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55화 (55/194)

< 잊혀진 왕국 >

윤형석은 눈을 떴다.

간밤에는 모처럼 꿈 한번 꾸지 않고 푹 잠을 잤다. 그렇게 잠깐 동안 멍 하니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아, 형석아! 형이야.

매니저 형이었다.

“어.”

-다름아니라, 너 WOF 일체감 테스트 한 데이터 중에 75% 이상 수준이 있었냐고 물어봤었잖아.

“응? 아아.”

윤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태호에게 두 번이나 탈탈 털린 뒤 그에게 알아 봐 달라고 했었던 것이었다.

-이번에 WOF 쪽에서 답신이 왔어. 일체감 테스트 랭킹에 등록된 사람 중에, 75% 이상은 없단다.

“......그래?”

뭔가 찝찝한 생각이 들어 잠깐 생각하던 윤형석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매니저가 어쩐지 떨떠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기된 기록 중에는 있대.

“......?”

-어...

매니저가 말 끝을 흐렸다. 윤형석이 물었다.

“뭔데? 몇 퍼센트래?”

-......어, 그러니까... 백 프로.

오싹!

윤형석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약간 나른하던 감각은 사라지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 프로...? 그게 가능해?”

-음... WOF 측에서도 그래서, 그 일체감 테스트기에 에러가 있는지 검사해 보고 있대. 아무래도 버그일 확률이 높겠지? 일체감 100%는 이론 상으로만 가능한 경지니까.

그리고 벌떡 일어나, 큼직한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백 프로...”

약간, 상상조차 가지 않는 경지였다. 그는 그 순간, 자신을 무참히 썰어 버렸던 흑마법사 ‘언노운’을 떠올렸다.

그 비정상적으로 정교하면서 완벽했던 움직임. 마법사면서 근접전 캐릭터와 붙어 승리하는 말도 안 되는 전투센스.

“세상에...”

그는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쪽 테스트기래?”

-노량진 쪽. 신상정보도 없고, 랭킹 등록도 거부했기 때문에 누구인지 밝혀낼 방법은 그쪽에서도 없다네. 흠... 얼떨떨하다 야.

“......어어, 일단 알았어. 고마워.”

윤형석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중얼거렸다.

“대체... 외계인이라도 되는 거냐?”

.

.

.

.

.

. [조회수 : 1421485]

조회수가 하루만에 142만이 찍혔다.

꿈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몇 번이나 새로고침을 해 보았으나 숫자는 더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진 않았다.

[팔로워 : 472041]

유튜브 채널의 팔로워는 하루만에 47만. 대체 이게 뭔가, 싶어 리얼포스의 팬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전설적 ‘흑마법사’ Unknown! 그의 첫 번째 매드무비 예고편!]

메인에 떡하니 걸려 있었다.

“......”

[The Dark Knight!, Unknown!]

지들 마음대로 부제목도 붙여 놓았다. 거 참 한 숟갈 거드는 덴 도가 튼 양반들이다. 뭐, 이 정도는 예상하지 못 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굉장히 빠른데.”

리얼포스의 인기가 나날이 더 늘어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 뿐인가?

태호는 두 번째 메인의 제목을 살펴보았다.

[언노운에게 리얼포스의 3대 대형 머더러 길드가 선전포고!]

“선전포고?”

클릭해 들어가 본다.

[리얼포스의 남부를 장악한 현 3대 대형 머더러 길드가 선전 포고를 해 와 화제다.

‘로만 제국’, ‘크레이지 도그’, ‘뱀파이어즈’ 가 오늘 아침 7시 경, 동시에 ‘언노운 사냥’을 선포했다...]

태호는 그것을 보며 킬킬킬 웃었다. 흐름에 탑승한 건 태호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놈들도 같이 탑승해, 시너지를 노리고 있었다.

“뭐, 대충 잘 풀려 가는군.”

태호는 기지개를 폈다. 그 와중에도 유튜브 팔로워와 조회수는 늘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결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놈들이 밀집돼 있는 장소에 ‘명분’을 가지고 쳐들어 간다. 무차별 학살은 처음엔 흥미로워도 금세 질린다. 때문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태호는 그런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며 소파에 앉았다. 리얼포스로 접속하는 고글을 쥔 채 긴 숨을 내쉬었다.

* * *

접속한 태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광휘의 궁전 앞에 완전히 영근 용과열매들을 따는 것이다. 용과 열매들을 잔뜩 딴 뒤 궁전으로 들어가, 로키를 부르려고 하던 무렵이었다.

“음?”

인벤토리 창에 남은 용과를 뒤적이던 태호가 문득, ‘잊혀진 왕국의 서’를 만지작거렸다.

인벤토리 창에서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잊혀진 왕국이 부상(浮上)하기까지 남은시간.]

[1D 0 : 0: 2]

[아테나의 힘이 부상시간을 4일 늦추었다.]

[혼돈의 힘이 부상시간을 10일 가속시켰다.]

“......”

태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추가된 메시지를 보았다. 분명, 대륙에 존재하는 혼돈의 힘의 잔재가 균형을 파괴한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균형.

따지고 보면, 확장팩들이 출시되던 날에도 별다른 광고나 점검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홈페이지에 작게 ‘1차 확장팩 ㅇㅇㅇ ’ 정도라고 공지사항이 올라올 뿐.

그렇다면, 확장팩은 어차피 유저들이 아무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일단 등장하게 된다는 말.

‘균형을 파괴한다.’

태호는 그 부분에서 어떤 점을 깨달았다.

‘그렇구나.’

바로, 예정돼 있던 일정들이 균형 파괴로 인해 빨리 등장하게 되거나 늦게 등장할 수 있다는 말.

즉, ‘예고된 멸망’ 에 한층 더 가까워진다는 말!

태호는 복잡한 심경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좋다.

잊혀진 왕국이 부상하게 되면, 1차 확장팩이 가동된다는 뜻. 남은 시간은 1일.

24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준비를 거친 뒤 확장팩을 맞아야 했다. 그대로 궁전 안으로 간 태호가 로키의 제단 위에 용과 열매를 쏟아냈다. 화아악!

과연.

곧, 로키가 등장했다. 로키는 오늘 하얀 색 턱시도를 입은 채 옷깃에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았다.

[음? 벌써 제단을 구한 거냐?]

“예. 여기가 어떠신지?”

[흐음...]

로키는 궁전의 내부를 살펴보더니 의외라는 듯 피식 웃었다.

[좋구나. 네 소유의 건물이냐?]

“예. 그리고 저 문 밖에는 용과 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습니다.”

[그렇구나. 용과 냄새가 솔솔 난다.]

로키는 썩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태호에게 말했다.

[너, 아주 훌륭하게 일처리를 하는군. 심지어 속도도 빨라. 말 해 보아라,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원하느냐 에 대한 답.

태호는 생각해둔 답을 제시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건 내 전문인데? 왜, 필요하냐?]

“예.”

[훗. 음침한 녀석, 여탕이라도 가 보고 싶은 게냐.]

“......”

로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손을 한번 휘저었다.

[퀘스트 완료]

[로키의 신전]

[레벨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패시브 스킬 : ‘속임수’를 획득했습니다.]

로키의 가호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가호 중 극히 일부이다만, 아주 쓸 만 할 것이다. 으하하하!]

“아, 그리고요.”

[오냐. 뭐든 물어 보렴.]

로키는 품 속에서 용과를 꺼내 아작 아작 씹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균형 파괴자라는 것... 아십니까?”

[......]

로키가 일순 먹는 것을 멈춘 채, 빤히 태호를 보다 대답했다.

[혼돈의 힘이 만들어낸 졸개들을 뜻하지. 혼돈의 힘은, 균형을 파괴하는 힘. 허나 그 주인이 잠들어 있으니, 지금은 놈의 졸개들 뿐이리라.]

“그럼, 균형의 수호자는요?”

[......]

로키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고 약간은 무서워진 얼굴로 태호에게 물었다.  [균형의 수호자... 그들은 이미 소멸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묻지?]

“책에서 봤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여쭤 본 겁니다.”

[흐응... 하긴, 너는 책을 많이 읽었다고 했지. 태고의 전쟁에서 소멸한 권능들이 아주 많다. 균형의 수호자는... 그 당시 소멸한 권능 중 하나를 사용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시간이라든가. 뭐, 이제 와서는 전설처럼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태호는 그의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시계가 보였던 거군.’

잠깐 생각하다, 태호가 재차 물었다.

“균형의 파괴자들이 지상에 난무하는 듯 한데, 막을 방법은 없겠습니까?”

[수호자가 사라진 이상, 파괴자들을 억제시키는 것만이 가능할 테지. 자세한 것은 고위 신님들께 여쭤 봐야 한다만, 나 조차 두려운 이야기다. 그러니... 너 역시 더 이상은 파고들지 마라.]

고위 신?

“아니, 로키 님보다 더 높으신 분들이 있다 이 말씀이십니까?”

로키는 터무니없다는 얼굴로, 다시 용과를 씹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 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신계에서는 고작 중위급 밖엔 안 된단다. 인간 세계랑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아... 그렇군요.”

[허나 그 분들에 대한 것들은 비밀 유지가 생명이다, 물어보고 싶은 거 다 아는데 하지 마. 너 그러다 죽어.]

그 말이 괜한 소리 같지가 않았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용과 더 드릴까요?”

[흠, 아니. 당분간은 안 먹어도 되겠군. 고맙게 잘 먹었다, 그럼 안녕!]

파시식!

로키가 사라졌다.

태호는 그에게 받은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특히, 고위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혼돈의 힘을 억제하는 것일 뿐’ 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쉬폰이 아테나의 조각상을 겐트 섬에 설치해 잊혀진 왕국의 부상을 한번 ‘억제’ 했던 것도 떠올랐다.

게다가, 균형의 수호자에 대한 것은 엄금 중의 엄금인 듯 하다. 이 정보를 얻기 위해선, 역시 여신 에테리얼이 말 한 ‘네메데스’ 라는 신을 만나는 수 밖에 없을 듯 했다.

태호는 로키에게 받은 가호를 살펴보았다.

[패시브 스킬 : 속임수]

[설명 : 거짓말과 장난의 신 로키의 마음에 들어 그의 권능을 아주 조금 부여받았다.]

[리얼포스에 존재하는 대상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일종의 변신술 같았다.

일단.

태호는 자신의 ‘어둠 세트’를 벗고, 대충 레어로 갈아입은 뒤 라이언으로 돌아갔다. 굳이 세트를 벗은 이유는 어둠 기사단 세트 고유의 외형 때문이다.

그리고, 경매장으로 향했다. 확장팩이 갑자기 이틀 밖에 남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를 할 생각이다.

경매장에 있는 강민의 어깨를 툭 치고 인사를 하자, 그가 고개를 까닥였다.

“왔냐?”

“그래.”

“뭐 팔 건 없고?”

“딱히 없다. 생기면 연락 할게. 에픽이나 유니크 스킬 북 있어?”

강민이 어깨를 으쓱였다.

“몇 개 있긴 한데, 이미 예약이 잡혀 있는 거라.”

“에픽도?”

“에픽은 없어. 매물 안 나와.”

잡담을 나누며 경매 창을 켠 태호는, ‘망가진 잡동사니’를 검색했다. 그새 매물은 어마어마하게 늘어 있었다.

‘유저가 늘어서 그렇구나.’

유저가 늘어난 만큼, 매물은 그야말로 넘겨도 넘겨도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최소가격은 1실버, 최대가는 10실버인데 그나마 10실버가 몇백 개 보이고 나머진 죄다 1~5실버다. 수요가 없고, 공급만 많다.

태호는 경매장에 존재하는 모든 ‘망가진 잡동사니’를 구매해 버렸다.

[경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눈 앞을 빼곡이 채웠다. 그야말로 쫙쫙 솟아오르는 메시지들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사라진 뒤.

태호는 경매장을 재검색해, 추가로 올라오는 잡동사니도 모조리 다 구매했다.

이번에 구매한 잡동사니는 대략 30만개였다. 3100골드 정도가 든 듯 하다.

[망가진 잡동사니 : 452420] 잡동사니는 지금이야 잡동사니지만, 향후 화폐의 단위를 대신할 때도 있었다. 그만큼이나 수요가 많아진다는 뜻. 이로서, 태호는 아마 리얼포스의 그 어떤 유저보다 잡동사니를 많이 보유한 유저가 되었다.

-형님!

그 무렵. 라간에게 귓속말이 왔다.

-슬슬 작업 끝날 듯 한데. 근데 여기, 히든피스 주는데 에픽인데?

라간이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태호는 빙긋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고생했다. 일 무사히 끝내고, 늪지대로 가.

-그래야겠다. 그나저나 형님 요새 유튜브도 해?

-......어젠가부터. 정체는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어.

-아 그래? 하하하! 베일에 뒤덮힌 다크나이트가 내 형님이라니 정말 재밌는 일이구만!

라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태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암튼 앞으로 하루이틀 내엔 끝날 테니, 올라가 봅시다!

-그래.

태호가 귓속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모두가 지나칠 정도로 평온한 지금이었다. 오직 태호만이 24시간 뒤 첫 확장팩이 등장할 것이란 걸 안다. 홈페이지에 공지도 올라오지 않고, 매스컴이나 유저들도 전부 다 모르고 있었다.

“하아...”

* * *

어느새 저녁.

[조회수 : 3242025]

매드무비의 예고편이 320만을 돌파했다. 팔로워는 이미 90만을 넘어섰다.

단 하루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태호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리얼포스의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예견된 24시간 중, 이제 2시간이 남은 시점. 아직까지도 아무 말이 없을 리는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1차 확장팩 업데이트.]

짧은 공지가 떠올랐다.

[업데이트, 잊혀진 왕국이 릴리즈됩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짧은 공지. 단 한 줄의 정보조차 없는 불친절함. 하지만 사람을 빨아들이는 터무니 없을 정도의 마력.

그 짧은 메시지가 만들어낸 파급력은 엄청났다. 공지가 떠오른 뒤, 대략 1시간 후에 모든 검색 플랫폼의 검색어 1위가 ‘리얼포스’ 혹은 ‘잊혀진 왕국’ 으로 도배된 것이다.

태호가 기억하는 시기보다 훨씬 빠르다.

리얼포스가 오픈하고, 1달 반이 조금 넘은 무렵이다. 세 달을 채우고 등장할 첫 확장팩이었는데, 무려 절반 가량이나 단축된 셈이었다.

< 잊혀진 왕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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