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다크 엘프 (2)
“네? 캘 거라고요?”
“그래. 안 그래도 업데이트된 곳은 고레벨 지역이라 전설급 채집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여기도 그중 하나인 같다. 역시 생명의 숲이란 이름이, 괜히 붙었던 건 아니었나 봐.”
“와우, 레전더리급!”
현재까지 필드에서 획득 가능한 채집물 중, 가장 높았던 건 고작 유니크 등급에 불과했다.
간혹 특정 지역에서 랜덤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레전더리급 채집물이 발견되긴 했으나, 필요 숙련도가 낮아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현재 이곳은 오직 극소수만 들어올 수 있는 필드.
이 지역에서 레전더리급 채집물이 뜬다면, 상당 기간 독식할 수 있을지 몰랐다.
‘벌써 투자의 결실을 맺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친구 목록을 살펴보자, 당연하다는 듯이 접속해 있는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꿈틀이(접속 중)]
내가 아는 모든 유저를 통틀어서 반복 노가다에 가장 진심인 유저.
그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나: 꿈틀이님, 아침부터 열심히 시네요. 불쑥 연락드려서 죄송한데, 혹시 숙련도 9성에 달성하셨나요?)
(꿈틀이: 이야 어떻게 아셨어요? 딱 어제 달성했는데요!)
(나: 오! 완전 잘됐습니다! 그럼 혹시 이곳으로 와주실 수 있겠어요? 대박 스팟을 발견했거든요!)
(꿈틀이: 오, 정말요! 안 그래도 요즘 스팟이 메말랐었는데 잘 됐네요!)
그는 우리 길드 소속도 아니라 제국의 수배를 받지 않는 몸.
생명의 숲으로 이어지는 ‘룬트 강 다리’의 위치를 링크 걸어주자,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굳이 우리처럼 마차를 탈 필요 없이, 공간이동 후 빠른 기동력을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산드로 님!”
“생각보다 더 일찍 오셨네요!”
“다 님 덕분에 얻게 된 이놈 덕분이죠, 뭐!”
마중 나온 다리 위.
낚시꾼들의 부러움을 한눈에 받으며, 페가수스 한 마리가 우아한 포즈로 안착했다.
그가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페가수스를 얻은 것은, 다 나의 전폭적인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벨업하느라 바쁜 와중에 굳이 거길 다녀와야겠어? 그냥 하나 사 드리든가?
-노가다만 하느라 힘드실 텐데, 바람도 쐴 겸 업적도 얻게 해드릴 겸 잠깐만 다녀오자. 투자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않겠냐? 도중에 섭섭하시지 않도록!’
문득 다시 페어리 퀸의 퀘스트를 함께 진행했던 현중이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드래곤 레어라는 쾌적한 환경에서 숙련도를 높이던 것도 잠시.
우리와 태성의 대규모 필드전 이후, 그곳은 온갖 채집꾼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변했다.
유저들의 레벨도 올라가고 그곳에 유저들이 많이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런 그의 숙련도를 돕기 위해 내가 택한 차선책.
그건 바로 빠른 페가수스 획득이었다.
-네? 타라고요? 어디 가는 건데요?
-아마 이번이 훼라리에 타는 마지막이 되실지도 모를걸요? 이제부턴 혼자 날아다니실 테니까요!
-앗! 설마……?
일주일의 퀘스트 쿨타임이 끝나자마자, 난 그를 데리고 공중정원을 방문했다.
소위 말하는 ‘버스’를 태워준 것이었다.
그렇게 페가수스를 얻게 된 이후.
그는 이동이 힘들던 산 정상이나 걸어서는 닿지 못하던 필드 등의 채집 스팟을 돌아다니며, 마침내 채집 숙련도를 9성까지 높이는 데 성공했다.
“근데 여긴 어디예요?”
“에이,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죠. 들어가 보시면 알아요!”
그를 데리고 엘프 순찰자들을 지나쳐 생명의 숲으로 들어왔다.
중간에 티로엔이 한번 막아서긴 했으나, 역시나 내가 동행한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다.
“와…… 엘프 숲이라니……. 제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랭커들보다 더 먼저 올 줄이야!”
“이곳을 아세요?”
“그럼요! 어딘지는 몰라도, 저희 채집꾼들 사이에서는 세계수가 있는 곳이 어마어마한 맛집일 거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던 걸요!”
그런 그의 기대는 축빙 형님을 만나자 더욱 극대화됐다.
“인던 때 뵈고 처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고고…… 그때 한 것도 없었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또 불러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근데 절 부르신 건…… 역시나 채집 때문이시죠?”
“아참, 이러고 있을 새가 없네요.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얼른 따라와 보세요!”
축빙 형님은 곧바로 우리가 어제 가보지 않았던 세계수 반대편을 향해 앞장섰다.
푸른 숲이 우거졌던 입구 쪽과 달리, 세계수 너머부터는 조금씩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특이하게도 크고 작은 나무가 어우러져 있었고, 고산지대나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다양한 수종(樹種)이 함께 공존하는 특별한 풍경이었다.
“아니, 이것들이 다 뭐야! 만드라고라가 널려 있잖아! 우왓! 이건 에이튼 가시나무? 잠깐만요!”
하지만 꿈틀이는 나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
잘 따라오던 그는 갑자기 제자리에 웅크려서 채집물을 따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지금 그런 거 딸 시간이 없어요!”
“네? 이거 유니크급인데요? 이것 때문에 부르신 거 아니었어요? 그동안 유저가 한 명도 없어서 그런지 완전 널려있는데요?”
“좀만 더 가면 레전더리가 떠 있다고요! 빨리 따라와요!”
“네? 뭐라고요?”
축빙 형님의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유니크급이라던 채집물을 그냥 캔슬해서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형님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흔하디흔한 공터.
특별할 거 없는 그곳에 정말로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름의 채집물이 하나 박혀있었다.
<천년 산삼>
새 필드에 먼저 도착하면 그곳에 있는 많은 것들을 선점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영웅의 전당에도 꿈틀이를 합류시켰던 건데, 이제야 드디어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채집 숙련도 9성을 달성했더라도, 전설급 채집물을 채집하는 건 순전히 운의 영역.
우리 같은 유저로 치자면, 눈앞에 디바인 템을 주는 필드 보스 몹을 혼자 발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갑자기 사라질지 모르니까, 바로 트라이할게요!”
그래서 그런지, 꿈틀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바로 채집에 들어갔다.
특수 장비 등을 통해 성공률이 올라갈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알기론 그는 이미 풀템이라고 들었다.
예전엔 그다지 벌이가 시원찮았지만, 한동안 드래곤 레어에서 채집물을 쓸어 담으며 순식간에 큰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이제 여기를 또 독식하게 될 테니…… 진짜 이분도 인생 제대로 피셨구나!’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역시나 그렇듯, 뭐든 쉬운 게 없었다.
“으악, 미쳤다! 실패예요!”
“뭐라고요?”
“날아갔다고요. 힝…….”
“이런…….”
9성이 되면 레전더리급을 채취할 수 있었던 거지,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허망하게 실패해서 없어져 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너무 상심 마세요 꿈틀이 님. 여기는 필드도 넓은데 몹도 안 떠서 독식하시다 보면 조만간 또 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오신 김에 이것도 한 번 채집해 보시겠어요?”
“네? 뭐가 더 있었어요?”
“영약이나 영단 같은 먹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급이 높아 보이는 게 하나 더 있더라고요.”
실망한 게 언제냐는 듯이, 형님의 말에 다시 기운을 되찾은 꿈틀이를 이끌고 도착한 곳.
거기엔 어른 키만 한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세계수 묘목>
그리고 이름이 금색인 것으로 보아, 역시나 산삼과 같은 레전더리급 채집물로 보였다.
“와, 이건 또 뭐지? 대체 형님은 언제 이런 것까지 찾아두신 거예요?”
“너야 이것저것 할 게 많으니까, 놓칠 만한 게 있나,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봤지.”
“형님…….”
“말씀 나누는데 죄송한데, 이것도 역시 바로 시도하겠습니다!”
형님께 감동받으려는 찰나, 꿈틀이가 조금 전 산삼을 캘 때와 비슷한 포즈로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는 그 상태로 분주하게 나무를 빙빙 돌았다.
다른 채집물을 캘 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어느 순간 눈앞에 있던 묘목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와, 대박! 이건 성공했어요! 최초의 레전더리급 채집물이예요! 업적도 뜰 줄이야!”
“네? 정말요? 와, 축하드려요!”
“템은 어때요? 설명에 뭐라고 쓰여 있어요?”
“직접 보여드릴게요, 한번 봐 보세요!”
서둘러 교환을 걸어 아이템을 보여주는 꿈틀이.
그러자 확실히 처음 보는 종류의 아이템이 교환창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세계수 묘목(레전더리, 특수 아이템)>
* 세계수로부터 떨어져나온 가지입니다.
* 땅에 심어 자라게 되면, ‘세계수의 기운’ 효과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특정 시간마다 세계수의 열매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현재 수호령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계수 기운? 이건 뭐지?”
“버프 같은 거 아닐까?”
“오…… 그럼 자기 영토에 심으면 짱이겠네요? 열매도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고?”
“그렇겠지. 근데 수호령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이지……?”
확실히 영약 같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템이었지만, 곱씹어 볼수록 괜찮은 아이템 같았다.
“저기 꿈틀이 님. 괜찮으시다면…… 혹시 이거 저한테 파실 생각은 없으세요? 저희 아베르 성에다가 심으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고 싶어서요.”
“네? 사신다고요? 이걸 산드로 님한테 어떻게 팔아요?”
“네?”
“그냥 가지세요. 저한테는 필요도 없는 템인 걸요.”
우리 길드원들에게 겪던 일을 다른 유저한테도 겪게 될 줄이야.
겨우겨우 얻게 된 전설 템을 팔아달라는 것도 미안한데, 그냥 주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레전더리급인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숙련도를 돕는 조건도 우선 판매해달라는 거였지 그냥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요…….”
“애초에 님 덕분에 제가 이 숲에 올 수 있었잖아요? 저 혼자라면 들어오기는커녕 이런 곳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을 거예요! 이번만은 그냥 처음이라서 주는 거라고 생각하시고 편히 받으세요. 보니까 퀘스트랑도 연관 있을 것 같은데요!”
“네? 퀘스트요?”
“이런 일회성이 아닌 아이템은 보통 퀘템과 비슷한 역할을 하더라고요. 어떤 용도일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스토리와 연관돼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건 아마…… 산드로 님이 푸실 문제겠죠?”
그렇게 그는 세계수 묘목을 넘겨주고, 곧바로 생명의 숲을 돌아다니며 다시금 채집 삼매경에 빠졌다.
* * *
NPC들과의 대화에서는 특별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축빙 형님.
어쨌든 우리가 놓칠 수 있었던 세계수 묘목을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하셨는지, 곧바로 주무시기 위해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자, 길드원들이 하나둘씩 접속하기 시작했다.
[산드로: 이상이 제가 지금껏 알아낸 바입니다. 축빙 형님이 도와주셔서 생명의 숲은 조사가 다 끝났어요.]
[라스트챤스: 캬! 왜 아직 안 들어오시나 싶었는데, 밤새 단서를 찾으시고 뒤늦게야 주무시러 간 거였구나!]
[산드로: 저희는 제국 내부를 찾아보긴 힘들어서, 거긴 카이저 형님께 일임하기로 했습니다. 워낙 퀘스트라면 도가 트신 분이니까 그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대탐험시대: 그럼 저와 파랑이는 페어리 출몰 지역을 살펴볼게요. 생명의 숲에 페어리들이 보였던 걸 보니, 조사해보면 캐볼 게 좀 있을 거 같아요.]
[축복받은얼굴: 난 누나랑 생명의 신 텔로라 관련 NPC들을 찾아볼게. 아무리 봐도 생명의 숲은 걔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당근당근단검: 전 드로 형과 다닐게요. 드로 형은 다 잘하는데 NPC랑 대화 나누는 게 조금 서투시더라고요.]
다들 어제 퀘스트를 함께 했던 터라, 접속하자마자 바로 단서 찾기에 돌입했다.
그래서 각자 두세 명씩 팀을 나눠 타연 전역을 뒤져보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당아, 그럼 우리는 어디부터 가볼까?”
“사실 제국부터 뒤져보는 게 정답 같긴 한데……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도 단서가 자주 나오는 타연이니까, 로낙쏜은 어떨까요?”
“로낙쏜?”
“네. 설정상 드워프들은 엘프랑 사이가 안 좋다고 알려졌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보단 더 아는 게 많지 않을까요? 싫어한다는 건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같은 하늘 산맥 지역이기도 하고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 같아, 우리는 곧장 드워프들의 도시 로낙쏜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