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듀얼 클래스 (1)
“응? 뭔 얘기? 갑자기 무슨 소리야?”
과연 단 한 명밖에 가질 수 없는 디바인급 템답다고나 할까?
뛰어나긴 해도 다소 특색 없는 옵션들로 이루어졌던 것을, 마지막 이 옵션이 전부 만회해주고 있었다.
‘이러면 템을 가진 유저의 입맛대로, 템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더구나 나에겐 번개보다…… 오히려 이 바람이 완전히 딱 맞춘듯한 옵션이고!’
보통 유저가 템에 맞춰 조합이나 테크트리를 바꾸면 바꿨지, 유저에게 맞춰 템의 성능을 바꿨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템은 등장한 그 순간부터 스펙이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 반지는 비록 단 하나의 옵션이라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유저가 의도적으로 원하는 스탯이나 효과를 집어넣을 수 있었다.
“중급 정령을 봉인했을 때 주어졌던 보너스 수치가 뻥튀기됐어. 특히 정령왕이라서 그런지, 새로 붙은 한 가지는 말도 안 되게 좋아.”
“뭔데 그래?”
“물회 10% 추가.”
“뭐? 진짜로? 대박이네!”
5성 집중 회피에 붙은 패시브 회피율은 7.5%.
나처럼 특이한 경우로 8성을 달성하더라도 고작 12%에 불과했다.
얼핏 낮은 듯싶었지만 적지 않은 수치였다.
데미지 감소 수준이 아닌 완전 ‘회피’ 판정은, 같은 수준의 감소율보다 효과가 우월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정령왕들은 시험해 볼일도 없겠네. 시간도 아끼고 잘됐다. 이제 바로 찾아가 볼까?”
“오, 드로 형님. 드디어 결정하신 겁니까?”
옆에 있던 라챤이가 반색하며 물었다.
“그래, 오래 기다렸다. 이제 난…… 타연 최초로 듀얼 클래스가 된다!”
* * *
처음부터 이중 직업을 택할 생각이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난 어중간하게 1차 직업 2개를 갖는 것보다는…… 상위 직업으로 발돋움하는 전직을 더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분간 전직이란 시스템은 앞서나가는 소수의 랭커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고, 보나 마나 더욱 강력한 고유 스킬들이 제공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루티안의 축복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말이지…….’
하지만 도중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계기는 많았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나 아베르 수성전.
바로 그날의 ‘특별’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수성이 끝나가던 무렵, 내성문을 뚫고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던 태성의 병력들.
난 성문 한복판에 서서 혼자 그들을 오롯이 마주했다.
마쉴 테크와 강력한 템들을 믿었던 도박.
그 결과 난, 결국 공성이 끝날 때까지 수천 명을 상대로 죽지 않고 버텨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버티는 것……. 그것밖에는 할 수 없기도 했지.’
문제는 내가 죽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놈들이 날 무시한 채 전부 돌격했다는 것이었다.
수성전이라는 특별한 전투 상황인 영향이 컸지만, 솔직히 나로선 충격이었다.
날 상대하지 않고 전부 지나쳐가자, 무력하게도…… 단 한 명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었다.
절대 죽지 않는 무적의 방패를 얻게 되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캐릭이 되고 만 것이다.
물론 빠른 이속과 여전히 위협적인 공격력 덕분에 이 같은 생각은 어폐겠지만,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딱 이와 같았다.
신검과 용살검이라는 최강의 무기를 둘 다 가진 내가, 이런 형편없는 공격력이라니!
레벨업을 하면 할수록,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맷집만 세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데 더 큰 문제가 찾아왔다.
나를 저격할 캐릭으로 재성장시킬 수 있는 스탯 및 스킬 초기화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마쉴의 카운터나 다름없는 신규 직업이 등장한 것이다.
앞으로 인챈터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가 설 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
그렇게 결국 난, 지금과 같은 선택을 ‘강요’받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와…… 형님이 선택한 두 번째 직업이 여기였어요? 진짜 의외네요.”
“그러게. 끝까지 숨기고 말을 안 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인챈터가 아니라 이거였네?”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고 싶다며 따라온 라챤이.
그리고 하릴없다며 함께 온 현중이.
녀석들이 내가 도착한 건물을 보고는 나지막한 탄성을 뱉었다.
이중 직업을 택하는 것까지 알곤 있었지만, 설마 내가 이 직업을 고를 거라곤 둘 중 아무도 예상 못했기 때문이었다.
<악마 사냥꾼 임시 본부>
데스라 사막 남부에 위치한 중립 도시 캄랑.
얼마 전 이곳에, 신규 직업 악마 사냥꾼의 본부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신대륙에서 넘어왔다는 인챈터의 등장 배경.
그와 달리, 악마 사냥꾼의 스토리적 등장 배경에는 우리가 레벤다스를 획득했던 지하 고대도시의 발견이 있었다.
그곳에서 마계 몬스터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지고 마침내 시공의 포탈로 마계 군단장의 존재마저 알려진 대륙.
그러자 뿔뿔이 흩어져 활동하던 악마 사냥꾼들이 조직을 꾸렸다는 내용이었다.
돌연 신규 직업을 추가한 것 같지만, 은근히 이것저것 신경 쓴 척 업데이트하는 일루전이었다.
“그래, 내가 선택한 세컨 직업은 악마 사냥꾼이야. 사실 이 조합을 생각해낸 지는 꽤 됐는데…… 생각이 바뀌긴커녕 더 확신이 서더라고? 그러니까 더 볼 것도 없어. 이게 내 인생 직업이다!”
난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2층 구조의 허름한 석조 건물.
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얼마 전 만났던 마스터의 방에 들어갔다.
벽에는 장검과 단검, 석궁 및 전투 망치 등 온갖 중장비가 걸려있었고, 중앙에는 여러 무기를 한 몸에 무장한 NPC가 서 있었다.
짧은 흑발에 외눈이라 한쪽에만 검은 안대를 한 중년 남성.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느낌을 풍기는 악마 사냥꾼, 오리스였다.
“그대는 이름 높은 도둑, 산드로 아닌가? 나에겐 무슨 볼일이지?”
주요 NPC답게 뛰어난 AI로 랭커를 맞이하는 오리스.
원래 아무 직업도 없는 상태였다면 다른 멘트였겠지만, 이미 난 직업이 있는 몸이라 몸소 키워드를 제시해줘야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전 당신의 뒤를 따라 새롭게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고자 찾아왔습니다. 제게 ‘두 번째 직업’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오…… 뭐야? 지환이 이 자식, 이제 제법 게임어 좀 하는데?”
내 진지한 모습에 옆에서 중얼대는 현중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오리스는 내 말에 곧바로 태도를 바꾸며 반색했다.
무섭고 쌀쌀했던 모습에서, 기특하기 그지없다는 다정한 표정으로.
“어허, 설마 우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 날 찾아온 것이었나? 자네는 보기보다 참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군! 비록 현재는 마계의 존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없어, 혹자는 지금 세상에 무슨 악마 사냥꾼이냐고들 하지만…… 정녕 어리석은 소리지. 우리가 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암암리에 어떤 활약을 해왔는지 알게 된다면, 그따위 말은 못 할 텐데 말이지.”
“…….”
“그들은 마치 어둠 속 달빛처럼 세상 모든 음지에 은밀하게 숨어있지. 한데 요즘 들어 낌새가 심상치 않아. 아마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네. 그리고…….”
“…….”
“……여하튼! 자네와 같은 두려움 없고 용맹한 일원의 합류는 언제든지 환영이네!”
띠링!
[두 번째 직업 ‘악마 사냥꾼’을 선택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선택하시겠습니까?]
거친 남자와 같은 외형과 달리,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던 오리스의 말이 끝나자 선택지가 떠올랐다.
한번 택하면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직업 선택.
하지만 이미 충분한 시간을 고민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기에 주저는 없었다.
[YES]
[새로운 직업으로 ‘악마 사냥꾼’을 선택했습니다.]
[업적 ‘두 길을 걷는 자’를 획득했습니다.]
“앞으로 무시무시한 마계의 마물과 마족들을 상대하게 될 텐데, 거기엔 우리만큼 많은 노하우를 가진 자들도 없지! 당장 우리만의 비법 기술들을 배워볼 생각이 있나?”
“네, 마스터. 지금 제가 배울 수 있는 스킬들과 관련된 퀘스트는, 전부 빠짐없이 주시죠.”
지금 이 직업을 택함으로써, 현존하는 가장 높은 레벨의 악마 사냥꾼은 바로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남들은 아직 레벨 제한으로 얻지 못한 퀘스트들까지 한꺼번에 주어졌다.
[퀘스트 ‘보이지 않는 존재들’를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어둠의 흔적’을 획득했습니다.]
[퀘스트 ‘케르베로스의 불길’을 획득했습니다.]
……………………
무려 15개나 되는 퀘스트.
이 중 내가 택하지 않을 고유 스킬들도 있을 테니 한 번에 해결하기엔 쉽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내가 직접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직업들의 고유 스킬은 오직 직업 퀘스트를 통한 보상.
즉, ‘스킬북’이란 존재를 통해서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 퀘스트도 얻었으니까 나가 보자.”
“어딜 가시게요? 형님?”
“직업을 택했으니까 스킬도 배워봐야지.”
난 그길로 이 마을의 거래소를 찾았다.
그리고 물품 검색란에 악마 사냥꾼의 스킬들을 하나하나 전부 검색해서 구입했다.
골드를 목적으로 스킬북 퀘스트를 반복하는 유저들은 넘쳐나는 편.
덕분에 얼마 되지 않는 골드로, 200레벨대까지 배울 수 있는 스킬들을 전부 구매할 수 있었다.
“근데 형님. 지금 스킬 포인트가 남아있긴 하세요?”
옆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본 라챤이가, 거래소를 나서는 내게 물었다.
“없지. 모아 뒀던 게 있긴 했는데 라이트닝 배리어를 익히느라 전부 다 써버렸으니까.”
“킁. 그럼 지금 구매한 스킬들은 어차피 못 배우는 거 아니에요? 이럴 거면 애써 듀얼 클래스가 된 보람도 없네요? 당분간은 배워봐야 한두 개 정도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그럴 거였으면 나중에 선택해도 되는데, 뭐 하러 지금 확정 지었겠냐? 난 지금 당장, 익힐 건 익히고 버릴 건 버릴 거야. 따로 염두에 둔 테크트리가 있어서 지금 데빌 헌터를 선택한 거니까.”
“네? 어떻게요?”
“고정관념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설마 내가 그걸 쓸 거란 생각은 아예 못 하는 모양이네? 왜, 저번에 너도 하나 받은 ‘그거’ 있잖아.”
“뭐지……? 아니, 설마?”
“그래. 제루티안의 축복을 쓸 거야. 그래서 오늘부로, 산드로 인생에서 마나 쉴드는 영영 안녕이다.”
내게 선택이 강요됐다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마나 쉴드’.
내 캐릭과 내 활약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심화 스킬.
이 스킬의 메리트가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엔 그저 마나 드레인이나 내가 가진 마흡 반지 정도의 카운터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챈터란 직업이 등장한 이후, 난 이 테크트리가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전히 몬스터나 특정 상황에서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칠 수 있겠지만…….
유저들 간의 대규모 전투에선 나날이 약해질 게 뻔히 예상됐기 때문이다.
소진되는 MP를 흡수하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 테크트리는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하물며 가뜩이나 동료들로부터 힐링 스킬도 받지 못하는 터라 더더욱!
그러니 내게는 이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조합이 필요했고…….
난 그 해답을 특정 스탯과 ‘악마 사냥꾼’의 고유 스킬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마쉴이 없으면 대규모 쟁을 버티실 수 있겠어요? 다들 형님만 노릴 텐데요? 이젠 디바인 템도 한두 개가 아니라, 절대 죽어서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악마 사냥꾼을 택한 거지. 그런 전투를 버틸 수 있는……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 떠올랐거든. 그리고 알게 되더라도, 나 말고는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말은 쉽지만 그런 게 가능할까요? 물론 어설프지만, 이젠 마쉴도 따라 하는 유저가 생겼던데요!”
내가 세상에 등장한 이후, 마나 쉴드를 찍는 유저들이 많이 늘어났다.
심지어 인챈터들 사이에서는 마나 쉴드를 활용한 조합이 상당히 좋다는 평가도 돌고 있었다.
이처럼 어떤 테크트리가 좋아 보이면, 유행처럼 따라 하는 유저가 느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러다 보면 메리트는 줄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으로 좋으면서 획기적인, 그러면서도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극단적이면서도 유니크한 테크트리.
동시에 내가 지금껏 이룩한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조합.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건 어려웠지만, 결국 난 해답을 찾고야 말았다.
통합 랭킹 1위라는 특별한 상황을 적극 활용해서!
“그래서 이젠 극 회피 조합으로 가보려고. 레벨 보정으로 강화된 회피율을 극대화하고, 마력 대신 민첩 스탯을 찍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