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신의 선물 (2)
“맞다! 너한테 그게 있었지?”
잊고 있었던 건 아니다.
대탐이와 기파랑을 가입 받으며 약속했던 사항이니까.
그저 간절함의 차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대탐이처럼, 신의 눈물이란 템이 나오자마자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확인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 내가 오히려 미안하다. 천계 루트를 뚫은 지도 꽤 됐는데, 복구 방법부터 알아볼 생각을 못 했네.”
“뭘요, 얼마나 바쁘셨는지 아는데요. 흔쾌히 오케이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당!”
“그리고 듣고 보니 그럴싸해. 제독은 이 생각을 못 해봤으려나? 아, 우리처럼 득템을 많이 한 유저도 드물지 참.’
제독은 이미 쓰레기라고 부르고 있는 이 재료템의 용도.
생각해보니 대탐이 같은 케이스는 드물어서, 따로 연구해보지 못했을 것도 같았다.
막 건국했지만 딱히 해야 할 일도 없던 터라, 우리는 다 함께 로낙쏜을 찾았다.
“허헛! 이 엄청난 힘을 담고 있는 구슬은 대체 무언 겐가? 이런 건 난생처음이로고. 클랜의 어르신들께도 들어보지 못한 게 있을 줄이야?”
“영감님! 혹시 이걸로 이 부츠의 진정한 힘을 회복시킬 순 없을까요?”
“허헛헛! 부끄럽네만 이건 내 역량을 넘어선 일이네!”
로낙쏜의 3대 클랜 마스터.
그들을 전부 만나보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처음 보는 물건이군…….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지만…….”
그 후 위험을 무릅쓰고 오스타그의 달켄도 방문했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면 남은 건 역시?”
“그래. 마탑들을 방문해 보는 수밖에 없겠다. 그래도 조짐이 좋은데? 장인 NPC들이 반응을 해주잖아?”
시험 삼아 신의 눈물만 꺼내면 별 언급도 없다가, 부츠와 함께 보여주면 새로운 멘트를 했다.
퀘스트 템 진행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
즉 번지수를 잘못 찾았을 뿐, 방향은 제대로 맞췄다는 뜻이었다.
“딱히 지혜의 마탑에 방문할 필욘 없으니까…… 녹색 마탑이나 칠흑 마탑에 먼저 찾아가 볼까?”
“흠……. 아무래도 고대 물건이다 보니 주나스도 괜찮을 거 같아요. 천계 루트와도 연관이 깊었던 마탑주니까요.”
“아, 그렇네! 환영 마탑부터 가보는 게 좋겠다! 고고!”
이젠 다들 퀘스트에 베테랑이 된 터라, 척하면 척으로 다음 목적지가 나왔다.
혼자였다면 한참을 헤매거나 아무 의미 없이 뺑뻉이만 돌았을 시간.
하지만 이렇게 길드원들과 함께, 무언가를 목표로 머리를 맞대 의논하고 이동하는 시간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천문을 개방한 자 산드로여.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을 다시 찾았는가?”
“주나스 님. 이번엔 제가 아니라 제 옆에 있는 동료 일입니다. 대탐아?”
“네, 형님. 주나스 님, 이걸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인벤토리에서 신의 눈물과 부츠를 꺼내 각각 양손 위에 든 대탐이.
그 모습을 본 주나스가 돌연 태도를 바꾸며 말했다.
“이 신성력이 가득한 물건은 설마…… 오, 세상에! 이것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이것들을 알아보시겠어요?”
“신마전쟁 당시, 권속들이 타천사로 타락하는 것을 보며 흘렸다는 신들의 눈물……. 부정하고 삿된 것들을 멸하는 힘이 담긴 이 신물로, 12영웅의 장비가 만들어졌단 소식을 들은 적 있네. 한데 이게 아직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그럼 주나스 님. 혹시 이걸로 제 장비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그 12영웅 중 하나였던 펠아린이 신던 부츠입니다!”
“물론이네! 신의 눈물로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건 어렵겠지만, 힘을 되찾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이 신물에 담긴 신성력과 마나라면, 그 어떤 장비라도 복구할 수 있을 터이니!”
NPC답게 다소 오버스럽게 반응하는 주나스.
하지만 그가 말한 내용 중에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그 어떤 것이라도 복구시켜 준다고?’
악마 군단장의 숨결로 봉인된 암살검을 진 암살검으로 업그레이드했던 것처럼…….
아이템의 진정한 위력이 감춰져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봉인된, 힘을 잃어버린, 혹은 그 외의 수식어가 붙어 있는 미완성 템들.
그중 나 또한, 회복된다면 디바인급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템을 하나 소지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 대탐아!”
“네?”
주나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막 선택창이 떠올랐을 대탐이.
녀석이 수락 버튼을 터치하기 전에 다급히 멈추게 했다.
“미안한데, 나도 한 번만 확인해 볼게. 내 요정왕의 서클릿도 이걸로 잃었던 마력을 되찾을 수 있는지 말야.”
“아…… 그 페어리 퀸 퀘에서 얻었던 최고 보상 템이요?”
“어. 괜찮을까?”
“그럼요.”
그렇게 다시 신의 눈물을 건네받고 주나스에게 말을 걸자, 놀랍게도 조금 전 대탐이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신의 눈물로 마력을 잃은 요정왕의 서클릿을 회복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내게도 뜬 선택창.
‘이런…….’
혹시나 했는데…….
이 신의 눈물이란 템은 아이템 복구용으로 만들어진 보조 템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디바인급답게, 봉인된 레전더리 템을 디바인급으로 만들어주는!
“형님도 선택창 떴어요? 멘트가 똑같은데요…….”
“어. 이 템이 꽝이 아니란 게 밝혀진 건 좋은데…… 좀 난감하게 됐네.”
갑자기 뻘쭘해진 분위기.
다른 길드원들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다들 가만히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템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장비가 두 개란 게 밝혀졌으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에이, 뭐가 난감해요? 누가 나라를 건국했고 이 템을 뽑았는데요? 형님이시잖아요? 드로 형님 템부터 완성시키세요. 전 다음에 천천히 복구할게요.”
“…….”
“그리고 저야 부츠를 뽑아봤자 죽을 수도 있어서, 잘 차고 다니지도 못할 거예요. 전직 후라면 모를까……. 그저 방법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만족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대탐이가 극구 사양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오른 선택창을 앞에 두고, 그렇게나 신나 하던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됐다. 이건 네가 써. 형이 약속했잖아, 니 부츠를 꼭 디바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이거 때문에 우리 길드에 가입한다고 말한 게 또렷이 기억나는데, 어떻게 형이 먼저 해? 너와 파랑이가 우리 길드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도 아는데…….”
“형님…….”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완성해봐라. 다들 궁금해할 거야. 날개 부츠라는 게 어떤 특수 옵션을 갖고 있는지 말야.”
“…….”
내가 도로 내민 신의 눈물을 선뜻 받지 못하는 대탐이.
하지만 난 진심으로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리 길드원을 위해 내가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기분 좋았다.
계속 길드원들에게 양보만 받아왔던 게, 항상 마음에 걸렸으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서? 나한테 투구 하나 정도는 지금 차나 나중에 차나 별 차이 없어. 자, 빨리! 형 손 아프다!”
“알겠습니다……. 건국해서 가장 혜택 보는 건, 뜬금없게도 저였네요.”
미안한 듯, 혹은 감격한 듯.
복잡한 표정으로 신의 눈물을 건네받은 대탐이는, 다시 주나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번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다.
솨아아.
그러자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는 돌풍과 빛의 향연이 이어졌고…….
이윽고 대탐이의 손 위에, 세련되고 날렵한 모양의 은빛 장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드디어……!”
타연이란 게임은 하나지만, 플레이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생김새만큼이나 천차만별이었다.
누구는 단순히 킬링 타임을 위해…….
누구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대리만족을 위해……
누구는 그저 현금화할 돈을 벌기 위해…….
나 같은 경우는 복수를 비롯한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었지만, 대탐이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나였다.
바로 ‘새로운 세상’을 자유롭게 모험하는 것!
우연히 펠아린의 부츠를 얻은 후,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템이 없단 생각에 필사적으로 완성시키려 노력해온 대탐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녀석은 그 목표를 이뤘다.
“아니, 이걸 제가 벌써 얻게 될 줄이야! 하하하!”
한낱 게임이라곤 하지만…….
수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이루지 못했을 난관.
따라서 녀석의 얼굴에는, 내가 다리우스의 첫 킬을 가져갔을 때와 비견될 만큼 기쁨으로 가득했다.
‘녀석.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나한테 무슨 양보를 한다고…….’
“축하한다! 드디어 타연에서의 꿈을 이뤘네!”
“감사합니다, 형님! 감사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만 말고, 한번 날아봐!”
“그럴까?”
기파랑의 제안으로 환영 마탑에서 나온 우리는, 곧바로 타연에서 처음 보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크하하핫!”
그 어떤 비행 펫도 없으면서 몇 배는 빠르게 비행하는 대탐이.
마치 슈퍼맨처럼 앞으로 양손을 내민 채 공중을 날아다니다가, 검과 방패를 빼 들고 이리저리 공중에서 자세를 취해보기도 했다.
“와, 간지 개쩐다!”
“미쳤네 미쳤어! 저렇게 날아다니면 도대체 누가 잡겠어? 부츠 따위가 아니라, 완전 사기템이었네!”
만약 비행 펫의 체력이 먼저 소진된다면 라이더는 그대로 낙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체력과 방어력이 월등히 높은 훼라리가, 비행 펫 계의 사기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펫에 탑승도 하지 않은 채 저렇게 고속으로 비행하며 스킬마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장담하건대, 작정하고 도망치면 잡을 수 있는 유저가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빼야겠지만!
“와, 좋긴 좋지만 페널티가 있긴 하네요. 1분마다 한 번씩 땅을 밟아줘야 해요. 물론 크게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별명이 도약의 머시기였나? 확실히 완벽한 템은 없구나. 그래도 대박이다. 다른 유저들은 따라 하려야 따라 할 수 없는 플레이를 혼자만 할 수 있는 거잖아? 단 한 개밖에 없는 템이니까!”
“진짜 운도 많이 따르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보람 있네요. 역시 디바인급 템은 달라도 뭐가 달라요!”
잠깐 대화하느라 지상에 내려온 뒤에도, 1미터 정도 둥둥 뜬 채로 말하는 대탐이.
게이머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들은 못하는 특별한 퍼포먼스가 가능하단 것만으로도 녀석의 존재감이 훨씬 두드러져 보였다.
“아이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 페가수스 따위가 아니라 진작에 저 템을 노렸어야 했는데……. 간지 외길인생에서 저걸 놓치다니, 크으!”
“크크, 이 자식 진짜 축빙 형님 말씀대로네? 현중아, 대체 언제부터 이리 욕심이 많아진 거냐?”
“사람이란 게 좋은 걸 차면 찰수록, 부족한 것도 마저 바꾸고 싶어지더라고……. 또 딴 건 몰라도 저건 간지가 너무 완벽하잖아! 그러는 넌 아쉽지 않냐? 너도 투구를 디바인으로 바꿔 찰 수 있었잖아?”
“괜찮아. 아직 포기 안 했으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템 완성 방법은 알아냈으니 지금부터 협상 좀 해보려고. 여러분! 전 잠시 누구 좀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어? 드로야, 갑자기 어딜 가게?”
“될지 안 될지 아직 모르지만…… 좀 전에 신의 눈물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 * *
밝혀진 바로는 무기나 방어구, 액세서리와 같은 장비류의 디바인 템은 단 한 개씩밖에 없다.
설정상 파괴되지 않는 이상 재등장이 불가능해, 만약 소유자가 잠수라도 타게 되면 영영 사라지고 마는 아이템들.
하지만 이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 디바인 템들이 있었다.
바로 제루티안의 축복 같은 특수 아이템.
그리고 신의 눈물과 같은 재료 템 또한, 다수로 존재할 수 있었다.
“국왕이 되고도 혼자 돌아다니는 건 여전하구나?”
“여럿이 다닌다고 더 안전한 건 아니니까요. 어딜 벗어날 때도 혼자가 더 편하기도 하고요.”
“풋!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하긴 맨몸으로 반년 만에 국가를 세운 녀석이니 그럴 만도 한가?”
신화국 점령 성 지역의 한적한 필드.
저레벨 지역이라 유저들이 잘 보이지도 않는 숲속에서, 제독과 재회했다.
“막상 국가를 세워봤자 그다지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던데요? 다들 왜 그렇게들 필사적으로 5성을 먹으려 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요.”
“네가 남들만큼만 세금을 걷고 있었어도 그딴 소리는 안 할 텐데……. 아! 이미 PK와 레이드로 그보다 훨씬 더 잘 벌고 있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나저나 어쩐 일로 날 부른 거냐.”
공성 도중 변심한 그의 협조를 받게 됐지만, 여전히 그를 신뢰하진 않았다.
물론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파악할 만큼 파악한바.
예전과 같은 협력 관계가 되고자 하는 생각이 추호도 없을 뿐.
“오, 바로 본론이시네요? 좋아요. 피차 덕담을 나눌 사이는 아니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아까 귓말했을 때 말했던 꽝이란 거 있잖아요. 신의 선물 뽑기에서 나온.”
“신의 눈물 말이냐?”
그래도 먼저 만남을 청한 건…….
이제 그에게서 무얼 빼먹든 간에, 더는 미안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득을 위해 속내를 감추고 거짓을 말하는 것.
제독만이 그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네. 맞아요. 그거 혹시 필요 없다면…… 저한테 팔지 않을래요? 신의 가호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