래! 대체 타연이 몇 명이나 하는 글로벌 게임인데, 그냥 두고만 볼 수 있었겠냐? 이번 공성전에서 방송된 것만 봐도, 네 실제 플레이를 잘 몰랐던 유저들 입장에서는 밸런스가 충분히 엉망인 것처럼 느껴질 만 했잖아!”
“근데 말야 현중아. 그런 것들 다 좋아, 좋은데……. 이건 그런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란 게 문제인 거지. 의도가 너무 감춰져 있잖아, 의도가. 내게는 너무 뻔히 보이는 놈들의 그 더러운 ‘의도’가!”
“의도?”
천사병 파티의 마지막 한 마리를 내리찍으며, 특정 단어를 힘주어 강조하며 말했다.
“제루티안의 축복도 그렇고, 인챈터의 마나 웨폰도 그렇고…… 표면상으로는 날 저격한 업데이트나 너프라는 느낌은 없어. 충분히 게임사에서 업데이트할 만한 일이고, 유저들에게도 환영받을 만한 업데이트지.”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근데 그것들이 동시에 이뤄졌다는 건 좀 다른 의미지. 그럼 누가 봐도 내 올마력 마쉴 테크트리를 무너뜨리려고 억지로 한 업데이트들 같지 않아? 이런 일이 계속돼왔고, 또 이번처럼 한번에 이루어질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혼자 타이탄을 갖자마자 PK 제한을 걸었던 것이나, 제국의 NPC들을 학살해 업적을 업그레이드하는 걸 저지시켰던 것.
모두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벌였던 긴급 패치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패치가 잦은 것 같고 눈에 띄니까, 신규 업데이트란 방식으로 나를 너프시키고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놈들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걸까? 그런 권한이 있다면 편한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동안 난, 놈들이 직접적이거나 노골적인 방법으로 나를 제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아왔다.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내가 이만큼 성장해서 날아오르기 전에, 제거한다거나 날개를 꺾을 기회가 무궁무진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 볼 때, 타연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태성과 다리우스.
그리고 그 뒤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로 ‘그’ 운영자에게는, 분명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무슨 제약 같은 게 있는 건가……? 아니면…… 어떤 누군가가 그런 방법은 쓰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
갑자기 떠오른 근거 없는 추측이었지만,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가정하면 지금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어느 정도 설명되기 때문.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해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노렸던 공격 패턴은 크게 두 가지였어. 하나는 너도 알다시피 마탑주한테 빙의해서 나를 기습했던 것. 두 번째는 나를 저격한 긴급 패치들과 신규 업데이트. 이거 외엔 없었지?”
“그래. 그게 앞으로 우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지. 우리가 계속 강해져봤자, 그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예측하지 못한 기습을 계속해올 테니까. 근데, 그게 왜?”
“내가 두 가지를 콕 집어 말한 이유가 뭘 거 같냐? 놈들에겐 그 두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놈들은 그 방법밖에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 뭐라고?”
“타이탄의 PK가 문제였으면 드랍 금지 패치 대신 타이탄의 위력 자체를 너프해버리면 됐어. NPC를 학살하는 게 문제였다면, 어그로 범위를 늘리는 게 아니라 죽일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으면 됐고.”
“어……? 어, 그래. 맞아!”
“마찬가지로 내 마나 쉴드가 문제였다면 스킬 자체의 경감률을 줄이든가 물상 면역이란 옵션을 수정했으면 그만이었어. 근데 놈들은 지금처럼 스탯이나 스킬 리셋 템을 주거나, 신규 직업을 만들어 저격 스킬을 만드는 식의 복잡한 방법을 썼지. 이게 무슨 의미일 것 같냐?”
떠오르는 생각을 현중이에게 속사포로 쏟아내자, 녀석도 뭔가를 깨달은 듯 고조된 표정으로 대꾸했다.
“놈들은 기존에 만들어둔 것들을 수정하지 못한다? 아니면 수정할 수 있더라도 대대적으로 바꿀 순 없고, 아주 약간의 추가 패치나 신규 업데이트 정도만 가능하다?”
“이그젝틀리! 역시 넌 말이 통하는 자식이라니까! 방금 떠오른 가설이 바로 그거야. 놈들에겐 어떤 제약이 있거나 생겨서, 새로운 콘텐츠 추가 정도로밖에는 타연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거! 결국 놈들은 내가 이만큼 성장하도록 봐준 것이 아니라, 놔둘 수밖에 없었던 거지.”
“뭐, 뭐야? 듣다 보니 그럴싸하잖아!”
“맞든 틀리든 나한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내 적이 태성뿐만 아니라 그 뒤에 숨어있는 운영자 중 하나라면, 아무리 성장해봤자 결국엔 당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 일단 이렇게 믿고, 그걸 토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앞으로의 네 계획은 말야.”
“뭐 별 수 있겠냐, 일단은 하던 대로 해야지. 이대로 태성을 견제하는 동시에 최대한 레벨업에 집중해서 랭킹 1위에 도달할 거야. 그래서 천계와 마계에도 가장 먼저 진입할 거고. 한데 그와 별개로 다른 목표도 생기게 된 거지.”
“그러니까 도대체 너의 그 목표가 뭐냐고!”
“하하! 짜식, 답답하냐? 방금 전에 이미 만들어둔 것들은 자기들 맘대로 수정하지 못한다고 가정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론 무수한 템들을 손에 넣을 거야. 타연이란 정해진 세상 속에서 최대한 많은 ‘툴’을 손에 넣을 거라고!”
어쩌면 ‘산드로’라는 캐릭이 만들어지고 성장한 배경에는, 놈들이 건드릴 수 없는 ‘신검’이라는 ‘툴(tool)’이 주어졌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와 비슷한 툴들을 손에 여럿 넣게 된다면, 놈들이 계속해서 방해한다 하더라도 대항할 방법도 생기지 않을까?
하나도 버릴 거 없을 정도로 좋은 템들을!
놈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이 얻는다면 말이다!
“가정만 맞는다면…… 확실히 템 파밍에 몰두한다는, 그 방법이 최선일 수도 있겠네. 이따위 업데이트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방법으론 말야.”
“그래. 어차피 다리우스 놈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신규 템들은 전부 차지하려고 생각했었어. 그 계획이 좀 더 명확해지고 확장된 것뿐이지. 그러니 앞으로 한 번 두고 봐라. 나 강지환이 어떤 놈인지, 놈들한테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새로운 카운터를 만들어서 나를 약화시키겠다?
그렇다면 내가 그보다 더 강해지면 그만이었다.
아직 내게는…… 두 디바인 검 외에도 착용할 만한 부위가 많이 남아있으니까!
* * *
“그러니까 여기서 주로 사냥하신다는 거죠?”
“응, 그래. 사냥보다는 주로 이곳저곳 돌아다니시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요즘엔 여기에 많이 나타나셨다고 하더라고.”
지웰 성 동부 지역에 위치한 화전민 마을.
그곳을 벗어나 좀 더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금 무살 형님과 내가 서 있는 ‘페어리 언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사냥도 못 하시고, 형님의 여러 지인분들도 귀찮게 해드렸네요.”
“무슨 소리야? 겸손인지는 모르겠는데, 너 그런 말 자꾸 하는데 앞으로 내 앞에서는 하지 마라. 비록 내가 형이긴 하지만, 난 길드원이고 넌 길마야. 한 길드의 수장이 왜 자꾸 그렇게 저자세인 거야?”
“네? 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형님!”
항상 살갑게 구는 무살 형님이었지만, 둘만 있는 지금 같은 때에도 이런 일에는 칼 같았다.
“듣기론 그 템으로 워낙 데인 게 많으셔서, 길드도 있으신데 거의 혼자만 다니시는 것 같더라. 물론 진작부터 귓속말은 다 꺼두신 상태로만 게임 하셨고.”
“여러모로 아픔이 많으신 분인가 보네요.”
“알려진 것처럼 몸이 불편하셨던 분이니 그럴 수야 있지만, 그거 때문에 그러신 것 같진 않아. 성향이 워낙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건너 들었다.”
이제 올마력 마쉴 테크트리의 수명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난, 잠시 레벨업이 늦춰지더라도 이를 보완할 만한 수단을 찾거나 새로운 테크트리를 찾아내야만 했다.
-네 뜻은 잘 알겠다. 그동안 드로, 너는 새로운 드랍 템들을 얻는 것에만 몰두해왔었지? 혹시 거기에 이유가 있었니?
-네? 아뇨, 형님. 전 그저 제가 착용할 만한 아이템들은 전부 시중에서 골드로 구하기는 힘들고…… 또 하다 보니 직접 레이드해서 먹는 게 더 편하고 빠르기도 해서 그런 거였어요. 기존의 유명한 템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아는 장사꾼님을 통해서 꾸준히 구매는 시도했었어요!
-그랬구나? 하긴 레전더리급, 특히나 고강화 템들은 쉽게 구하기 힘들긴 하지.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데……. 네가 말한 앞으로의 계획이 그렇다면, 일단 한번 시도라도 해보고 포기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제가 레벨업도 빨리해야 하고 개척할 곳도 많아서 시간을 투자하기가 좀 힘들 것 같아요. 거기다 제 목표는 디바인급 방어구나 액세서리인데, 기존에 풀린 레전더리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도 같고요.
-같은 레전더리라도 급이 다른 템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구나. 거기다가 고강화면 디바인급에 맞먹는다는 사실도……!
-네? 그런 템이 있어요?
-그래. 대중에 널리 알려졌지만, 옵션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몰랐을 거다. 한번 그 템의 주인을 한번 만나봐라. 의향만 물어보는 데는, 시간이 크게 낭비되진 않을 테니까.
현중이에 이어 지옥불 형님과 상담한 자리에서, 생각지 못하게 새로 목표로 삼을 만한 아이템에 관한 단서를 얻었다.
그리고 그 아이템은, 놀랍게도 나도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던 템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타연이 출시된 지 막 1년이 지났을 무렵, 세상에 놀라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그건 불행하게도 음주운전 차에 치여 하반신 마비에 빠졌던, 한 젊은 대학생에 관한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몇 년간 절망에 빠져 지내던 청년은 우연히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금세 중독되듯 빠져버리게 되었다.
그에게 삶의 구원과도 같이 다가온 게임은, 당연하게도 타이탄 연대기였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시간 이상 하드하게 플레이하던 그 청년이, 갑자기 마비 상태에서 회복됐던 것이다.
이 일은 당연히 대서특필되며 의학계는 물론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그 청년은 한순간에 모든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 됐다.
그 후 지금까지도 그 청년 외에 비슷한 케이스는 한 번도 재현되지 않은,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으나…….
일루전은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여러 문제점과 중독성이 너무 심한 탓에 점차 부정적으로 변해가던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이미지가, 단숨에 반전됐던 것이다.
심지어 청년이 중증 게임 중독에 가까울 만큼 플레이했다는 사실 또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가상현실을 통해 신체적 문제는커녕 장애마저 극복했다는 스토리가, 정말 돈 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이미지 개선 효과를 안겨준 것이다.
이에 당시 총괄 디렉터였던 장현수 부사장은, 그 청년에게 단 하나뿐인 아이템을 만들어 전해주며 이 기적 같은 미담을 기념했다.
-분명 ‘불굴의 의지’……. 뭐, 이런 이름이었었죠?
-맞다, 불굴의 의지. 오직 그 청년을 위해 만들어진 탓에,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을 레전더리 액세서리지. 마찬가지로 타연이 종료되는 그 날까지, 절대 사라지지 않을 템이다.
-네? 그게 무슨……?
-대부분은 잘 몰랐겠지만, 그 아이템에는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는 옵션이 달려있었다. 따라서 그 템을 받게 된 그 청년은…… 분명 레전더리 템임에도 불구하고, 풀강화인 10강화까지 만들어 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