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상성 (2)
사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생각 못 해낼 만했다.
그동안 등장했던 데미지 반사 능력의 몬스터나 스킬은 대부분 ‘물리’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특별 스킬인 ‘가시 반사’나 심해 머맨 같은 몬스터가 보여준 반사 공격은, 말 그대로 ‘가시’나 특수한 ‘비늘’ 등을 통해 적용됐다.
따라서 근접 반사 데미지는 원래부터 ‘물리 피해’라는 선입견이 있었고, 그 때문에 뒤늦게서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사용했던 반사 공격은…… 분명 마기(魔氣)로 인한 ‘마법’ 타입의 공격이었단 사실을!
“확실히 암흑 기운으로 반사 피해를 입었다는 로그 기록이 기억나! 그렇다면 반사 데미지는 ‘암’ 속성의 마법 공격이었다는 거지!”
비록 크림슨 나이트가 날린 다크 블레이드와 같이 마신검으로 흡수할 수 있는 공격은 아니지만…….
놈의 반사 데미지가 마법 공격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았다.
난 이곳에 온 목적도 잊은 채, 바로 스펙 창을 열어 내 속성 내성 수치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불 속성 내성: 58.5%
* 물 속성 내성: 48%
* 바람 속성 내성: 56%
……………………
* 암 속성 내성: 48%
“따로 암 속성 내성 템을 가진 건 없지만…… 역시 생각보다 높은 상태구나!”
그동안 힘들게 얻은 업적에 붙은 효과.
그리고 디바인급 장비와 상위급 레전더리 템에 있는 최상급 옵션.
바로 ‘모든’ 속성 내성 증가라는 놀라운 효과로 인해, 내 속성 내성들은 전부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비록 메인 옵션들 사이에 곁다리로 붙었던 터라 주목받진 못했지만…….
십시일반으로 적용된 내성 수치 덕분에, ‘암(暗)’ 속성 내성 또한 48%나 되었다.
‘황제에게 반사 데미지를 입었던 것도, 사실은 속성 내성이 48%나 적용됐던 데미지였구나. 그게 절반 정도로 감소된 데미지였다니…… 정말 미치도록 강한 놈이기는 하네.’
그만큼 놈에게 내 공격력이 많이 들어갔다는 의미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피해였다.
한데 그마저도 0% 내성 상태에서 받은 피해가 아니었다니…….
왠지 더욱 암울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수치에서 내성률이 추가되는 게 더욱 큰 데미지 감소 효과가 적용될 것 같았다.
(나: 형님. 혹시 요정계에 계세요?)
(카이저: 아니. 저번에 받은 솔데이아 퀘스트 때문에 오스타그에 있다.)
(나: 잘됐네요. 그럼 의논 좀 드릴 게 있어서 잠시만 찾아뵐게요.)
(카이저: 녀석, 또 뭔가를 금방 발견해낸 모양이구나. 그래, 바쁜 것도 아니니 광장 앞 여관에 방을 잡아 놓으마.)
* * *
“오호라, 속성 내성이라……. 확실히 몰랐다면 모를까, 놈의 반사 데미지가 매직 데미지였다는 걸 감안하면 가능성 있다. 아니지, 가능성 수준이 아니라 확실히 제대로 먹힐 거다.”
“그렇죠? 역시 이게 황제 공략의 필수 조건 중 하나였나 보네요.”
어느 게임이나 절대 클리어 못 하게 만들어두지 않은 이상, 보스 몹이나 퀘스트에는 ‘공략법’이란 게 존재한다.
그리고 타연은 후퇴하는 NPC마저도 잡아낼 수 있을 만큼 높은 자유도가 보장된 게임이었다.
따라서 마족이 된 ‘암흑 황제’의 레이드는, 참여자들이 암 속성 내성을 최대한 갖춰놓는 것이 공략의 필수 조건인 모양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놈이 ‘암’ 속성이란 게 문제구나.”
“네? 왜요?”
“그동안 타연에 물, 불, 바람, 땅 등 대표 4원소 속성 관련 아이템은 많이 풀렸어도, 암 속성은 극히 드문 걸로 알고 있거든. 네 신검에 붙은 ‘빛’ 속성보다도 훨씬 찾아보기 힘든 게 바로 암 속성이다.”
“아! 그러네요……. 희귀 속성…….”
4원소 속성 추가 데미지나 내성 옵션은 유저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레어급 무기에조차 불이나 바람 같은 속성이 붙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레전더리 템을 구한답시고 그렇게 많은 거래소 템들을 살펴봤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 외에도 사제나 성기사 등을 위한 템에도 ‘빛’ 속성 옵션이 심심찮게 붙어있었지만…….
돌이켜보니 ‘암’ 속성은 마신검에서 처음으로 본 옵션이었다.
“기본적으로 타연의 속성 템은 그 속성과 관련된 몬스터들이 드랍하는 구조로 만들어졌으니까……. 아무래도 암 속성과 관련된 건 주로 마계 몹일 텐데, 그동안 거의 볼 수 없거나 이제 막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템도 거의 없는 거겠지.”
“무슨 산 넘어 산이네요. 속성 내성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다른 속성들은 널렸지만 정작 암 속성 템은 없다니!”
“솔직히 네가 달성한 48%라는 수치도, 다 네가 가진 템들이 워낙 훌륭한 탓에 달성해낸 사기적인 수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상태에서 만약 네가 리미트 수치인 95%까지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반사 데미지는 거의 1/10이라는, 기적적인 감소율을 보여주겠지만!”
“업적은요 형님? 업적에도 속성 내성을 올려주는 것들이 있잖아요?”
“막 그것도 말하려던 참이다. 최근 내가 마계와 관련된 퀘스트를 하며 얻은 업적 중에 암 속성 내성을 올려주는 것도 있었다. 한데 고작 C급 한 개라 3%밖에 안 돼. 차라리 새로운 디바인 장비를 찾아보는 게 훨씬 더 좋을 거다. 네가 찬 목걸이만 해도 레전더리지만, 10강화라서 내성 전부를 10%나 올려주잖아?”
“디바인이나 최상급 레전더리 장비라……. 알겠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좀 알아봐야겠네요. 그럼 형님, 그 업적 얻는 법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히 알려줘야지. 생각해보니 레이드에 참여할 인원 전부 다 암 속성 내성은 올려두는 게 좋을 테니, 다들 미리 얻어두는 게 좋겠구나. 상세히 알려줄 테니 길드원들과 잘 공유해라.”
“넵, 형님! 언제나 감사, 또 감사합니다!”
“허헛! 그래.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다시 연락해라!”
그렇게 형님과 헤어진 후, 나는 다른 조언도 들어보기 위해 핑크래빗을 찾았다.
* * *
“와! 시간 진짜 빠르네요. 벌써 업그레이드가 완료돼서 다음 티어로 넘어갔다니!”
“제가 말했잖아요! 골치 아프게 신경 쓰실 것 없이, 제게 다 맡겨두시면 알아서 척척 잘 해놓을 거라고요!”
“암만 그래도 정말 빠르네요. 아마 이번 업글이 완료된다면, 저희 프리덤 국이 최초로 3티어 연구소를 얻게 되는 거겠죠?”
“아마 그렇겠죠, 길마님? 우리처럼 멀쩡한 타이탄을 해체해서 정수 조각질로 시간을 단축한 곳은 없을 테니까요!”
아베르 성에서 다시 만난 핑크래빗은 우리가 바삐 활동하던 사이 본인이 할 일들을 차질없이 달성하고 있었다.
성문 강화 및 수성 경비병 장비 업그레이드와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타이탄 연구소의 업그레이드까지.
타이탄 정수 조각을 활용해 최적의 효율로 제작과 연구를 진행했다는 핑크래빗.
그녀는 2티어로 업그레이드하자마자 단시일 내에 다음 업그레이드 조건도 달성했다.
그리고는 오늘 막 3티어 업그레이드에 돌입한 상태였다.
“타이탄을 강화할 수 있다면…… 황제 레이드에서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당연하죠! 천상궁 입구에도 제국의 타이탄들이 있었다면서요! 내부에서는 소환이 안 돼도 문밖으로만 끌어내면 충분히 타이탄을 활용할 수 있겠죠!”
“그렇겠네요. 황제가 밖으로 따라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크림슨 나이트 몇 명만 빼내더라도 확실히 훨씬 더 수월해지겠어요.”
“그럼 더 서둘러야겠네요? 연구소 업그레이드 후에도 타이탄 강화가 되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까요! 다행히 정수가 더 넉넉해져서 괜찮을 것 같아요!”
요정계를 정벌하면서 한 차례 더 다수의 타이탄 정수를 획득했던 터라 조각은 충분했다.
난 그녀에게 정수 걱정은 하지 말고 서둘러주기를 주문하고는 이곳에 온 목적에 관해 물어보았다.
“아는 암 속성 템이 있냐고요? 흐음…… 지금은 딱 두 개밖에 생각나지 않는데요?”
“오! 두 개나요? 어떤 건데요?”
“레서 데몬의 보호 아뮬렛, 그리고 케르베로스의 가죽 장갑이요. 데스라 사막의 유적 도시 인던에서 나오는 템들이에요. 근데 이게 각각 레전더리와 유니크급이라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할걸요?”
“그래요?”
“네. 인던 템이라 스펙도 딸릴뿐더러 길마님은 대부분 디바인급 장비를 차고 계시잖아요? 레이드 상대가 무려 황제인데…… 설령 운 좋게 10강화를 구한다 해도 유니크급으로 갈아끼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확실히 고 스펙의 암 속성 템이 드물긴 드문가 보네요. 이걸 어쩌나…….”
기본적으로 보스 몹들은 자연적인 체력 회복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편이다.
따라서 힐링 보조가 없더라도 일정 데미지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제대로 피를 깎지도 못했다.
그런데 현존하는 최강 보스인 황제는 어떻겠는가?
전력을 다해도 모자란 상대인데, 반사 데미지 때문에 데미지를 조절하는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만회하고자 떠올린 게 속성 내성이었는데, 이마저도 여러 제약에 묶여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게 밝혀지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모르는 템이 없다고 자부하는 저니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어요. 길마님이 쓰실만한 암 속성 장비는 없다고요. 그렇지만 아직 포기하시긴 일러요.”
“네? 그게 무슨……?”
하지만 핑크래빗은 그렇게 우울해하는 나를 향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현존하는 템 중에서 없다고 했지, 착용할 만한 템이 없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잖아요. 템이 없다면…… 직접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
“네? 설마 제작템이요?”
“맞아요! 원래 아쉬우면 본인이 직접 해보란 말도 있잖아요? 타연에서도 마찬가지죠! 비록 제한적이긴 해도 유저의 취향도 조금은 반영되는 게, 바로 ‘제작템’만의 묘미기도 하거든요!”
필요한 걸 구할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 써라!
핑크래빗의 이 같은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가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최고의 자유도를 제공해주겠다던 타이탄 연대기의 슬로건.
그 말 그대로, 유저들은 제각각 다양한 방식으로 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고…….
제작 및 생산 유저들은 현실에서는 이뤄보지 못한 본인들의 예술혼이나 성취감 등을 이곳 타연에서 만끽하고 있었다.
특정 속성과 관련된 제작템.
지금껏 게임 해오면서 레어급이나 유니크급에서 분명히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 핑크래빗의 의견은 상당히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와우! 맞네요! 필요하면 직접 만들어 쓰면 되죠!”
“그러니까 당장 전문가인 테디 님께 가서 여쭤보세요. 안 그래도 갑옷 세트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 두신 상태잖아요? 갑옷 3피스마다 속성 내성이 붙는다면 수치도 어마어마하게 붙겠네요! 만약 그게 디바인급이라면…… 감히 예측도 안 될 정도로요!”
“고맙습니다 핑크래빗 님! 덕분에 살았어요!”
“뭘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요. 그럼 제게 부디 좋은 소식을 들려주세요!”
혼자서는 절대로 생각해내지 못했을 아이디어.
동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외성에 있는 테디베어의 공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테디베어에게 물어보았다.
“뭐예유. 내가 말한 카오스 스톤인가를 구해온 거여유?”
“아니요, 테디 님! 하나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귓말로 하지 뭣 하러 여까지 왔대유? 뭔디유?”
“제가 의뢰한 갑옷. 거기에 속성 내성 옵션이 붙을 수 있을까요?”
긴장되는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에 레이드의 성패는 물론 가능 여부가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거유? 당연히 붙겠쥬! 악세에도 붙는 게 속성 내성인데 갑옷 세트에 안 붙겠슈? 디바인급인데유?”
“와! 그거 정말이죠! 그럼 암 속성! 암 속성만 골라서 붙도록 만들 수 있을까요?”
“특정 속성만 골라서유? 되긴 되는데…… 조건이 쪼까 필요한디유?”
“조건요?”
그가 말한 조건은 다름 아닌 제작템의 재료였다.
히든캬드가 최초로 완성한 것으로 유명한 ‘레드 드레이크 갑옷’ 세트의 주재료는 사실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레드 드레이크’의 비늘을 사용했기 때문에 불 속성 내성이 붙은 붉은 갑옷 세트가 완성됐다는 뜻.
마찬가지의 원리로 같은 드레이크 갑옷 레시피로 만들더라도 ‘블랙 드레이크’의 비늘을 재료로 제작한다면…….
암 속성 내성이 붙은 동일 외형의 검은 갑옷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테디 님 말씀은 제 디바인 갑옷의 주재료가 될 성룡의 뼈와 비늘이…… ‘암’ 속성 드래곤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맞어유. 많이 힘들 건디…… 가능하시겠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