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지상 탈것은 >
접속과 동시에 사방이 까맣게 변하며, 리얼포스의 대지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쿠구구궁! 쿠궁!
거대한 대륙 중앙의 초원.
그 곳에 큰 지진이 일어나며, 거대한 도시 하나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태였다. 얼마 전, 태호가 겐트 섬에서 본 건물의 완전판처럼 보였다. 여기 저기 가시 같은 조형물들이 튀어나와 있고, 하나의 거대한 도심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도심의 사방에 사악한 기운을 가득 뿜어내는 존재들이 씨익 씨익 거친 숨을 쉬며 무기를 꼬나쥐고 있다.
[잊혀진 왕국]
동시에 화면에 글자가 새겨졌다. 화면이 일순간 클로즈업 되며, 도심 내부로 파고든다. 도심 내부의 거대한 성 하나로 화면이 이동하더니, 왕좌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비추었다.
산발한 머리에 시뻘건 두 눈, 그리고 온 몸에 핏빛 갑주를 입은 남자가 씨익 웃고 있었다.
화아악!
화면이 바뀌고, 대륙 각지에서 지진이 일어나며 이전엔 없던 지형들이 만들어졌다.
동영상은 그걸로 끝.
잊혀진 왕국이 나타남을 모든 유저에게 알리는 인트로 영상이었다.
* * *
[뭐야, 확팩 나온거임?]
[예고도 없이 나옴? 뭐가 어떻게 된 거죠?]
팬사이트에 난리가 났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황당해할 그 무렵, 태호는 경매장에 앉아 있었다.
이 시점에도 망가진 잡동사니는 매물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었다. 태호는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죄다 구매해 가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했다.
‘잊혀진 왕국에서 꼭 챙겨야 할 물건들.’
슬슬, 1차 확장팩이다.
태호가 겪었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확장팩이 열렸다.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첫째, 자신이 회귀함으로 인해 이미 세상의 균형은 깨어졌다.
이 가능성은 꽤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쉬폰에게 들었던 ‘혼돈의 사념체가 퀘스트를 부여한다’ 는 일들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태호가 균형의 수호자가 되며, 판타로스의 장군을 벌써 두 마리나 해치웠다. 이로 인한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을 거라는 추측이다. 혼돈의 힘이 위급함을 느끼고, 과한 힘을 불어 넣어 앞으로의 일정을 앞당겼다는 것. 그것이 둘째.
뭐가 어떻게 됐든,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명백한 일 하나.
‘균형의 수호자로서, 놈의 하수인들을 하나 하나 없애 버리면 분명히 미래는 바뀐다.’
혼돈의 권좌로 돌아가 부활하는 것을 원천봉쇄해 버리며, 차후 등장할 놈들이 하나 둘 완전소멸할 것이다. 그 때문에 태호에겐 힘이 필요했다.
더 강한 힘!
확장팩으로 등장하는 녀석들은 주로 파티 플레이를 권장한다. 새로운 필드의 몬스터들은 맷집과 공격력 방어력이 무척이나 높고, 많은 경험치를 준다.
실제로 20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소위 ‘꿀’을 빠는 곳에서는, 확장팩 나오기 전 보다 레벨업이 빠른 경우도 있다. 리얼포스의 특성 상, 웬만한 직업군들도 대부분 파티를 낄 수 있다. 정말 아주 후지다고 평가할 만 한 직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막상 흑마법사가 별로다 별로다 얘기를 해도, 나름대로의 디버프와 보조 딜링 정도로 파티에 못 끼는 수준은 아니었다.
태호는 그 뒤로 잠시 동안 잡동사니를 챙겼다. 이 과정에서 다시 30만개를 쓸어 넣었다. 이제, 태호가 보유한 잡동사니는 75만개가 넘었다.
개당 50실버에만 되판다고 해도, 35만골드다. 10골드에 최소 5만원 꼴로만 잡아도, 이미 태호가 보유한 골드의 가치가 한화 17억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태호는 어쩐지 무덤덤했다. 향후에도 이런 식으로 골드를 쓸어 담을 수 있는 컨텐츠들이 존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호는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미 대륙 각지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하나 둘 새로운 던전과 새로운 필드들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태호는 그 중, 가장 먼저 선점해야 할 물건을 떠올렸다. 이 시기에, 가장 빨리 도착한 사람만이 에픽 아이템보다 귀한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아참.” 태호는 깜빡 잊고 있었던 시스템을 떠올렸다. 그리고 메뉴의 ‘랭킹’ 시스템에 들어갔다.
이제 랭킹 시스템으로 사람들은 랭커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가 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비공개로 놓거나 이름을 변경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얼포스에서 랭커라는 것은, 그 상징성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대형 스폰서를 받는 것은 당연하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샀다.
또한 그 이름이 가진 브랜드 가치가 대단했으니, 효율나쁜 짓을 하는 괴짜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
[이름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누군가가 사용 중인 아이디로 변경은 불가하며, 변경 시 ‘가명’ 이라는 표기가 추가됩니다.]
태호는 예,라고 짧게 말하며 새 이름을 입력했다.
때론 효율이 나빠 보이는 일이 고효율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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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시스템!
[레벨 랭킹] [PVP랭킹] [아이템 수집 랭킹] [통합 랭킹]
세 가지의 랭킹으로 분류되며, 레벨 랭킹은 그야말로 ‘레벨’. 그 외의 랭킹은 ‘확장팩 공개 전 까지의 행보를 점수로 책정함’ 의 방식을 따른다.
그리고 통합 랭킹은 그 모든 것을 점수로 환산하여 나타낸 지표다.
예를 들어 PVP 랭커 중엔 당연히도 머더러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머더러 랭커에게는 붉은빛 테두리가 추가된다.
대륙의 대도시, 노펜시아.
그 한복판에 선 남자는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르코. 향후 동양 최대의 레이드 길드가 될 노블레스의 수장이다.
그는 이미 150레벨의 실력자였으며, 그가 이끄는 길드원들 역시 제법 고레벨들이었다.
이 게임을 시작하고, 노블레스 길드는 리얼포스의 표면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들은 철저히 사냥을 통한 레벨업을 지향하였고, 지금은 힘을 키우는 것이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에 추가된 랭크 시스템에 본인을 포함한 길드원들이 적어도 ‘레벨’ 랭킹의 상위에 포진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레벨 랭킹 1위]
[Unknown(가명)]
[2위 : 라간]
[3위 : 아서]
[4위 : 다이스]
세상은 넓다고 하던가?
그는 상위 5위 안에 들지도 못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이디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얼포스의 시스템은 서비스되는 국가의 언어로 자동 번역되어 보여지지만, 본인의 의사에 따라 고유 언어로 보여지기도 하기에 보통 한국어로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PVP 랭킹 1위]
[Unknown(가명)]
[2위 : 쉬폰]
이 역시 그렇다 치자.
[아이템 수집 랭킹 1위]
[Unknown(가명)]
[2위 : 강민]
그리고.
[통합 랭킹 1위]
[Unknown(가명)][점수 : 비공개]
“......?”
놀라운 점은 최근 장안의 화제라는 언노운이 전 종목 1위를 석권해 버린 것이다.
“언노운이 소문대로 대단하긴 하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심지어 아이템 수집 랭킹에서 장사꾼인 강민을 앞선다는 기현상도 일어나고 있었다. “핵이라도 쓰는 건가?”
이런 의심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리얼포스에 핵이 돈다는 소문은 아직까지 들어 본 적도 없다. 중국의 해커들이 두손 두발 다 들고 물러섰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다. 뚫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기묘한 이야기를 했다나.
그는 그런 고민을 하며,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세상은 넓구만...”
바짝 달렸으니, 꿀 한 번 빨아 볼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 녹록지가 않다. 그는 그렇게 한숨을 쉬다, 누군가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도시에 흔히 보이는 꼬마였다. 나이는 일곱 살 쯤 돼 보이는 NPC였다.
그는 꼬마를 보다 빙긋 웃었다.
“꼬마야. 먹을 거라도 주랴?”
“아니에요.”
태호는 마르코를 보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마르코로군.’
랭킹 시스템이 등장하며, 태호는 과거의 유명인사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볼 수 있었다. 노펜시아에서 그를 본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으나, 아무튼 반가운 얼굴임은 틀림없다.
그는 인성 자체가 악하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다.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남 탓 보다는 본인이 책임을 지려는 타입의 인간이다. 향후 태호에게도 기꺼이 협력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태호는 로키의 권능 ‘속임수’ 로, 노펜시아의 꼬마 하나로 변한 상태다.
태호는 그에게 천천히 정보 하나를 전달해 주었다.
“제가요.”
“응?”
마르코가 고개를 까닥이며 빙긋 웃었다.
“저어기, 노펜시아 북쪽에서 친구들이랑 노는데요.”
태호는 마치 진짜 아이처럼 양 팔을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거기 구불거리는 산길 조금 지나니까, 막 동굴 같은 게 새로 생긴 것 같던데요? 거기 막 암호 같은 게 있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태호의 말에 마르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호는 씩 웃으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어, 어, 꼬마야, 잠깐만!”
그 곳에는 던전 하나가 있다.
노블레스는 원래 그 던전을 최초로 발견해 사냥하게 되는데, 본인들의 사냥이 끝난 뒤 기꺼이 초보 유저들을 위해 개방했었다.
다만, 확장팩이 열린 뒤 제법 시간이 지난 뒤였던지라 로만 제국과 피 터지게 싸운 뒤에야 쟁취할 수 있었다. 태호는 그를 만난 김에 가볍게 조언을 해 준 셈이었다.
태호는 인파 속을 걸어가며 아무 유저 하나를 골라 다시 속임수를 사용했다.
샤아악!
이번엔 평범한 보통 유저로 변한 태호가 천천히 노펜시아의 동문으로 향했다.
* * *
1차 확장팩이 열리고, 드디어 유저들에게는 탈것 제한이 풀렸다.
이제 유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각종 탈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데, 태호가 이번에 얻을 탈것은 리얼포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상 탈것이었다.
동쪽으로 빠져나온 태호는 달리기 시작했다. 넓은 평야가 나오고, 그 사이 예전과는 달라진 지형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양, 사방에는 처음 보는 지형들이 울쑥불쑥 솟아 나 있었다. 그리고 동쪽 평야 한가운데에는 큼직한 산이 만들어져 있다.
저 쪽은 잊혀진 왕국이 등장하며 등장한 던전 중 하나인데, 초보자용이라 큰 매리트는 없다.
스쳐 지나가며 달리기에 속도를 붙이던 태호가 멈춰 선 곳은 어쩐지 평범해 보이는 초원 한복판이었다.
그 자리에 선 태호가 좌우를 살폈다. 아직 이 곳에 도달한 유저는 없다.
시간은 오후 8시.
시간상 조금 일찍 도착했으나, 뭐 그 나름대로 나쁘진 않다. 태호는 그 자리에서 여기 저기를 살폈다.
“아.”
그리고 화색을 띄었다.
히히힝- 히힝-
여기 저기, 초원을 달리는 말 무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말들은 ‘초원마’ 로서, 준수한 성능을 보이는 말들이었다.
허나 태호가 찾는 말은 저런 평범한 초원마가 아니었다.
조금 더 기다릴 즈음.
하늘에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 달이 떠오르자, 초원의 말들이 일순간 우뚝 멈추더니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급히 사방을 경계한다. 히히힝, 히힝! 하며 울음소리를 내며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맞게 왔군.”
태호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달빛을 받아, 말들의 사방에 포식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원의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표범들이었다. 저것들도 태호가 원하는 탈것은 아니었다.
그 중.
“역시.”
표범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덩치 큰 표범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놈의 몸집은 다른 표범보다 두세 배는 더 컸다. 그리고, 전신이 반투명했으며 두 눈은 영롱한 금빛을 띄고 있었다. “역시 지상 탈것은 유령 표범만 한 게 없지.”
리얼 포스 역사상, 가장 성능이 좋은 지상 탈것 유령 표범이다.
< 역시 지상 탈것은 > 끝